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상가의 팝업스토어
주영중
파란시선 0128
2023년 6월 1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41쪽
ISBN 979-11-91897-57-9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곳은 곧 당신입니다
[몽상가의 팝업스토어]는 주영중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점령군처럼」, 「섬세한 노동」, 「몽상가의 팝업스토어」 등 5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주영중 시인은 2007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시집 [결코 안녕인 세계] [생환하라, 음화] [몽상가의 팝업스토어]를 썼다. 현재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전반에 걸쳐 도시 속 일상을 “착란”에(「게이트 징수원의 눈물」) 가까운 몽상으로 그려 낸 시인은 어느덧 몽상 가운데 팝업스토어를 차리고 독자를 기다린다. 독자들이 저마다 가진 ‘가장 민감함 자유’와 더불어 그들의 몽상이 우주에 이르기까지 넓어져 갈 때, 시인은 “블랙홀 같은 가게”인 팝업스토어에서 독자를 기다린다.(「몽상가의 팝업스토어」) 거듭되는 몽상적 이미지의 전개 속에서도, 이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발화되던 화자의 목소리 또한 항상 함께 존재하던 것을 생각하면, 시인은 팝업스토어 주인으로서 계속해 우릴 기다려 왔던 것일지 모른다.
몽상가들을 위해 새로운 무언가를 홍보하고 판매하는 몽상가의 팝업스토어, 그 새로운 무언가란 두말할 것 없이 파국, 진짜 파국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저 진짜 파국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파국을 파는 이 가게가 아직 팝업스토어인 것이 말해 주듯, 아직 파국의 사랑을 많은 이들이 실현하기엔 더 많은 과정들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몽상가 시인에 따르면 몽상은, 더 정확히 ‘몽상 다음의 몽상’은 저 추가적인 과정에 거듭 요청되는 주요한 방법으로 보인다.
몽상을 주제로 하는 또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시로부터 도망 중이다/증오로부터/저 열도로부터 열렬한 열도로부터”로 시작해, “겨우 생명만 유지한 여름이 지나고/극한 계절에 맞닥트린 벌레를 떠올린다/몸으로 얼음을 만들던 벌레를”로 끝을 맺고 있다(「그리고의 몽상」). 시인에 따르면 먼저 우리는 기존의 “시로부터 도망”쳐야 하는데, 몽상을 낳은 원인으로서 “증오로부터/저 열도로부터 열렬한 열도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남기고 간” 인생 요리법이 오직 “분노”와 “단말마적 지진들”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한 시인으로선 자신의 자녀들에게 동일한 역사를 넘겨줄 순 없다(「인생 요리법」).
그러나 그렇다고 몽상 자체를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몽상과 더불어 우리는 비록 절반의 자유이지만 소위 ‘현실’이라는 것에서 최대치로 벗어나 그 가운데 예언자의 팝업스토어를 마주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몽상만이 그 고유의 부정 능력으로 기존의 몽상을 부정하며 갱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몽상은 몽상 이후의 몽상, 즉 진짜 파국 이후의 몽상이 되어야 하는바, 관련해 몽상가들마다 다양한 양태의 것들을 만들어 내겠지만, 만약 여전히 저 파국이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한다면 “겨우 생명만 유지한 여름이 지나고/극한 계절에 맞닥트린 벌레”가 결국엔 “몸으로 얼음을 만들”었던 것을 떠올리는 시인의 몽상을 함께 따라가 보자. 파국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연습에 다름 아닐 이 몽상은 기존의 시로부터 도망을 꿈꾸는 몽상 이후의 몽상으로, 적어도 파국의 사랑을 몸소 실현하는 과정의 첫걸음만큼은 분명히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이는가. 그러나 방향만큼은 명확해졌다. 급할 것 없이, 예언자가 보여 주는 이 방향으로 모두 한 걸음만 나아가 보자. 한국 시단의 새로운 10년을 추동할 힘은 여기 ‘진짜 파국’에 있음을, 이 오래된 예언자들에게 있음을 조심스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 양순모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입성한다. 시간의 리듬이 삶의 영속하는 아픔과 슬픔의 근원에 닿을 때, 우리의 영육에 촉지될 때, 주영중의 이미지는 미지(未知)에서 지(知)로 형질 변환된다. ‘미(未)’에서 ‘미(美)’로 변태한다. 작품을 앓고 겪으면서, 단언컨대, 독자는 “일상의 가시”에 찔리게 될 것이고, 시인의 섬섬(閃閃)한 감각의 그물이 길어 올린 성찰의 진술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아닌 자/나를 내몰지 말라”는 선언이 심장을 관통하는 총알 같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가능에 대한 언어의 투쟁 주체, ‘시인-투석기’를 만난다.(「섬세한 노동」) 주영중은 볼록렌즈이자 오목렌즈이고―수렴과 확산의 주체이고―포획하고 구축(驅逐)하는 변양체이다.
