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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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2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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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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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외 4편
남금희
당신을 생각하는 나의 하루는
오직 당신을 기뻐하는 일
어마어마한 그 위엄 앞에
나는 초라해도 겁날 것 없고
아빠를 부르며 달려가는 어린아이같이
열병식에 나섭니다
첫 울음 이후 알게 된
황홀한 사랑의 약속
당신의 그늘은 공평합니다
그 눈빛으로 알알이 새겨준 비밀
유황과 몰약을 준비하면서
당신을 맞이하는
아프고 행복한 먼 훗날을 바라봅니다
가랑비 흩으시는 봄날도
폭풍과 해일을 다스리는 손길도
오직 당신으로 충만합니다
바람의 길
― 제주 통신
이쯤에서 돌아서자
너무 다그치지 말고
너무 많이 이해하지도 말고
제주 돌담에 기대
너를 생각하는 시간
밭담과 산담과 갯담들
나지막하게 어우러져
바람의 길을 내는구나
몸 굴리면 슬픔이 부대끼는 소리
우리 그늘에는 달빛처럼 이끼가 끼어도 좋겠다
잡초들 삐죽이 고개 내미는 건
파도가 뱉어낸 물거품 탓일 게다
너와 나, 위태한 경계에도
바람의 갈기 잠재우는
설핏한 돌담 한 길(丈) 놓아두고 싶다
청동 말을 닦으며
거실 선반에서 오래된 청동 말 장식품이 눈에 띈다
목과 발굽 이음새 부분이 퍼렇게 녹슨 것
낡은 칫솔로 훔쳐 낸다
가야할 길이 험해서
아들아, 네 발목에도 녹슨 꿈이 고여 있구나
엄마가 말이라면
강변 버드나무 아래 지친 너를 누이고
네 발목을 핥아 주며
세상 모든 무명용사의 이름을 들려주고 싶다
그들도 너처럼 무수히 아팠으니
한달음에 성큼 바다를 건너는 비법은 없단다
크고 작은 섬들을 걷고 뛰고 헤엄치면서
네 몸 불 밝혀 새벽을 깨우면
그 바다 끝에는 빛의 오로라
앞서간 영혼의 군무를 볼 수 있을 테니
한 걸음 이후에 또 한 걸음
아들아, 안장을 갖추고
꺾인 무릎을 세워야겠구나
엄마는 네 뒷모습을 새기는 청동 말이 되고 싶다
대숲에 버리다
너를 안고 돌아온 날부터 잠을 잘 수가 없다
누가 보면 들킬까봐 몸을 웅크리며
비가 오면 우산 속에서도 멍하니 너를 생각한다
나는 자꾸만 사나워져서 대나무 숲으로 간다
너를 외쳐 마구 떼어낸다
후려친다
질린다
메아리처럼 달라붙어도
네가 없으면 내가 무너진다 해도
한 번 꽃피우면 스러지고 마는
대숲에 기대
너를 안고 떠다닌 기억
우지끈 꺾는다
죽창 몇 개 벼리는 사이
멀리, 호랑지빠귀들 날아가고 있다
가출
제 팔, 제가 흔들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과분한 일이냐
참새들이 전깃줄에 나란히 앉은 것처럼
병실 복도 끝 티비 앞에 휠체어들 쭈르르 도열해 있다
노인들 고개는 티비 쪽으로 뻗어 있고
헐렁한 환자복 사이
세워진 다리가 막대기 같다
닫힌 공기를 뚫고 누군가가 나타나면
고개들 일제히 그쪽을 향한다
숨어살다 들킨 사람처럼
낯선 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뜨악하다
처음 가출해 한 곳에 모인 사람들
잠시 그러나 아직
지평선까지 가야 하는 밤은 얼마나 더디게 오는 것이냐
깃을 털어 새처럼 가벼워질 아침은 또 얼마나 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