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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宣)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며,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宣允祉)이다.
선씨(宣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는 서주 선왕의 희정(姬靜), 송 선공의 자력(子力), 노나라 재상 숙손교여(叔孫僑如)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서주 선왕이 시종(始宗)이다. 선(宣)씨는 옛부터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군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온다.
선(宣)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2,094가구, 38,849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70위이다. 본관은 보성(寶城) 단일본이다.
보성 선씨[편집]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옛부터 복호촌(伏虎寸=伏忽, 지금의 전라남도 보성)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여러 집안들이 각각 세를 이루어 후손들을 이루다가, 조선중기 각 집안이 족보를 편찬하던 17세기에 들어,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된 고위관직을 지낸 최초의 인물(그 기록이 선씨일문의 가승기록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었을 것으로 추정) 우의정 선형의 고조부(5대조)인 선윤지(宣允祉)를 시조로 삼고, 선윤지가 낙향한 전라남도 보성을 본향으로 삼았다.
선윤지(宣允祉)는 고려 우왕 때의 인물로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있으면서 전라도 해안 지방에 넘나드는 왜구를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으며,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보성에 정착하였다.[1]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로서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전라도 해안지방을 침범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선윤지의 아들 안혁(安赫)이 태종(太宗)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고, 증손 화(和)는 태종 때 여산 군수(礪山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의 진정(陳情)으로 두 번이나 고을 수령을 지냈다.
고손 형(炯)은 세조때 수많은 벼슬을 거쳐 적개공신과 좌리공신이 되고 유성군(楡城君)에 봉해졌으며 사후 시호를 평양공으로 받는 등 최고의 벼슬자리에 올라 선씨 일문을 우뚝 세웠다.
그리고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대첩과 행주대첩 등에서 큰 공을 세운 선무원종일등공신 선거이(宣居怡), 안동영장으로 청나라의 침입에 맞서 쌍령전투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선세강(宣世綱),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당하게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수사공 선약해(宣若海), 경상도 좌수사로 신령전투에서 왜구와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여 선무원종일등공신이며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선극례(宣克禮) 등이 있다.
16세기에 편찬된 역사상 최초의 통합족보인 씨족원류에는 최소 4계보에서 최대 8계보의 선(宣)씨들이 각기 살고 있는 것으로 기록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선(宣)씨는 전라도 보성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조선 순조 31년(1831년) 예조에 건의하기를 "감사 선윤지(宣允祉)는 명(明)나라의 학사(學士)로서 홍무15년(1382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그대로 보성(寶城)을 관향으로 하였었는데, 그 후손 절도사 선약해(宣若海)는 숭정(崇楨) 4년에 사신으로 심양(瀋陽)에 들어가 한마디 말로 강성한 오랑캐를 꺾어 굴복시켰으며, 안동 영장(安東營將) 선세강(宣世綱)은 병자호란 때 좌병사(左兵使) 허완(許完)의 중군(中軍)이 되어 쌍령(雙嶺)에 이르러 전망(戰亡)하였습니다.
명나라 사람의 자손으로 또 명나라를 위해 적을 꾸짖고 몸을 바친 것이 이와 같이 환히 드러났으니, 청컨대 그 후손으로 하여금 황단(皇壇)의 망배(望拜)하는 반열에 들어와 참례하도록 하소서.”라고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충사(五忠祠)"의 사액을 내리고 전라남도 보성에 사당을 지어, 향교로 하여금 매년 봄가을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현재 오충사는 보성군 보성읍 보성군청앞 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강매동 등 2곳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宣允祉)와 세계가 확인되지 않으면서 보성의 조성(鳥城)과 도촌(道村)을 세거지로 하면서 선용신(宣用臣)을 시조(始祖)로 하는 도촌계열의 선씨도 있다.
도촌계열의 선씨와는 1978년(무오년)에 합보를 하였으나 그후 도촌계열에서 다시 별보를 함으로서 각자의 시조를 모시고 다른선씨로 살아가고 있다.