환영합니다. 당신은 지금 「몽상가의 팝업스토어」에 들어오셨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순간” 당신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비존재입니다. 존재하려고 하는 의지이자 실행되지 않는 불규칙입니다. 지금 당신이 머무는 “이곳은 곧 당신”입니다. 독자는 [몽상가의 팝업스토어]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 꼬리를 목격하고 보르헤스의 우주 도서관 안을 유영한다.
귀환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곳’에서 시인은 “사슬처럼 묶인 몸을 움직”이라고 청유한다. “그 집에서 벗어나/멀리에서 춤을” 추라고 명령한다. 「이중 사슬」이 드러내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격절은 육친의 죽음을 통과하는 아들의 그리움에 사무친 비명이고, 오이디푸스의 저항이다. 새로운 생명이 발생하고 있다. 시원과 종말, 닫히고 그리고 열린다. 동시에 또한 한꺼번에.
환몽한다. 주영중의 시는 “반투명”하다(「빵이라는 말」). 그의 시는 보이고 보이지 않고 더불어 보여지지 않는다. 투명과 불투명이 명멸하다가 서로 멸망하다가 “망루”처럼(「코드 블루」) “갱신”한다(「갱년」), 하려고 한다. 영원히 완료될 수 없는 삶의 나날들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인이 마법을 펼쳐 보인다. “흰 새라 발음하자 비상의 흔적 속에 음악 없는 저녁”이 다가온다(「아이와 감자전」). 고투 끝에 “애써 외면할 수 있어도/벗어날 수는 없는 사랑”을 발견한다(「언 발 찬 밥」). “아무도 아닌 자로 흩어지”면서 “아무도 아닌 자로” 살아가는(「∞」) 시인과 우리의 삶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그 무엇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기적, 아직 사라지지 않은, 사랑을 껴안는다. “아기가 꽃처럼 말을 뱉는데/먹고 마시고 웃는데/아기의 심장은 어딜 향해 오르고 있나요”(「기적에 대한 몽상」). 당신이 [몽상가의 팝업스토어]의 문을 열고 나온다. 잠시 후, 당신에게, 사랑이라는, 기적이 실현될 것이다.
―장석원(시인)
•― 시인의 말
먼 살갗이 스쳐 간다
아니
통과했을지도 모른다
빛 너머의 빛이
터졌으니
다시
척박한 지대를 건넌다
다행이다
•― 저자 소개
주영중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7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결코 안녕인 세계] [생환하라, 음화] [몽상가의 팝업스토어]를 썼다.
현재 대구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점령군처럼 – 11
게이트 징수원의 눈물 – 14
키리코, 그 겨울의 우울과 신비 – 16
타임캡슐 – 17
굿바이! 고비—구름의 몽타주 – 18
흰 마스크족의 전설—설영(雪影)에게 – 20
꽃, 피, 벽 – 25
섬세한 노동 – 26
손의 춤 – 28
∞ – 30
제2부
광명역에서 – 35
불투명 육체 – 37
그림자 없는 태양 – 39
유형지 – 41
굿바이! 고비—낙타에게 보내는 서한 – 43
악몽 – 45
소음에 가까워지다 – 47
프랑켄슈타인의 심장 – 50
욕망 기계—n차 발굴 – 52
일몰증후군 – 53
그리고의 몽상 – 54
폐허의 섬에 닻을 내리는 시간 – 56
몽상가의 팝업스토어 – 58
제3부
아이와 감자전 – 61
가을 미용실, 라벨르 – 62
물푸레 식탁 – 63
거울의 제단 – 66
수명 다한 전구를 갈고 – 68
박새 울음소리가 굴참나무 숲을 데리고 온다 – 70
덫 – 74
목줄에 대한 명상 1 – 76
목줄에 대한 명상 2 – 78
인생 요리법 – 80
이중 사슬 – 81
언 발 찬 밥 – 83
그림자가 겹치다 – 84
제4부
오슬로의 밤 – 89
미지의 살갗 – 91
긴 외출 – 93
갱년(更年) – 95
책의 화형식 – 99
코드 블루 – 102
기적에 대한 몽상 – 105
빵이라는 말 – 107
미래의 집 – 109
구름 속 강의실 – 111
고양이 게임 – 114
술래잡기 – 115
기린 심장 – 116
사이 – 118
해설 양순모 파국 이후의 파국, 몽상 이후의 몽상 – 120
•― 시집 속의 시 세 편
