|
아침 일찍 다시 탁심광장 쪽으로 이스틱랄 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어제는 그렇게나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더니 이른 아침의 이스틱랄 거리는 무척이나 한산하다.
한산하다는 느낌에 개의치 않아도 그냥 호젓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제대로 된 이스틱랄 거리의 풍경이 내게 손짓을 하는것처럼 느껴진다.
카메라를 들고 사람숲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지 않아도 이 아침엔 빨간 트램이 온전히 내것인양 내 곁을 떠날줄을 모른다.
남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오른쪽으로 치첵파사지 건물이 보이고 발륙 파자르 골목의 입구가 나타난다.
이 거리의 최고급 쇼핑몰이 늘어선 니샨타쉬 쇼핑가도 채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다. 그런만큼 한껏 맵시를 뽐내는 이스탄불의 멋쟁이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사람들 거의가 발걸음을 빨리 서둘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로서도 일찍 이곳까지 오기는 했으나 어떤 서둘일이 있어서 일찍 나선 걸음은 아니었기에, 느긋한 마음으로 잠시 이스틱랄 거리를 거닐어 보기로 했다.
다가오고 지나가는 트램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맘껏 셔터를 눌러보고, 허름한 골목의 헌책방 가계들을 구경하기도 한다. 반지하의 상점으로 이어지는 헌책방 거리는 대부분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지만 부지런한 할아버지는 털이개로 먼지를 털며 벌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차와 커피와 토스트 같은 간단한 아침 요기를 파는 곳을 찾아 카푸치노 커피를 한잔 마신다. 참으로 원더풀한 아침이다. 요때 까지만.
탁심 스퀘어를 지나고 베식타스 동네를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서 애초 목적했던 곳을 찾았는데........ 아뿔싸.......
군사 박물관이 휴관일이다. 그것도 오늘과 내일 이틀이 모두 휴관일이다.
나는 내일 오후에 귀국 비행기를 타야하는데.......... 오.마.이.갓.
오스만 투르크의 등장과 팽창, 십자군 전쟁 이후와 비잔틴의 몰락, 바티칸의 쇠락, 오스만과 비잔틴의 충돌, 비잔틴의 멸망, 로도스로 쫓겨난 요한 기사단과 오스만 투르크의 정면대결, 신사협정과 요한 기사단의 철수, 다시 맞붙은 요한 기사단과 오스만 투르크의 두번째 전쟁........ 등등의 공부를 하고 나름의 글을 쓰면서 좀 더 많은 자료가 필요했었다. 그래서 그 필요의 상당부분 자료를 바로 여기 이스탄불의 '군사 박물관'에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 일부러 찾아온 발걸음이었는데 그만........
굳게 잠겨진 철문 안으로 그 유명한 '우루반 대포'가 그나마 위안을 해주듯이 놓여져 있다. 물론 지금 보이는 저 어마어마하게 육중한 대포는 본래 대포의 절반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은 보이질 않는다. 포신 두개를 중간에서 연결을 해야 제대로된 '우루반 대포'인데....... 저 우루반 대포의 등장이 곧 비잔틴의 멸망을 가져온 공포의 무기였다.
대포 기술자 '우루반'이 처음 대포를 만들어서 팔려고 거래를 제의 한쪽은 바로 비잔틴 제국이었다. 하지만 대포의 위력을 평가절하한 비잔틴은 구입을 거절했고, 대포의 진가를 알아본 오스만의 술탄 메메트 2세는 엄청난 웃돈까지 주어가면서 대포를 구입했다.
그리고 결국은........ 저 어마무시한 우루반 대포의 위력 앞에 천년동안 비잔틴제국을 지켜온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 지도자의 안목과 과감한 결정이 한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게 된 극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그런데 지금 여기 이 멍청한 한 사내는 휴관일도 몰라서 이 멀고 먼 터키까지 와서 군사박물관을 들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하루만 일찍 알았어도 어제와 오늘의 스케줄을 바꾸었을 텐데........
어쩐다?
탁심스퀘어까지 다시 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이곳에서 다시 오늘의 스케줄을 선택하면 될 일이다.
걷는 게획이라면 여기서부터 다시 걸음을 시작할 것이요, 아시아지역이던 유럽지역이던 여기 탁심에서는 모든 교통편이 연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공화국 기념비 옆에 잠시 서서 생각에 몰두해 본다.
