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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 예배 "בֹ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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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드 : 근원, 하야
헤이 : 바라, 네샤마 : 꿈
바브 : 짜르, 루아흐 : 벌레
헤이 : 아싸, 네페쉬 : 대소변 / 예술
네페쉬는 대소변이라고 했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나가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이 네 개의 세계를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고 하나님의 나라이다.
아싸의 세계에서는 예술적인 삶, 아름다운 삶을 살게하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다. 네페쉬가 없으면 예술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 다이아몬드, 이런게 아니고, 내 삶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제자 중 하나가 얼마 전에 전기차 중고차를 하나 샀는데, 얼마나 좋아하던지, 너무너무 좋아하는 것이다. 차를 산 이후에 코빼기도 안 보인다. 차를 사서 좋아하는 그 제자의 모습을 아름답다 하겠는가? 물론, 그 제자는 되게 예쁘다. 저는 옛날부터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언제냐면, 돌이킬 때 말이다. 자기가 자기 단 지파의 모양대로 역사하는 것을 돌이킬 때, 그래서 형상으로 나아갈 때 정말로 아름다웠다. 차가 없어도, 돈이 없어도,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돈이 백억이 생긴들, 얼마나 좋은 집이 생긴들,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면, 우리에겐 아싸의 세계가 없다.
하나님은 사실 이 아싸의 세계에서 하시는 일이 있는데, 아싸의 세계에서의 아름다움의 핵심은 집, 베이트, 412이다. 모든 집은 타아봐, 갈망이다. 우리 속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갈망, 욕망을 토라에서는 집이라고 한다.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면, 이것을 아름답다고 한다. 이 원함이란 것을 집이라고 하는데, 이 집 속에 하나님이 와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위에 계신 분인데, 이 세계를 왜 창조하셨냐면, 우리를 통해 왜 창조하시기 원하시냐면,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 목적이 아싸의 세계에 내려오셔서 거하시는 것이다. 가장 근원에 계신 분, 테홈, 가장 깊은 어둠 속에 계신 분이 이곳에 내려오셔서 여기 거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가장 큰 아름다움을 타아봐라고 하는데, 타아봐라고 하는 것은, 내 속에 다른 사람이 와서 살아라는 갈망이다. 내가 많은 것을 가졌다. Receive to give, 주기 위해서 갖는 것이 집의 독특한 특징이다. 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집을 지었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게 아름다움의 가장 큰 핵심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아름다움, 예술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금지라고 했다. 로 하야, 있게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세계를 주관하고 세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던 굉장히 중요한 것을 로 하야라고 했다.
לא היה 로 하야
음행을 있지 않게 하였다. 이런 갈망을 가져서, 집을 완성해서, 하나님으로 그곳에 와서 거하게 하는 방법은 로 하야, 음행이란 것을 있지 않게 해야한다. 음행이란 것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다. 집을 짓는 이유가 자기를 위해서이다. 그래서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이 결혼이다. 결혼을 왜 하느냐? 결혼은 집을 짓는 것인데, 자기를 위해서 결혼을 한다. 자기가 살려고 결혼을 한다. 집 가, 결혼해서 집을 세운다. 왜? 자기 행복하려고. 그것을 음행이라고 한다. 그것을 애굽의 씨불로트, 고역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내 집을 세워서, 내가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을 어마어마한 고역이라고 한다.
סבלת 씨불로트 : 고역
씨불로트를 하면, 맨날 씩씩거린다. 이 세상을 사는 이유가 자기를 위한 것이면, 아싸의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을 받는다. 아싸의 세계에서 씨불로트는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느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음행이라고 했다. 사람도 소유하려고 하고, 그러다보니까 집착하고, 그러다보니까 내 소유, 다른 사람이 소유한 것만 보이고, 왜 나는 소유하지 않는가? 이런 것만 보인다. 이 씨불로트 아래에서는 정말 엄청난 고역이다.
