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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불행한 미래
예레미야 22장 20-30절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을 일컬어서 ‘습관(習慣)’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는 습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주 좋은 습관입니다. 그렇기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대해 불순종을 반복하면 그것도 불순종의 습관이 됩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의 운명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요시야의 아들 살룸(여호아하스)은 애굽에 포로로 끌려가 거기서 죽을 것이며, 탐심을 품고 압제와 강포를 일삼던 여호야김도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져 짐승같이 매장될 것입니다. 다윗의 왕위를 계승한 유다의 왕들이 포로 신세로 이방 땅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예루살렘의 운명(20-23)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는 심판 밖에 없습니다. 불순종이 습관이 된 예루살렘은 바벨론으로 잡혀가 수치와 욕을 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통치자인 고니야(여호야긴) 왕 역시 불행한 미래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요시야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20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21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2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23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20-23)
과거에 유다 왕 여호야하스(살룸)이 애굽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다윗의 위를 계승한 유다 왕들이 폴 신세로 생을 마감할 것이라고 선지자는 예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메시지 중간에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가혹한 심판을 받아서 예루살렘을 향한 통곡이 있을 것을 예언합니다.
⑴ 탄식(20)
하나님께서 청자인 예루살렘에게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주변에 높은 산들인 레바론(북쪽)과 바산(동쪽)과 아바림(남쪽)에 올라가서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높여 탄식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하게 된 이유가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은 우상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정치·군사적 동맹국들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에게 협조를 맹약했던 주변 나라들이 바벨론에 모두 멸망하고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의 절망적 처지에 놓입니다. 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떨어졌지만, 어디에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습니다.
‘레바논’은 팔레스틴 북쪽 산악 지대로 그 정상은 해발 3000미터가 넘었습니다. 요단 동편의 아르묵 강 상부와 중부의 해발 500-600미터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 초지의 비옥함(아모스 4:1; 예레미야 50:19)과 상수리나무(이사야 2:13)로 유명했습니다. ‘아바림’은 사해와 요단 계곡을 굽어보고 있는 모압 북쪽의 산악지대를 가리킵니다.
⑵ 책망(21)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해 어조(語調)가 탄식에서 책망으로 바뀌면서 재앙이 닥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예루살렘에 닥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안할 때에’ 곧 아직 위기가 닥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셨지만, 예루살렘은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길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존하기보다는 현실에 속하는 정치·군사적 동맹을 더 신뢰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불순종은 예레미야 시대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려서부터’, 곧 하나님과 처음 관계를 맺은 직후부터 완강하게 그분 음성에 귀를 닫습니다(2:2; 3:24). 한마디로 예루살렘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불순종과 반역으로 점철된 길이었습니다(에스겔 16장; 23장).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이 잘못된 습관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불복종이 초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⑶ 위협(22)
하나님께서는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 때문에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고 위협하셨습니다. 사나운 바람이 짚과 먼지를 단번에 날려버리듯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판의 바람이 예루살렘의 목자들인 지도자들을 모두 쫓아낼 적입니다.‘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켜질 것이요’는 문자적으로 옮기면 ‘네 목자들을 모두 바람이 (목장으로 데려가) 먹이리라’입니다. 목자가 양 떼를 풀밭으로 내몰듯이 (심판의) 바람이 (궁궐에서 사치를 즐기며 권력을 휘두르던) 목자들을 (삶에 적대적인 거친) 들판으로 내몹니다. ‘네 목자들’은 왕과 통치 계급에 속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너를 사랑하는 자들’도 문맥에 의하면, 20절의 경우와 달리, 유다의 동맹국들보다는 예루살렘의 지배계급과 귀족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모두 심판의 바람에 내쫓겨 적들에 사로잡혀 유배를 떠납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은 자신이 저지른 온갖 죄악으로 인해 땅바닥에 떨어져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외간 남자에게 강제로 능욕 당하는 여자에 비유됩니다. 불순종의 필연적 결과로 예루살렘은 바벨론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당합니다.
⑷ 탄식(23)
하나님께서는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이렇게 탄식하십니다. 20절에서 예루살렘에게 높은 곳에 올라 큰 소리로 탄식하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께서 23절에서는 예루살렘이 겪게 될 고난을 탄식하십니다. 전자의 경우와 달리 여기의 레바논은 예루살렘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레바논에 살면서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건축한 집에 사는 자들로, 좁게는 왕궁에 사는 자들을 가리키지만 왕궁이 도성을 대표하기에 예루살렘 전체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임할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이라고 재앙의 극심함을 보여주는 비유적 표상입니다. 해산의 고통은 성경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을 가리킬 때 사용한 말입니다. 진통 중인 여자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은 파국적인 재난에 직면해 신음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방어도 못한 채 멸망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릇된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하신 후에 심판하십니다. 유다 백성들도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전에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들어야 할 하나님의 경고가 있다면 그 경고를 듣고 순종해 가야 합니다.