트램이 탁심의 좀점에 서 있다가 다시 이스틱랄 거리로 운행을 시작하고 있다.
나는 서둘러 빨간 트램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언덕길을 걸어서 내려가 페리 선착장에서 골든 혼 안쪽으로 가는 페리를 탈 생각이다.
'그래. 피에르 로티에 가서 진한 커피를 마시자.'
베이올루 지역의 경사가 제법 급한 언덕길을 걸어서 금각만 해변으로 향한다.
이스탄불의 여러지역 중에서도 상당히 낙후된 지역으로 꼽히는 동네이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걷다보니 어느새 카심파샤 페러선착장(Kasimpasa Pier)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제 시내버스를 대신하여 페리를 타고 골든혼 안쪽의 왼쪽과 오른쪽 선착장들을 모두 거쳐서 여섯 정거장을 들어가면 골든혼(금각만)의 가장 안쪽 예윱 페리선착장(Eyup Pier)도착하게 되고, 그곳에 '피에르 로티 언덕' 이 있다.
페리에 올라 골든혼의 안쪽으로 향하는 뱃길에는 이스탄불의 근.현대사속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아픈 상흔들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아타튀르크 다리에서 시작하여 출발지였던 카심파샤 선착장은 물론 이 넓고 깊은 금각만(골든혼)의 오른쪽 기슭은 모두가 오랜 세월동안 일반인들의 출입조차도 제한되던 군사시설이었다. 메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스탄불로 개병하면서 부터 이 일대는 모두 해군 기지였다. 금각만 일대가 모두 배를 건조하던 해군 병기창이었다. 중세의 군함인 갤리선에서 부터 시작하여, 근대의 철갑선과 잠수함까지 건조하던 비밀기지였다. 이곳이 지중해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던 오스만군의 해군 병참기지였다. 페리선착장 바로 우편의 낡아서 페쇄된 건물이 바로 해군사령부였다. 현재도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배를 건조하는 방파제 시설인 도크가 사방에 널려 있다. 저기 저 도크 하나마다 전투함이 건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중해를 놓고 패권 싸움을 벌이던 강대세력중에서 군함 건조에 열을 올린 양대산맥은 바로 여기 이스탄불의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상단이 보유한 베니스섬 인근의 군함 건조장이었을 것이다. 훗날은 여기에 스페인 함대와 영국함대가 뛰어들게 되지만......
4차 십자군 원정시 모든 군사시설과 물자를 제공하기로 한 베네치아 상단이 보유한 군함 건조시설은 자그만치 일년에 갤리선 2척씩을 생산해 낼 수 있는 도크를 1백개나 보유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인근에 말이다. 다시말하면 1년에 2백척의 전투함이 생산되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이 성공하면 그 갤리선을 대포를 제거한 무역선으로 개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현대의 오늘날에서도 실로 감히 접근하기조차 힘든 어마어마한 시설이었던 것이다.
이 베테치아 상당을 포함한 기독교 세력의 해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여기 이스탄불의 가장 심장부에도 이렇게 어마어마한 군함건조시설이 존재했었다.
이 시설들은 2차대전 후에까지도 상선을 건조하면서 터키를 해양왕국으로 이끌어 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그러던 중에...... 바로 한국의 H사가 영국의 은행을 찾아가 '오백원 짜리 (구) 지폐를 내밀면서 손가락으로 지폐의 뒷면을 가리키면서, 돈을 차관해 주면 배를 만드는 공장을 만든다음 다시 그 배를 팔아서 빚을 갚겠다'고 천하에 날강도 같은 제안을 내밀면서 엉뚱하게 터키의 선박건조사업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4백년 전에 쇠를 다루어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야. 넬슨 제독에게 물어봐. 거북선을 누가 만들었나?'
조선업에 뛰어든 한국은 실로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던 일본이 이에 질세라 전력 투구를 하기 시작했다. 결과로 터키 같은 일부 선박업에 종사하던 여러 국가들이 하루아침에 경쟁이라는 철퇴에 맞고서 쓰러져갔다.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이 해안가에 그대로 남아있다.
잠수함 한척을 비롯한 구축함들이 이곳을 해군박물관으로 꾸며서 그나마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를 간직하며 이어오고 있다.
총성이 울리나 안울리나....... 세상엔 여전히 약육강식이 존재한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 선착장 앞 공원에 설치된 터키의 어디에서나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 메메트 2세(정복자 술탄 마호멧 2세) 동상이다.