애굽의 만화영화를 보면, 애굽에서 노예들이 씨불로트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커먼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씨불로트로부터 나오게 한다는 것이다. 호쩨티라고 했다. 여기서 나와야지, 하나님의 아싸의 세계를 구축한다. 아름다운 하나님의 집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씨불로트에서 못 나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집을 세울 생각도 안 한다. 내가 결혼해서 집을 세운 것이,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것이다. 나 잘 살려고, 행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을 세워서, 거기에 하나님이 오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맨날 음행만 한다. 나를 기쁘게, 즐겁게하라. 그 집을 세워놓고 맨날 음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오실 수가 없다. 하나님은 음행이 있는 곳에는 오지 않는다. 그런 음행이 있는 곳이,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음행하려고 집을 세웠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불과 유황으로 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집을 지을 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갈망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받을 줄 알아야 한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 다른 존재가 와서 살아라. 행복해라.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것이 Hospitality,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가진 것만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 제자들을 보면, 어제 제자들 생일도 있어서 이야기를 하는데, 서초동 시대와 목감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을 이야기하더라. 목감 시대에 와서는 전혀 공부를 안 한다. 학군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제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서초동에서 그렇게 공부했어도, 그 공부한 것은 다 우리 것이 아니고, 가짜다. 그렇게 공부했어도, 혜성이, 영화, 여기 와서 결혼시켜놓으니까, 실로 그 모습이 정말 극악무도한 짐승의 모습 이상이하도 아니었더라. 그게 어떻게 공부한 사람의 모습인가? 서초동에서 공부했던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은 목감에 와서 공부한 것이 훨씬 더 많고, 그게 실제로 깨달은 것이고, 그게 실제 성장한 것이다.
요즘 제가 7시부터 자니까, 왜 그러냐고, 용희냐고 하는 것이다. 지원이, 반석이도 말이다. 이들의 성장 정도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실제 상황 속에서 실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고, 실제 그 삶을 배워가고, 움직이는, 실제 여호와의 도, 그 길을 어떻게 가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근원에까지 다시 올라갈 것인가? 라고 하는 것들을 배워가는 가장 실제적인 시간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들은 실제를 배우는 시간들이기에, 그냥 쉽게 넘어가지 않고, 서초동에서 이론만 배웠다면, 이제는 그것을 실제로 배웠어야 했다. 군인처럼 진흙에 들어가고, 산에 들어가서 생존 훈련을 하고, 폭탄이 터지고, 그 가운데서 어렵지만 하나하나를 배워나가는 우리들의 모습들인 것이다. 그것을 배우려면 정말 씨불로트의 실제를 마주해야 하고, 그래서 애굽에 내려간 것이다. 얼마나 내가 음행하고 있는지를 실제로 마주해야 한다. 이게 음행이구나. 절대로 알 수 없다. 집을 지으려고 결혼하기 전에는 절대로 모른다. 결혼 전에는 착한 줄 알았다. 우리 지원이도 착한 줄 알았다. 정말 성격도 좋고, 예쁘고, 너무너무 착한 줄 알았는데, 결혼해놓으니까, 집을 왜 짓는가? 분명히 결혼할 때, 너의 행복을 아닌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 집에 하나님이 오시기 위한 것이다. 너희들이 하나되어서, 음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살고, 이웃을 먹이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살고, 너를 행복하게 하려고 하지 않고, 이러면 하나님이 오신다. 하나님이 이 집의 주인이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그게 훈련이다. 실제 상황에 들억면, 이론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 실제 상황에서 부딪혀야, 실제 나의 지식이 된다.
그냥 나를 위해서 배운 것들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그래서 씨불로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 우리는 더 이상 음행하지 않겠다. 우리에겐 음행이란 것은 없다. 이 땅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가장 추한 것이다. 가장 추악한 것의 특징이 악취이다.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악취가 난다. 악취의 특징은, 철저히 홀로된다. 사람들이 다 떠난다.
우리는 아싸의 세계만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야짜르의 세계도 건설해야 한다. 야짜르의 세계는 Forming하는 세계인데, 무엇인가 개별들을 다 모아서 결합시켜서, 하나의 다른 형체를 만드는 것, 이것을 Forming한다고 한다. 네페쉬의 세계는 다양성의 세계이다. 다양하게, 여러개가, 복수형태로 존재한다. 루아흐의 세계, 성령이 부어지면, Forming을 한다. 여러가지를 결합시켜서, 다른 어떤 것들을 만든다. 조립품들을 결합해서, 다른 것들을 만든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것이, 아름다워져야지, 악취가 안 나고, 다른 것과 Forming할 때, 서로 밀어내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에게서 악취가 나면 떠나게 되어있다. 내가 악취를 풍긴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물 중에 스컹크란 동물은, 이 세계에서의 원리를 기가막히게 아는 것이다. 방귀를 뀌면 모든 자들이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피 재앙을 통해서 악취가 나는 것이다. 악취가 나면, 이 야짜르의 세계에 성령이 부어지지 않는다. 성령으로 사는 것을 모른다. 성령으로 사는데로 와야지 주님의 사람들과 Form을 이뤄서 결합을 할 수 있다.
