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가드너(Ava Gardner 1922~1990)
'금발 미녀들'이 '스크린'을 주름잡던 즈음에 특이하게도 짙은 갈색
'머리결' 과 녹색 눈동자의 미녀(美女)가 '스크린'의 한 축(軸)을 지배했다.
'천사(天使)의 얼굴, 여신(女神)의 몸매'로 알려진 '에바 가드너' 가 그 존재
였다. 1946년, 우직한 한 남자를 범죄와 죽음으로 몰아넣은 고혹적인
'팜므파탈' 로 등장한 영화 '킬러스(Killers)' 로 존재를 널리 알린 그녀는,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실제 삶으로 더욱 팬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에바 가드너' 는 192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州에서 목화와 담배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록색 눈의 갈색머리를 한
그녀는 18살이 되자, 놀랄만한 미녀(美女)로 성장했다.
1941년 결혼한 언니를 만나러 뉴욕에 들렀다가, 사진작가 인 형부가
처제의 미모에 반해 인물사진을 촬영하자고 졸랐다. 사진 작품에 흡족해진
그는 자신이 운영하는 스튜디오 쇼윈도에 그녀의 사진을 내걸었고, 이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됐다. MGM사 자회사의 직원으로, 신인배우
선발에 관여 하던 어떤 사람이 그녀의 사진을 보고는 애가 닳아 인터뷰를
주선하려고 나섰다. 영화사는 연기경력 제로인 그녀와 정식계약을 맺었다.
오직 그녀의 미모만으로 결정한 일이다. 학교를 그만 두고 여동생과 함께
뉴욕으로 온 그녀에게 MGM이 맨 먼저 한 일은 그녀의 투박한 남부 사투리
억양을 교정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1941년 'Shadow of the Thin Man' 을 시작으로 1946년까지 17편의
영화에 출연한 다음 'Whistle Stop(1946)' 이라는 B급 영화에서 주연으로
출연했다. 그러나, 헐리우드 영화팬들에게 그녀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
시킨 영화는 MGM이 유니버셜 社에 그녀를 임대해 무명의 '버트 랭카스터'와
함께 찍은 '킬러스(The Killers, 1946)'에서였다.
제작비 확보 문제로 신인 남녀배우를 쓴 이 영화는 그녀와 함께 '버트 랭카스터'
라는 카리스마의 혜성과도 같은 등장을 알린 영화이기도 하다.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을 기초로 한 이 작품에서 이 영화를 본 '헤밍웨이'가
자신의 작품을 각색한 영화들 중 처음으로 '제대로 만든 영화'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아무튼 '에바 가드너' 는 '팜므파탈'을 연기한 이 영화를 통해 새로운
섹스심볼로 떠올랐다. 1947년 아카데미 감독상 등 4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1964년에는 '돈 시겔' 감독이 동명의 타이틀로 '리 마빈'과 후일 미국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 이 출연한 리메이크 필름을 찍었다.
LA에 도착한 직후 '에바'는 같은 MGM 소속의 '미키 루니'를 만났고, 뭐가
그리도 급했던지 이듬해 1월에 결혼했다. '에바 가드너' 의 나이19세,
'미키 루니'는 21세로 시작된 이 결혼은 이듬해 성격 차이로 인해 끝나고
말았다. 후일 '미키 루니'는 '에바 가드너'가 잠자리에서 얼마나 황홀했는
지를 읊조리곤 했는데, 이 소문을 전해들은 '에바'는 이렇게 받아쳤다.
"흥, 그는 섹스를 즐겼는지 몰라도, 난 그러질 못했어."
'에바' 와 17년간의 계약을 맺은 MGM에서 그녀는 별다른 두각을 내지
못했고, 스스로도 자신의 연기력에 자신감을 갖지 못했다.
그녀의 잠재능력을 끌어낸 준 것은 '존 포드' 감독이었다. 1953년에 찍은
'모감보(Mogambo)' 로 그녀는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에 올랐지만,
아쉽게도 '로마의 휴일' 의 '오드리 헵번' 에게 밀렸다.
팬들은 1964년 '이구아나의 밤(The Night of the Iguana, 1964)'에서
그녀가 일생 일대의 연기를 보였다고들 입을 모았지만, 수상의 기회는
얻지 못했다. 그녀의 대표적인 영화로 꼽히는 작품들은 이 외에도
'장사치들(Hucksters, 1947)' '쇼보트(Showboat,1951)' '맨발의 백작
부인(The Barefoot Contessa, 1954)'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 1957)' 그리고 '그날이 오면(On the Beach, 1959)'을 들 수
있겠다.
'미키 루니' 와 이혼후, 재즈 뮤지션 '아트 쇼' 와의 두번 째 결혼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영화 외적으로 그녀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각인시킨
사건이 1951년 발생했다. 당대 최고의 가수이며 배우로 활동하던
'프랭크 시나트라' 가 가정(家庭)을 박차고 나와 그녀와 결혼한 것이다.
연예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당시 '에바 가드너' 는 최고의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프랭크 시나트라' 는 마피아와 관련된 여러가지 소문과
더불어 인기가 날로 떨어지는 시점이었다.
언론은 온통 '프랭크 시나트라'가 '착한 마누라'를 버리게 만든 '이국적
팜므파탈' 에 대해 대서특필 했다.
'시나트라' 와의 결혼생활은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았다.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싸우고, 질투하고, 갈라지기를 반복했다. 이 와중에 '시나트라' 가 자살을 시도
하기도 했다. '에바' 는 '프랭크 시나트라' 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욕심을
냈던 '지상에서 영원으로(1953)' 의 '마지오'역을 딸 수 있도록 모든 영향력을
동원 했고, '시나트라' 는 이 영화를 통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거머쥐며
왕년의 인기를 다시 되찾았음은 물론,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사생활(私生活)'에 대한 언급에 솔직담백했던 '에바'는 "우리의 침실생활은
대단 했다. 비데를 쓰기 위해 (화장실로) 가는게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고
술회했다. '에바'는 아기를 임신했지만, 결혼생활이 길게 이어질 수없음을
알고 아기를 포기 했다. "우리 자신들조차 돌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기를
돌보겠는가?"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1955년 그녀는 '세 번에 걸친 결혼실패의 상처'와 헐리우드 생활의 환멸감을
안고 스페인으로 갔다. 이후에 찍은 대부분의 영화는 해외 촬영작들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헤밍웨이' 와의 교분을 통해 알게된 유명 투우사와 불같은
사랑을 나누기도 했고, '하워드 휴즈' 와도 오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프랭크 시나트라' 에게 있어 그녀는 각별한 여인이었다.
이혼 후에도 'I'm a Fool to Want You(당신을 원하는 나는 바보야)' 라는
노래를 짓게 만들었다.
이혼 후에도 그들은 여생(餘生)을 친구로 보냈다. 말년(末年)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보낸 그녀를 위해 거액(巨額)의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기도 했고,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하고는 종일 침실에 틀어박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에바' 의 장례식 때 수백 명의 조문행렬 뒤를 검정색 리무진 한 대가 따라
갔는데, 그 속에 슬픔에 잠긴 '시나트라'가 타고 있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1987년 두 차례의 뇌일혈 후, 말년(末年)까지 침대에 누워 지내던 '에바
가드너' 는 결국 폐렴(肺炎)이 악화(惡化)되어 67세의 나이로 숨졌다.
"너무 피곤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로.........
<인천 아이러브색소폰 클럽 대표 윤양로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