선착장 대합실 벽에 걸린 낡은 흑벡 사진 속에서 수많은 갤리선을 건조하고 있는 오스만 시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은 남자 직원이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행객 차림의 내 모습을 보고는 다가와서 방파제쪽으로 안내하면서 과거 역사속의 이 지역을 간략하게 소개해 준다. 모두 알아듣는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참 친절하고 고마운 청년이었다.
이곳에서 내가 갖는 감정들도 온통 알싸한 아픔들 뿐이다. 왠지 그런 느낌이 진하게 다가온다.
페리에 올랐다.
생각보다는 한산했다. 완전히 현지인 뿐이다. 주로 노인분들이다.
문득........ 젊은사람이 모두 떠난 어느 시골 외딴마을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라 탄 기분이 든다.
나는 다소 멋쩍은 웃음을 띠며 차림새를 매만지며 자세를 바로 했다.
수많은 파고의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 앞에서 다소 낯선것이야 어쩔수 없겠으나, 시건방져 보이는 이방인의 인상을 남기고 싶진 않아서였다.
더구나 내가 안고있는 파란 배낭엔......... 무한한 나의 자긍심이 되어주는 태극기가 번듯하게 달려있지 않은가.
외국에 나가보라.
내 손에 들려있는 '대한민국의 여권'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얼마나 많은 관심과 환대를 받게되는지를.........
'나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랑스런 한국인이고 싶다.'
금각만(골든혼) 지역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당도했다.
갈라타 다리 아래로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불쑥 빼져나온 금각만은 이곳에서 끝이 난다.
그리고 그 금각만이 끝나는 지점의 왼쪽으로(위 사진의 가운데 빨간 터키 깃발이 나부기는 곳) 하얀 대리석 채석장 같은 산비탈이 나타나는데, 그 정상부분에 바로 '피에르 로티 언덕'이 있다.
호젓하게 숲속 나무 테이블에 앉아서 가깝게는 금각만의 풍경과 멀리는 갈라타 다리와 보스포러스 해협을 조망하기에 최고의 명소라고 알려진 곳이다.
19세기에 유럽인들이 가졌던 로망중에는 막연하게나마 동서 문화가 만나는 이곳 이스탄불에 대한 로망이 대단했다. 특히 '오리엔탈 특급 열차'에 대한 로망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여 유럽인들은 이스탄불에 머물면서 '불루 모스크''하기야 소피아 성당''그랜드 바자르' 그리고 '보스포러스 크루즈' 등을 즐기면서 열차의 출발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던 중에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가 이곳에 자주 들려서 터키식 커피와 차를 즐긴다는 소문과 함께 이곳 역시 유럽인들이 꿈꾸는 로망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히 '로망'이라 부를만큼 '낭만적인 분위기'가 존재하느냐 하면..........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그렇다' 라고 대답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유럽의 여행자들도 많이 눈에 띄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특히 한국인. 일본인.중국인 여행자가 유독 많이 눈에 띈다.
터키 현지인들이 가족 단위로 많이 찾아와 한참씩 머물다 가는데......... 그들의 경우는 딱히 이곳에 차를 마시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오는것이 상당부분 아니라는 나의 생각이다. 현지인들에게는 여기 '피에로 로티 언덕'보다 매우 중요하고 꼭 찾아와야 하는 곳이 바로 인근에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은 그곳을 찾기위해 '예윱' 마을에 왔다가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이 산마루의 찻집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을 포함한 여행자의 절대 다수는 오로지 '피에르 로티'의 어떤 정취 내지는 무엇때문에 로망으로까지 자리하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전부일 것이다.
전망이 뛰어난 것은 나로서도 어느정도 인정이 간다.
하지만 그 유명세 만큼 독특하거나 매력적인 곳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곳보다 커피값이나 음식값이 더 비쌀 이유도 없어보인다.
꼭 가보아야 할 만큼의 매력적인 명소는 결코 아니다. 이스탄불엔 여기보다 멋진곳이 멋진 카페가 사방에 널려있다. 아시아 지역에 건너가 보라. 여기보다 더 멋진곳도 많다.
절반의 거품이랄까.............
이곳의 지명이 이스탄불의 예윱(Eyup) 지역이다.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이슬람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경건한 성지이다.