신유초고 : 신유년(1681년)에 시작하였으나 초고만 남기고 완성되지 못함. 초고에서 선복주님은 오선개조안렴공(吾宣皆祖按廉公)이라는 시를 남겨 안렴공(선윤지)가 시조임을 밝힘.
·기사보 : 1749년 보성선씨 최초로 완성된 족보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라고 기록함)
·을사보 : 1785년 보성선씨 기사보를 수정, 보완하여 발간(문송영제 수록, 문송영제란 보성선씨간 시조논쟁에 대한 1768년의송사결과 판결문)
·정미보 : 1847년
·정미보 : 1847년 수정발간
·신해보 : 1851년
·을묘보 : 1855년
·을해보 : 1875년
·계사보 : 1893년
·정사보 : 1917년
·경오보(참의공파보) : 1930년
·임오보(옥암공파보) : 1942년
·정해보(선전공파보) : 1947년
·을미보 : 1955년
·무오보 : 1978년 (선윤지 후손과 선원지 후손이 합보하였으나, 선원지 후손이 다시 분파하여 별보를 함)
·정축보 : 1997년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고려말 호남안렴사; 지금의 전라남북도 도지사)로 보성선씨 족보를 처음으로 만들려고 했던 1681년부터 보성선씨의 시조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1681년 신유초고(보성선씨 최초로 족보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서문만 남아 있는 중요한 기록)에도 우리 모든 선씨의 시조는 안렴공(선윤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조도선씨(조성,도촌을 세거지로 하는 선씨), 도촌파의 주장인 1681년 부터 시조를 선용신으로 하였다는 것은 기록으로 확인한 결과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선씨 모두의 시조는 안렴공(선윤지"이라는 글은 후손인 당시 보성선씨 문중의 문장(門長)이신 선복주님이 신유초고(1681년)에 칠언시로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조도선씨들은 이 기록에 대해 자신들의 기록에 없으니 거짓이라고 얘기하겠지요.
2. 조도선씨(도촌파)족보 정축보(1757년)에 선윤지(보성선씨의 시조)가 자신들의 시조 선용신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보성선씨 몰래 조도선씨 족보에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기록한 거짓기록입니다. 이의 명확한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 보성선씨 최초족보는 1749년(기사년)에 최초로 선씨 족보를 만들었으며, 그 족보에는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고려시대 안렴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성선씨 최초족보 기사보 (1749년)를 제작할 무렵 조도선씨는 선용신이 시조라고 주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주장은 선원지와 선윤지의 역년이 서로 달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그 당시 보성선씨와 세계(世係)를 확인해 보아도 도저히 보성선씨와 세계를 연계할 수 없어 선용신을 시조로 주장하는 조도 선씨를 제외하고 보성선씨만의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 보성선씨 최초족보인 기사보(1749년)보다 8년 늦은 1757년(정축년)에 조도선씨들은 자신들만의 족보를 만들면서 보성선씨와 합의되지도 않았고, 검증되지도 않은 내용인 선윤지가 선용신의 손자라고 보성선씨 몰래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족보에 기록하였습니다.(당초 정축보 인쇄본에는 기록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수기(손으로 기록)로 선윤지를 기록 : 정축보를 보면 확인이 가능함)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가 선용신의 손자라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성선씨는 조도선씨의 족보에 기록된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를 삭제하라 지속 요청도 하고, 보성선씨의 시조를 가리는 여러번의 송사도 있었습니다.
1768년(무자년)에 문송영제라고 하는 양 문중의 시조를 가리는 송사에 대한 판결이 있었습니다.
당시 보성군 군수의 의견을 들어 전라 순찰사가 판결하기를
1)조도선씨 선원지(선용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고(이 글을 해석하면 선용신이 시조가 아니고 선윤지가 시조라는 뜻)
2)선원지의 지자가 항렬이 같다고 하여 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없다고 하였고(선윤지와 선원지는 형제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 즉, 선용신과 선윤지는 관계가 없다는 뜻)
3)조도선씨 집안에서 선씨의 종통을 차지하고자 하는 음모라고 하였으며,
4)선윤지를 시조로 하는 보성선씨에 조도선씨의 주장대로 하루 아침에 아버지와 조(선용신), 형(선원지)을 기록하는 것은
모든 선가에 대망발이라 판결하여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임을 확실히 판결하였습니다.
