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행(海南行) 71
무정의 머릿속에서 점들이 움직인다. 수많은 점들이 세상을 이룬다. 자신도 점의 집합이다. 그 점들이 흐트러지고,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문득 무정은 자신의 몸을 본다. 열두 개의 점이 보인다. 그 몸을 이루는 열두 개의 문이 점으로 보이는 무정이었다. 무정의 고개가 들린다.
눈앞의 허공에 한 점을 찍는다. 그리고는 그 한 점을 움직인다. 좌우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한점을 찍는다. 좀 더 멀리 점을 찍는다. 뛰어야 같다. 그가 뛴다. 그리고는 점을 찍는다.
정말 먼 점이다. 그의 묵기가 올려진다. 묵기에 둘러싸인 그의 신형이 섬이 나간다. 뒤쪽으로 점들이 흐트러진다. 곳곳에 점들의 흔적이 남아있으면서 환영을 만든다. 점을 찍는다. 헌데 점이 움직인다.
왼쪽이다. 무정의 묵기가 왼 어깨로 이동한다. 점들이 이동한다. 순식간에 열두 개의 점이 왼 어깨로 모여 무게를 이동시킨다. 문이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문은 그대로였다. 허나 조금 색이 바랜 것이 힘을 잃은 듯 하다. 왼 어깨만 아주 밝게 빛나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의 몸이 호선을 그리며 따라 잡는다. 무정의 도가 움직인다. 헌데 점이 갈라진다. 두 개 이상으로 갈라진다. 무정의 신형이 멈춘다.
“쩌어어어엉”
“크아아악!”
비명소리가 난무한다. 지옥도였다. 해남도주의 무공은 가공스러웠다. 이미 십여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반수의 해남 검혼대가 사라진 것이다.
“갈!”
누군가 중간으로 끼어들었다. 만시명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그가 나선 것이다.
“흐흐흐 팔병신이 뭐하러 나서나?..... 아직도 내가 당신의 아래로 보이나보지?”
“팔이 없어도 네놈의 상대로는 충분할 거다. 한번 해보면 알 것이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느냐?”
“.............”
나우중은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더니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는 나우중이었다. 검해 만시명, 절대로 아래로 볼 수 없는 자였다.
점이 늘어난다. 수십 개, 수백 개로 늘어난다. 무정은 움직이지 못한다. 그렇게 서 있다. 그러다 그가 움직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점들도 움직인다. 무정의 움직임에 맞추어 진 것만 같다. 그런 그의 눈에 점의 궤적이 보인다. 무정의 눈이 그 점을 꿴다. 이리저리 어지러운 선들이 얽혀져 있다. 무정의 신형이 빨라진다. 그리고는 땅을 박차며 섬전같이 달려간다.
점들이 사라진다. 그 선의 연장선을 무정이 지나갈수록 하나둘씩 사라져간다. 무정의 신형이 멈춘다. 이것인가? 이것이 쾌인가? 아니다. 이건 아니었다. 그가 여지껏 생각한 것은 그의 여지껏 해 왔던 움직임일 뿐이었다.
일순간 점이 생겨난다. 그 점들이 모여 선을 만든다. 그 선이 무정을 향해 날아온다. 무정은 조용히 서있다. 그들의 궤적이 느껴진다.
무정의 눈에 무엇인가 보인다. 선으로 연결된 다섯 개의 점이다. 갑자기 가슴에서 아릿한 느낌이 온다. 선의 맨끝에서 점이 빛난다. 서서히 그빛이 선을 타고 앞으로 나온다.
두 번째 점이다 조금 빨라진다. 세 번째 점에 도달한다. 상당한 속력이다. 네 번째 점에 오니 빛살처럼 빨라진다. 다섯 번째 점에 오니....무정의 가슴을 이미 지나간 점이었다.
“...............”
다시 선이 나타난다. 무정은 집중한다. 그의 가슴에 또다시 아릿한 느낌이 든다. 이곳이 점의 쾌의 끝점이다. 저 멀리 점에서 다시 한 번 빛나고 있었다. 무정은 달린다. 최대한 그 간격을 좁힌다. 그리고는 눈을 치켜뜬다.
선의 처음과 끝이 보인다. 그 선의 중간을 먼저 끊는다. 자신도 그런 선의움직임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자 마지막 쾌가 사라진다. 그제서야 선이 사라진다.
“콰아아앙.....”
“............”
과연 검해였다. 자신이 갈 길을 모두 알고 있다. 그전에 봉쇄당하는 그의 쾌검이었다. 두 팔이 없어도 강기어린 양 소매는 칼보다도 예리한 무기였다. 채 검을 다 펼치기도 전에 봉쇄당하는 나우중이었다.
“차아앗.....”