터키의 이슬람 신자들이 생각하는 성지로는 첫째가 '메카'이며, 두번째가 '예루살렘'이며, 나머지 세번째가 바로 여기 '예윱'이다. 그런만큼 이슬람 순례자들로 이곳 일대는 항상 붐빈다. 특히 금요일의 예배시간이 되면 이 일대는 발디딜 틈도 없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멧'의 제자였다가 후에 술탄을 이어받은 '아부 아웁 알-인사리'가 674년 기독교 세력인 비잔틴을 쳐부수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가 이곳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인사리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1453년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성채를 허물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메트 2세(파티흐 술탄 마호멧 2세)가 이곳에서 '알-인사리'의 무덤을 찾아냈다. 누군가가 혹여 기독교 세력에게 들켜 낭패를 당할까봐 깊고 깊은곳에 명패와 함께 고이 묻어두었던 것이다.
메메트 2세는 이곳에 이슬람 사원을 짖고 '알-인사리'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했다.
이후 이곳은 오스만의 새로운 술탄이 즉위할 때, 오스만 술탄의 권위를 상징하는 성검(聖劍)을 수여하는 의식을 갖는 장소가 되었으니, 술탄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이슬람의 절대 성소가 된것이다.
이곳이 이슬람 신자들에게 절대 성지인 만큼 이슬람인들은 모두가 이 성지의 근처에 묻히기를 원했다.
하여 이슬람 역사상 최고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술탄의 명을 받들어 마호멧 파샤의 무덤과 시야우쉬 파샤의 무덤을 비롯한 오스만의 역사에 공헌한 저명한 재상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미마르 시난' 역시 위대한 업적은 남겼으나 결코 행복하진 못했으리라. 그 이야기는 차후에 다시........
그런 상황이 이어지다 보니 이곳 일대는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을만큼 무덤들로 넘쳐났다.
하여 인근의 산자락 정상까지 무덤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덤들이 들어선 산자락에 죽은자를 만나러 먼길을 찾아온 사람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찻집이 생겨났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은 '피에르 로티' 였다.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 공동묘지에 이웃해 있는 커피 숍'이라 하겠다.
낭만이니 풍광이니 어쩌고 저쩌고 하기 전에......... 죽은 원혼들을 찾아뵙고 위로하고 돌아서다 잠시 쉬어가는 휴계소였다.
이런 실체로 보자면 딱히 이곳이 관광 명소가 될 이유는 별로 없어 보인다.
'피에르 로티'라는 조금 이상한 사람이 이곳에 자주 기웃거렸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냥 힘든 언덕배기 공동묘지 일 뿐이다.
로티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 언덕의 찻집에서 '염세주의''비관주의'를 운운하면......... '여행의 맛이 뚝 떨어진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자는 어떤 낭만을 기대하고 이곳에 왔을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피에르 로티'가 이곳을 자주 찾은것은......... 오가는 언덕길 옆으로 누워있는 죽은자들을 생각하면서 허무와 절망과 종말에 대해서 늘 영혼이 젖어있었기에 어떤 위로를 찾아서 이곳에 왔던 것이다. 그의 발걸음엔 어떤 낭만도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영적인 출구를 찾아 헤매는 염세주의자 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스스로 출구를 확 열어재끼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줄을 선 사람들에 이끌려 마치 당연한것 처럼 나도 따라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케밥 샌드위치를 샀다.
슈퍼마켓에선 캔맥주를 팔지 않았다. 아니지. 아예 술을 취급하지 않는다. 이곳이 저들에게 성지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었다.
콜라를 사서 들고는 광장의 분수대에 걸터 앉아 케밥을 먹는데....... 정말로 맛있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윱 술탄 자미'를 방문하고 있다. 행렬이 끊이지를 않는다.
저들에게 신앙이란 아주 커다란것에서 작고 미미한 것까지 일상이자 전부인듯 싶다.
내가 알고 보아온 이슬람 사람들은 대부분 지극히 서민적이고 친절하다. 선뜻 다가오지는 않지만 미소를 건네면 수줍고 온화한 미소로 이내 화답해 온다.
이런 모습들은 어떻게 보자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에서 보았던 정교회....... 다시 말해서 초대교회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 근원이 같아서 일까?
신에 대해서...... 또는 믿음에 대해서 대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우리와 비교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신앙 모습은 너무도 다르다.
