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스가 욥을 책망하는 내용이 5장에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논리는 죄가 많이 있기 때문에 고난도 많다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칙을 고난에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상황에서는 잘못된 적용임을 우리에게 욥기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 공식 하나로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욥의 죄는 논단함
1절에 욥에게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욥이 지금 부르짖고 있는 것은 의미가 없는 짓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응답할 자’가 없다는 말은 중재할 수 있는 존재도 없다고 합니다. 후에 욥은 하나님께 중재자를 기대합니다.(9장 33절. 16장 19-21절)
2절에는 욥에게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3장에 욥이 탄식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가지고 욥이 분노를 품고 있고 시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분노를 품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죽이는 죄악을 늘어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3절에 미련한 자의 집안에 저주가 임한다고 말합니다. 3절을 봅시다.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아주 두려운 얘기를 합니다. 자신이 저주를 했더니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4절에 자식들이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 자식들을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욥의 10명의 자녀가 죽었는데 그 자녀들에 대하여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의로운 자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35편 25절에 의인의 자녀들은 걸식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잠언 13장 22절에 죄인의 재물은 쌓아두어도 그 자녀들이 누리지 못하고 의인들이 누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욥의 자녀들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5절에는 자신이 저주를 하니까 추수한 것, 재산도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것 어디에서 많이 듣던 얘기입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있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이런 저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미련한 짓을 욥이 지금 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많은 죄”를 지었다고 은근히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재난 티끌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어떤 물리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데에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7절에 일반적인 법칙을 말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다’고 합니다.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합니다. ‘불꽃’은 고대에 사람은 괴롭히는 악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욥은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그런 주장은 그쳐야 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법칙으로 보더라도 욥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욥을 무엇인가 고난을 받을만한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으로, 미련한 짓을 행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욥을 저주 받은 사람으로 몰고 가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욥을 논단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정당화시키면서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는 너무 쉽게 판단을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세상에서 죄인 취급을 당하고 병이 들고 귀신이 들렸던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다 끄집어내면서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향해서 나도 너는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몰라서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보다도 더 정확하게 죄를 아십니다. 우리 자신보다 더 깊이 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를 끄집어 내놓고 사람들 앞에서 논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바스는 참된 사랑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바스의 해결책
엘리바스는 욥에게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8절을 봅시다.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이 얘기는 고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말입니다. 욥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31장 35절에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하여 탄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이 그 말만 가지고는 틀려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욥에게 이 말을 하는 뜻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을 찾으라는 뜻입니까? 이 말의 배경에는 욥이 하나님께 심각한 죄를 짓고 있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 그 죄를 회개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9-16절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을 생각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죄를 지었는지 깨달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9-10절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심을 얘기합니다. 10절에 하나님은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는 분이라고 하죠. 비는 풍성한 수확을 주는 것으로 하나님의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명기 28장 12절에는 하나님께 순종할 때 이 비를 주심을 말씀하십니다. 11-15절은 사람들의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심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16절에 악행은 스스로 입을 다문다고 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연과 사람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죄악에 대해서 내리신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죄 때문에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의 크기가 곧 고난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얘기입니다. 번성의 크기는 곧 의의 크기이고요. 이런 사람의 논리에는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것이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시각이 굉장히 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맞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욥의 고난에 대하여 잘못 적용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에 대한 해석
엘리바스는 욥이 당하고 있는 상황을 해석해서 발합니다. 17절입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라.”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라고 충고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면 18절에 하나님께서 치료해주시고(신 32장 39절) 예전처럼 형통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18-26절) 20절에 기근과 전쟁 때에도 지켜주시고, 21절에 언어의 폭력과 멸망에서도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그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면 징계를 거두시고 번영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27절에 자신들이 연구한 바가 이와 같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이 내리고 있는 해결책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숨어 있는 큰 죄를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은 죄 때문에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왔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신다고 말합니다. 24절에 평안함도 주고, 25절에 자손도 많아지도록 해주신다고 합니다. 자손이 많아진다는 말에는 욥이 자녀들을 잃은 것은 욥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욥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말이 됩니다. 아주 잔인한 말을 욥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서 바르게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재앙은 죄가 원인이라는 생각으로 이런 잔인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관점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의미로 고난을 주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11절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자녀답게 하기 위하여, 거룩하게 하는 유익을 주기 위하여 징계를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의의 평강한 열매도 맺는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이 유익이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징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징계는 엘리바스가 얘기하고 있는 그런 물질적인 차원의 유익이 아니고 영적인 성숙을 위한 유익입니다.
그러나 욥의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닙니다. 물론 욥의 신앙이 더욱 성숙하도록 하시는 뜻도 있음을 뒤에 가서 볼 수 있지만 큰 죄에 대한 징계의 뜻으로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은 의롭기 때문에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을 말씀하십니다. 물론 죄가 있어서 맞는 매도 있지만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거짓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24절에 우리의 ‘나음’을 위한 고난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받는 고난도 있다고 하십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입니다.(4장 16절) 이런 고난은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하여 어떤 시각, 관점을 갖느냐? 고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것을 보면 그 사람의 지혜,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 그 사람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건은 한 사건인데, 그 사건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보느냐? 어떤 생각과 어떤 방향으로 보느냐? 이것은 그 사람의 신앙의 성숙도를 드러냅니다. 그 사람의 지혜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들이 해야 할 작업입니다.
자신의 경험, 자신의 좁은 식견을 가지고 함부로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언뜻 보면 엘리바스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은 이런 엘리바스와 같은 말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넓은 시각으로 보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관점으로 보면 욥의 고난은 엘리바스의 해석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좁은 소견, 생각, 지혜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지혜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남수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