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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 11 그의 뜻대로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
은사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기원을 가진다.
6절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발생(發生) 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비교하여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은 하나님의 특별계시들을 전달하고 확증하기 위해 주신 것이었다. 그것들은 사도 시대에 신약성경이 완성된 후 거두어졌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거두신 것은 신약성경의 완성으로 그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설치된 비계들이 건물이 완성된 후 철거되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초자연적 은사들 외에 여러 가지 자연적 은사들도 나누어주심으로 교회에게 유익을 주셨다. 로마서 12: 6-8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 구제하는 은사, 관리하는 은사, 긍휼을 베푸는 은사 등을 언급하였다. 우리는 거기에 찬양의 은사도 포함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다 한 성령께서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돌아보신다. 영혼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다. 성령께서는 개인을 중생(重生)시키시고 점점 더 거룩하게 하시고 마침내 교회 전체가 온전케 되게 하신다.
성령의 사역(使役)
성령께서는 성부, 성자 하나님과 같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할 때에 삼위일체 신관을 가지고 해야만 바르게 할 수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창조와 섭리 사역을 주체적으로 하셨지만 성자와 성령 하나님도 창조와 섭리 사역에 동참하셨으며, 성자 하나님 그리스도께서 구원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나가실 때에도 성부와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의 사역에 동참하셨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사역에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고, 성령 시대에 와서는 주체적인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다.
성령 시대라 함은 성부 시대와 성자 시대와 구별하는 것인데, 오순절 성령강림절 이후부터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를 말한다. 그래서 성부 시대와 성자 시대에 활동하신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보조적 사역"이라 부르고, 성령 시대의 주도적이고 본질적인 사역을 "주체적인 사역"이라고 한다.
(1) 성령 하나님의 보조적인 사역
① 성부 하나님과 함께 창조와 섭리 사역에 동참하셨다.
* 창 1: 2-3 –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 창 2: 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 욥 26: 13 - 그의 입김으로 하늘을 맑게 하시고 손으로 날렵한 뱀을 무찌르시나니
* 욥 33: 4 -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 시 33: 6-7 – 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7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 시 104: 29-30 – 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성령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셔서 천지만물 창조와 인간 창조에 성부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역을 보조하셨고, 섭리 사역에도 항상 함께 하셔서 지으신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사랑으로 돌보셨다. 그러나 밖으로 주체적으로 나타나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성령시대에 와서는 이러한 사역을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하시게 되었다.
② 성자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 사역에 동참하셨다.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을 도우셨고 세례를 받으실 때 임재하셨으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함께 하셨으며 말씀 선포와 기사와 이적을 행할 때에 함께 하셨다.
특별히 성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성령께서도 성부와 함께 고통을 당하시며 성자의 아픔에 동참하셨다. 성자는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고 성부와 성령께서는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이상과 같이 보혜사 성령께서는 성부의 사역과 성자의 사역에 동참하여서 창조와 섭리와 구원사역의 시작과 모든 과정을 완전히 아시고, 그 일을 완성하시는 것을 본질적인 사역으로 담당하셨다.
(2) 성령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역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성령 하나님 시대의 개막식이다.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성부와 성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섭리와 구원사역을 완성키 위해 오셨다. 성령께서는 재창조의 활동을 계속하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때까지 일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2천년 전에 이루어 놓으신 구속사역을 현재화하셔서, 지금 우리 앞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도록 하시는 믿음을 일으키는 일을 하신다.
① 인류 구원을 위한 사역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인간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일방적이며 주권적으로 부르시고, 화해시키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신다.
② 성도들을 위한 사역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성도들이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응답하게 하신다.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고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하시며, 사랑과 소망이 넘치게 하시고 기도와 전도와 봉사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③ 교회 안에서 활동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창설되었고, 부흥, 성장하였으며, 또한 성령께서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를 튼튼하게 하시고,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하도록 새롭게 하신다.
