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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회 지혜서 10장-19장
지혜서 10장-19장은 이집트 탈출 사건에 관한 숙고이다. 즉 지혜서에서 마지막으로 읽을 부분은 지혜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범에 대한 이야기이다. 찬가는 찬미하는 대상을 정의하는 것에서 멈출 수 없다. 그 대상의 구체적인 가치를 잘 깨달을 수 있게 하려면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알려진 갖가지 본보기로 그 효과를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다. 담론의 이러한 부분은 확장이라 불리는데, 찬미하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과 실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대비시켜 이를 간략하게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이 저자가 그의 작품의 둘째 부분에서 실천하는 이론이다. 사실 그는 기도의 마지막 절인 9,18에서 이러한 전개를 예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다”(9,18).
그래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순간에 파라오의 백성에게 쏟아졌던 일곱 가지 재앙과 주님께서 이집트를 떠나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셨던 일곱 가지 은혜를 나란히 놓는다.
· 이집트인들에게 마실 수 없게 되었던 나일 강물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목마름을 풀어 주었던 바위의 물을 대립시킨다(11,4-14).
· 이집트의 집들에 몰려들었던 개구리 떼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배고픔을 해소시켜 주었던 메추라기 떼를 대립시킨다(16,1-4).
· 이집트인들을 물었던 메뚜기와 파리 떼에, 광야에서 모세가 독사에 물린 이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들어 올렸던 구리뱀이 대조된다(16,5-14).
· 하늘에서 이집트인들의 수확을 망쳤던 우박과 번개에, 저자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하늘의 빵인 만나를 대조시킨다(16,25-29).
· 어둠이 파라오의 땅을 덮었을 때, 고센 지방에서는 빛이 이스라엘인들을 비추어 주었다(17,1-18,4).
· 이스라엘인들이 파스카를 지낸 때 죽음은 이집트인들의 맏아들을 쳤지만, 죽음이 광야에서 반역한 이들을 쳤을 때에는 아론의 기도가 죽음을 막았다(18,5-25).
· 마지막으로, 홍해가 이스라엘인들을 추격하던 파라오의 군대를 삼켜버렸을 때, 이스라엘인들은 맨발로 홍해를 건넜다(19,1-9).
이 모든 이야기는 탈출기와 민수기에 전해진다. 지혜서의 저자는 이것을 미드라쉬(midrash)방식으로, 즉 현재에 적용시켜 그의 시대에 필요한 의미를 보여 주면서 고찰하지만, 동시에 그 종말론적 의미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기원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며, 주님께서 역사의 끝에 이르러 의인과 악인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집트 탈출 시대에 주님은 물, 동물 등 눈에 보이는 요소를 사용하여 심판하셨다. 이것은 저자의 해석이 보여주는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할 것이다.
또 저자의 묵상은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진다. 저자는 자주 주님을 향해 직접 말을 하는데, 적들의 잘못과 그들이 겪은 벌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여러 동물에 의해 일어난 재앙을 회상하는 가운데 저자는 몇 군데에 삽입문을 넣기 시작한다. 첫 번째 삽입문(11,15-12,27)은 어째서 이집트인들이 그렇게 온건한 수단으로 벌을 받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죄인들을 서서히 처벌하심으로써 주님을 그들을 일깨우시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두 번째 삽입문(13-15장)은 살아있는 동물을 섬기던 이집트인들이 저자가 분석하는 이교 종교 가운데 최악의 종교를 따랐다고 말한다. 그래서 동물을 숭배하는 이집트인들은 그들이 섬기던 바로 그것에 의해 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지혜 10,1-21 선조들을 이끌어 준 지혜
역사에서 드러나는 지혜의 업적에 관한 이 묘사는 구약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 특별한 점들을 보여 준다. 성경의 전승 외에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전해 오는 성경 밖의 전승들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묘사되는 업적을 이 대목은 지혜의 역할로 설명하면서, 아담에서 모세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사건 가운데서 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의인들 개개인의 운명을 악인들의 멸망과 비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도 역시 지혜서의 다른 부분에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는다. 지혜의 구원 활동은 역사적 조건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속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지혜는 아담이 낙원에 홀로 있었을 때 죄에서 보호해 주었으며, 그가 여자에게 유혹을 당했을 때에도 구해 주고 만물을 지배하게 하였다(1-2절). “세상에서 처음으로 빚어진 조상, 홀로 창조된 그를 지혜가 보호하고 그가 지은 죄에서 구해 주었으며 2 그에게 만물을 통치할 힘을 주었다”(1-2). 타인은 진리에서 떨어져 나가 멸망의 길에 들었으나(3절) 의인인 노아는 지혜에 의해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다(4절). 바벨 탑을 쌓으면서 민족들이 언어의 혼란에 휩싸이자(창세 11장 참조) 지혜는 아브라함을 가려내어 그를 죄에서 보호하였으며, 하느님께서 그에게 아들의 희생을 요구하셨을 때 그를 굳세게 만들었다(5절).
