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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과 한편 되려 내 편과 전쟁한다>의 줄거리: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된 뒤에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려고 싸우는 겁니다. 사탄까지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고 생사화복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누구와 싸우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싸움이 있을 뿐인데 그 싸움은 예수님이 이미 치르신 것으로 하나님과 같은 편 되려고 내 편과 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한편 되려 내 편과 전쟁한다
(누가복음 19장 28절~44절)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과 한편 되려 내 편과 전쟁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한편 되려 내 편과 전쟁한다’
하나님과 한편이 되고자 치르는 전쟁에는 적이 있습니다. 그 적은 내 편으로 여기는 대상들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전쟁을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시고 공개적으로 왕의 자리에 등극하시는 행사를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와 전쟁을 하실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천사나 사탄을 포함하여 세상만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싸움은 하나님의 것이 아닌 우리 인간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싸움은 언제나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한 싸움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하나님과 내가 한편이 되어서 원수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으신 하나님과 한편이 되기 위하여 지금까지 내 편이었던 대상들과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재와 게의 생김새가 비슷하기에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입니다. 땅을 파고 다니던 두더지가 굴을 잘못 파서 해변으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변에 있던 게가 깜짝 놀라서 두더지와 싸움이 붙게 되었습니다. 한편 바닷가재 한 마리가 이 모습을 보다가 이유도 모른 채 게 편이 되어서 두더지를 공격합니다.
인간세상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부부가 어떤 사람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부부는 평소에 관계가 좋지 않아도 제삼자를 앞에 두게 되자 남편은 아내 편을 들고 아내는 남편 편을 듭니다. 같은 이유에서 이유를 따지지 않고 부모는 자녀 편이 되어주고자 하고 친구들끼리 같은 편이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서 소속과 단체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이 평소에는 옥신각신하더라도 일본의 독도망언 앞에서는 일치단결하는 모습이 가재가 게 편이라는 말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가재는 게 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의 평생에 사명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편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실 때에 내가 해야 될 일이란 하나님 편들기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왕으로 등극하십니다. 당시 왕이란 전쟁을 이끄는 자였습니다. 새로운 왕의 등장은 정복전쟁을 통해서 영토를 넓히든지 전쟁을 걸어온 상대로부터 나라를 지켜 내리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 전쟁은 다른 나라를 상대하는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한 사람을 하나님 편으로 만드시는 전쟁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편 되기는 “내가 오늘부터 하나님 편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쟁을 통해서만 나는 하나님 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치러야 할 전쟁을 앞서 행십니다. 이 전쟁의 대상은 바로 지금까지의 내 편입니다. 이미 내 편이 되어있던 사람 혹은 대상들과 전쟁을 함으로써 나는 하나님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내 편과 싸우는 전쟁이 없으면 하나님 편이 될 수 없고 이 전쟁을 주님께서 치르신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공표했던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전쟁을 치르시겠다고 선언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치르는 전쟁의 몇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내와 어머니가 싸우면 남편이자 아들은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치르신 전쟁을 나의 전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와 어머니를 모두 주관하시는 하나님 편이 되어야만 합니다. 아내 편을 들거나 어머니 편을 든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아내와 어머니의 갈등에 대해서는 예수 믿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아들과 이웃집 아들이 싸우게 되었을 때 나는 아버지로서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예수 믿기를 포기했다면 가재가 게 편이 되듯이 아들 편을 들어주면 됩니다. 그러나 내 아들과 이웃집 아들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면 나는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또 병에 걸린 사람은 나의 몸과 질병이 싸우는 형국에 처해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도 나는 몸과 질병을 동시에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몸의 편이 되어서 질병을 이기는 건강만을 추구하게 된다면 적어도 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님 믿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장으로서 적자를 낼 수 있는 경제적 상황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장이 사업 편을 드는 것은 가재가 게 편을 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비록 사장일지라도 사업도 주관하시고 경제상황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편이 되어야만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축구시합을 하고 있습니다. 축구시합을 보는 동안에 한국 편이면 적어도 그 시간 동안에는 하나님 믿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한국선수도 주관하시고 일본선수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편이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외교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에도 나는 한국 편이 아닌 한국도 일본도 주관하시는 하나님 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환호하였습니다. 이들이 환호하였던 이유는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님께서 전쟁을 시작하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가 왕으로 등극하시면 선민의 나라 이스라엘을 식민지로 삼은 로마를 향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승리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등극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41절 이하를 보면 선민의 나라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는지를 현실에 비추어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면 첫 번째로 대국민담화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국민들을 향한 첫 마디가 “대한민국은 머잖아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 편이 되시고자 하셨고 하나님 편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교리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교리적으로는 화목제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던 인간의 상태를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단순히 교리적 차원의 이해에서 끝낼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주권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실 때에 내가 하나님 편임을 삶의 현장에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교리적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과 갈라져 있던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할렐루야! 아멘!”하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해놓고 아내와 어머니가 싸울 때 누구 편을 들지 고민하고, 자녀가 다른 아이와 싸울 때 자녀 편을 들고, 한국과 일본이 외교전을 치를 때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국 편을 들고 있다면 하나님 편을 드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 편을 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조국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전쟁을 하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의 침략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포로로 잡혀간 곳에서 집을 짓고 농사지으며 살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는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 편이 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허물어져서 온전한 관계가 되었다.”라고 느끼며 끝날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한 전쟁을 치르시기 위해 왕으로 등극하시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이러한 멸망을 예고하셨다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종자들이 예수님의 속도 모른 채 왕으로 추대했기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특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에 제자들과 무리들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38절을 보면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14절을 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이와 비슷한 노래가 언급된 바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리들의 노래에서 평화가 언급되는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당시의 왕은 전쟁을 치르는 자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전쟁이 나면 대통령은 통수권자로서 전쟁을 치를 것이고, 평시에도 나라의 권익을 위해 외교적 경제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전쟁을 벌이고 이기기를 바라던 추종자들이 평화를 외치고 있다는 것이 모순적입니다. 애초에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조차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평화의 도시가 평화의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평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4~36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가 평화와는 무관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바로 이러한 내 편들과의 전쟁이 곧 하나님과의 평화로 이어지는 결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우리에게 임해야 되는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을 들고 기존의 내 편이었던 모든 대상들과 전쟁을 치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내 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전쟁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편이 나와 완전히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편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욥은 재산이 엄청난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산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다 없앨 것을 제안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이를 허락하셨고 욥의 재산은 일시에 사라지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재산을 잃은 상황도 수습되지 않았는데 다른 종들이 와서 전하기를 열 명의 자녀가 생일잔치로 모였다가 한꺼번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욥의 반응이 특이합니다. 욥기 1장 21절을 보면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주권자께서 많은 재산과 열 명의 자녀를 주셨다가 한꺼번에 거두어 가셨을 뿐임을 인정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에 찬송을 드립니다.