터키 사람들의 신앙적 태도와 비교해 오늘날 우리의 신앙적 모습도 또한 상당히 다르다. 확연히 구분 될만큼........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초대교인들 모습이랑 여기 터키의 이슬람인들 신앙의 모습은 상당히 닮아 보인다.
신기하게 여겨질 만큼...........
물론 나만의 느낌이자 나만의 생각이지만.........
다시 가고 싶어진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기도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진다.
다시 가기는 가 보아야만 할것 같다.
예윱 자미 광장에서 서쪽으로 난 번화한 상점가인 발라반 율류 골목을 따라가다보면, 골목의 끝자락에 케이블 카를 타는 곳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케이블 카를 타면 언덕배기의 공동묘지 위를 날아가 산정상까지 데려다 준다. 그곳에서 내리면 바로 피에로 로티 언덕이다. 물론 공동묘지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만은 편도로 케이블 카를 타기로 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은 로티가 걷던것 처럼 공동묘지 사이로 난 길을 걸어서 내려오기로.
1876년에 '피에르 로티'가 이곳 예윱 자미 인근의 마을에 방을 얻어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는 시간이 날때면 이 언덕길을 걸어 올라서 여기 찻집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금각만을 내려다보곤 했단다. 오래지 않아서 로티는 이곳을 떠났지만, 이곳에서 집필한 소설이 발표되면서 이곳의 나름 빼어난 전망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언덕위의 이 고풍스런 찻집 이름도 아예 '피에르 로티의 찻집'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실내에는 피에르 로티가 이곳에 머물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잠시나마 그 당시의 추억에 젖게 만들어준다.
동네를 한바퀴 돌고 나서 한적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금각만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커피를 주문해 마신다. 너무 진한 느낌이다.
그리곤 아스라히 어떤 상념에 젖어본다.
'피에르 로티(Piyer Loti)'
그가 이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상념에 젖던 과거속의 그 어느날.......... 그 하루동안 그는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낙관주의자는 장미를 볼때 가시는 보지 않지만, 비관주의자는 가시만 본다.'
<예언자>를 썼던 레바논 출신의 작가 '칼리 지브란'의 말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개 필부인 나는 가시에 찔리면 상당히 아프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두려워 진한 장미의 향기를 맡아보는 것을 포기할 사람은 절대 아니다.
히자만 '피에르 로티'는 나와 같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장 먼저 가시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알고있는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生死路隱 此矣 有阿米 次肸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죽고 사는 길 예 있으매 저히고
나는 간다 말도 못다 하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다이 한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누나
아으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내 도닦아 기다리리다.
신라 경덕왕 때 월명사(月明師)가 지은 10구체 향가인 '제망매가[祭亡妹歌]' 이다.
인생사라는 것도 스쳐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처럼 참으로 덧없도다.
하지만, 그 덧없음으로 하여 보다 더 소중하고 빛나는 것은 아닐까?
여기 이 가파른 망자의 언덕길을 걸어오르는 노인을 보게되었다.
손에 든 비닐보따리에는 오렌지와 약간의 음식이 보인다.
무표정한 초췌한 모습에 발걸음도 제법 힘겨워 보인다.
노스텔지어를 떠올리게 한다기 보담은 어떤....... 진한 페이소스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다.
어디를 가는 것일까?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일까?
오늘 찾아가서 누군가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N.카잔챠기스가 말하길....... 신은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망각' 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우리에게 내려주셨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세월이 우리를 궁휼이 여겨서 시간이 지나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저절로 잊혀진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잡초들이 자라나서 내 묘비명을 감싸안듯이 뒤덮어서 세상의 눈초리와 관심과 질시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편안하게 휴면에 들수 있으리라.
그런데 지금 저 노인에게는 아직도 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내려지지 않았음일까?
아니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일 지라도 의도적으로 잊고싶지 않은 추억 같은 과거의 시간들이, 차마 그의 기억들을 자의식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힘든 생활과 고된 발걸음 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아가게끔 만드는 원천은 그리움일까? 회한일까?
나는 그 노인이 모퉁이를 돌아설때까지 멈춰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주여. 그의 발걸음을 기억하소서..........'