④ 우주 만물과 인류 역사 가운데서의 활동
피조물의 탄식을 들으시고 고통 당하는 인류와 함께 신음하시며, 만물을 새롭게 하실 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하나님의 뜻대로 새롭게 하시는 역사 변천의 원동력이 되신다. 지금은 성령 시대이며,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때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온 인류가 동참해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이 주신 은사 (고전 12: 1-11) : 박조준 목사
본문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χαρισματα)와 ‘은혜’(χἀρις)는 다릅니다. 물론 은사도, 은혜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 심령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은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곳에도 은사가 있을 수 있고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떠나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은사는 사람에게 주어진 신령한 자비이지만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은 은사는 풍성했지만 질서가 없기 때문에, 혼란한 가운데서 잘못된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은사에 대해서 바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본문 1절에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이전에 있던 상태를 말했습니다. 2절에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전의 상태를 이해한다면 모든 영적인 은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이전의 상태는 한마디로 말해서 ‘이방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선택된 유대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세상의 다른 민족과는 구별됐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할 때는 유대 민족만 예배에 참석했고 이방인들은 성전 뜰에서 안으로 들어올 수도 없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1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도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다 이와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왜 이것을 강조합니까? 예수를 믿기 전에는 사실 하나님과 그의 축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던 처지였었는데 이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신령한 축복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어 성도가 되기 전에 어떤 일을 행했습니까?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했습니다. 헛된 상상력과 무지를 악용하는 이방 선지자들의 영향으로 큰 우상에 빠져 아무것도 아닌 나무나 돌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상을 섬기며 경배했습니다.
오늘 이처럼 과학 문명이 발전한 세대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미신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머리로서는 그와 같은 미신 행위를 경멸하면서도 행위로는 지지하는 것입니다. 비행기 회사에서 비행기를 사면 출항하기 전에 돼지 머리를 놓고 절을 합니다. 최첨단의 과학을 연구한다고,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겨루면서 남극에 과학 기지를 건설하고도 여전히 돼지 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야 하는 세상입니다. 어딘가 잘못 되었어도 상당히 잘못된 데가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그 당시 이방인들은 예수를 사기꾼으로 저주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영으로 기사를 행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며 이방인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저주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당신은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물으면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신앙 고백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그래서 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했습니다.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다”고 했습니다. 은사와 성령, 직임과 주님, 역사와 하나님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든 영적인 축복과 유산의 원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는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천은 하나입니다.
왜 바울이 여기서 이런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까? 교회의 본질은 통일을 강조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건강한 몸의 특징은 몸의 각 부분이 전체를 위해 각기 제 구실을 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 통일이란 말은 획일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직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 성령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교인 각자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 특별한 ‘은사’가 어디서 왔어요?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은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의 신념이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러면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특별하고 우수한 것만 은사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의 손으로, 입으로, 발로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도 내가 받은 은사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노래 잘 하는 사람은 성가대로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가르치기를 잘 하는 사람은 교회 학교 교사로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전에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갔더니 버스가 많이 있는데 운전 기사를 따로 둔 것이 아니고 교인 중에 버스를 운전할 수 있는 분이 손수 운전해서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데 봉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대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또 해야 됩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 여성도님들께서는 맹인들을 돕기 위해서 점자를 배워 교회에서 발행하는 갈보리지를 찍어 맹인들이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는데 그 열의가 대단합니다. 이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헛되게 묵혀 두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8절 이하를 보세요.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이나 지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 지식입니다. 이 두 가지,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그 심오한 것을 아는 지혜와 세계와 교회에 있어서의 일상 생활과 활동 가운데서 실천할 수 있는 지식은 모두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믿음인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바울이 흔히 말하고 있는 신앙 이상의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 있는 신앙 혹은 영적인 것을 현실로 나타나게 하는 능력이라고 어떤 이는 해석했습니다. 다른 말로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떤 사실을 인정하는 지적인 확신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정열적인 신념을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 전부를 내던져도 후회가 없는 그런 신념입니다. 의지를 강철 같이 굳게 하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을 말합니다.
여기 말씀의 순서를 보십시오. 의미가 깊습니다. 지혜와 지식, 그리고 그 다음이 뜨거운 실천력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맑고 차갑고, 가슴과 마음은 뜨거울 때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상을 행위로 변화시키는 신앙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유가 일상적인 경험이었던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병에 걸리면 의사에게 가기보다는 랍비에게 가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병이 낫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헬라인의 경우에는 애스쿨라피어스가 치료의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신의 신전에 가서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며칠 밤을 새웠고 실제로 병 고침을 받는 예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한 신전의 폐허에서 병 고침을 받는 기념으로 봉헌한 비석이나 명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에피다우러스 신전에는 하나의 비석이 서 있는데 거기에는 알케다스라는 사람이 “눈이 멀었는데 꿈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와서 손가락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가 맨 처음으로 본 것은 신전에 서 있는 나무들이었습니다. 새벽에 그는 고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로마 신전에 있는 어느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눈먼 군인 바레리우스 아펠에게 신은 흰 수탉의 피에 꿀을 섞어서 약을 만들어 가지고 사흘 동안 이것을 눈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했더니 시력이 회복되어 돌아와서 신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병이 고침을 받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병 고치는 은사가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울이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 14절에 보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했습니다. 9세기에 이르기까지 교회에는 성유식(聖油式)이란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병의 치료를 위한 성례전이었습니다. 그러나 9세기에 이르러 그것이 종유식(終油式), 다시 말하면 죽음을 준비하도록 하는 성례전으로 변했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입니다.