지혜는 창세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 아드마와 츠보임, 초아르라는 다섯 도시 위에 벌이 내렸을 때 의로운 롯을 구하였다(6절). 그 도시에서 일어난 악행의 증거로 땅은 황폐해져 여전히 연기를 뿜고 있으며, 나무는 열매를 맺으나 때가 되어도 익지 않고, 믿지 않은 롯의 아내를 기억하게 하는 소금 기둥이 서 있다(7절).
따라서 악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행위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곧, 그것은 벌인 동시에 후대에게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고하는 증거물이었다(8절). 그 당시 지혜가 자기를 섬기는 이들을 구원하였듯, 형 에사우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친 야곱을 인도하였으며, 꿈속에서 그에게 하느님의 천사를 보여 주고 미래의 일을 계시하여 주었다(9-10절).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일하여 얻은 재산은 지혜의 선물이다(10-11절). “의인이 형의 분노를 피하여 달아날 때 지혜는 그를 바른길로 이끌고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었으며 거룩한 것들을 알려 주었다. 고생하는 그를 번영하게 하고 그 노고의 결실이 불어나게 하였으며 11 착취자들이 탐욕을 부릴 때에 그 곁에 있어 주고 그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다”(10-11). 지혜는 야곱을 괴롭히던 에사우와 라반에게서 그를 보호하였으며 주님의 천사와 격렬한 싸움을 벌일 때 그를 도와주었다(12절). 마찬가지로 지혜는 요셉이 종으로 팔려 가고 포티파르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을 때에도 그와 함께 있었으며(13절; 참조: 창세 39,6-12), 감옥에서도 그와 함께 있으면서(창세 39-20-41,36 참조) 마침내 그로 하여금 이집트를 관리하게 하고(창세 41,41 참조) 박해자들을 이기게 해 주었다(13-14절).
지혜는 의인들 개개인뿐 아니라 거룩한 백성 이스라엘도 이집트인들에게서 구하였다. 지혜는 모세의 마음 속에 들어가 그를 통하여 파라오 앞에서 기적을 행하였다(15-16절). 지혜는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들이 강제로 일한 대가로 이집트인들에게 그들이 강제로 일한 대가로 이집트인들의 귀중품들을 가져가게 하였으며(탈출 3,21-22; 12,35-36), 낮에는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고 밤에는 별빛처럼 빛나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였다(17절; 참조: 시편 105,39).
지혜는 이스라엘인들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은 빠져 죽게 하였다(18-19절). 이스라엘인들은 죽은 이집트인들에게서 무기를 빼앗고, 승리에 대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20절; 참조: 탈출 15,1-8). 지혜는 말 못하는 이들과 젖먹이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해주었다(21절). “20 그리하여 의인들이 악인들에게서 전리품을 거두고 나서 주님,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찬송하고 자기들을 지켜 주신 당신의 손을 한마음으로 찬양하였다. 21 지혜가 말못하는 이들의 입을 열어 주고 아기들의 혀가 똑똑히 말하게 해 준 것이다”(20-21).
지혜 11,1-12,22 악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인내
“1 지혜는 거룩한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2 그들은 사람이 살지 않는 광야를 건너 인적 없는 곳에 천막을 쳤다”(1). 예언자는 탈출 15장에 나오는 모세를 가리킨다. 모세는 광야로 가서 천막을 치고 주님께서 인도하는 길로 갔다. 11,4-14절은 원수들이 나일강의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과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이 바위에서 흘러 나온 물을 마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대조해서 보여준다.
