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안락사(2)
쉐퍼는 안락사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인간 생명의 가치보다 효율성을 더 중시하는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임을 지적한다. 노인들, 병약한 자들, 지진아들, 지적장애 자와 같은 자들이 젊고 건강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의료혜택을 가로채고 있다는 인식이 안락사를 지지하는 운동의 배경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그 가장 비근한 예가 나치 정권의 안락사 프로그램이었다.
뉴렘베르크 전범 재판에 관여했던 레오 알렉산더(Leo Alexander) 박사의 보고서에 의하면 나치독일의 의학계는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없고 비용만 축내는 만성질환자들, 사회적으로 소란을 일으키고 인종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고, 인체를 군사 의학적 목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기획에 협조했는데 이 같은 독일의학계의 행동을 뒷받침한 것은 살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 생명이 존재한다는 인간관이었다. 장애인들과 정신병자들의 치료에 들어갈 돈으로 새로 결혼할 부부에게 투자한다면 많은 집과 결혼자금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비방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게재된 일도 있었다.
객관적인 도덕적 기준이 상실된 시대에 아무리 윤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안락사를 시행할 것인가의 여부를 신중하게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위원회의 회원들이 모두 효율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에 물들어 있는 이상 별다른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 과정에서 죽어가는 환자들 자신은 통상적으로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을 원할 뿐, 안락사를 요구하는 일이 거의 드물다는 사실도 무시되어 버린다. 의사들은 환자를 죽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안락사 지지운동에 매달리기도 한다.
~ 이상원, 《프란시스 쉐퍼의 기독교 변증》, p.16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