교회가 병 고치는 은사를 완전히 잃어버린 때는 한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이 병 고치는 은사를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요, 바로 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억할 것은 이 은사는 어느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은 종이라고 굉장한 선전을 하는데, 어떤 은사든지 받은 것을 선전하는 데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은사든지 받았으면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할 것입니다.
교회는 너무 오랫동안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생각했으며 육체는 무시하고 영혼에 대해서만 책임져 왔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다시 한번 하나의 전체로서 다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에 있어서의 커다란 인간 재발견이라고 생각합니다. 머지 않아 의사와 목사가 다시금 손을 잡고 같이 일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병이 발생하는 원인의 반 이상이 마음에서부터인 것을 의사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능력 행하는 은사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악령을 추방하는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많은 병이, 때로는 모든 병이 특히 정신병 계통의 것은 모두 악령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 악령을 쫓아내는 일이 교회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한 악령이 실제로 존재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여하튼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은 악령이 실재하는 것으로 확신했고, 교회는 그러한 사람을 돕는 것은 정말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병을 마귀와 연관시켜서 감기에 걸려도 바이러스균에 의한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고 감기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데 거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마음에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번민하며 고통하는 사람을 도와주어 이런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 평화와 담력, 만족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말은 오히려 설교의 은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고 바클레이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언이라고 말하면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지 예언은 ‘예고(foretelling)’한다기보다는 ‘앞장서 말한다(forthtelling)’는 편이 훨씬 사실에 가깝습니다. 예언자란 하나님과 가까이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가령,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못하다고 경고하며 견책합니다. 혹 어떤 분은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만 교회 강단에서 정치에 대한 비판을 가끔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것인데 사회에서는 교회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사업을 하시거나 장사를 하시는 분들은 사업에 지장을 줄 것 같아서, 구체적으로 마음에 안 들게 보이면 세무 사찰을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지요. 당장에 위치가 위협을 느끼는데요. 그래서 투표 때 보면 마음의 판단이 서 있더라도 말로는 못하고 현실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대적으로 예언자적 사명을 다 할 수 있고 또 해야 될 사람이 교회의 성직자입니다. 그런데 이 성직자가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다면 짖지 못하는 개와 다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목사가 몇만 명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히려 생활에 구애받지 않고 단순한 마음으로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여 외치고 부르짖는 젊은 학생들이 낫지요. 교회가 모든 면에서 개인이나 사회에 대하여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하나의 사교장으로, 혹은 기복을 추구하는 무리의 집합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을 충고하고 지도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영을 분별하는 은사입니다. 가짜와 진짜가 뒤섞이고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을 가리기가 어려운 때는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이며, 어느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고, 어느 것이 마귀에게서 나온 것인지 분별하는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 또한 교회도 분간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때 우리가 지켜야 할 바른 자세는 남을 비난하기 전에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 중에 마지막으로 방언을 말하는 은사와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이 방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만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방언이 오히려 덕을 세우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다시 생각을 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가령, 그 당시 예배를 드리는 도중인데 누군가가 황홀한 지경에 빠져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합니다.
방언은 많은 사람이 바라는 은사 중에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은 하나님의 성령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중에게는 그 방언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들려졌습니다. 때로는 방언을 말한 사람 자신이 통역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은사를 받은 이 중에서 방언을 통역하는 다른 사람이 있어야 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방언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위험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교회가 생생하게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예기치 않았던 일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교회 생활이 강조되고, 고조되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그저 안일하게 아무 일없이 평탄하게 지낸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계속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생생하고도 힘찬 성령의 활동으로 알았습니다. 성령은 각자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할 각양의 은사를 나눠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에게 덕이 되고 유익이 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12장 12~31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이 세상에 육신의 형체로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으실 때는 자기를 위해 그 일을 대신 해 줄 사람을 찾아내셔야 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할 때는 그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병자를 고쳐 주고자 할 때는 그 일을 맡아 볼 의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자 할 때에는 누군가 말해 줄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일을 해야 할 손이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심부름하기 위해 뛰는 발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말하는 목소리입니다. 우리의 손이 아니면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할 손이 없으며, 우리의 발이 아니면 주의 길로 사람을 이끌 발이 없으며, 우리의 목소리가 아니면 주님의 죽으심을 전파할 목소리가 없으며, 우리가 도움이 되어 주지 않으면 사람을 주님께 이끌 도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서로의 필요성을 아는 것이 우선이며, 서로가 존경해야 하며, 서로가 동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은사를 받았든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최선을 다해 봉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