점령군처럼
그는 오늘 아침 후투티로 현현했으며 산딸나무 하얀 꽃잎으로 피어났다
한동안 오지 않던 그가 점령군처럼 왔다
은밀한 햇빛 속에서 산란하던 먼지들처럼
무자비한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얼마든지 공간을 점유한다
왜 그런 자가 존재를 들켜 오래도록 어린 아기의 울음과 기이한 웃음과 모방의 언어를 흘리는 걸까
그윽한 도둑처럼 사라지거나
한 움큼의 물로 두 손을 빠져나가는
생활을 조금이라도 지우지 않는다면 결국 끔찍한 일이 일어날 거야
바람이 휘저은 구름 호수에 젖은 저물녘
거꾸로 오르는 엘리베이터 물에 빠진 아파트 물의 벌어진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던 그가 쏟아진 아가미로 낙낙한 숨을 쉬고 물로 된 밥과 물로 된 반찬 물로 된 칼날의 통증
눈에서 나온 물이 호수와 뒤섞이고 그리하여 그는 둥근 물의 평원과 알지 못할 물의 나라 물의 대지로 나를 인도했으며
물의 평등 물의 침범 물의 언어 물의 사랑 물의 행적을 보여 주었다
드디어는 물의 광란 물의 해일에 이끌리는 시간
피가 물처럼 설레고
그의 얼굴은 물살로 기억되기도 한다
달빛, 두려움의 냄새가 풍기어 왔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어색한 악수를 나누고
무한의 공간을 응시한다
오염된 거라구
나쁜 공기에 떠다니는 얼굴
잠시,
무정형의 데스마스크
어느 날 물속으로 사라진 거미가 은빛 줄을 튕겨 쇳소리를 연주했고
나는 늘어진 시간을 잡아당겨야 했다
두 손에 탈장된 언어를 그러쥔 채 죽은 언어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
섬세한 노동
욕망의 또아리 추락 절단 끼임 충돌 질병 불안 공포 우울 질식 돈돈돈 당신들 당신들 당신들 나를 내몰지 말라
허공에서 내려올 수 없는 몸을
말려들어 가는 몸을 잘린 손가락을
아직 지상에 도달하지 못한 몸을
전율하는 눈을
차가운 죽음의 온도에 잠시 살갗을 대어 본다
당신에게로 움직이는
노동의 몸이
당신에게로 당도할 수 있을까
노동헌장을 다시 적는다
모든 노동은 섬세하므로 그 여건도 섬세해야 한다
섬세한 보호 속에 노동할 권리가 있다
젓가락으로 작은 멸치를 집어 입속으로 가져갈 줄 알고 가는 실을 바늘귀에 꿸 줄 아는 몸 먼 곳에 있는 동료에게 공을 차 넘기고 차의 속도와 도로의 차선에 미세하게 반응하는 몸 작고 뾰족한 가시 조기 가시 장어 가시 고등어 가시 나무 가시 선인장 가시 일상의 가시 투명한 가시 그런 얇고 작은 가시에 박혀도 불편하고 아픈 몸 뜨거운 차를 조심스레 마실 줄 아는 그런 몸 그런 몸을 움직여 노동 쪽으로
노동의 꼬리를 잡자 이내 모든 노동 쪽으로 움직여 나가기 시작한다 노동의 척수를 지나 노동의 내장을 지나 노동의 통증 쪽으로 하얗게 질린 뼈마디가 추락하고 충돌하기 시작한다 노동의 혈관을 거쳐 노동의 끝까지 돌아 나온다 질식할 것 같다 그곳에서 지옥으로 내몰린 공포의 얼굴들을 마주한다
아무도 아닌 자
나를 내몰지 말라
마지막 밤을 볼 때까지
스스로 도착하고 떠나도록
세계의 몸을 위해 ■
몽상가의 팝업스토어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이곳은 무한의 골방이자 공명의 성소, 기다림과 얽힘의 무한궤도 불쑥 하고 열릴 겁니다 언뜻언뜻 떠올라 올 때가 있을 겁니다 무심코 들르세요 당신의 시간 속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다시 나타날 순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상념의 거리를 걷다 당신은 그저 발길을 돌려 자동문 너머로 스르르 들어오면 됩니다 언어들이 나비처럼 떠다니고 무정형의 층마다 무정형의 공간이 튀어나올 겁니다 당신은 아득한 빛 속으로 증발하기도 하고 다른 차원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습니다 놀라지는 마세요 어디선가 다시 솟아날 테니까요 진열된 감정 앞에서 시계의 초침이든 바람이든 나뭇가지든 그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시면 됩니다 이곳은 곧 당신입니다 당신이 가진 송신기에 어떤 번호를 입력해도 언제든 연결될 겁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블랙홀 같은 가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