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적 신앙을 가지고 인문주의자들을 환대했던 앙굴렘의 마르궤리트와 달리 남동생이었던 프랑수아 1세는 개신교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강력한 정책으로 맞섰다. 이 시기에 개신교적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은 박해를 피해 몸을 숨겼다.
칼빈의 은둔생활은 친구였던 니콜라 콥(Nicolas Cop)의 연설문을 대필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연설문이 파리 대법원을 뒤흔들었으므로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급히 피신하여 이후 망명으로까지 이어졌다.
칼빈은 은둔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책을 집필하고, 복음적인 신앙으로 진일보하였다. 은둔 기간에 칼빈이 만났던 인물들, 특히 훗날 니고데모파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인물들의 행보와 그에 대한 칼빈의 대응을 알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구분선 아래의 내용들은 우리 신앙에 유익함을 줄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내용들까지 파악할 수 있다.
“(전략)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당신들에게 지시하며 또한 매우 엄중히 명령하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서 일부를 선정해서 만사를 제쳐두고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그 루터 종파에 관계된 사람들, 즉 그 혐의가 있거나 강한 의혹이 드는 사람들, 또는 거기에 가담하거나 추종하는 사람들 모두를 색출해서 모조리 체포 현장에서 구속 기소하고, 도망자들의 재산을 압수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혐의 사실을 가지고 투옥시켜 놓은 사람들에 관해서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서 형벌을 부과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파리의 대주교와 그의 사제들에게 이단자들을 처음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의식과 의지가 없으면, 그 위법행위가 만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문관들 중 두 명을 위임해서 재판을 완벽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밝힙니다."1)
그렇게 프랑수아 1세는 1533년부터 복음전파자들과 싸우겠다고 결정했던 것이다. 콥의 피신을 알고 나서 칼빈은 포르테 대학의 그의 방을 급히 떠났다. 사람들은 그가 창문으로 도망쳤으며, 포도원지기의 옷을 빌려 입고 등에는 지게를 지고 어깨에는 괭이를 멘 차림으로 파리를 벗어났다고 말하기까지 한다.2) 그때, 그는 노용으로 갔다가 다시 생통즈(Saintonge)로 갔다.
그런데 그의 친구들 중의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let)가 그에게 앙굴렘으로 오도록 권유했다. 클레(Claix)의 사제이자 대성당의 참사원인 루이 뒤 틸레는, 학식 있고 관직에 많이 진출했던 가문에 속했다. 그의 집안은 칼빈을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거기서 칼빈은 3, 4천 권의 장서나 필사본이 진열되어 있는 긴 회랑에서 공부하는 것을 흡족해 했다. 그는 그렇게 공부에 몰두하면서 조용히 몇 개월을 보냈다. 1534년 3월경에 그는 오를레앙에서 그의 친구 다니엘에게 편지했다.
“당신이 흥미 있어 할 당시의 유일한 일은, 내가 잘 지냈고, 당신이 알듯이 무위도식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내 주인의 친절은 내 인격이 아니라 학문을 고무할 만큼 컸고-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장 무기력한 사람의 나약함을 충동했습니다... 나는 그렇게 조용히 피신과 은둔 기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가 원하시는 일을 하며, 그의 섭리는 더 나은 것을 이룹니다. 나는 그가 너무 오랜 미래를 예상하는 일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웠습니다. 나는 조용히 지내려고 했던 반면에, 내가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던 위기가 문 앞에 다가와 있었습니다.3) 반대로 내가 피신할 곳을 찾아 헤맬 때,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보금자리가 은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 그것은 주님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 자신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4)
여기서 엿볼 수 있는 절대 신뢰와 평화는, 다니엘에게 보낸 이전의 편지에서 나타났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칼빈이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심오한 신앙을 가졌다는 좋은 표시이다. 그렇다면 연구하느라고 밤을 지새웠던 "유명한 무위도식"의 공부는 무엇이었을까?
