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는 계속 아내와 냉전 중이지만 아가씨와 전화한 이후 김교수는 즐거워졌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기다리던 금요일 오후가 되니 김교수는 아가씨를 만날 생각에 사로잡혀 가벼운 흥분 상태가 되었다. 호텔에서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이후 처음인 것이다. 젊은 아가씨였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이란 지금부터 20년 전 까마득한 옛날이 아닌가? 그 때에 청년이었던 김교수는 가슴이 뛰고 설레는 마음으로 이제는 아내가 된 아가씨와 함께 다방에 가고 음악 감상실에 가고 고궁에도 갔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그렇게도 곱던 아내의 눈가에는 주름살이 생겼다. 나를 그렇게도 좋아했고 또 나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던 아가씨는 이제 고3 아들의 수능시험 성적 1점이 남편보다 더욱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는 아줌마가 되어 버렸다. 더욱이 냉전 중인 아내는 자기가 집에 늦게 들어가더라도 아무 말도 안할 것이 뻔하다. 언제부터인지 남편은 아내의 관심사 1순위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잠실까지 가려면 4시 반에는 나가야 하는데, 4시쯤 같은 학과의 A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저녁에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서울에서 자기가 술 한 잔 사겠다는 제안이었다. 김교수는 고맙지만 선약 때문에 다음에 만나자고 가볍게 거절하였다. 당연한 일이지, 아가씨와의 일생 일대의 약속을 어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 5분 후에 박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말인즉, A교수가 자기에게 전화를 해서 서울에서 술 한 잔 하자는데 웬만하면 같이 가자는 것이다. 선약이 있다고 말하자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차마 미스 최라고 밝히지는 못하고 친구와 저녁을 먹는 일이라고 둘러대자 몇 시에 끝나느냐고 다시 묻는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자기들도 저녁을 간단히 먹고 보스에 가려고 하는데, 식사를 끝내고 조금 늦더라도 보스로 오라는 것이다. 일이 묘하게 풀리네. ‘님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거로구나! 미스 최도 만나고 술도 마실 수 있는데, 술 값은 다른 사람이 낸다니 말이다. 김교수는 그러면 8시까지 보스로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교통이 막히는 바람에 김교수는 30분이나 늦게 뉴스타 관광호텔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고서 호텔의 위치를 파악하였기 때문에 판교-구리 고속도로까지는 빨리 왔는데, 송파IC로 빠져 나오니 그만 길이 막힌 것이다. 뉴스타 호텔은 석촌 호수의 남쪽 연안에 붙어 있었다. 뉴스타 호텔은 별로 크지 않았고, 무궁화 4개가 표시된 그저 그런 호텔이었다. 주차장에 들어가 프라이드 차 열쇠를 맡기고 나서 약간은 쑥스럽고 염려스런 기분으로 호텔로 들어섰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나? 미스 최가 기다리다가 혹시 가지나 않았을까? 커피숍은 2층에 있었다.
미스 최는 제일 안쪽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라고 물으면서 김교수는 반가운 표정을 하고 맞은 편에 앉았다. 미스 최는 코트를 입었으며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다. 대낮에 맨 정신에 다시 보니 얼굴이 작고 동글동글하며 전체적으로 귀여운 느낌을 주는 예쁜 아가씨였다. 그날 나이가 스물 넷이라고 해서 하루는 24시간 어쩌고 저쩌고 했는데, 그보다는 나이가 더 될 것 같았다. 아마 처음 말한대로 스물 일곱 정도는 될 것이다.
“오랫만이야, 미스 최. 만나서 반가워.”
“네, 저도 반가워요, 오빠.”
“그런데, 우리 뭐 좀 먹어야지.”
김교수는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호칭을 썼다. 커피숍에서는 음료 외에도 가벼운 식사를 주문할 수 있었다.
“미스 최 뭐 좋아하나? 예쁜 아가씨를 만났는데, 오늘은 내가 저녁을 사지.”
미스 최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더니 피자를 시키자고 했다.
피자를 먹으면서 두 사람은 아리랑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다른 책과 달리 아리랑이 재미있는 것은 걸죽하고 직설적인 전라도 쌍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순박한 민초들의 삶이 구수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쌍소리하면 전라도가 제일인 것 같다. 김교수는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는데, 모처럼 고향에 가면 아직도 어렸을 때 듣던 그 ‘다정했던 쌍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전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쌍소리를 잘할까? 사실 김교수도 그 점이 매우 궁금했었는데, 조정래의 소설을 읽다가 해답을 발견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태백산맥에서일 것이다. 타향 출신인 장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나온다. “여기 사람들이 쌍소리를 잘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쌀이 많이 생산되는 전라도에 사는 백성들이 오랫동안 관으로부터 수탈을 당했기 때문이다. 기껏 힘들여 쌀을 생산하면 관에서 이런 저런 명목으로 뺏어가고 정작 백성들은 굶주리게 된다. 그러니까 억울하고 살기 힘든 세상에서 쌍소리까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전라도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는 삶을 살아왔으며 쌍소리란 그러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김교수는 피자를 먹고 있는 미스 최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런데, 미스 최. 자네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나?”
“특별히 취미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가끔 은행에 갔을 때에 기다리면서 월간 잡지를 읽는 것이 전부지요.”
“아리랑은 어디에서 샀어?”
“어느 날 오빠가 생각나서 동네 책방에 가서 샀지요.”
“왜 내 생각이 났을까?”
“오빠는 특별하니까요.”
“남자는 다 똑같지 뭐가 특별해? 나도 알고 보면 엉큼한 놈이다.”
“아니에요. 오빠는 다른 손님과는 좀 다른 데가 있어요.”
“뭔데?”
“글쎄요. 저희들은 많은 손님을 만나니까 뭔가 감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구체적으로 뭐?”
“그러니까... 오빠는 제 가슴을 만지지 않았잖아요. 그저 손만 잡고 있었지.”
“그거야 모든 남자들이 술집에 와서 아가씨 젖가슴을 만지는 것은 아니겠지.”
“또 하나는... 오빠는 내가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을 때에 망설이지 않고 명함을 준 것도 다른 손님과 달랐어요.”
“다른 손님은 어떻게 하는데?”
“대부분 명함은 주지 않고 삐삐나 핸드폰 번호를 적어 주지요.”
“그거야, 내가 삐삐도 없고 핸드폰도 없으니까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