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양시의 지세와 연혁
■ 지세(地勢)
밀양군의 중앙에 위치하여 동으로 단장면과 산외면, 서로 부북면, 남으로 삼랑진읍, 상남면, 북으로 상동면, 부북면의 일부에 접한 지역이며 행정명으로는 내일동, 내이동, 교동, 삼문동, 가곡동, 용활동의 육개동과 28통, 360개 반으로 행정구역이 구분 조정되어 있다. 총면적이 28.85㎢((답 3.89,전 3.74, 임야 13.50, 대지 1.87, 기타 5.85)인 전국 67개 시중 65위이고, 경상남도내 10개 시중 9위에 해당하는 부산, 대구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위성도시로서일 뿐 아니라 동부 경남의 한 중심을 이룬 지방 도시로서 많은 문화 유적이 산재한 교육 및 관광의 유수한 도시이다.
■ 연혁(沿革)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의 기록에 따르면, A D 3세기 경에는 변한 12소국중의 하나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미리미동국은 그후 독자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로국(斯盧國 : 경주)을 중심축으로하여 보다 강력한 국가 체제를 구축하고,활발한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신라의 세력권에 편입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우경(牛耕)의 실시와 순장제(殉葬制)의 폐지 등에 따라 비약적인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보게 되는 6세기초 신라 지증왕대의 주군제(州郡制)의 시행과 더불어 추화군(推火郡)으로 개편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통일 신라 시대에는 경덕왕 16년(757)의 지방 제도 정비와 더불어 밀성군(密城郡)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성종14년(995)에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구분하는 군현제(郡縣制)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종전의 밀성군을 밀주(密州)로 승격시키고 군수 또한 자사로 개칭하였다.
충렬왕 2년(1276) 고려 정부는 이 지방의 군민 방보, 계년 등의 주도하에 고을 사람들이 당시 대몽항전을 이끌었던 삼별초군에 호응하였다는 이유로 밀양 전체를 반역향으로 귀화부곡으로 만들어 계림부(경주)에 예속하게 하였다. 그 얼마 뒤에 밀성현(密城縣)으로, 다시 밀성군(密城郡)으로 회복되었다. 그리고 밀양부(密陽府)로 승격시켰다.
이 밀양부는 조선 왕조의 건국 후에 읍호의 승강을 거듭하다가 태종 15년(1415)에 이르러 비로소 고을 주민의 호수가 천호 이상으로 불어나 이때 정식으로 밀양도호부가 되어 거읍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현재의 밀양시 일원에 해당하는 부내면(府內面)은 당시 서문내리(西門內里), 남문내리(南門內里), 동문내리(東門內里), 노상리(路上里), 노하리(路下里), 송정리(松亭里), 교동리(校洞里), 춘복리(春福里), 전천리(箭川里), 용성리(龍城里), 평리(平里), 남포리(南浦里), 가곡리(駕谷里) 등의 13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부내면은 고종 32년(1895)에 칙령 제98호로 23부제를 실시함과 더불어 종전의 밀양도호부를 대구부 밀양군으로 개편하게 되자 밀양군 부내면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가 1896년(고종 건양 원년)에 구제(도제)로 되돌아가서 13도제를 시행함에 따라 이 밀양군 부내면은 종전의 대구부 소속에서 경상남도의 관할로 개편되었다.
당시 밀양군 부내면의 행정 구역은 단장면과 부내면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활성리, 용평리, 가곡리, 남포리, 삼문리, 내일동, 내이동, 교동리의 8개 동리로 개편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 이전까지는 9개이였다. 개편 당시 면소재지는 내일동이었으며, 기왕의 활용리, 남부리, 동부리, 서부리, 노상리, 노하리 등의 명칭은 행정 구역 개편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밀양군 부내면은 몇 년 뒤인 1918년에 밀양군 밀양면으로 명칭 변경을 보게 되었다.
그후 1931년 4월 1일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승격하게 되었고, 나아가 1988년 6월 22일 밀양군 조례 제1047호로 내일, 내이, 교, 삼문, 가곡동을 이로 명칭 변경하였으며,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로 대망의 밀양시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