이에 대해 22절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의 제안에 동의하시고 시험을 내리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봅니다. 욥이 누구 편을 드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이 시험의 목적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윽고 욥은 온 몸에 악창이 나게 되었고 아내는 떠나가고 친구들도 욥을 정죄하면서 떠나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 편에 있기를 선택합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라는 증거는 욥처럼 세상을 끊어냄으로써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까지 관장하시고, 내가 잠든 동안 머리털이 몇 개나 빠지고 얼마나 남았는지조차 세신 바 되십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편에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의 칼이 움직일 때 내 편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사정없이 후려칠 때가 있습니다. 이때 나와 관련된 것들을 내 편으로 끌어안았다가는 상처를 입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가재는 게 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편이었던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전쟁을 치를 수 없다면 결코 하나님 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42절을 보면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기에 멸망하게 되리라는 예고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AD.70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 43~44절에서는 이러한 멸망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됩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당시에 헤롯 대왕이 성전을 쌓을 때 정성을 들이기 위해 돌과 돌 사이에 보석을 넣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이 보석을 찾기 위해 성전을 완전히 무너뜨리게 됩니다.
선민의 나라가 왜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예수님은 왕으로 추대되는 순간에 왜 이러한 비참한 예언을 하셔야만 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진짜 평화가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진짜 평화란 곧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선민들은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의 마음은 가족의 편이었고 조국의 편이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하나님의 평화가 아닌 내 편이 되어있는 대상들을 위한 평화를 기대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에 관한 일을 몰랐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남편과 아내와 같은 편이 되고, 부모와 자녀가 같은 편이 되고, 형제와 자매가 같은 편이 되고, 나라와 백성이 같은 편이 돼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같은 편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서 번영과 성공을 주실 것만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잘못된 것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멸망 당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의 삶을 떠올려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사업을 위하여 사방을 떠돌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떠돌이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허락하신 일들이 어떠했는지 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을 보면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이자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환난을 겪게 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만 했던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은 곧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한 전쟁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전도하며 다녔는데 하나님께서는 같은 편이었던 사도 바울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셨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욥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고통과 환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 편임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내 몸조차도 내 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자신의 몸조차 같은 편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바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이었습니다. 몸이 죽어가는 중에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순교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마음이 몸과 같은 편이 되었다면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은 몸과 같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순교 현장에서 하나님 편일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서 얼굴이 천사처럼 광채가 나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는 것이야말로 화평이고 평화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내 편으로 여겼던 것들과의 전쟁은 치러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바로 내 편들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하여 하나님 편이 될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과제는 무슨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기준에서 일이 잘되든 못 되든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끌어 가시고 결정하실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의 떨어짐을 주관하시고, 내 눈에 들어오는 티끌 하나까지 살펴보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일하실 때 나의 사명은 범사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 편이 되는 전쟁을 주님은 세상에서 버림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치르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내 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끌고 나와 같은 편이 되고자 하는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해 갈라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의 편이 되었음을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에 병이 생겼습니다. 그럴 때 의사를 찾아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몸의 편이 되기 전에 하나님 편이 되어야만 합니다. 먼저 내 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내 몸과 같은 편이 되지 않도록 갈라서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몸에 대한 관심을 끊음으로써 몸이 내 편이 아님을 드러내고 하나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병도 생기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몸의 병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편이 된 뒤에 하나님께서 무슨 약을 먹으라고 하시고 어떤 의사를 찾아가라고 하시면 그대로 하면 됩니다. 우리의 몸은 한 시도 하나님의 주권 밖으로 튕겨져나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몸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하나님의 주권은 다 잊어버린 채 몸과 같은 편이 되어서 조처를 취하고자 합니다.
날씨를 보면서도 좋고 나쁨을 따질 수는 없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 편이 아닌 것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 편이라면 하나님께서 날씨를 이렇게 하고 계심을 알기에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왕으로 등극하셔서 전쟁을 치를 것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말을 타고 벌이는 세상에서의 전쟁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싸울 수 없는 나귀 새끼를 타고 이루어지는 이 전쟁은 바로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기 위한 전쟁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편이 되기 위하여 싸워야 될 대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내 편으로 여겨지던 것들입니다. 내 편과의 싸움을 통하여 하나님 편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현장에서 당신의 주권을 마음껏 휘두르실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주권이 막힘없이 휘둘러져야 할 곳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 편이 되기 위하여 내 편과 싸우는 십자가 생활화를 한시도 잊지 마시고 오늘 하루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자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하나님 편임을 밝히 증명해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한순간도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에서 내 편과 싸우게 해주셔서 승리함으로써 삶의 매 순간과 어느 장소에서든지 내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편임을 증거 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