플로리몽 드 레몽이 전하고 있다. "앙굴렘은 이 새 뷜켕(Vulcain, 대장간의 신)이 전부터 공표했던 그 낯선 견해를 모루 위에서 만들어 놓는 대장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리스도를 농락하고자 코란, 또는 차라리 이단의 탈무드라고 불릴 수 있는 『기독교강요』 (Institution)라는 직물을 짰던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5) 곧 문학과 인문주의로 채색된 서클이 칼빈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가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그리스어를 그의 친구인 신부 클레에게 가르쳐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클레의 그리스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인정받고 평판이 높아졌으며,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았던 그는 자신의 연설 가운데서 종교적 주제를 자주 언급했으며, 항상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찌르고 들어가는 어떤 말을 던지곤 했다. 그는 곧 여러 명의 유력인사들로부터 지지받게 되었다. 가령, 부트빌르(Bouteville)의 수도자로서 곧 루터파의 교황이라고 불린 앙트완느 샤이유(Antoine Chaillou)와 바삭(Bassac)의 사제이다. 이 두 인물은 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좋은 서적이라면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모아놓고 있었다. 칼빈은 토르삭(Torsec) 공과 그의 형제인 라플라스(La Place)의 회장 등과 종종 함께 어울렸다. 그들의 모임이 앙굴렘 시의 교외에 있는 지락(Girac)이라 불리는 한 집에서 있었는데, 그 집은 주로 부트빌르의 수도자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칼빈은 그들에게 그의 『기독교강요』의 개략을 소개했고, 그의 신학의 모든 비밀을 열어주었으며, 그가 밤에는 자지 않고 낮에는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열심히 써나간 그 책의 항목을 읽어주었다.6)
“칼빈은 앙굴렘 시에서 저술을 계속하면서 몇 년을 지내게 되는데, 언제나 표면적으로는 카톨릭 교도인 것처럼 가면을 쓰고 살았으며, 교회도 가능한 한 나가려고 하지 않았지만 다니기는 다녔다. 성당측은 집회가 있을 때마다 하는 주기도문의 라틴어 영창을 관례에 따라서 그에게 부탁하기도 했으므로, 그는 성베드로 교회에서 그것을 서너 차례 했다. 앙굴렘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카톨릭에 대항하는 어떤 종교행위나 권유나 기도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그것을 실제화하지는 않았고, 그 세 명의 교회인사들(뒤 틸레, 부트빌르의 수도자, 그리고 바삭의 사제)과의 회합은 "진리”를 찾아가려는 토론의 형태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 “진리”라는 단어는 그가 어떤 책을 펼 때마다 일상적으로 했던 말이다. 그는 "진리를 찾아봅시다"라고 말하곤 했다.”7)
우리는 이 카톨릭 문서의 덕분으로 칼빈이 은둔하며 공부와 탐구에-이 연구 덕분에 『기독교강요』가 나왔다-열중했던 기간 중의 몇몇 자취를 포착할 수 있다. 그 기간은 진리를 탐구하는 노력에 몰입하는 배태기이자, 그의 학문의 은밀한 형성 기간이었다. 젊은 신학자의 심중에는 이미 카톨릭 교회를 떠났지만, 현지의 사제들을 위하여 설교를 작성해 주는 불분명한 기간이기도 했다. 여러 사람이 칼빈의 그런 태도를 확신이 부족했다고 비난한다. 그것은 (사안의) 중대성을 모르는 것이며, (당시에) 단절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것이다.8) 그리스도가 두 교단으로 깨끗이 나누어져 각각의 예배와 교리와 의전으로 인해-물론 어떤 갈등이 아직도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명백히 선택할 수 있도록 각기 형성된 현시대의 개념으로 그 점에 대해 정죄할 수 있다. 그러나 1534년의 프랑스에서는 어떤 형태의 복음적(프로테스탄트를 말함) 교회도 없었다. 그것은 그 이후로도 20년이 지나서야 세워질 수 있었다. 루터의 사상은 마치 앙굴렘 교외의 시골집에서의 집회나 루이 뒤 틸레의 서점에서와 같이, 어떤 수도원이나 연구모임이나 작은 비밀결사조직 같은 데로만 전파될 뿐이었다. 당시에 장작더미위에서 불에 타 죽은 순교자들도 있었다. 하나밖에 없었던 교회를 뛰쳐나온다는 것은 당시로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가면"이나 "음모”, “지하공작" 같은 말을 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복음을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길 앞에 선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진리를 향한 열정적 탐구나 시도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9)
1) Herminjard, Correspondance des Reformateurs, Ⅲ, pp. 115-116.
2) E. Doumergue, Calvin, I, p. 354.
3) 포르테 대학에서의 가택 수색을 암시하고 있다.
4) Herminjard, Ibid, III, p. 156. Dourmergue의 번역에 따름, I, pp. 371-372.
5) Florimond de Raemond, Histoire de la Naissance, Progreès et Décadence de ľHérésie de ce Siècle, Ⅶ, Ⅹ, p. 883.
6) Ibid., p. 884.
7) Ibid, p. 889. 이런 사실은 드 베즈에 의해서 확인된다. Op. Calv., XXI, p.56.