이곳 망자의 언덕길 한쪽 벽면에는 '코란의 귀절'과 이슬람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명언'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지금........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멈추어 서 있는 지점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 나는 그대에게 선물로 줄 진주가 없다. 그대에게 줄 다이아몬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에게 건네줄 꽃다발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대에게 들려주고픈 아름다운 말 세마디는 가지고 있다. 신께서 그대와 함께하시기를...........'
'피에르 로티'는 우울한 관능주의자 이다.
아름다운 여인, 아름다운 풍경, 아름다운 환경을 찾아다녔으며 그것들을 넘치도록 즐겼다.
그것들을 향유하고 향락에 젖어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사라질, 언젠가는 소멸될 그 피할수 없는 운명을 미리 지레짐작으로 두려움속에 맞이했다.
쾌락의 시간속에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죽음을 떠올리면서 우울해 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늘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녔다.
'모든것은 죽는다.'
그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운명이다. 죽음을 이기거나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신이 아니어서) 죽음에 쫓겨다니거나 눌려 살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불가능한것에 대한 욕망을 추구하고, 사라져 간것에 대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아쉬워하고, 머지않아 모든것은 소멸할것이라는 두려움에 늘 떨고있고, 어떻게든 죽음으로 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 로티는 감성적 이기주의자였다.
예윱 페리선착장에서 다시 페리에 올랐다.
오전에 츨발했던 카심파샤 선착장의 건너편 훼네르 선착장(Fener Oier) 에서 내린다.
이곳에서 숙소인 사르케지 방향으로 가다보면 우측 언덕배기에 아주 작고 예쁜마을 아이란즈 골목(Ayranci Sokagi)이 있다. 아주 작고 허름하고 낡은 작은 동네에 불과하지만, 비잔틴을 함락한 후 이슬람인들이 처음으로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었던 곳이다. 오스만 방식의 테라스가 있는 형형색색의 나무로 만든 집들로 빼곡한 정감어린 골목이다. 페가로 방치되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것을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봉사단체의 노력으로 상당부분 복원을 통해 옛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동네이다. 현재도 복원작업이 진행되는 중이라, 지난번 방문보다무엇이 달라졌나 궁금하여서 찾아가던 중에........... 그만.
아이란즈 골목과 상반되는 전혀 다른 지역의 먼곳에서 오스만 시대의 붉은 전통의상을 갖춘 악단과 합창대가 팡파레를 울려가며 춤과 합창과 함께 연주를 시작하고 있다.
저절로 귀신에 끌리듯 끌려간 그곳에서는 향신료 가계의 오픈을 축하하는 잔치가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터키사람들은 개업식 잔치를 결혼식 잔치에 버금가게끔 아주 거창하고 성대하게 치른다.
연륜이 절로 묻어나는 악단의 축하공연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개업식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거창하게 악단의 공연까지 동원하여 춤과 노래까지 선사하는 잔치는 처음 이었다.
역동적이다.
참으로 멋진 발렌스 수도교(Bozdogan Kemeri).
'로마 수도교' 하면 스페인 세고비아 지방의 멋진 수도교나 프랑스의 가르교 풍광으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여기 이스탄불의 로마 수도교도 참으로 웅장하고 멋지다. 참으로 위대한 로마 건축의 결정판이라 하겠다.
유럽의 대부분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은 물론 북아프리카 지역까지를 절령하고 다스렸던 로마인들은 그들이 머물렀던 모든곳에 로마 특유의 위대한 건축물들을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 놓았다.
첫번째는 바로 '아피아 가도'라 하겠다. 이 고대시대의 포장도로의 완성이야 말로 로마의 권위와 영역을 나타내는 기장 확실하고 위대한 창조물이라 하겠다.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둘째는 콜로세움 이다. 로마인이 거주하면서 다스리는 거점마다 원형경기장(신전을 포함)을 건설했다.
셋째가 바로 수도교이다. 지리적 지형적으로 중요한 거점이다 싶으면 도시를 건설했다. 도로는 뚫으면 그만이고, 물은 어디서던 끌어오면 그만이었다. 물과 도로가 해결되면 도시의 건설과 로마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충분 조건은 대부분 해결된 것이다. 나머지는 전쟁과 노예가 해결해 줄테니까.
그리고 위의 세가지 위대한 건축을 담당한 기술자들은 바로 로마의 군인들이었다.
전투에서는 지상 최강의 용맹한 병사이면서, 그 이전에 그들은 모두 훌륭한 건축가요 토목기술자들이었다. 로마는 위대한 제국일 수 밖에 없었다.