왜 향수, 이런 것들이 정말 놀랍냐면, 냄새라는 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결국은 냄새가 좋아야한다. 그런데 냄새가 좋으려면,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위한 욕망을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이런 집을 지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살려고 집을 지으면 안된다. 내가 행복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 나한테 좀 잘해라, 이런 이야기만 하면 안된다. 그러면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는다.
나는 하나님께서 진짜 나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언약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나를 케어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적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하다.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완전한 자라는 것을 안 믿는다. 그리고선 그 난리를 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아싸의 세계에서 루아흐의 세계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그런데 아싸의 세계에서는 음행이 있으면 안된다. 그런데 야짜르의 세계에서는 자기를 기쁘게하는 것이 있으면 안된다. 악한 말이 있으면 안됐다. 악한 말을 있게하지 않음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짜르의 세계로 인도외어졌다고 했다. 음행을 없으니 호쪠티, 주님이 뺴내었고, 악한 말을 있지 않게 하니까, 히짤티,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됨에서 구해내었다. 악한 말이란, 자기가 살려고 하는 말이다. 욕도 자기가 살려고 소리지르는 것이다. 악한 말이 있으면 하나님이 구해내실 수 없다. 여기는 노예됨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한 말이 있고, 히브리어가 있다. 이 위의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라고 했다. 이 밑이 형이하학의 세계라면, 위는 형이상학의 세계이다. 우리가 살아야 할 세계는 이 두 세계가 있다. 물론 우리는 지금 형이하학의 세계에서도 버둥거리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빨리빨리 통과해야 한다. 믿음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완전하게 하시고, 내 속에 선한 경향성을 넣어두셨다. 그러면 굳이 악한 말 안 해도 된다. 나 어떻다, 내가 살려는 말 안 해도 된다. 주어가 나인 것은 굳이 안 해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나를 잘 살게 할 수 있는 선한 경향성을 내 속에 넣어두셔서, 그냥 믿기만 하면 된다. 노력할 것도 없다. 그냥 은혜이다. 믿기만하면 어마어마한 두 세계가 주어진다. 참 희한하다. 그 믿음이 없어서 맨날 안 믿는다. 내가 아름다운 것도 안 믿고, 맨날 다른 사람이 더 아름다워보인다. 그러니까 맨날 나 좀 사랑하라고 음행한다. 내 속에 주님의 성품을 다 살아낼 수 있는, 선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믿는다. 그 우주가 존재함을 안 믿는다.
아싸의 세계는 예술의 세계지만, 야짜르의 세계는 도덕과 윤리의 세계라고 했다. 도덕과 윤리의 세계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세계이다. 정말 파라다이스이다. 이 도덕과 윤리의 세계는 정말 샬롬의 세계이다. 내 가정이 살만하다? 그것은 도덕과 윤리가 있는 가정이다. 이게 없으면 그 가정은 정말 엉망이다. 개판 오분전이라고 한다. 서로에게 별 짓을 다 한다.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실천이성비판이라고 했다. 도덕과 윤리는 그 사람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행동이 타인을 위한 것이다. 이타적인 것이다. 도덕과 윤리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타심이 다스리는 것, 양심이 다스리는 것이다. 양심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지 않고, 자기 사랑, 자기 중심에 있으면 찔림을 받는 것이 양심이다. 내 욕심을 부리고, 내 이익을 추구하고, 나 어떻게 될까봐, 나를 케어하면, 우리는 찔리게 되어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불쌍하지만, 저 사람을 위해서 뭘 좀 해야지? 먹을게 있으면, 나도 먹고 싶은데, 저 사람을 위해서 해야지? 이런 것이다. 이게 도덕과 윤리이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 도덕과 윤리가 무너지면, 이기심이 지배를 하게된다. 이것을 악한 경향성이라고 한다. 이기심이란, 다 자기가 어떻게 되는 것이다. 맨날 자기 생각만 한다. 나 힘들다, 나 괴롭다. 이기심이 지배를 한다.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이 세계는 도덕과 윤리의 세계이다. 양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선한 경향성으로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 나를 위해 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게 도덕과 윤리이다. 사람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이 야짜르의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 행복하다. 이 가정이 야짜르의 세계가 되었다. 그러면 성령이 막 역사한다. 숨쉴 수 있는 것 같다. 왜 그러냐면,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를 않는다. 너무 행복하다. 유니스와 있다보면, 자기를 위해서 살지를 않는다.