“바른길에서 지각없는 길짐승들과 볼품없는 벌레들을 숭배하게 한 저들의 미련하고 불의한 생각에 대하여 당신께서는 벌을 내리시려고 지각없는 생물들을 떼 지어 보내셨다”(15).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대(기원전 4세기 후반-기원후 1세기 후반) 이집트에서는 동물 숭배가 성행하였다. 공경을 받은 길짐승으로는 뱀, 도마뱀, 개구리, 볼품없는 벌레로는 풍뎅이 등이 있다. 이집트인들의 이러한 동물숭배는, 바로 동물들이 동원되는 여러 재앙으로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15절에서는 왜 하느님께서 악인들을 직접적으로 오랫동안 벌하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물음이 다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지각없는 동물 떼로 이집트인들을 벌하셨다(11,15-16).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내리시기엔 너무 약한 분이셨는가?(11,17-19) “당신의 전능하신 손, 무형의 물질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손이 곰의 무리나 사나운 사자들을 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17). 17절에서 ‘무형의 물질’은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 온 표현이다. 이 표현을 빌리기는 하였지만, 물질의 영원성 또는 ‘신과 물질은 영원하다’는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까지 따르는 것은 아니다. 이 “무형의 물질”은 단순히 창세 1,2에 나오는 태초의 혼돈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당신보다 더 힘센 자를 두려워하신 것인가?(12,11) 이집트에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왜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하시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혜서는 하느님께서 악인들을 오랫동안 내버려 주시는 것은 그분이 약하셔서가 아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을 벌하시고자 당신께서 원하시는 다른 방법들을 사용하시거나 아니면 당신의 임금만으로도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으시다(11,2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작품들을 지혜롭게 다루시는 창조주로서(11,20) 언제든지 막강한 힘을 발휘하실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신의 피조물 안에 있는 힘을 사용하신다(11,21-23). 21-22절은 하느님의 전능을 다시 말하는데, 그 앞에서 세상은 이슬방울 같고 천칭 위의 먼지 가루에 지나지 않는다(이사 40,15 참조). 이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 주십니다.”(11,23). 이것이 저자의 주된 주장이고, 다음 절에서 이를 전개시킬 것이다. 첫 절은 역설적이다. 죄인인 우리 모두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설명해 주는 것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이다.
하느님께서 악인들을 부드럽게 다루시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악인들 역시 당신께서 지어내셨고, 당신께서는 지어내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이다(11,24-12,1).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 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24).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피조물 모든 것이 당신 것이기에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인들도 당신의 피조물로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깨닫고 뉘우쳐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조금씩 벌하시는 것이다(12,2).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12,2).
지혜서 저자는 가나안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온건함에 대해 말하면서 설명을 계속하고(12,3-18),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모든 독자에게 해당하는 하나의 가르침으로 이 첫 번째 삽입문을 끝맺는다. 다음이 그 핵심이다.
“19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다.
22저희의 원수들은 만 번을 더 채찍질하시니 저희가 남을 심판할 때에는 당신의
선하심을 잘 생각하고 심판을 받을 때에는 자비를 기대하라는 것이다”(12,19.22).
“인자하다”는 것, 그리스어 필란트로포스는 호의와 자비를 보임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임금의 덕인 이 덕을 주님께서 행하시고 또한 교육받은 사람도 실천한다(사도 27,3; 28,2 참조). 이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약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전능하시기 때문에 악인들을 자비롭게 다루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 백성에게 이중의 가르침을 주신다. 곧 당신의 백성이 죄를 범했다하더라도 하느님의 관대함에 기댈 수 있다는 사실과 의인들은 인자해야 한다는 점이다(12,19-22).
여기서 지혜서의 저자는 이집트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동족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곧, 그들은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 원수들 역시 비록 죄인들이지만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분께 사랑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누구든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마냥 관용만을 베푸는 분이 아니라 관용 뒤 이를 거부할 때는 엄벌을 주신다. “고통을 당하고 자기들이 신으로 여겼던 바로 그것들로 징벌을 받자 그것들에게 화가 난 저들은 사실을 보고서야 자기들이 전에 알아 모시기를 거부하던 그분께서 참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저들은 가장 무거운 단죄를 받았다”(27). 이집트인들의 맏아들들이 죽은 사건, 그리고 홍해에서 군사들이 빠져 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지혜 13장-15장 자연 숭배의 어리석음
12장에서 동물 숭배에 관한 언급이, 이제 13장에서 15장까지 본론에서 벗어나는 주제에 관하여 길게 말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서 저자는 우상 숭배의 두 가지 큰 형태 곧 자연의 신격화와(13,1-9) 사람 손으로 만든 우상들에 대한 경배를 고발하고(13,10-15,17), 그 뒤에 다시 동물숭배를 다루게 된다.
