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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하고 병든 종교권력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역시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행하고 있던 정치권력과 손을 잡았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함께 작당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는 평소 자주 들르시던 산에 오르셨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따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열두 명의 제자들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권한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에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를 당신의 사절단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타락한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열두 명의 사도들을 통해 온 천하에 알려졌습니다. 그것을 통해 악은 결코 선을 이길 수 없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역사는 당신을 떠난 불의한 다수가 아니라, 당신이 친히 선택하신 소수에 의해 개혁될 수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역사를 바꿀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받고 주님을 팔아넘긴 패역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자 겁에 질려 벌거벗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를 뺀 제자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만큼은 죽는 자리까지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주님을 부인한 제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는 하나님의 사절단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습니다. 실제로 죽었습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친히 자신들을 선택해 주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라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70억에 육박하는 인류 가운데서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골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었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기도와 선택과 부르심을 부끄럽게 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합당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약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일꾼을 세우기 위해 한 부부를 선택해야 한다면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분명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양육할 수 있을 만큼 젊고, 건강하고, 유능하기까지 한 여인을 찾을 것입니다. 유복한 가정환경, 최상의 교육환경, 다양한 문화를 즐길 수 있고 안전까지 보장되는 사회 환경을 먼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돌아보신 이스라엘에는 총체적인 절망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최상의 조건을 갖춘 환경이 아니라, 당신 한 분만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경건한 가정을 찾으셨습니다. 잉태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친 여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당신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찾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어떤 환경이 필요한 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도 아십니다. 그래서 바로 그곳에,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에 두십니다. 비록 어렵고 힘겨울지라도 당신이 두신 곳에서, 당신이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과 어울리며 당신의 선택과 부르심에 합당한 인격을 갖춘 당신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한편, 창조는 우리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지혜와 공교함을 요구합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창조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지으실 것인지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을 책에 모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말로 다할 수 없는 공을 들이셨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존재와 관련하여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139:13-16)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계획 속에서 태어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우리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크고 소중한 가치를 가진 존재입니다. 어디에 내 놓아도 부족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걸작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완성하셨습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소중한 자신의 가치를 잊어버린 채 죄를 벗 삼아 살았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처참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히 인간이 되셨습니다. 모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구원해 주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자녀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바로 그 사랑을 증거 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수없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목숨이 다하기까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증거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으시기까지 소중히 여기시는 존재로서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그것을 통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하나님 한분께만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 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17-19)라고 시작됩니다.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 각처에서 몰려온 많은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로잡고 있던 각종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믿음이 준비되어 있다는 어떤 암시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나폴레옹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소녀는 “페하! 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나폴레옹은 “네 아버지는 누구며,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습니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제 이름은 라욜라입니다. 제 아버지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폴레옹은 두 번씩이나 반역죄를 저지른 소녀의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소녀는 “폐하, 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는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오, 폐하! 간청합니다. 제 아버지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세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순간 나폴레옹은 갈등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곧 “그래, 얘야, 내가 너를 위해서 네 아버지에게 긍휼을 베풀어 석방해주마.”라고 대답했습니다. 법과 현실로는 살려 줄 수 없는 사형수지만, 아무 조건 없이 긍휼을 베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성경에는 “긍휼”이라는 단어가 약 169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비, 인자, 불쌍히 여김” 등을 포함하면 무려 500번 이상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반증입니다. 한편, “긍휼”의 사전적 의미는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적극적으로 도와줌”입니다.
