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출생. 호는 우남(雩南).
아버지 이경선(李敬善,1839-1912), 어머니 김해 김씨(1833-1896) 사이에 3남 2녀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6대 독자가 됨.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의 16대손이지만 대군이 세자 자리를 동생 충령대군(세종)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양녕대군파는 조선시대에 별로 빛을 볼 수 없었다.
(20세) 신긍우(신흥우의 형)의 권유로 아펜셀러의 배재학당(培材學堂) 입학.
(24세)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됨(독립협회 사건). 5년7개월간의 감옥 생활이 시작됨
(29세) 제물포항에서 미국으로 출국(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한 고종의 밀사 자격). 일본 고베를 거처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윤병구 목사와 합류
(32세)「조지워싱턴」대학 콜럼비아 학부를 졸업
(35세)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 은 영세중립론’은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출판부에서 출간됨.
(45세) 서재필과 함께 찰스 토마스, 존 쉬로스 미 상원의원으로 하여금 한국독립승인 안을 미 의회에 상정케 함. 상원 본회의에서 아일랜드 독립지지안과 함께 상정되었으나 34:46으로 부결됨.
(57세)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됨.
(73세) 유엔한국 임시위원단 한국 도착. 이승만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 위원단 단장 메논(인도)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식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4월 28일 이화장으로 은퇴.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
1965년 7월 19일
(90세)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 국립묘지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