그리스인, 로마인, 이스라엘인들은 동물 숭배를 하였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을 조롱했다. 저자는 이교의 여러 종교를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안에서 세 가지를 구별한다. 가장 오류가 덜하지만 마찬가지로 단죄받을 첫 번째 것은 우주적 요소, 별, 특히 해와 달을 숭배하는 일이다(지혜 13,1-9). 이 단락은 뒤에서 다룰 것이다. 둘째는 우상 숭배인데, 이는 마치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자기 손으로 만들 수 있기나 한 듯이 인간 자신이 만든 대상을 숭배하는 것이다(13,10-15,13).이러한 종교적 일탈에 관련하여, 저자는 경신례에서 저지르는 오류가 도덕적 타락을 가져온다는 것도 보여 준다(14,12-31). 이는 바오로가 로마 1,18-32에서 되풀이할 것이다. 이교 종교들 가운데 최악인 세 번째 종교는 온갖 형태의 동물 숭배이다(15,14-19). 이집트의 동물 숭배자들은 그들이 공경하는 바로 그것으로 벌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의 저자가 우주적 종교를 비판하는 맥락이다.
그리스 철학적 기반을 가지는 이들은 초월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출발하여,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있는 분”(탈출 3,14)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분을 알 수 없었고, 실상은 그분의 작품인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했다(13,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3,1). 한편으로, 이 철학자들이 알아보지 못한 그분은 참 하느님 즉 인간의 역사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며 동시에 우주를 만드신 장인이다.
여기서 저자는 특히 스토아 학파의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그들은 유물론적 이론을 넘어설 수가 없었고 세상과 그 구성 요소를 신격화했다(13,2).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13,2). 볼테르(Voltaire)는 그분을 가리켜 이 세상을 시계처럼 통제하는 시계공이라고 말했다. 오래 전부터 성경은 같은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또한 역사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한편으로, 계시와는 무관하게 인간 이성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실재를 관찰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로마 1,20 참조).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따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계시 헌장에서 이를 반복하여 말한다(<계시헌장>, 6항).
우주의 요소들, 별들, 세상을 다스리는 두 “빛물체”(창세 1,14-16)인 달과 해의 아름다움과 힘과 작용에 감명을 받고도, 그 고대의 사상가들은 이 모든 우주적 실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그것들보다 더 뛰어나심을 상상하지 못했다(13,3-4).
저자에 따르면 – 그는 이러한 주장을 처음 했던 증인이지만, 이것은 후에 철학에서 전통적인 주장이 될 것이다 –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은 그리스인들이 피타고라스 학파 이래로 수학에서 사용했고 플라톤이 선(善)에 관련하여 사용했던 비례의 유비를 참된 신성을 찾는 데 적용하는 일이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13,5). 이것이 관상적 작업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혜서 저자는, 이 철학자들이 어떻게 이러한 우주적 실재의 주인을 발견하지 못할 수 있었는가를 묻는다(13,9ㄷ).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9). 그러나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비난은 크지 않다. 이들은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에 기울어, 그들이 보았던 것에 매여 겉모습을 가지고 탐구했던 것이다. 그들의 학문은 위대했지만, 지적인 힘이 부족했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용서될 수 없다. 어떻게 좀 더 높이 올라가지 않을 수 있었는가? 저자는 이렇게 끝을 맺지만, 물음에 응답하지는 않는다.
14장은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또 어떤 자는 항해를 준비하고 거친 파도를 헤쳐 가려고 하면서 자기를 데려다 줄 배보다 더 깨지기 쉬운 나뭇조각에 대고 빕니다”(14,1). ‘더 깨지기 쉬운 나무조각’은 뱃머리에 만들어 놓은 우상이다. 이 우상에 대고 비는 태도는 그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6 그래서 한처음에 오만한 거인들이 멸망할 때에도 세상의 희망이 뗏목에 몸을 피하여 당신 손의 인도 아래 새 세대의 씨를 세상에 남겼다. 7 그리하여 정의가 나온 그 나무는 복을 받았다”(6-7). 6절에서 ‘거인들’이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거인족을 가리킨다. 그리고 ‘희망의 뗏목’은 노아의 방주를 말한다. 7절에서 ‘나무’는 노아의 방주에 쓰인 나무를 가리킨다. 이 ‘나무’가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도록, 또 세상과 사람들의 마음을 그분의 법이 지배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들은 이 ‘나무’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적용시켰다.
