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엄일섭(嚴日燮)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3. 두 차례의 사업활동
1 나는 1963년 12월 21일, 군에서 제대하고 귀가하여 동생은 1주일 만에 축복 임지 남원으로 떠나고 나는 한사코 만류하는 부모 때문에 두 직장에 이력서를 내놓고 뒷산에 올라 기도를 올렸다. “임지로 가야겠으니 협조해 주십시오”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내려와 큰 댁에 간다고 집을 떠나 전북 신태인 임지로 향했다.
2 “또다시 이 고향땅을 밟게 될는지 알 수 없으나 육신의 부모님 건강하시고 멀리 떠나는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흐르는 눈물을 가누지 못하며 집을 등지고 나왔다.
3 1964년 1월 31일, 전주에 도착하여 지구수련회를 마치고 2월 11일 임지인 신태인 교회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부인인 권영옥씨가 6개월 전에 도착하여 개척의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에 20여 명의 어린 식구들의 환영 속에 첫 집회를 가질 수 있었다.
4 수일 후에 대구 제1차 전도집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인근의 높고 낮은 모든 산마다 올라가 특별기도를 드렸다. 그 후 흑판을 메고 마을마다 다니며 강의를 했는데 영적인 역사도 있어서 더욱 힘이 났다. 이후에 제2차, 제3차 대구 부흥집회에도 참석하게 됐다.
5 가을이 되어 훈련 관계로 일시 귀가했는데 육신의 부모님 말씀이 “내 몸에 있는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없애야겠다고 뒷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우셨다”고 하시며 가려거든 다리라도 하나 끊어놓고 가라고 하셨으며, 또 어머니는 늦게까지 우시는 것이다.
6 나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기도를 올렸다. “육신의 부모께 효도하면서는 뜻길을 갈 수가 없나요? 어떻게 해야 이 환경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십시오”
7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한과 원망으로 가득 찬 육신의 부모님께 하직의 인사를 드리고 임지를 향해 떠났다. 둘을 낳고 기르시며 소망의 뜻을 두셨다가 제대하면서 똑같이 모두 전도 일선에 나서니 반대하심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던 뜻길을 중단할 수는 없다. 마음으로 다짐하며 오늘의 이 길이 육신의 부모 앞에 감사와 감격의 날이 되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지에 도착했다.
8 하루 두 끼 그것도 고구마로 연명하는 몸이지만 그저 감사함으로 활동에 임했던 것이다. 1964년 겨울, 영하의 추위와 흰 눈으로 덮인 호남평야를 22명의 어린 식구를 이끌고 사업을 시작했다. 부안 교역에서는 두 칸의 성전에 신문지 몇 장씩을 깔고 포개 앉은 채 이불도 없이 냉방의 기온과 싸워가며 잠을 청해야 했다.
9 새벽 4시경 활동에 지친 식구들의 머리를 헤아려 보았는데 하나가 없는 것이 아닌가. 확인해 본 결과 복부를 수술받았던 식구가 없는 것이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중심 식구를 깨워 온 시내 병원 약국마다 노크해 보았으나 없는 것이다. 얼마나 놀랐는가. 찾고 보니 추워서 도저히 더 있을 수 없어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하고 온 것이었다.
10 다음 고창으로 옮겼다. 나도 자루를 들고 구걸을 시작했다. 성전을 건립하리라 다짐하면서 한 가정도 빼지 않고 들렸으며, 가정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조상만은 환영할 것이다. 어린이들은 신사 거지 왔다고 줄줄이 따라다녔다.
11 한 가정에서는 돈 2원을 던져 주는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버지 참아야지오. 그리고 이 가정에도 복을 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 지나쳐 버릴 뻔했던 조그만 집에서는 할머니가 고구마 찐 것을 서너 개 주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꽁꽁 얼어 버린 것을 마을을 옮겨 갈 때 껍질째 먹으면서 “아버지 감사하지요, 피로도 가시구요. 조금만 더 참고 한 마을만 더 가야겠어요” 이렇게 하루의 일과를 마쳤다.
12 전남 영광군 함평읍, 나주군 삼포면을 거쳐 광산 장성읍을 돌아가며 활동을 했다. 밤이면 눈물로 보고를 받으며 통곡을 했고 새벽이면 격려의 말씀으로 결의를 다짐하며 출발을 했던 것이다. 활동을 마치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는 교회는 반대하는 부모 형제들에 의하여 수라장이 되었고 어린 식구들은 대성통곡을 했다.
13 그 후 나는 전국 순회 대강연회 집회 준비를 위하여 제2차의 사업을 18명의 식구를 동원하여 김제군 만경면 수월리에 자리를 잡고 시작을 했다. 밤으로는 원리강의를 했는데 주인집 부부가 전도되었고 후에 그들은 그곳에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14 2차의 사업 활동에 참석한 식구는 이순형(현 재단 경리부장) 씨가 있다. 이로 말미암아 반대도 많이 받았지만 식구들의 심정은 한 단계 승화됐고 뜨거운 분위기가 되었으며 단결의 계기가 되었다.
15 그 후 이웃면 모정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날 밤 온 마을 사람들에게 영적인 역사가 생기기도 했다. 청년회장의 숙모가 기독교인으로서 아기를 낳은 후 금줄을 친 것이 동기가 되어 영적 시련 속에 정신이 돌게 된 것이다.
16 기성 교단에서 수차례 다녀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얼음을 깨고 앞개울에서 냉수 목욕으로 정성을 들이고 식구들과 합심하여 3일간 철야 기도회를 가졌는데, 씻은 듯이 완치되었던 일도 있어서 식구들은 더욱 힘을 내게 된 것이다.
17 그때 나는 성염으로 1주일간의 조건을 세우고 방을 성별했으며, 환자의 오른편 쪽으로 식구들을 앉히고 나는 머리 편에 앉아 철야 기도를 했는데 다음날은 악령이 방문 앞에서 못 들어오고 있다는 증언을 듣고 성염의 역사를 실감 있게 느꼈으며 모든 식구도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된 것이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