8) 괄호 안의 보충어는 역자의 첨가.
9) 칼빈의 앙굴렘 시절은 전설적인 자취를 다소 남겨두고 있다. 사람들은 드를렝쿠르가 1667년에 알아냈던 칼빈의 포도원이나 강의소, 방, 동굴 등을 아직도 제시하고 있다. 칼빈의 동굴은 도시 변두리에 있던 백악질의 절벽에 난 굴로서, 칼빈을 시골에 숨어 동아리모임에서 설교하는 쫓기는 인물로 묘사하고 싶어하는 전승과는 실제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장 카디에 지음, 이오갑 옮김,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5), pp. 52-56.
첫댓글 좋아요. 칼빈의 은둔 생활과 친구에 관한 글이네요.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네요.
네, 공감합니다.
바젤 Basel
스위스의 행정구역. 비르스 강과 비제 강의 어귀에 라인 강을 끼고, 프랑스·독일·스위스 국경이 만나는 스위스 라인란트 입구에 있다. 1501년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으며 네덜란드의 학자 에라스무스가 이곳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문주의와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종교개혁을 피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숙련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18세기에 이르러 길드가 정치권을 쥐게 되었다. 유통 중심지로서 스위스 총관세 수입의 1/3이 이곳에서 얻어지며, 국제결제은행이 있다. 스위스 화학 및 석유화학 산업의 중심지이며, 전기공학, 금융업, 기계류·견직물 제조업 등의 산업도 중요하다.
(중략)
1501년 스위스 연방에 가입했다. 1521~29년 네덜란드의 학자인 에라스무스가 이곳 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인문주의와 스위스 종교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반종교개혁을 피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숙련된 노동자들이 모여들었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길드가 정치권을 쥐게 되었다.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8b3219a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위치인 것 같습니다.
칼빈은 인문학, 성경원어와 성경 읽기에는 매우 탁월했지만 좁은 의미의 신학을 공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섭리에 의하여 신학도들이 필독해야 할 명저를 썼는데요. 이는 오늘 포스팅 기간의 은둔과 독서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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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칼빈은 앙굴렘(Angoulême)에 사는 친구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et)의 집에 숨었다. 루이는 클레(Claix)의 참사회원이었다. 앙굴렘에는 매우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기에 칼빈은 계속해서 학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 칼빈은 성경과 교부들의 서적을 연구하였다. 그는 많은 책을 읽으면서 기독교 강요 초판 작업에 몰두하였다.
칼빈은 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한 그가 종교개혁 사상을 표출하는 콥의 연설문을 쓰고 난 후 불과 3년 만에 기독교 강요를 썼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자들이 공부하는 책들과 연구 과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는 우선 1세대 개혁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개혁 사상을 튼튼히 하였다. 그는 루터, 부처, 츠빙글리, 멜랑히톤, 오이콜람파디우스 같은 개혁자들의 자료를 읽었다. 그 밖에 초대교회 공의회 자료,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의 저서를 공부하였다.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었다. 불과 27살 되던 해 신학을 공부한 적도 없는 평신도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였다.
(후략)
<--- 배경락 목사 (2017.5.2)
@장코뱅 은둔 생활 가운데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하고 기존의 신학을 능가하는 올바른 신학을 정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배경락 목사는 칼빈이 공식적으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건 조금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당시 유럽에서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라틴어를 비롯한 고전어를 기본적으로 배웠고, 종교가 일상을 지배하던 시대의 영향으로 신학이라고 명명하지 않더라도 신학적이라 할 수 있는 공부를 많이 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칼빈은 수도원 기숙학교인 몽테규대학에서 혹독하게 공부했습니다. 그 학교의 교사들이 수도사들이었을 테고, 어쩌면 지금의 신학교보다 더 원색적으로 고전과 중세철학, 신학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었죠. 이후 상급학교에서도 좋은 스승들을 만나 충분히 신학적이고 개혁적인 사상을 접했던 것을 보면 요즘 신학교보다 훨씬 더 깊고 방대하게 공부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코람데오 아마 현대와 같이 교육부 인가 졸업장에 전공과목 신학이 안 적혀 있다는 뜻 정도로 보면 되겠습니다.
책 제목이 마음에 드네요.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이고 섭리를 따라 종교개혁의 큰 일꾼으로 예비하신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멋진 댓글입니다!!
매우 유익한 글을 올려 주셔서 배우고 좋습니다. 앞으로의 연재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유익하고 재밌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 얻는 게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