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눈죽(嫩竹)
눈죽재수척嫩竹纔數尺
이함릉운의已含凌雲意
등신욕화룡騰身欲化龍
불긍와평지不肯臥平地
홍세홍<洪世泰>
어린 대나무 겨우 몇 척
구름을 넘어설 뜻 이미 머금었네!
몸을 올려 용이 되고자
평지에 누우려 하지 않네!
이 시는 홍세태(洪世泰)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측기식(仄起식) 시(詩)다, 압운(押韻) 운통(韻統)은 거성(去聲) 치통(寘統) 운중에 의(意) 지(地)로 작시(作詩)를 했다. 보통 평성운(平聲韻)으로 시작(詩作)을 하는데 홍세태(洪世泰)의 눈죽(嫩竹) 시(詩)는 거성(去聲) 운(韻)으로 작시(作詩) 한 것이 근체시(近體詩) 범주(範疇)를 벗어난 것이 특이점(特異點)이다. 홍세태(洪世泰)는 중인(中人) 계층으로 위항문학(委巷文學)을 이끈 시인(詩人)으로 알려져 있다. 벼슬은 역관(譯官)을 지냈다고 한다. 그는 위항문학운동은, 1712년에 홍세태(洪世泰)가 편찬한 해동유주(海東遺珠)에 48명의 시 230여 수가 실림으로써 초기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회변화(社會變化)와 함께 문학활동(文學活動)이 전반적으로 확산(擴散)되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었다. 특히 중인층은 역관 무역과 상업 등에 의한 자본축적으로 경제적 지위를 향상했고 그로 인한 생활의 여유는 곧 문화예술에 대한 적극적 참여로 이어졌다. 중인층은 한시뿐만 아니라 시조의 창작과 가창 또는 음악·미술 분야에도 두드러진 활동을 나타냈다. 〈청구영언〉, 〈해동가요〉 등의 시조집 편찬도 중인층에서 담당했으며, 시(詩), 서(書), 화(畵) 삼절(三絶)의 문인취향(文人趣向)을 가진 위항인도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학이나 예술에서의 성취가 사대부에 못지않다고 자부(自負)하고 있었으나 양반사회의 신분질서에 막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소외된 계층으로서의 자각의식에서 그들 나름대로 동류의식을 형성하여 나타난 것이 위항문학운동이다. 이 운동은 위항문학이 양반들의 문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류와 자신들의 불만과 신분계층적(身分階層的) 갈등(葛藤)을 드러내는 부류 등 크게 둘로 나뉜다. 전자만을 부각(浮刻)시키면 위항문학(委巷文學)은 사대부문학(士大夫文學)과 구별할 수 없는 동류의 것이 되지만 후자의 것과 아울러 살필 때 위항문학은 조선 후기 한문학의 한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작자층의 직업이 일상생활에 연결되어서인지 그들의 시는 관념보다는 일상현실을 중시했으며 표현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위항문학은 귀족문학으로서의 성격과 서민문학으로서의 성격을 혼합한 시민문학적(市民文學的) 성격을 지닌 문학운동이었으나 근대문학으로 꽃피우지 못한 채 개화기(開化期)에 이르렀다. 중인은 사대부, 양반은 물론 평민과 천민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았기에 애환(哀歡)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위항인(委巷人)으로도 불리는 중인(中人)들은 그들만의 공동체(共同體)를 가꾸고 나름의 문화를 일궜다. 중인을 위항인이라 부른 것은 그들이 살았던 곳에서 비롯됐다. 위항(委巷)은 꼬불꼬불한 거리나 골목, 사람이 많은 동네를 말한다. 인왕산(仁旺山)과 청계천(淸溪川) 일대가 조선 시대 중인들의 터전이었다. 특히 인왕산 기슭에 문화(文化) 공동체(共同體)를 형성(形成)했던 중인(中人)들은 시사(詩社)라는 시문학동인(詩文學同人)을 만들어 교우(交友)하며 위항문학(委巷文學)을 꽃피웠다. 홍세태(洪世泰)는 슬하에 8남 2여를 두었는데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금(偶吟)이란 시(詩)를 보면 구구절절이 망자(亡子)의 애절함이 묻어난다. 시비를 겪고 나서 몸은 지쳤고 영욕을 버린 뒤라야 마음은 비었다. 인적없는 맑은 밤 문 닫고 누우니 들려오는 저 시냇가 솔 바람소리<是非閱來身倦 榮辱遺後心空 閉戶無人淸夜 臥聽溪上松風> 지난번엔 옆집 애와 놀았었는데, 오늘은 옆집 애만 홀로 왔구나, 봄 바람에 꽃다운 풀 고운 빛깔들 어느새 또 못가 누대 뒤덮었네<昔與隣兒戲 隣兒今獨來 東風芳草色 忽復滿池臺> 이시는 오언절구(五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압운(押韻)은 상평성(上平聲) 회통운(灰統韻) 중에 래(來) 대(臺) 운족(韻族)으로 작시(作)를 했다. 이웃집 아이와 함께 놀던 아들이 생각이 울컥 나서 오늘 보니 옆집 아이 혼자 놀고 사랑하는 아들은 옆에 없다는 것을 담담한 시어(詩語)로 읊고 있다.
또 파관(罷官) 시를 보면 그의 시(詩) 세계(世界)를 엿 볼수가 있다. 이제야 물러났냐고 국화가 비웃겠지만, 술 익었으니 꽃과 마주 앉아 한잔 마셔야지, 세상사야 상관없는 내 몸 밖의 일이지만, 내 배 속에 든 시심은 귀신도 빼앗지 못하리<黃花笑我解官遲 酒熟花前可一巵 榮辱不關身外事 鬼神難奪腹中詩> 이 파관(罷官) 시(詩)는 역관 벼슬을 그만두고 읊은 시(詩) 같다,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시(詩)다. 압운(押韻) 운통(韻統)은 지통(支統)운 중에 치(巵), 시(詩)로 정확한 운(韻)으로 작시(作詩)를 했다. 위항인 홍세태(洪世泰)는 일상적 생활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것이 곧 신시(新詩)이고, 진시(眞詩)라고 말한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는 진솔함이야말로 진시(眞詩)라고 말하고 있다. 관직은 역관출신(譯官出身)인데 얼마나 가난했던지 부모 제사가 돌아왔는데 제수 장만할 돈도 주지 못한 못난 가장(家長) 신세라 가빈(家貧) 시(詩)를 보면 제수(祭需) 장만도 못한 가난한 살림살이에 아내가 아끼던 은비녀를 팔아 제사상을 차린 아내에 대한 미안(未安)함을 시로 읊고 있다. 제삿날 앞두고 어찌 못하는 가난, 은비녀 파는 것도 애달파 하지 않는 아내, 나는 스스로 당신 효성에 감동하는데 부질없네, 이 생애는 장부의 몸뚱이지만 헛되게 살았구려!<祭先無力奈家貧 不惜銀尖賣與人 我自感君誠孝意 此生虛作丈夫身> 시인(詩人)은 삶이 한(恨)이 많고 곤궁(困窮)해야 시어(詩語)가 애절(哀切)하여 가슴을 치게 한다. 오늘은 중인 역관출신(譯官出身) 홍세태(洪世泰)의 한시(漢詩)를 살펴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