고니야(여호야긴)에 대한 말씀(24-30)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특별한 사이라 할지라도 버림받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헛된 신학을 만든 신학 안에 갇혀서 헛된 소망을 같지 말고, 하나님을 바르게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음 세상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5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6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27그들이 그들의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28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9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3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24-30)
이제 선지자는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에 대해서도 예언합니다. 이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멸망과 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⑴ 여호와의 심판선언(24-27)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5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네가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인장 반지’의 비유를 통해 여호와께서는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의 유배가 반듯이 필연임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야긴이 하나님 오른손에 낀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그를 손가락에서 빼내어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주실 것입니다(24-25).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니야에게 내린 재앙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보여줍니다. 왕을 버리시기로 한 하나님의 결정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습니다. ‘인장’은 소유주의 현존과 문서의 권위를 확인하고 보장해 주는 도장입니다.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할 소중한 물건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인장은 목걸이처럼 줄 매달아 목에 걸거나(창세기 38:18) 팔찌처럼 손목에 두르거나(아가서 8:6), 또는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기도 했습니다. 본문은 후자의 인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는 여호와와 고니야의 특별한 개인적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13:11), 인장이 소유주의 가장 가깝고도 가장 귀한 사적 용품인 것처럼 고니야도 전적으로 여호와께 속한, 그리고 그분의 권위를 대표하는 유다의 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독점적이고도 남다른 사적 관계가 구원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다윗 왕조를 특별히 선택하셨지만, 그 선택이 다윗 왕조에 주어진 영원한 면죄부는 아닙니다. 바벨론의 예루살렘 고니야의 항복과 유배는 불순종한 다윗 왕조를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에 속합니다. 주년 598∼7년 겨울에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1월 중순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3월 중순에 유다 왕 고니야는 저항을 포기하고 성문을 일고 항복합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열고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는 것으로 고니 야의 고난이 끝나는 것은 아니 있습니다. 항복은 재앙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고니야와 그의 어머니 하무달은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비극적 삶을 마감해야 합니다(26,27). 열왕기하 24:12-16에 의하면 고니아와 그의 어머니와 신하들을 포함해 적어도 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52:28). 유배민은 가나아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히 기다리겠지만,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합니다(29:14). 조상들과 함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방 땅에서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나안 땅이 아닌 이방 땅에서의 죽음은 그 뿌리로부터 완전히 잘려지는 저주받은 죽음입니다(창세기 49:29; 50:25). 26-27절은 유배당한 여호야긴을 여전히 유다의 합법적인 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다시 돌아와서 유다를 재건해 주기를 기대하는 자들에게 헛된 소망을 버리라는 경고의 말씀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⑵ 예언자의 탄식(28-30)
예언자는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하고 깨진 그릇이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의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라고 탄식합니다. 여기서 고니야를 삼인칭으로 언급하며, 그의 소망 없는 운명에 관해 말하는 28-30절에서는 화자가 여호와에서 예언자로 바뀝니다. 의문문으로 된 28절은 아마도 고니야에게 소망을 두며 그를 기다리는 자들의 탄식을 인용한 말인 것 같습니다. 이들은 여호야긴이 깨어져 조각난 항아리처럼,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릇처럼 이방 땅에 내버려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여호야긴의 유배를 기점으로 연대를 정하는 에스겔서의 예가 보여주듯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윗의 보좌에 앉혀진 시드기야를 인정하지 않고 유배당한 여호야긴을 여호야김의 적법한 후계자로 간주하며 그의 귀환을 소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고니야에게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예언자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도록 충고합니다. 고니야는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30a; 역대상 3:17-18)입니다. 고니야는 실패한 왕으로 이미 그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그에게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미래가 없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유다를 통치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겠고’와 ‘그의 자손 중’은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서로 충돌합니다. 역대상 3:17-18에 의하면 고니야에게는 적어도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기에, 후자를 배경으로 전자를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유다 왕 고니야에게 아들이 있지만, 그의 아들 가운데 누구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지 못하기에 아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남 유다는 외형적인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통해 불순종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피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피상적인 신앙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변화와 성숙을 향한 자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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