이 야짜르의 세계가 와야지 Space,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생기는데,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공간을 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실은 공간을 내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기심은 공간을 내어주질 않는다. 미쯔라임, 공간을 좁힌다, 좁다는 뜻이 있다. 애굽이라고 하는 것은 공간을 내어주질 않아서 숨을 못 쉰다. 그런데, 사람이 양심, 이타심으로 살게되면, 선한 경향성으로 살게되면, 상대, 친구, 이웃을 위한 공간을 내어주고, space를 내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그곳에서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자식도 자기를 위해서 낳았으면,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자식을 키우면, 자식에게 공간을 주지 않는다. 숨막히듯이 조인다. 이거저거 해야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야짜르의 세계를 살아야지만, 공간이란 것을 얻는다. 안 그러면, 여러분들은 있을 공간이 없게된다. 공간이 없으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수가 없다.
헤이 : 바라 : 창조의 세계
히브리어, 언어라고 하는 것은 소리가 굉장히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어를 바꾸지 않았다. 언어를 바꾸지 않고 지켰다. 그렇기 때문에 바라의 세계, 창조의 세계를 하나님이 주실 수가 있었다. 이 히브리어의 세계, 소리라고 하는 것은 뭔가? 이전에는 다 사역동사였는데,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사역동사를 쓰지 않고, 일반동사를 쓰신다. גאלתי 가알티, 내가 구속했다. 구속이란, 미래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가 구속받았다. 라고 하는 것은, 미래가 현재가 된 것을 의미한다. 미래가 현재로 와버렸다. 그 이야기는, 미래가 확정되었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예를들면, 우리가 결혼할 때, 프로포즈를 했다. 아직 결혼은 안 했지만. 그 미래에 의해서, 미래가 현재에 와 있는 것이다. 결혼했다고 하는 미래가 현재에 와서, 현재에 프로포즈, 미래를 위한 것을, 미래가 현재에서 살아지는 것이다.
옛날에 니짜빔을 할 때 배웠다. 이 미래에 해당되는 우주의 특징이, 아싸의 세계는 과거이다. 아싸의 세계를 잘 못 살고, 아름다운 삶을 못 살고 음행을 하면, 아싸의 세계의 반대편, 과거에 매여서 살게된다. 과거의 상처, 과거에 의해서 조종당하는 로보틱한 삶, Reaction의 삶을 살게 된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과거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한번 버림받은 사람은 맨날 자기 버릴거라고 한다. 유니스같은 경우도, 오빠가 과거에 한번 놀러갈 때 안 데리고 간 것, 그럴 수도 있지 않는가? 여동생이니까, 오빠들끼리 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영이는 단이라 하늘이가 아무리 놓고가도 상처 안 받고, 자기가 잘라버린다. 그런데 남쪽 유니스는 그게 아니다. 자기를 버리고 간 것이 어마어마한 상처가 되어서, 방에 들어와서, 혼자서 그것을 다 형상화하는 것이다. 깜깜한 방도 아니었을텐데, 감옥같은 방을 형상화해서, 거기서 처참하게 울고있는 자기, 소외당하고 버림받고, 그것을 트라우마화해서 이것을 가지고 40살 될 때까지 그 Reaction으로 살았다.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 삶은 도대체 무엇이고, 뭘 이루어냈는가? 어떠한 세계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트라우마를 반복하면서, 어떤 하나님의 나라도 건축하지 못한채 살았던 것이다.
