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태일의친구들 2025 정기총회 축사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은, 어두운 대구 지역의 밝은 빛이고, 답답한 대구 지역의 시원한 바람입니다. 작년에는 전태일 열사의 옛집을 수리하여 개관하기도 했습니다. 이 옛집은 전태일 열사가 “내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한 열여섯 살 때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며 살던 곳입니다. 이런 훌륭한 단체의 2025년도 정기총회에서 축사를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나 한편 제가 축사할 자격이 되는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변명 거리를 찾아, 제가 전태일 열사와 약간의 인연이라도 있는지 더듬어 보았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1948년생입니다. 학교에 계속 다녔다면 저와 같은 학년입니다. 작년에 수리한 옛집은 당시 제가 살던 곳과 멀지 않습니다. 수녀원을 가운데 두고 반대쪽입니다. 또 열사가 1970년 11월 13일 자기 몸에 불을 붙이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던 평화시장은 제가 4학년 재학 중이던 대학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전태일 열사의 거룩한 생애를 세상에 알린 조영래 변호사와의 인연도 있습니다. 노동이든 환경이든 말도 꺼내지 못했던 험악한 분위기의 박정희 독재 시절에, 조영래 변호사는 민청학련 사건에 휘말려 당국에 쫓기면서도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1983년에 <전태일 평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일본에서 먼저 출간하고 이어 한국에서도 출간하였습니다. 인권 변호사 조영래는 저의 대학 2년 선배입니다. 제가 대학에 입학한 1967년, 박정희 정권이 6.8총선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는데, 3학년이던 조영래 선배가 학교 강당에 비상 소집된 학생들 앞에서 부정선거를 강력히 규탄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제가 전태일 열사, 조영래 변호사와의 인연을 억지로 찾아서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이런 분들이 사회와 인류를 위해 자신을 바칠 때 저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부끄럽습니다. 각자 자기 앞길 닦기에 급급한 세상에서, 헌신과 용기는 쉽지 않은 덕목입니다. 그러나 헌신과 용기는 전파력이 있습니다. 이에 관한 감동적인 문구 하나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제 전공 분야인 토지공개념의 선구자인 19세기 미국의 토지개혁가 헨리 조지의 대표 저서 <진보와 빈곤>의 결론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같은 별을 본다는 사실을 알 때 더 확신을 가지고 별을 본다.”
[W]e are surer that we see a star when we know that others also see it.
전태일, 조영래 같은 분 덕에 그리고 송필경 이사장님을 비롯한 임원진과 후원자 여러분 덕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같은 별을 보게 되면,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더 나은 세상이 되어 갈 것으로 믿습니다. 대구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 운동인 2.28의 도시인데도, 지금은 오히려 많은 국민이 대구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구 출신인 전태일, 조영래 그리고 ‘사단법인 전태일의친구들’의 헌신과 용기가 전파되고 증폭되어 우리 지역도 변화하기를 기대합니다.
끝으로, 탄핵 시국과 관련해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최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면서 헌법재판소 재판관 두 명을 임명했습니다. 그중에 정계선 재판관이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산화하기 1년 전인 1969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충주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예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을 읽고는 진로 변경을 결심했고, 재수를 해서 1988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서 수석 합격하여 지금은 윤석열 탄핵소추 재판을 맡고 있습니다. 전태일 열사, 조영래 변호사 그리고 여기 계신 모든 분과 같은 별을 보고 있는 분이므로 정의로운 결정을 내려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 2월 21일 김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