이 판결결과는 보성선씨 족보 을사보(1785년)에 '문송영제' 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조도선씨들은 자신들의 기록에 없으니 믿을 수 없는 거짓판결이라 하겠지요.
1681년에 만들어진 신유초고의 서문(선윤지 후손 선응뢰 지음)과 선남두님의 칠언시는 조도선씨 족보에 실려 있고, 그와 같이 쓰여진 당시 보성선씨의 문장이신 선복주님의 칠언시에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임을 명확히 밝힌 증거가 있고,
1768년에 시조를 가려달라는 송사에서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임을 확실히 판결하였고, 보성선씨와 조도선씨는 서로의 상관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바, 각자 시조를 모시고 살아라라고 판결하였는데, 지금 시점에도 보성선씨의 시조 선윤지가 선용신의 손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조도선씨에서 주장하는 선대(선용신, 선선유, 선좌, 선중길, 선중의, 그 아래 여러 대)에 대한 근거를 아무리 찾아 봐도 근거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선용신에 대한 기록이 려사제강에 실려 있다고 해서 려사제강을 완독하였는 바, 려사제강에 선용신을 비롯한 조도선씨의 선대에 대해서 전혀 기록이 없었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실존했던 근거가 없는 선용신을 보성선씨의 시조로 삼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조도선씨의 기록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발발시 절충주부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선거이, 선극례와 함께 선무원종공신으로 추봉된 선여경이 조도선씨의 인물중 역사 기록에 등장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그래서 일부 선씨는 조도선씨의 시작은 임진왜란 전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중의의 호구첩(보성선씨는 거짓기록이라 판단) 하나만으로 600년 이상 보성선씨의 시조로 모셔온 선윤지를 전혀 실존 근거도 없는 선용신으로 바꾸라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1681년 최초 족보 수보시 부터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와 선용신(선원지)는 세계가 확인되지 않고, 역년이 위착되어 서로간의 관계를 확인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지금까지 왔는데, 조도선씨는 그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리하고 결론이 날 수 없는 주장인 것입니다.
최근 10여년 이상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조도선씨들의 주장을 할만큼 했으면 그만 할 때 되지 않았습니까? 더 이상 서로를 헐뜯고 상잔하는 것 이제 그만합시다.
조도선씨들의 주장은 호구첩, 계축가승, 자신들만의 족보로 주장하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보성선씨 문중에도 조도선씨 기록보다 먼저 기록된 족보가 있고 기록이 있고, 그 기록에 모두 보성선씨 시조가 선윤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어찌할까요?
보성선씨 선대의 기록인 신유초고(1681년), 기사보(1749년), 을사보(1785년) 기록은 믿지 말고, 조도선씨 선대의 기록인 정축보(1757년)와 병오보(1786년) 기록을 믿어야 할까요?
아래에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에 기탁된 문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중연에 고문서를 기탁하면 갑자기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에서 선용신으로 바뀝니까?
한중연에서는 기증된 문서에 대하 고문서로의 가치는 인정했을지 모르지만 보성선씨 문중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한중연이 기증된 문서로 인해 보성선씨 시조가 선용신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한중연의 역대인물을 찾아보면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라고 되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요? 결론적으로 고문서 기탁은 기탁에 의의를 가져야지 보성선씨 시조문제와 연계할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이유인데, 한중연을 국가의 기관으로 그렇게 믿는다면 보성선씨의 시조는 선윤지이다라는 한중연의 공식기록 또한 믿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조도선씨가 한중연에 기탁한 고문서에 의해 시조가 선용신임을 증명했다는데, 가당치 않는 주장에 대해서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1.기탁문서인 조도선씨 족보에 대한 의견입니다.