이게 왜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시고, 자꾸 하느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지, 아싸의 세계조차 건축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여서 트라우마 속에서 로보틱한 삶을 반복하면서 짐승처럼 살도록 부름받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월절에 네 아들에 대한 비유도 된다. 아싸의 세계를 건축하는 아들을 라샤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이노, 탐, 하캄의 아들이다. 아들은 바나, 세우다, 건축하다는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부르심이지, 우리는 그렇게 나하쉬, 어렸을 때 받은 뱀 가지고선, 그리고 그 처음에 늙은 왕이 와서 육체가 나라는 것을 가지고 속임받은 미혹을 가져다가, 아싸의 세계 근처에도 못 와보고, 짐승의 왕국에서 그렇게 울부짖으면서 살게 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제발 깨어나야 한다. 짐승의 왕국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 이상 짐승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하면서 살자.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되자.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면서 살자는 것이다.
이 아싸의 세계와 야짜르의 세계, 바브 헤이의 세계, 이 두 세계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이미 우리 속에 넣어두셨다. 믿어보라. 돈이 없어도 된다. 그렇게 나 살려고 안 해도, 진짜 타아봐, 아름다움, 다른 사람을 위한 집을 짓기를 원하는 아름다운 갈망을 가진 사람들은 온 우주가 다 서포트한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돈이 있어서, 돈을 벌려고 해서 산 것이 아니다. 그건 삶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오징어나라가 되었다. 456억을 한 사람만 가질 수 있다고 한다. 가졌다고 치면, 삶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 사람은 왜 돈이 필요했던 것인가? 부자가 되서 그 삶이 어떻게 되었는가? 삶이란 돈이 많다고 좋아지는 이런게 아니다. 그건 삶이 아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양심으로 살아야 하고, 이타적으로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그 아름다움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줄 줄 아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성품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삶이지 돈이 좀 많아졌다고 그게 삶이 아니다.
차가 생겼다고 네 삶이 얼마나 가치있게 되었는가? 똑같다. 차가 생겼다고, 네 삶이 가치있는 삶이 되었고, 고귀한 삶이 되었고, 삶이 살아졌다면 미친 것이다. 내가 뭘 소유했냐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은 우주가 다 서포트하게 되어있다. 내가 아름다운 갈망과 선한 경향성이 내 안에 있는 것만 가동시키면, 이 두 우주가 나를 서포트한다. 그래서 사실은 아싸라고 하면, Do, doing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우주를 통해서 모든 것을 행하신다. 야짜르, 조성하신다. Make, 그분이 모든 것을 만드신다. 모든 길을 만드신다. 이게 다 그분이 행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행하심과, 그분이 만드시는 것을 그냥 감탄하며, 그냥 찬양하면서 살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행하려고 하고, 내가 만들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스트레인 것이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이다.
요드, 하야 : 라카흐티 : 취하다, take
사람이 이 세계에서 나오게되면, 가알티, 미래가 확정된다. לקחתי 라카흐티, 취하다는 것인데, 결혼의 용어이다. 신부를 데려가는 것이다. 바라는 미래인데,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미래이다. 진짜 미래는 하야에 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미래를 얻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라도, 이 생명이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길어진다, 미래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야이다.
미래를 확정짓는 것이 가알티이다. 미래를 확정지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이 세상은 미래를 확정지을 수 있는 것은 언어밖에 없다. 소리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기도문을 가르쳐주신다. 우리는 종종 기도라는 것을 내 필요를 막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유대인들의 기도를 접한 후에 충격을 받은 것이, 기도책이 이렇게 두껍다. 기도는 내가 지금 필요한 것, 우리 애가 아프다, 우리 남편이 네가지가 없다, 좀 바꿔달라, 이런게 기도인데, 기도책이 이렇게 두꺼운 것이다. 기도문이 있다.