14장 12-21절은 우상 숭배의 기원에 대해 말한다. “12우상들을 만들려는 생각이 간음의 시작이고 우상들을 고안해 내는 것이 삶의 타락이다. 13그것들은 한처음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영원히 있을 것도 아니다. 14우상들은 인간의 허영 때문에 세상에 들어왔으니 그것들이 얼마 못 가 끝장난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일이다”(12-14). ‘간음’은 성서적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 불충을 뜻한다. 곧 자기들의 하느님을 저버리고 이민족의 신들과 우상들을 쫓아가 그것들을 섬기는 것이다. 우상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라 참 하느님을 알게 되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15절을 보면 “때 이르게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긴 아비가 갑자기 빼앗긴 자식의 상을 만들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은 사람에 지나지 않던 것을 신으로 공경하며 자기 권솔에게 비밀 의식과 제사를 끌어들였다”다고 하였다. 옛날에는 어린이 사망률이 높았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때 이르게 죽은 아이들의 사후 운명에도 관심이 높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별나라로 가서 행복하게 살고, 또 자기 가족들에게는 일종의 수호신이 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석상을 만들어 그 아이를 영웅화하고 신격화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밀의식과 제사로 새로운 신에 대한 종교 의식를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상으로 임금을 신격화하였던 것이다(14,17-19).
우상숭배의 결과로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하느님을 잘못 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그들은 무지 때문에 일어나는 격렬한 싸움 속에 살아가면서 그토록 커다란 여러 악을 평화라고 부른다”(14,22). 우상숭배로 아이들을 죽여 제사를 지내는 예식이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것은 인신공양의 제사 방식 때문이었다. 제물로 선정된 아이를 놋이나 동으로 만들어진 소머리 형상의 우상에 바치게 되는데, 이 우상의 가슴 부분이 아궁이로 되어있었다. 여기에 불을 지펴 우상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 그 팔에 살아있는 아이를 안기는 방식이었다. 아이는 몸부림치다가 팔의 경사를 따라 아궁이 속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며 이때 아이의 절규와 부모의 오열을 사람들이 들을 수 없도록 매우 시끄러운 북소리를 곁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인신공양은 페니키아뿐 아니라 페니키아 출신들이 건설한 식민지에서도 남아있었는데 고대 사회에서도 잔인하고 몹쓸 풍습이라고 여겼었다. 특히 페니키아 출신 도시이자 저 풍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카르타고와 싸움을 벌였던 로마인들이 매우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며 카르타고를 파괴한 뒤 "이러한 풍습을 가진 카르타고 인들은 로마인들에 비해 더 잔인하고 야만적이므로 멸망당해도 싸다"라는 식의 선전을 하는데 활용되기도 하였다.
우상숭배로 “25모든 것이 뒤엉켜 있다. 유혈과 살인, 도둑질과 사기, 부패, 불신, 폭동, 위증 26가치의 혼란, 배은망덕, 영혼의 부패, 성도착, 혼인의 무질서, 간통과 방탕이 뒤엉켜 있다. 27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우상들을 숭배하는 것이 모든 악의 시작이고 원인이며 끝이다.”(14,25-27).
15장 3-4절은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자 하는 노력이 드러난다. “3 당신을 앎은 온전한 정의이고 당신의 권능을 깨달음은 불사의 뿌리이다. 4 인간의 간악한 상상이 만들어 낸 작품도, 화공들의 보람 없는 노고도 저희를 꾀지 못하였다. 그것은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해 놓은 조각상일 따름이다”(3-4). 3절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괄하는 앎을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것이 마치도 옹기장이가 부드러운 흙으로 당신의 모상을 빚는다고 표현하다. “옹기장이가 부드러운 흙을 열심히 개어 우리에게 쓸모 있는 갖가지 그릇을 빚다. 같은 진흙을 가지고 깨끗한 일에 쓰일 기물도 반대되는 일에 쓰일 것도 다 같은 방식으로 빚어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어디에 쓰일지는 도공이 결정합니다”(15,7).
