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사람
'잊을 수 없는 사람' 이라면 대개 큰 은혜를 입었거나 아니면 직접 감화를 받은 사람을 두고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사람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어서 이런 제목이 합당한 것인지 어떤지 주저가 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사회에서 두고두고 기억되어 마땅한 사람으로 여겨져서 이런 제목을 붙여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말하려는 사람은 국립도서관 부관장을 역임한 박봉석(朴奉石) 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분은 일반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분의 뚜렷한 업적은 8.15 해방에서 1950년 7월, 6.25 동란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될 때까지의 5년의 세월에 불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 동안에 남긴 그의 발자취는 너무나 크고 뚜렷하다.
8.15 해방이 되었을 때 그는 한국 사람으로서는 총독부 도서관에서 가장 고참 간부였으며 유일한 사서 자격 소지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향리에 은거중인 지난날의 상사 이재욱(李在郁) 씨를 새로 발족하는 국립도서관의 책임자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관장에 머물러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박봉석' 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1959년 1월, 어떤 강습회에서였다. 그 당시 전국 18개 사범학교에서 차출된 사서 교사 강습이었는데 나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수서과목의 강사였던 장일세(張一世) 선생을 통해서 꼭 한 번 박 선생의 이름이 나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20년도 넘는 묵은 이야기가 되었으며 그동안 장 선생도 고인이 되었다.
그런데 최근 나는 어떤 계기에 박봉석 선생에 대한 간단한 연구를 하게 되어 자료를 찾고 그분의 동창, 제자들을 만났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나는 많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국립도서관 학교 시절의 제자들은 "박 선생님은 참으로 부지런한 분이어서 많은 연구에 몰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다정하고 인자하여 구김살 없는 인간성을 지닌 분이었다"고 마음으로부터 흠모하고 있었다.
호적에 의하면 박봉석 선생은 1905년 8월 22일 경남 밀양읍에서 태어난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출생이나 초등교육 과정에 대해서는 확실치가 않다. 조사 내용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지난날 오랫동안 그분의 수하직원이었던 사람은 "최독견(崔獨鵑)의 작품속에 박 선생을 모델로 한 글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박봉석 선생은 통도사(通度寺)와 표충사表(忠寺)의 장학생으로 중앙고보와 중앙불전(中央佛專)을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중앙고보 동기생의 한 사람은 "학생시절 박군은 성실 근면하고 책임감이 강했었다. 축구선수로 활약을 하면서도 특히 책을 많이 읽는 출중한 사람이었다. 학생시절부터 민족의식이 강했으며 6.10 만세운동에도 적극 가담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박 선생이 중앙불전을 졸업한 다음해인 1931년 4월에 지금의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신인 총독부 도서관에 들어간 것도 아마 그 분이 학생 시절부터 책을 좋아한 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체육인으로서도 진출할 길이 있었을 터인데, 공 보다는 '책'의 길을 택한 것이라 하겠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박 선생은 8.15 해방을 총독부 도서관 에서 맞이했다. 해방 당시만 해도 그분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매우 드문 편이었을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해방된 마당에 각 방면에서 활동할 수 있는 화려한 무대도 많이 전개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도 그분은 순교자적인 자세로 도서관만을 지킨 것이다. 사실 도서관은 화려하기보다 은미(隱黴)한 일이 많은 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분은 15년을 외곬으로 지켜온 그 직장을 기꺼이 그대로 지킬 각오를 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인들로부터 도서관을 고스란히 인수하느라고 한눈 팔 사이가 없었거나.......
그분은 해방과 더불어 재빨리 문헌 수집대를 만들어서 거리로 내보냈다. 등사판 또는 활판으로 인쇄되어 거리에 마구 뿌려지고 분해되는 인쇄물들을 빠짐없이 모아들였다. 건국의 문헌자료를 허술하게 취급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감투와 황금'에 혈안이 되어 난무하고 있을 때 박 선생은 거리에 버려진 포스터나 삐라 수집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이어서 태평양전쟁 중에 소개(疏開)되었던 도서의 회수, 미군정 당국의 법률도서 이관에 대한 도서수호운동, 국민학 교과서에 '도서관'을 넣기 위한 편수국과의 교섭 등 불면불휴의 나날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국립중앙도서관사에 대강 이런 내용들이 밝혀져 있다.
박봉석 선생의 진면목이 발휘되는 것은 앞에서 밝힌 것처럼 8.15 해방에서 6.25 동란에 이르는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우리나라 도서관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몰두하면서 「조선십진분류표 』와 「동서편목규칙(東書編目規則』을 편찬 간행했다. 몇 년이 걸려도 어려운 일을 불과 1, 2년에 이룩한 것이다. 일제의 잔재를 불식하고 우리의 자주적인 도서관을 만드는 데 얼마나 강한 집념을 가졌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 밖에도 수다한 귀중한 연구업적을 비롯하여 도협의조직, 국립도서관 학교 교수, 서지학회 창립, 동국대학 강사, 불교청년단장, 「국사정해」 발간 등 일인십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과중한 책무를 수행하면서도 하나의 차질이 없었다고 한다. 실로 초인적인 업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분은 교육에 대해서도 열의를 보여 바쁜 일과를 무릅쓰고 불우한 근로여성을 위한 야간 고등교육기관을 세워 무상교육을 시킨 듯하다. 국화여자전문학관(國華女子專門學館)이라는 이름이었는데 오늘날의 명지대학 전신으로 여겨진다고 어떤 기록에는 적혀 있다.
그분의 가족이 밝힌 바에 의하면 박 선생은 1950년 7월 13일, 6.25 동란의 와중에서 피난길을 외면하고 직장인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간 것이 마지막 길이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직장과 장서를 지키기 위하여 차마 딴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분이 지금(1981년)도 생존해 있다면 76세의 고령에 접어 들었을 것이다.
그분의 지난날을 말하는 제자들은 그분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제자들 속에 이처럼 뚜렷하게 부각되는 스승도 드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 선생은 뚜렷한 철학을 지녔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도서관을 통해서 겨레를 사랑하고 애국을 실천한 '사랑의 철학'이라고나 할까?
다른 분야에서는 기념관, 기념비도 세우고 장학회 학술상도 마련하는데 이분에 대해서는 아직 그런 논의조차 없는 것이 아쉽게만 생각된다. 이 기회를 통해서 관계요로에 <박봉석 기념사업회>의 발족을 제의한다.
(새교육, 1981.10.)
첫댓글 '잊을 수 없는 사람' 이라면 대개 큰 은혜를 입었거나 아니면 직접 감화를 받은 사람을 두고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말하려는 사람은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어서 이런 제목이 합당한 것인지 어떤지 주저가 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 사회에서 두고두고 기억되어 .... 박 선생은 1950년 7월 13일, 6.25 동란의 와중에서 피난길을 외면하고 직장인 국립도서관으로 달려간 것이 마지막 길이었다고 한다. 사랑하는 직장과 장서를 지키기 위하여 차마 딴 곳으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본문부분 발췌
전쟁 중에 피란길이 아닌 직장으로 달려가는 사람. 장서를 지키겠다고 아수라장이 된 길을 달려 직장으로 복귀하는 사람... 일면식도 없는 그는 정녕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분명하다. 오랜 세월이 흘러 누군가를 기억해주는 이가 있으니......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