이방인들은 많이 올라가봤자 야짜르의 세계이다. 이방인의 모든 종교들은, 많이 올라가봤자 여기까지인 것이다. 부처가 해탈했다. 어디서 탈했는가? 악한 경향성에서 탈, 나온 것이다. 악한 경향성에서 나와서 선한 경향성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게 여기이다. 그리고 아싸의 세계도 대단한 것인데, 이미 내가 가장 최고로 아름다우니, 남의 것을 가져올 필요가 없이, 내게 최고의 것이 있다. 내가 최고로 존귀하다. 이것을 깨달으면 씨불로트, 모든 고통이 없어진다. 내가 최고로 귀하다. 그게 뭐냐면, 부처는 태어나서부터 손을 들고 걸어가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다고 한다. 내가 존귀하다는 교만 이런게 아니라, 내 안에 이미 그런 존귀함이 다 있다는 것이다. 탐내거나 시기하거나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음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할 필요가 없다. 천하에서 나 자체 하나가 모든 존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면, 모든 씨불로트가 사라진다. 이스라엘아, 너희는 나의 언약이 있는 존재들이다. 내 백성들이다. 내 아들들이다. 뭘 그렇게 애굽에 있는 것을 탐내고, 너희들은 충분히 아름답게 살아도 될 존귀함이 있다. 이런 것이다. 뭘 그렇게 낮은 열등감으로 살고, 맨날 전지현 부러워하면서 사냐는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높이 올라가봤자 여기까지이다.
바라의 세계는 히브리어가 있어야 한다.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소리냐? 형이상학적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을 넘어선 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한다. 진짜 젊은이들에게 제가 해주고 싶은 말이, 그렇게 교만하고 오만하면 안된다.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난리를 피면 안된다. 늘 삶에 대해서 배우고, 훈련하고, 이렇게 가야지, 할 줄 아는게 자기가 어떻다고 발버둥치는 것 밖에 못하면, 스스로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그냥 거기에 빠져죽고 만다. 제발 겸손해야 한다. 스스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누리려고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안 오면 난리를 피고, 그러면 정말 큰 아픔이 온다. 왜 그러냐면, 어렸을 떄 채찍으로 안 키워서 그렇다. 어렸을 때 혼낸다는 것은, 어렸을 때 정말 그 무서움으로 혼을 낼 수 있어야 하는데, 애들에게 무서움, 경외함을 안 가르치니까, 애들이 혼나고도 에이씨, 막 이런다. 어른한테, 막 조만한 애들도, 혼내키면 막 뭐라고 한다. 그런데 진짜 무서움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잘못했을 때, 진짜 무서움을 가르쳐야 하는데, 진짜 무서움을 가르치면, 무엇을 애들이 학습하는 것이냐면, 나중에 있을 심판을 학습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심판을 학습을 해야한다. 그러면 나중에 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심판받을짓을 안 하는데, 심판을 학습하지 않은 아이들은 무서운 것이 없다. 그래서 나이가 20살, 30살이 되었는데도 어른들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고, 그대로 악한 경향성으로 살고, 냄새나게, 음행하면서 살고, 그래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저 그냥 자기 이야기만 해쌓는다. 자기들만 살려고 한다.
그렇게되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수 밖에 없다. 어렸을 때 심판을 경험했더라면, 심판받을 짓을 안 하게 된다. 그런데 어렸을 때 심판을 경험해보지 않은 것이다. 그냥 오냐오냐 키우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잔소리로만 듣고, 한번도 이 세계의 무서움, 형이상학의 세계, 아버지 세계의 무서움, 미래, 다음 세계의 무서움을 경험해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러지 말아라, 아무리 이기심으로 살지 말라고 이야기해도,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다. 아무리 이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아라, 아무리 너 자신을 돌보지 말아라, 이야기해도 그게 뭔 소린지, 너는 이야기해라. 한다.
이것에 대한 심판이 내려오면, 지금 조금 나 좋은 것, 쾌락을 추구하다가, 다음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지, 구천을 떠도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음부에 가서 물 한방울 찍어달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 조차도 다 잃어버리고, 구더기가 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지금 그렇게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셨어도, 나는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은 왜 저러냐고 하는 것이 얼마나 심판받을짓인지 모른다. 요즘 아이들을 다 그렇게 키운다.