지혜 16-19장 이집트 탈출에 대한 모습
16장을 시작하면서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비교하여 해로운 동물들과 유익한 메추라기를 설명한다. “1그래서 저들은 같은 동물들로 응분의 징벌을 받고 또 벌레 떼로 고통을 받았다. 2그러나 당신의 백성에게는 당신께서 그 징벌과는 반대로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의 식욕을 채워 주시려고 놀라운 맛이 나는 음식, 메추라기를 마련해 주셨다”(16,1-2).
16,1에서 저자는 다시 이집트의 재앙과 이집트를 탈출할 때에 이스라엘인들에게 주어졌던 은혜를 대비시킨다. 네 번째 장면에서 악천후로 망쳐진 이집트인들의 수확과 히브리인들을 배부르게 먹였던 만나가 대조되는데(16,25-29). 이 장면은 이집트 탈출에 관한 일곱 장면 가운데 중심 위치에 있다. 탈출 16장과 민수 11,4-9에서 오경은 만나가 나타난 정황을 이야기한다.
지혜서 저자는 당시의 유다교에서 널리 퍼져 있던 재해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천사들의 음식”(16,20ㄱ)은 시편 78,25의 칠십인역 그리스어 번역(시편 77,25)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모세 오경의 설화에서 제기되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만나의 맛에 대한 것이다. 탈출 16,31에 따르면 그 맛이 벌꿀 과자 같았다고 하는데, 민수 11,8에서는 기름 과자 같았다고 말한다. 지혜서 저자는 처음으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만나는 모든 입맛에 맞는 것이었다. “20그러나 당신의 백성은 당신께서 천사들의 음식으로 먹여 살리셨다. 그들의 노고 없이 미리 준비된 빵을 하늘에서 마련해 주셨다. 그 빵은 갖가지 맛을 낼 수 있는 것, 모든 입맛에 맞는 것이었다. 21당신의 양식은 자녀들을 향한 당신의 달콤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것을 받는 이의 소원을 채워 주고 저마다 원하는 대로 모양이 변하는 양식이었다”(16,20-21). 유다교 전통은 이러한 기발한 해석을 유지해 갈 것이지만, 지혜서의 저자만이 만나가 주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향한 당신의 달콤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혜 16장을 성찬의 신비에 비추어 재해석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겠는가? 오늘날에도 지혜 16,20은 성체 성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용된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천상 양식을 주셨나이다. 한없이 감미로운 양식을 주셨나이다.” 이 빵은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을 기르시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도록 하는 말씀이다.
만나 이야기는 우박과 번개로 이집트인들의 수확물을 망친 재앙과 대조되므로, 저자는 만나가 불에 견뎠다는 것을 지적한다. 실상 민수 11,8은 만나를 가루로 내어 불에 구워서 과자처럼 만들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이유가, 불이 상반되는 두 가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불은 어떤 이들의 수확물을 망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음식을 준비하는 데에 사용된다(16,22-23). 여기에서 그는, 전체적으로 볼 때 피조물은 창조주의 손 안에서 그 작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16,24). “피조물은 자기를 만드신 당신을 시중들며 불의한 자들을 징벌하는 데에는 그 힘이 팽팽해지고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에게는 득이 되도록 그 힘이 느슨해집니다”(24). 지혜서는 다른 구약 성경의 작품들처럼 세상을 “피조물”(16,24)이라 부른다. 팽팽해질 때에는 불의한 자들을 벌하고, 느슨해질 때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에게 득이 된다는 것이다.
16,25-29은 만나의 선물, 말씀과 감사에 관한 메시지이다. 만나를 모으는 일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루어져야 했다. 각자는 필요한 만큼 거두어들이되, 비축해 두어서는 안 되었다. 금요일에만 휴식의 날이며 주님의 날인 안식일을 위하여 두 배를 모았다(탈출 16,16.23). 이러한 하느님의 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벌레가 금지된 잉여분을 부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탈출 16,19-20).