조도선씨의 최초 족보는 정축보(1757년)인데 정축보가 제작되기 8년전에 보성선씨 족보 기사보(1749년)가 발간되어 보성선씨 시조가 선윤지(퇴휴당)임이 이미 기록되어 있고, 그 이전 신유초고(1681년)에 작성된 기록에도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안렴공)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으니, 조도선씨 족보만을 가지고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용신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알수 있는 것은 조도선씨의 시조가 선용신임은 알 수 있습니다.
2.두번째 기탁문서 선중의의 호구첩에 대해서 입니다.
이 호구첩은 1757년에 조도선씨 족보에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호구첩에 대해서 보성선씨 문중에서는 보성선씨와 상관없는 문서이며, 이 호구첩의 내용에는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퇴휴당)의 기록이 전혀 없기에 보성선씨와 상관없는 호구기록이라 말합니다. 선중의의 호구첩에 보성선씨 시조인 선윤지에 대한 기록은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호구첩으로 인해 선용신의 손자가 선윤지로 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선중의의 호구첩으로 선윤지와의 상관이 있다고 주장을 하려면 호구첩 어딘가에 선윤지에 대한 기록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아쉽게도 선윤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참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됩니다.
호구첩으로 알 수 있는 것 역시 조도선씨의 선대인물중 선용신이라는 분이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호구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헛점투성이의 호구첩입니다.
호구첩이 정상적으로 발급된 호구첩인지 의심가는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의견은 별도로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상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3.세번째 기탁문서인 선무원종공신록권에 대한 내용입니다.
선무원종공신록권은 현재 10부 정도 남아있는 임난 공신기록이며 각 성씨별 대표문중의 적장손 집안에 한권씩만 하사했다고 조도선씨들은 지난 수십년 주장해 왔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요? 거짓말 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선여경의 선무원종공신록권의 문제점에 대해 말씀드리면
1)표지에 선무원종공신록권이라 기록되어 있어야 하나 보성선씨록권이라고 쓰여 있어 표지제목이 다릅니다.
2)록권의 첫페이지에는 록권에서 가장 중요한 록권을 발급받은 개인의 신분과 성명을 기록하게 되어 있는데, 기증된 록권의 첫 페이지는 훼손되어 누구에게 발급된 록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선여경에게 발급된 록권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훼손된 사유가 황당하지만 후손들이 너무 많이 들여다 봐서 첫페이지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하여 왔습니다. 하지만 그 뒤 페이지는 정상인 것을 보면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3)거기에다가 이 훼손된 첫 페이지를 필사본으로 기록,보관해 왔다고 합니다. 필사본 역시 개인의 신분(직급)과 성명을 기재해야 하는 란에 먹칠이 되어 있어 신분(직급)과 성명도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정(正)이라 쓰여져 있는 직급을 병사(兵使)로 수정한 흔적이 보입니다. 원본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자세히 살펴볼 일입니다.
보성선씨 문중에는 시조 선윤지의 후손인 선광회에게 지급된 선명한 원본 그대로 400여년 넘게 선무원종공신록권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보성선씨의 정통문중은 선윤지(퇴휴당)후손이라고 인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4.네번째 기탁문서인 소지문서 3종에 대한 의견입니다.
이 기탁된 소지문서는 보성선씨 시조에 대한 분쟁관련 소지들입니다. 그렇다면 기탁된 소지의 판결결과문에 선용신이 시조라고 판결받은 내용이 있는지요? 판결결과에는 선용신이 시조라고 판결한 결과는 단 한줄도 없습니다. 대부분 판결결과는 내용을 확인후에 조치를 하라는 판결인데, 그 주장이 옳다고 판결한 결과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이 소지문에서는 조도선씨들이 주장한 내용은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이 주장일 뿐 사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한중연에 기탁된 조도선씨 소지문서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소지(판결)결과가 원문의 진실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내용은 없는 지, 조도선씨의 입장에서 원본에서 글을 잘라내고 고쳐 쓴 부분은 없는지 잘 확인하여야 합니다.
