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40)
[에피소드98]
일본여행이 끝나고 집에 도착하자 출간된 책의 판매 상황을 점검했다. 아직 홍보가 되지 않아 일선 서점의 판매가 저조했다. 나는 여행 가기 전에도 가까운 친구나 지인들에게는 이미 책을 구입해 달라는 요청을 한 바 있지만, 판매를 위해서 고교, 대학 동창회, 큰 교회 목사님들, 은행 직원들, 대학 때 활동한 클럽회원(태권도부), 가족, 친척, 선배, 심지어 사돈의 팔촌까지 연락하여 도움을 청했다. 그야말로 전 방위적이고 사력을 다한 판매 활동이었다. 홍보를 위해서 언론(동문회보, XX통신, XX일보 등)에도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약 두 달 가량 온 힘을 기울이다 보니 휴식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그 때 나의 행동을 생각해보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아마 출판사가 비용을 전부 부담하여 나의 책을 출판해 준데 대하여 무언가 보답을 해주어야 한다는 나의 일종의 강박감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침 대학 때 국가대표 럭비선수였던 O군이 구미에 있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남쪽에 있는 지리산 청학동, 화개장터, 통영, 거제도를 같이 구경하자고 제의해 왔다.
[에피소드99]
2007년 12월 22일 아침 7시경에 O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구미를 출발하여 신설된 중부내륙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11시 30분경에 통영에 도착했다. 전국에 하나 밖에 없다는 멸치 전문집인 정양동에 있는 “멸치마을”에서 멸치 풀코스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거제도로 향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 청마 유치환 생가, 대우 조선소, 삼성중공업, 거제도 자연 휴양림을 들린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 기념공원에 있는 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가 거제도민에게 헌정한 은덕 비를 구경했다. 은덕 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은덕 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공포와 죽음을 피해 남으로 간다는 흥남부두의 생명선에 올라탄 안도감도 잠시, 칼바람 몰아치는 겨울 바다의 혹한 속에서 부모형제와 고향을 떠난 두려움만큼 무서운 것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갈 남쪽 땅에는 갈 곳이 없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제도민 여러분들은 저희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저희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따뜻한 사랑으로 녹여주시고 저희들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와 의지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희들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주신 거제도민의 장엄한 공덕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 은덕 비를 세워 헌정합니다. -흥남 철수작전 기념 사업회 발기인 일동-
이 은덕 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 중 10만 명의 피란민을 자신의 형제처럼 보살펴 준 거제도와 통영 사람들은 참으로 선량하고 정감이 있는 분들이었다. 우리가 길을 몰라서 물을 때 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더 없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마치 일본여행을 했을 때 만나는 일본인처럼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것을 느꼈다. 역사전문가들은 “가야국이 멸망하면서 가야의 유민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지금의 일본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마 일본인들의 친절성이 지금 가야국 자리에 사는 통영과 거제도 사람들의 유전자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접해본 통영과 거제도의 분위기는 너무나 따뜻해서 시간을 내어 자주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정신과학자 칼 구스타브 융이 주장한 “집단 무의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통영과 거제도 사람들이야말로, 순박한 환경 속에서 타인을 배려해 왔고, 오랜 시간동안 그러한 유전자의 상호 교류를 통해 친절성이 배양된 집단무의식의 아키타입(Archetype)이 아닌가 한다.
거제도에 있는 계룡산 유황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통영으로 돌아 왔다. 저녁은 도천동에 있는 XXX횟집에서 푸짐하게 먹었다. 서울에 비해서 값이 반값 밖에 되지 않았다. 통영 앞바다에 있는 양식장과 자연산 생선은 국내 생선회 공급량의 60%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소화를 시킬 겸 근처에 있는 해저터널(길이 400M)을 산보했다. 다음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미륵관광특구에 있는 통영수산과학관 앞에서 장엄한 일출을 구경했다. 나는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2008년도에 대한 마음의 결의를 다졌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암흑 속에서 반드시 환한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충만해 졌다. 친구는 일출을 휴대폰으로 촬영을 해 나중에 나의 휴대폰으로 화면을 전송해 주었다. 나는 그 후 마음이 허전할 때면 그 장면을 보면서 용기와 힘을 얻고 있다.
일출이 끝난 후 미륵 도에 있는 탄산 유황온천에서 온천을 즐겼다. 물이 사이다처럼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모습이 신기했다. 언젠가 다시 오고 싶은 조용한 온천이었다. 아침은 XX집에서 시원한 졸복탕을 먹고, 통영의 특산물인 뚱보할머니 김밥을 2인분 사가지고 갔다.
청학동을 가기 위하여 산청군에 있는 어느 높은 재(嶺)를 넘었다. 고개 위에 있는 등산객들을 상대하는 매점에서 토종 꿀 차를 먹었는데 그 맛이 그야말로 진짜 꿀맛이었다. 청학동 도인 촌을 향하는 도상의 지리산은 각종 펜션과 민박집들로 가득 차 있었고 경치는 수려했다. 도인촌은 생각하던 것과 달리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으로 변해 있었다. 거의 대부분 관광객들과 도시인들을 상대로 장사와 서당, 예절교육 등으로 연명을 하는 듯 했다.