지혜서 저자에게 이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절제 없이 사용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삶에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16,26). 더 정확히 말하면, 신앙인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수확의 결실이 아니라 말씀이다. 이와 같은 종류의 대조를 16,7.12에서도 볼 수 있어서, 저자에게 만나는 그 자체로서 당신의 관대함으로 온 세상을 먹여 기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의 가시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6,25ㄴ 참조). 이를 말하기 위하여 저자는 신명 8,3의 유명한 구절에서 영감을 얻는데, 그 구절은 예수께서 유혹자에게 응답하실 때 다시 사용될 것이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이러한 놀라운 사건들을 고찰함으로써 지혜서는 피조물이 하느님께 시중들고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자연의 힘이 강하거나 약해지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달린 것이며, 따라서 악인들을 벌하시거나 의인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뜻 때문이다(16,24). 사람들은 일상적인 일들이 변화하는 데에서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 역시 놀라운 만나의 기적에서 자기들을 기르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16,26).
지혜서 저자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 낸다. 탈출 16,21에 따르면 만나는 아침 일찍, 태양의 열기가 만나를 녹게 하기 전에 거두어들여야 했다. 이는 해가 뜨기 전에 주님을 만나러 가고 그분의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함을 의미한다(16,27-28). “27 불에도 없어지지 않던 그것이 잠깐 비치는 햇살에 따뜻해지자 그냥 녹아 버린 것은 28 당신께 감사하기 위하여 해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하고 동틀 녘에 당신께 기도해야 함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27-28). 실상 성경에서는 아침 기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고(시편 5,4; 57,9). 예수께서도 이를 실천하셨다(마르 1,35).
17장 1절에서 18장4절까지는 이집트인들에게 벌할 때 암흑의 재앙 대신 불기둥이 내려 질 것이라고 말한다. “저절로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불덩어리만 저들을 내리비쳤는데 그 광경이 사라지자 저들은 공포에 떨며 방금 본 것을 더 불길한 것으로 여겼다”(17,6).
18장 5절에서 18장 25절은 이집트인들의 맏아들의 죽음 대신 이집트에서 탈출과 승리를 말한다. “저들은 요술에 마음을 빼앗겨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자기들의 맏아들들이 죽은 것을 보고 그 백성이 하느님의 자녀들임을 인정하였다”(18,13).
19장 6절-21절에서도 지혜서는 다시 한 번 피조물이 이집트 탈출 때에 하느님께 시중든 사실을 고찰한다. 이집트인들이 바다 속에 빠져 죽는 동안 이스라엘은 경이로운 여행길을 체험하였다. “그리하여 당신의 백성은 경이로운 여행길을 체험하는 동안 저들은 이상한 죽음을 맞게 하였다”(19,5).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고 있을 때처럼(창세 1,2) 이집트 탈출 때에 구름 기둥이 백성 위에 머무르며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탈출 14,19-20). 세상 창조 때 물에서 마른 땅에서 나왔듯(창세 1,9-10), 이집트 탈출 때 홍해 한 가운데에 마른 바닥이 생겼다(탈출 14,21-22). 또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창세 1,11)으로 바뀌었다(19,7). 마찬가지로 이집트에서 일어난 기적들과 광야 여행 역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상시시킨다. 동물들 대신 땅이 동물을 내놓으며(창세 1,24) 물(창세 1,20)이 동물을 뱉어 낸다(19,10-12). 따라서 이집트 탈출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결정적으로 해방시킬 마지막 날, 새 창조가 놀랍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이국인들을 적개심으로 대하고 미워하였기 때문에 응당한 징벌을 받았다(19,13-17). 소돔인들이 나그네들을 적개심으로 대하였기 때문에 심한 벌을 받았듯(창세 18,16-19,29), 이집트인들도 외국인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았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탈출 때 자연의 힘에 변화를 일으키시어 새로운 조화를 이루고자 하셨다(19,18-21).