조도선씨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기록을 수정하고 고쳐써서 유리하게 기록한 것은 진실로 잘못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면 잘라내고 고쳐쓴 사례들이 여러가지가 발견됩니다. 알고서 그리하였다면 진실로 반성해야 할 것이며, 모르고 했다면 족보를 더 자세히 봐야 할 일입니다.
참고로 보성선씨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송영제'의 송사결과 보성군수의 의견을 들어 전라순찰사가 판결한 판결문에는,
1)조도선씨 선원지(선용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였고(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원지(선용신)라는 것이 사실이 아님을 말함),
2)선원지의 지자가 항렬이 같다고 하여 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없다고 하였고(선윤지와 선원지는 형제관계를 증명할 수 없다. 즉, 선용신과 선윤지는 관계가 없다는 뜻)
3)조도선씨 집안에서 선씨의 종통을 차지하고자 하는 음모라고 하였으며,
4)선윤지를 시조로 하는 보성선씨에 조도선씨의 주장대로 하루 아침에 아버지와 조(선용신), 형(선원지)을 기록하는 것은 모든 선가에 대망발이라 판결하여 보성선씨의 시조가 선윤지임을 확실히 판결하습니다.
5.다섯번째 기타 소지 3종에 대한 의견입니다.
조도선씨 선대의 벼슬관련 징표내용이 들어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도선씨들의 선대에 대한 벼슬기록에 대해 후손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다시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소지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보성선씨 시조와는 상관없는 조도선씨 문중의 일이기에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한중연에 기탁한 문서만 가지고 보성선씨 시조가 선윤지가 아니고 선용신이다라는 근거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조도선씨들이 소지문서를 통하여 시조가 선용신이라고 주장한 내용은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보성선씨 문중에서는 당초부터 시조가 선윤지(퇴휴당)라고 하는데, 조도선씨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보성선씨 시조가 바뀔 수 있는 것인가요?
아래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의 인물사전에 나오는 보성선씨 시조 선윤지의 글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기록내용>
인물 사전 : 선윤지(宣允祉) [요약정보] UCI G002+AKS-KHF_13C120C724C9C0U9999X0 호 퇴휴당(退休堂)
호 용암(龍庵) 생년 ?(미상) 졸년 ?(미상)
시대 고려후기 본관 보성(寶城) 활동분야 관료
[상세내용]
선윤지(宣允祉)에 대하여 생졸년 미상. 고려 말의 관리. 호는 퇴휴당(退休堂) 또는 용암(龍庵)이다. 보성선씨(寶城宣氏)의 시조이다.고려말에 명(明)나라의 학사(學士)로서 홍무 15년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다가 귀화하였다.(주1)귀화 『순조실록』 32권, 순조 31년(1831) 9월 1일 기사를 참고. 1382년(우왕 8)에 전라도 보성에 왜구가 침입하자 전라도안렴사 (全羅道按廉使)(주2) 안렴사 『신증동국여지승람』 40권, 전라도 보성군편을 참고. 가 되어 왜구를 물리친 후 백성을 위로하고 안정시켰으며 유학 보급에 힘썼다. 이후 보성(寶城)에 은거하여 보성을 관향으로 삼았다. 보성 오충사(五忠祠)에 배향되었는데, 1830년(순조 30)에 오충사에 사액이 내려졌다.
[주 1] 귀화 : 『순조실록』 32권, 순조 31년(1831) 9월 1일 기사를 참고.
[주 2] 안렴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40권, 전라도 보성군편을 참고.
[참고문헌]
『大東韻府群玉』 『신증동국여지승람』 『순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청선고』 『國朝寶鑑別編』 『山陽誌』 『皇朝人本朝忠臣目錄』
현대 인물로는 초대 외교통상부 장관 선준영, 前 하이마트 회장 선종구, 국회의원 선경식, 선병렬, 배우 선동혁, 야구 감독 선동열, MBC 프로듀서 선혜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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