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8
무력감에 빠진 위대한 사람 / 연제원 목사
오늘 우리가 읽었던 열왕기상 19장의 시대적 상황은 당시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이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부인은 이세벨이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여자입니다.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여사제였습니다. 이세벨은 아합과 결혼한 뒤 이스라엘 땅 전국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과 제사장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또한 하나님의 종들을 잡아다가 처형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 버리고 바알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온 나라가 바알과 아세라 천지가 되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선지자중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일을 한 사람입니다. 앞서 본문 18장을 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제사장 850명과 영적싸움을 벌입니다.
제단을 쌓아놓고 하늘에서 불로써 응답하는 신이 진짜 ‘신’이다 라면서 대결을 벌입니다.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은 거의 종일 기도하며 불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옵니다. 그리고 제단을 태웠습니다. 이 광경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전부 놀라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다’(18:39)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모두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산에 올라가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했더니 3년 반 동안이나 오지 않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은 엘리야에게 있어서 생애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영광을 받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선지자들중 이런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후 19장에서 만나는 엘리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완전히 침체된 모습입니다. 무력감으로 가득차 있었고 영적으로 다운되어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보았던 본문 4절을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무아래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 중 한사람이었던 엘리야는 왜 오늘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것일까요? 무엇이 이를 이렇게 만든것일까요?
오늘 본문 1절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갈멜산 사건이후 아합왕은 부인 이세벨에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합니다.
바알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부르짖어도 제단에 불이 내리지 않더니 엘리야가 기도하자마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들까지 다 핧아버렸다. 심지어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을 그 모두를 그 자리에서 칼로 죽인 것도 말했습니다. 아마 이때 아합은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놀라는 모습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 같으면 이런 말을 들으면 기가 죽게 되어있습니다. 벌벌 떨며 엘리야를 찾아 살려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아합왕도 이세벨이 기가죽어 엘리야를 찾아 살려달라고 통곡했을것으로 알았습니다. 엘리야도 그렇게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의외였습니다. 두려워하기는 커녕 오히려 화를 내며 엘리야를 잡아죽이겠다고 말합니다.
2절입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분이 풀리지 않아 내일 엘리야가 죽인 그들과 같이 똑같이 죽여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 죽여버리지 않고 내일 죽이겠다는것이 무슨이유일까요? 이세벨은 이세벧은 엘리야를 공개 처형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이세벨은 다음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엘리야를 갈기발기 찢어서 공개처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의 종 엘리야는 이 위협과 살기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3절입니다.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도망갔습니다. 얼마나 도망간 줄 아십니까? 국경을 넘어 남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까지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브엘세바라는 곳까지 가서 거기서 사환을 머물러두고 다시 광야로 혼자 들어갑니다. 왜 엘리야는 홀로 광야로 들어갔을까요? 기도하러갔습니까? 금식하러 갔습니까? 아닙니다. 4절말씀을 보십시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무슨 말씀입니까?
죽으러 광야로 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불과 조금전까지만 해도 이적과 능력의 종이었습니다.
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떨쳐 보였던 종입니다.
그런데 그가 불과 하루 만에 이처럼 고향땅을 떠나 먼곳 유다땅 브엘세바- 팔레스타인 최남단지역-까지 황급히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서 ‘죽여 주십시요’라고 간구합니다.
엘리야가 이런 무력감에 빠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대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던 이세벨이 두손들고 항복하겠다고 나올 줄 알았는데 전혀 반대로 오히려 더 강하게 나오니까 여기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기대감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사람이 무력감에 빠지는 이유중의 하나는 너무 기대감을 높이 가졌을 때, 그 기대감이 성취되지 않을 때입니다.
왜 또 엘리야가 무력감에 빠졌습니까?
탈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갈멜산에 올라가면서 육신의 에너지를 다 소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탈진됬던 것입니다.
불 내리는 기도, 비 내리는 기도를 하면서 긴장했었습니다. 응답받고 기적을 경험했지만 육체적으로 너무 지쳐있고 피곤해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상황에 놓여 있을때가 없었습니까?
이유도 없이 내 자신의 모습이 싫고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까?
만사가 귀찮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서 며칠이고 쉬고 싶지는 않습니까?
사람 만나는 것도 싫고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을 때는 없습니까?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싫고 내던져 버리고 싶을 때는 없습니까?
별일도 없었는데 사는 것이 귀찮고 아무런 의욕도 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기도하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을 찾고 싶지도 않을 때는 없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이런 무력감은 특별한 사람만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겪는 것입니다.
심지어 능력의 종이요 위대한 하나님의 종 엘리야도 무력감 때문에 죽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사람이라면 살면서 어느 누구나 예외없이 이런 일들을 몇 번씩 다 겪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기를 기도했던 엘리야!
무력감에 빠져 죽기를 기도했던 엘리야는 어떻게 이 무력감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작정기도했습니까?
40일 금식했나요?
아니면 기도원에 올라가 집회에 참석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까?
본문 5,6,7절 말씀을 보십시다.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무력감에 빠져 로뎀나무아래에서 죽기를 기도하고 누워 자던 엘리야에게 누가 다가왔습니까?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력감과 탈진에 빠져있는 엘리야에게 다가오셔서 육신의 필요를 먼저 채워주십니다.
천사를 보내 어루만지며 일어나서 먹으라 하고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준비해주셨습니다.
광야에서 고독을 경험했던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어루 만져주셨습니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먹을것도 준비 못했던 엘리야에게 물과 떡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탈진했으면 먹고 또 눕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천사를 다시 보내셔서 어루만지시면서 먹을것을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굶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외로운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옆에서 말동무하며 있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먹을것을 주셨습니다.
외롭게 지쳐있는 그에게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9절을 보면 엘리야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있느냐?’
13절에도 물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있느냐?’
그때 엘리야가 여기 있게된 배경을 쭉 설명합니다.
10절 -“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4절-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들어주시기만 하신것이 아니라 엘리야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 감정을 다 쏟아놓게 하십니다.
본문 9, 14절에서 엘리야는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나쁜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다 쏟아냅니다. 하나님보다 엘리야가 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씩 쏟아내면서 엘리야의 심령이 차츰 치료되고 회복됩니다.
9절에서는 엘리야가 굴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마음을 토해놓고는 하나님이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 서라 하니까 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마음을 다시한번 토해 내놓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명을 주시니까 순종하여 나갑니다. 다시 선지자의 길을 갑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름다운 덕소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자가 되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때론 삶의 무력감 때문에 의욕을 놓고 있을때 주님은 찾아와 주십니다.
저는 우리 가족들이 찾아와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삶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빗나간 사고 잘못된 사고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그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느껴지 않습니까?
무력감에 빠져있던 엘리야에게 찾아오셨던 주님이 오늘 아름다운덕소교회 여러분 마음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일어나야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낙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무력감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두려움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염려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걱정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에게 다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떡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물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일어나십시다.
다시 시작하십시다.
절망의 자리에서
실패의 자리에서
무력감에서 다시 일어나십시다.
다 같이 일어나십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십시다.
그리고 찬양하십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620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