따라서 세상은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달려 있으며 의인들을 위하여 봉사한다. ‘우주가 의인들 편에 서서 싸웠다.’(16,17) 이렇게 지혜서 저자는 이집트 탈출 사건을 고찰함으로써 세상이 의인들을 위하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영원한 생명을 충만히 소유하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자연 역시 생명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따라서 의인에게는 세상의 피조물이 다 이롭다(1,14). 세상의 피조물은 의인들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는 마지막 구절에서 다시 한번 독자들에게 깊이 심어 주고픈 말을 요약한다. “주님, 당신께서는 모든 일에서 당신 백성을 들어 높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으며 언제 어디에서나 그들을 도와주시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19,22). 곧, 하느님께서는 지난날 언제 어디서든 항상 당신 백성을 도와주셨다. 따라서 거룩한 땅에서 멀리 떨어진 이집트에 살고 있던 경건한 이스라엘인, 곧 의인 역시 굳건하게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항상 당신 백성 곁에 계실 것이다. 원수들은 벌을 받게 되지만 의인은 분명 하느님의 사랑과 신의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학적주제들
1. 인간의 불멸성
디아스포라에서는 유다인들의 전통사상이 본토에서보다 훨씬 자유롭게 논의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을 신앙의 회의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러한 물음 중 지혜서의 저자가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은 것은 ‘보상받지 못하고 죽는 의인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가 완전한 평화를 누리다가 심판 때에 그 삶을 보상받는다고 정리한다. 즉 구약성경에서는 다니엘서 12장과 마카오베오기 하권 7장을 제외하고 좀처럼 언급되지 않았던 ‘내세’와 ‘영혼의 불멸성’이 구약 시대 끝자락에 저술된 지혜서에서 다시금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지혜서의 영혼 불멸 사상은 그리스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영혼과 육신의 결합으로 보는 사고는 그리스 사상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적 사고로 본다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 그저 숨결과 흙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영혼의 불멸 사상은 그리스 사상을 잘 알고 있던 저자가 이러한 내용을 유다인들의 사상에 도입하면서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지혜서의 영혼불멸 사상이 플라톤의 이원론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전개된 것은 아니다. 지혜서 저자에게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단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혜서가 신학적으로 해석한 불멸성은 인간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특징을 보여 준다. 특별히 다음의 그리스어 두 단어가 의인들이 장차 받을 보상을 드러낸다. ‘불사’(不死 1,5; 3,4; 4,1; 8,17; 15,3)와 ‘불멸’(不滅 2,23; 6,19)에 대해 지혜서는 이 두 단어를 통해 인간이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곁에서 영원히 불멸하며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저자는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 불멸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은 이 불멸의 그룹에서 제외된다. 불사와 불멸은 의인들에게만 허락되는 특은인 것이다.
2. 지혜서가 말하는 지혜: 지혜의 의인화
지혜서가 제시하고 있는 지혜는 ‘영’(1,4-7)이며 하느님의 숨결이고 선하심의 형상(7,25-26의 다섯 가지 은유 참조)이며,창조자(8,6; 9,2.9)이고,지식의 원천(7,15-22; 8,4)이다. 지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이미 알고 있는 존재였고(7,23; 8,4-8; 9,9-11) 또한 구세사의 주인이다(10,1-21).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녔고(7,25-26),하느님처럼 모든 것을 통솔하며(8,1),의인들과 구체적인 삶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의인은 지혜의 뜻을 따르고(9,10) 선한 생활을 하게 되며,지혜는 의인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7,27). 인간은 바로 이 하느님의 지혜로 만들어졌으며(9,2),아무리 완전한사람도 하느님의 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9,6).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시도록 간청해야 한다(9,10).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를 주실 때에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의 의견,곧 지혜를 알게 된다(9,17)
이러한 지혜의 속성은 고대 근동 문학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의인화된 지혜와 유사하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보존하는 동시에 당대의 철학 사상을 빌려 와 지혜를 새롭게 해석하려는 의도를 찾아볼 수 있다.
지혜서에서는 지혜에 대한 의인화가 두드러지며,이는 잠언1-9장을 더욱 심화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특별히 지혜서는 ‘지혜’ 가 역사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 계시’ 임을 강조한다(9,13.17 참조). 지혜는 자신을 받아들일 만한 사람을 찾아 나서고(6,16),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의 실재로 등장한다(7,8-14).
이러한 지혜의 속성을 확인하기 위해 저자는 이집트 탈출사건을 상기하는데(10-19장),여기에서 부각되는 신학적 주제는 상선벌악이다. 곧 이집트인들은 악인들로서 벌을 받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불멸의 구원을 받는다. 여기에서 한 걸음만 내딛으면, 지혜서 저자에게 의인들을 구원한 이집트 탈출이 종말 때를 포함하는 모든 구원의 원형이 됨을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기초를 이룬 이집트 탈출 사건은 역사의 종말에까지 이루어질 주님의 모든 구원활동을 예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