제가 진짜 요즘 제자들을 훈련시키면서, 너무 뼈저리게 느낀다. 어떻게 한번도 그 무서움을 경험해보지 않고 컸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이 소리는 정말 무서운 소리이다. 이 소리는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소리이다. 그런데 한번도 이런 세계를 경험해본적이 없다. 우리가 이 소리를 알게되면, 순종할 수 밖에 없다. 영원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세계이다. 또 이 세계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으려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가, 말았다가 한다. 이 세계에서 하나님의 소리 듣는 것은 없다. 여기를 넘어와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순종을 하게된다. 순종을 하게되면, 우리의 미래는 확정되어버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되면, 아버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가 되면, 미래는 확정이 된다. 미래에는 어떠한 해도, 어떠한 두려움도, 어떠한 것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소리를 못 듣는 인간이 되면,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민족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라,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세계, 이 백성들의 소리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다. 우리가 여기서 내는 소리는 소리가 아니다. 여기서 아무리 소리내어봤자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그렇게 상대방이 어떻다, 저떻다 그렇게 소리질러도,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 오히려 악취만 난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히브리어 속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창조를 한다. 없던 것을 있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꽹과리 소리만 내면서, 하나도 삶에서 새 창조가 없이, 맨날 옛날의 나를 그대로 사는 것 뿐이다. 사람만 바뀌지 똑같은 수준의 삶이 반복된다. 10년을 살던, 20년을 살던, 그 수준이 똑같다. 제발 나한테 하나만 해달라고 하지만, 수준이 맨날 똑같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 즉, 영원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근원의 세계, 그것에 대한 무서움, 그것을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표현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할 줄 알게 되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다르다. 아버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사람을 바라의 세계로 올리신다. 그래서 그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저는 2022년에 들어서면서, 정말 가슴이 뛴다. 왜냐면, 이 소리를 듣는, 진짜 아버지를 경외하고, 이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런 제자들이 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 이 밑의 세계에도 못 왔지만, 싹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그런 제자들과 함께 이 바라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건축해서 아버지께 바칠 것에 가슴이 뛰고 있다.
우리 지원이가 저한테 와서 그런다. 아버지, 이것도 저주에요? 겁이 되게 많다. 저주란다. 구천을 떠도는 저주를 받으면 영원히 외롭다. 영원히 악취가 나서,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런데, 지원이가 그 이야기를 저한테 하는 이유는, 지원이 속에 주님을, 아버지를 경외함이 있다. 만약에 이 아이 속에 그것이 없다면, 쟤는 우리 교회를 떠났어도 벌써 떠났을 얘이다. 그 깊은 곳에 경외함이 있다. 그래서 이 바라의 세계로 올라온, 지원이는 르우벤이니까, 라카흐티의 세계까지 올라오는 그런 떡잎이 있는 것이다. 얘는 실제적으로 언약 결혼까지 하는, 그런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세계를 알아야지, 여러분들은 이제 살 수 있다. 삶의 네 가지를 구분할 줄 모르면, 너무 혼돈스럽다. 모든 세계는 이 네 가지로 구분된다. 모든 삶은 이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되어진다. 모든 아들들은 네 가지 종류의 아들들이 있다. 아싸의 세계를 건축하는 아들, 루아흐의 세계를 건축하는 아들, 네 종류의 아들이 있고, 내 안에도 네 종류의 인격이 있다. 예술가가 있고, 실천가가 있고, 도덕과 윤리를 세우는 아들이 있고, 히브리어, 소리, 언어학자가 있고, 꿈꾸는 자가 있고 그리고 쉠, 이름을 다루는 아들이 있다. 여기는 정말 엄청난 것이다. 모든 것의 근원을 다룬다. 샘을 잘 찾고, 아주 근원을 다루는 아들이 있다. 이 아들들이 태어나면,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저 근원에 무엇이 있는가를 계속 본다. 절대로 지금 현재로 판단하지 않는다. 근원에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에, 근원에 대한 힘을 딱 가지면,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기에도 모든 것을 자기가 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궁극적으로 동행하는 것은 이 근원의 세계이다.
이 보의 세계에서 네 가지의 야훼의 세계를 건축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불러내신다. 애굽에 있으면 저 네 개의 세계는 절대로 건축하지 못하고 바로의 세계만 건축할 뿐이다.
* 기도
보의 세계를 배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고,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 우리가 이 땅에 와서, 내 몸뚱아리 하나 살리려고 아등바등사는데, 사탄이 그렇게 우리를 그게 삶이라고 미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창조하셨고,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만드셨고, 우리에게 선한 경향성을 넣어두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들되게하사, 당신의 창조의 세계를 맡기고 싶어하십니다. 이 모든 것에 역사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그분의 사랑 안에 푹 잠기어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축복하사, 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데 한치의 부족함도 없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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