화개장터를 가기 위해 하동에서 구례로 접어들었다. 어떤 시골 할머니가 하동 삼거리에서 차를 좀 태워 달라고 해 같이 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혼자 정부지원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그녀는 방화혐의로 5백만 원의 벌금을 부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이웃의 잘못된 고발로 인해 절대로 자기는 억울하게 당했다고 했으나 그녀의 행동거지로 봐서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내 친구 O는 그녀의 사정을 딱하게 여겨 주머니에서 만원을 꺼내 주었으나 할머니는 고맙다는 인사도 않고 넙죽 받아 쥐었다. 시골에서도 도시 못지않게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화개장터를 구경하고 호박엿을 하나 샀다. 화개장터는 매일 열린다고 했다. 지리산 가까이 있어서 산나물이 많이 보였다. 점심은 시골 토종 한우등심을 전문으로 하는 집에서 한우 고기를 맛있게 구어 먹었다. 그런데 이틀간의 여행을 끝내고 서울로 올라오는 열차 안에서 친구가 건네 준 충무김밥을 먹으려고 끄집어낸 순간, 어찌된 일인지 김밥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O는 틀림없이 오징어 무만 가져 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김밥 집에서 김밥과 양념오징어, 무를 각각 별도로 포장한 것을 몰랐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불민함이었다.
[에피소드100]
여행을 갔다 와서 책 판매에 더 열심히 힘을 썼다.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책의 내용이 좋다고 했지만, 무명의 작가가 쓴 책이고 보니 판매는 예상보다 부진했다. 1월 한 달은 판매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기독교 신문인 국민일보에서 책에 대한 서평을 크게 실어 주었다. 그러나 이 서평도 판매시장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책의 내용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판매는 실패했다. 1월 말까지의 판매는 2000권을 넘지 못했고 2쇄 인세에 그쳤다.
[에피소드101]
신학에세이 “흔적” 판매에 실패한 나는 지금까지 심혈을 기울여 쓴 책 나의 인생이야기 3부작 “다시 시작할 수 있다”를 출간하기 위해 2월 20일부터 원고를 다듬기 시작했다.
[에피소드102]
2008년 2월 26일 새벽 6시경 아내가 갑자기 자고 있던 내 방으로 들어 왔다. 그리고 오른 쪽 어깨의 통증을 호소했다. 나는 졸지에 당하는 일이라 몹시 당황했다. 몸이 약한 아내는 1년 동안 토스트 가게에 일하면서 무리를 한 듯 했다. 그리고 최근 3~4일간 가게에서 교대하는 사람 없이 혼자서 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인근 종합병원에 가서 X-Ray촬영을 해 본 결과 소견이 있다고 MRI촬영을 권유했다. 아내는 돈을 걱정했지만 일단 검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MRI검사는 검사가 밀려 있어 일주일 후에야 순서가 배정되었다. MRI촬영 결과, 담당의사는 뼈에 이상이 있어 뼈의 일부를 깎아 내야 한다고 했고, 힘줄이 파열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돈이 아무리 들더라도 정상적인 회복을 위해서 아내에게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혹시 수술이 잘못되어 팔을 못 쓰게 될까 두려워 수술을 거부했다.
나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진찰실에 배석한 레지던트 의사에게 물어보았더니 파열된 부위는 70대 노인이 되면 누구나가 끊어지는 힘줄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술을 하지 않더라도 움직이는데 약간 불편한 것 외에는 살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나는 다소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아내는 파열된 힘줄보다도 뼈를 깎는 수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결심이 단호한 아내의 마음을 돌릴 수 없어 나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수 밖에 없었다. 아내는 MRI촬영 사진을 가지고 혜화동 국립 S병원에 가서 다시 진찰을 받아 보겠다고 했다. S병원은 환자가 많은 관계로 한 달 뒤에야 진찰일자를 잡아 주었다. 아내의 병으로 토스트 가게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체의 수입이 없어져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에피소드103]
2008년 3월 20일 예수님의 기일(忌日)을 맞이하여 온종일 금식과 묵상기도를 드렸다. 새벽 2시 무렵 인터넷을 통해서 찬송가 135장 “갈보리산위에 험한 십자가 섰으니”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흐르는 가운데 주님께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셨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이 세상은 전쟁과 기아, 온갖 병고, 배신, 증오, 갈등, 사기, 음란 등이 넘쳐나 사람이 살기에는 그야말로 참혹한 곳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그 도는 갈수록 더해가고 있어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은 점점 무서운 곳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인류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이 참혹하고 무서운 세상현실을 당신도 한번 체험해 보시기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 자신도 말로만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실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당신도 고귀한 옷에 흙을 한번 묻혀보시고, 험악한 꼴도 당해 보시면서 인간의 현실을 직접 체험해 보라는 요구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점증하는 요구에 직면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셨다. 그것은 그의 친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 보내 인간의 모든 현실을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서 인간의 모든 고통을 체험하게 하셨고, 종국에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상에서 처형까지 당하게 하셨다.
이 그리스도의 세상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은 결코 인간과 유리된 존재가 아니라 진정 인간의 현실과 함께하는 사랑의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이 지상에서의 헐벗은 생활과 십자가의 참혹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인간의 고통과 일치(一致)하고, 연대(連帶)하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계시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은 인간을 괴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인간을 더 성숙시켜 인간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을 찾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 한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