특히 “긍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라훔)는 “자궁 또는 가슴”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렉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긍휼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는 어머니의 가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죄와 관련되어 있다면, 긍휼은 죄로 인해 비참한 처지에 몰린 상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고통을 제거해 주려는 열정이 합쳐져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죄와 허물로 인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던 사람들을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가엽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모든 악한 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주셨습니다. 먹을 것까지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긍휼의 나라입니다. 가난과 질병과 더러운 귀신도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힐 수 없는 나라입니다. 참된 평안과 안식과 만족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시된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그동안 우리를 그토록 괴롭혀 왔던 지독한 가난과 질병과 지긋지긋한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뿐 아니라, 고해와 같은 인생 속에서도 세상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참된 안식과 평안과 만족까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들에게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20절입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은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먼저 경제적인 면에서 그 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압제를 당해도 사회적으로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때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가난한 자”를 하나님께서 돌봐 주시는 경건한 사람 또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고통을 당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평행본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이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자” 앞에 “마음”이라는 단어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의미에는 큰 변화가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그들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항상 관심을 베풀어주시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든, 영적이든 그들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을 통해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께 몰려나온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권세와는 거의 상관이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가난하고 병약한 자들이 태반이었습니다. 특히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들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본 절을 편협하게 해석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성경은 물질적인 가난을 무조건 영적인 복이나 상급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오직 저에게 필요한 양식만을 주십시오. 제가 배가 불러서 주님을 부인하면서 ‘주가 누구냐’고 말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가난해서 도둑질을 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잠30:8b-9)라는 지혜자의 간청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징계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다스리는 원리는 물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방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 앞에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가? 나에게 물질적인 손해가 따를 때에 하나님께 돌이켜야 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공동체의 필요를 돌아보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체에는 어떤 영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가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할 삶의 표준이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보다는, 가난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아무튼 본 절에서의 가난은 굳이 물질적인 부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5:1),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눅6:20a)라는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가르침의 대상입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야할 대상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제자들은 전적으로 하나님 한분만 의지해야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의식을 가져야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가 되어야했습니다. “나는 불쌍하고 가난하지만 주님, 나를 생각하여 주십시오. 주님은 나를 돕는 분이시요 나를 건져 주는 분이시니 나의 하나님, 지체하지 말아 주십시오.”(시40:17)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구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고 구하는 영적인 가난이라면 몰라도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은 제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주의 종이라 불리는 목회자들은 가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을 믿음 없음과 연결시키려고 합니다. 오죽 능력이 없으면 하루하루 끼니와 임대료 걱정이나 하며 지내는 것이냐며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것을 지극히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결과 가난한 주의 종을 무시하고 얕보는 경향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멸시하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무모해 보이고 미래가 보장되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제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부자들이 아닙니까?”(약2:5b-6a)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61:1a)라고 외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했습니다. 자신이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복음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기 위해 땅에서의 가난을 선택합니다. 동시에 땅에서도 부요할 수 있는 비밀을 소유합니다.
이는 자본주의적인 가치에 따라 자신의 최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따라 자신의 것으로 형제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사람들만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공급하여 곤궁에 빠진 형제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형제의 필요를 발견한 즉시 망설이지 말고, 서슴없이 베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후히 되어”는 “분량, 척도”라는 의미의 헬라어(메트론)와 “좋은”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칼로스)의 합성어로, “좋은 분량으로 주다, 줄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굵은 콩 사이로 작은 조나 깨를 섞듯이 조금도 빈틈없이 누르고 흔들어서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만큼 최대한으로 채워서 다시 돌려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갚아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 것 이상으로 갚아주십니다. 움켜쥐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나눠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마음은 물론 생활까지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 나눠주려고 몸부림칩니다. 나눠주면 줄수록 하늘의 보물이 더 풍성해 지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이 땅 가운데서도 풍성하게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한분만 믿고 의지하십니까? 신뢰하십니까? 하늘에 상급을 쌓는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땅에서도 하늘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제자 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방법으로 삶의 필요를 채우고 있다면 결코 가난한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염려하십니다. 깊이 생각하십니다.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채워주십니다. 당신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당신 한 분만을 믿고 의지하는 가난한 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의 타락은 그저 받기만 원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고 말씀합니다. 욕심 때문에 움켜쥐었고 결국 그것은 죽음을 불렀습니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움켜쥐었습니다.
복음을 접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을 움켜쥐었습니다. 자신의 아성을 움켜쥔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백세 때에 얻은 귀한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쥐었던 아들을 놓았습니다. 하나님이신 주님 역시 아무것도 움켜쥐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는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께서 우리에게 움켜쥐려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가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고, 열린 마음으로 이웃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귀한 사역에 동참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가난한 삶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한 고장에서 가장 큰 부자와 가장 가난한 사람이 상담을 위해 랍비를 찾았습니다. 일찍 온 부자가 먼저 랍비의 상담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이 지나서 나왔습니다.
곧이어 가난한 사람이 상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면담은 불과 5분 만에 끝났습니다. 기분이 상당히 상한 가난한 사람은 랍비에게 “부자와의 상담은 한 시간씩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저와의 상담은 불과 5분 만에 끝났습니다. 이것이 공평한 건가요?”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랍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진정하세요. 당신은 자신의 가난함을 알고 있었지만 부자는 자신의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한 시간이나 걸렸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성경해석자요 저술가인 바클레이(W. Barclay)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비천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주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물질적이고 영적이고 육체적인 가난에 빠뜨리시기도 하십니다. 교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붙잡고 있는 세상 줄을 끊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겸손히 당신 한 분만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형태의 가난은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119:67, 71)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 역시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각종 형태의 가난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복입니다. 주어진 것을 독차지 하지 않고 누군가와 나누는 자발적 가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중요한 덕목입니다. 형제와 함께 천국을 누릴 수 있는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것이 있다면 필요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십시오. 겸손히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가난해 지십시오. 그것을 통해 아무리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