이스탄불은 동서양이 교차하는 천혜의 지형적인 축복을 받은 도시였지만 단 한가지........ 물의 축복만은 받지 못했다. 어디서나 흐르는 물을 그냥 떠서 마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도시였다. 이것은 도시건설에 있어서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긴 동로마의 군인들은 이 문제를 능수능란하고도 완벽하게 해결해 냈다. 이 식수문제의 해결 뒤에서야 콘스탄티노플은 거대 도시로 탄생할 수 있었다.
이스탄불에서 제법 떨어진 외곽지역 벨그라드 숲에는 말고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흘러내려갔다.
이곳에 말을 타고 나타난 일련의 로마 군인들은 이곳의 지형을 탐색하고 거리를 측량하고 나서 거대한 제방을 축성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스탄불 올드시티(술탄 마호멧 광장) 인근에 여기저기 사방으로 그리이스의 옛유적들을 파내거나 뭍어버리면서 여러개의 저수조(물탱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벨그라드 숲속의 제방에서 올드시티의 저수조까지 수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골이 깊으면 수도교를 건설해서 건너갔다. 수로를 따라 흘러들어간 물은 사방으로 널려진 여러개의 저수조마다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그들은 물이 그득한 그 저수조 위에 건물을 지어 덮었다. 그 저수조에 모인 물들이 작은 수도관을 통해 사방의 도시 전체로 흘러 내려갔다. 2백만의 인구가 싯고 마시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설계 건설되었다. 그게 이스탄불이다.
그리고 그 많은 저수조들 중의 한곳이 바로 "술탄 마호멧 광장'의 인근에 있는 메두사의 머리로 유명한 '에레바탄 지하 궁전' 이다. 이 공장의 주면 사방으로는 땅 속에 아직 발굴하지 않은 지하 저수조들이 널려있다.
이스탄불은 완벽한 게획도시 였다.
이 위대한 건축 유산인 발렌스 수도교 아래로 끊임없이 차들이 오간다. 일반 도로다.
그리고 주변의 사방으로는 온통 푸른 숲이 우거진 공원이다.
공원 북쪽의 이트파이에 거리 양쪽으로는 멋진 야외 레스토랑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의 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잠시 쉬면서 수도교와 바로 아래 파티흐 공원을 바라다 본다.
파티흐(Fatih)란 '정복자'란 뜻이니 이곳은 당연히 '메메트 2세(술탄 마호멧 2세)' 기념 공원이란 뜻이다. 공원의 한 가운데로 메메트의 동상이 서있다.
말을 타고 하늘을 나는 동상이다. 가히 터키인들의 '정복자 메메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파티흐 공원에서 발렌스 수도교를 따라 도로를 건너면 또다시 나타나는 공원의 뒤편으로 장엄하게 솟아있는 사원이 바로 '파티흐 자미(Fatih Camii) 이다.
'4차 십자군 전쟁' 당시 느닷없이 콘스탄티노플에 들이닥친 십자군이 이 자리에 있던 비잔티움 정교회 건물을 불태우고 약탈을 감행했던 장소이다. 이슬람을 상대로 성지회복을 떠났던 원정대는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먹고 동맹국 비잔틴으로 쳐들어 왔던 것이다. 그들은 살륙과 약탈을 일삼았다.
훗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메트 2세(파티흐 술탄 마호멧 2세)는 이 자리에 자신을 위한 자미를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이젠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옮긴다?
왔던 길을 되돌려 아이란즈 골목길을 마저 돌아보고 나서 다시 베이올루의 '갈라타 타워'에 올라 저녁 노을을 볼까?
아니면 에미뇨뉴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아시아지역 카드쿄이로 가서 어제의 아쉬움을 달래볼까? '하이다르파샤역'을 못본것이 이내 마음에 걸린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골목 투어를 계속할까?
이대로 골목 언덕길을 올라가면 '슐레이마니 자미'가 나올것이고, 언덕을 내려서다 보면 '그랜드 바자르'가 그 앞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걷다보면 '하기야 소피아'며 '불루 모스크'며 '예레바탄 지하궁전'에 '톱카프 궁전' 까지가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좀 더 걸으면 되지 뭐. 내가 가진게 시간하고 깡다구 밖에 없잖아?'
나는 다시 힘차게 골목 안쪽으로 난 언덕길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긴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