나우중은 소리를 지른다. 어차피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아는 그였다. 그저 확인의 차원에서 검을 내지른다. 그리고는 손목을 틀어 검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선의 끝이 움직여 온다. 아래위로 꺾이며 갈 곳을 모르게 만든다. 무정의 눈이 치떠진다. 점의 밝기가 달라진다. 이건 느낌이다. 느낌으로 쾌바로 전 섬에서 밝기가 머무른다. 쾌의 점이 세차게 움직인다. 일순 정의 점에서 빛이 다시 나온다. 그리고는 섬의 점에 다다르며 그대로 쾌로 간다. 그러나 쾌에 이르기 전에 이미 무정의 초우가 가있다. 그렇게 선의 움직임을 막는 무정이었다.
그러자 선이 휘돈다. 그리고는 막강한 곡선을 그린다. 어느 때는 일자로 어느 때는 환으로 휘돌며 날아다닌다. 무정은 서있다. 그렇게 서 있었다.
나우중의 신형이 보이지도 않는다. 허나 만시명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풀거리는 두 팔소매로 동의 지점에서 모조리 막아내는 그였다. 그의 내력이 공기를 휘돌고 있었다. 그 휘도는 공기의 내력이 만시명에게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우중의 치는 검의 궤적을........
“만시명........역시 대단하다. 네놈이 입을 꽉다물고 내놓지 않는 무공이 있기는 있었구나!”
“어리석은 놈! 무공은 모두가 같은 것이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무공으로 생각하고 익히는 네놈은 해남무공의 진수를 깨닫지 못했겠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무공 같은가! 모두가 해남의 검이다. 남해 삼십육 검이란 말이다!”
“웃기지 마라! 그 무공으로는 절대로 이런 검식이 나오지 않는다. 검로가 그렇게 자유스럽게 나올수 없다.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구나. 만시명!”
나우중의 기세가 일변한다. 그의 몸에서 혈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무언가 다른 무공을 시전하는 듯, 검을 쥐고 왼손으로 나우중을 가리키고 있었다.
“잘 봐라 이 검법을! 남해 삼십육 검은 여기에 비한다면 달빛에 견주는 반딧불이다! 내가 연성했지만 이것은 무적의 검법이다. 봐라 이 검의 궤적을!, 그 위력을!, 그리고 지난세월을 후회하면서 죽어라!”
“파아아아앗”
일곱 개의 검이 뻗어나간다. 한순간에 보이는 검법이었다. 만시명은 가슴이 답답했다. 한손만.....한손만으로 검만 쥘 수 있다면.......저 검을 깰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깨달은 쾌의 요결(要訣)은 전했으나 이어서 알리지 못한 중(重)의 비결로.......
무정은 석상이다. 그의 눈앞에 수십여 개의 선이 빛살이 되어 날아온다. 그
대로 가슴으로 통과시키는 그였다. 난감하다. 한 개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수는 될 수 없었다. 모아야 했다. 전부다 모아야 했다. 그래서 하나의 선으로 만들어야 했다. 선이 찍은 마지막 쾌의 점으로 인해 느껴지는 온몸의 아릿한 감을 한 점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무정의 오른손이 들린다. 그의 초우에서 수많은 점들이 모여 빛의 무리가 생겨난다. 초우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눈앞에 커다란 원을 그린다. 묵기를 내보내면서..........
묵기에 담긴 점들이 반짝인다. 초우가 회전하면서 서서히 묵기가 원형으로 돈다. 그와 함께 공기의 작은 점들도 같이 휘몰아친다. 무정의 앞에 작은 원이 뚤릲 거대한 방사형 원판의 막이 휘돈다. 그러자 선들이 움직인다. 좌우에 부딪히며 중앙의 한 점을 향해서 꺾이고 휘어지면서 움직인다.
줄 곳을 보여준다. 그렇게 만든 무정이다. 그의 몸이 모로 선다. 최소한도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무정의 열두 점이 흔적이환영이 된다. 쾌가 그 환영을 지나간다. 무정의 초우가 내려진다. 선의 동에 해당하는 부분을 끊는다.
“크으윽”
만시명의 입에서 피가 흐른다. 내력만으로 중검을 시도하는 것은 무리였다. 하다못해 작은 쇳조각하나라도 조금만 무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매개체로 가능하였을 것이다. 소매로 내력을 뿌려내어 막을 만들기는 했지만 결국 뚫려 버렸다. 그의 가슴어림에 있는 장포가 너덜해진다.
쾌검이 보여주는 환검(幻劍)이었다. 어떤 게 진짜인지는 그도 모른다. 방법은 오직 하나, 그 환검을 모두 모아야 했지만 그는 하지 못했다. 이미 두 팔을 잃은 그에게는 무리였다.
“크흐흐흐흐......만시명! 어떤가? 안 되겠지? 크하하하하 예전의 내가 아니다!”
득의의 광소를 짓는 나우중이다. 그의 입이 계속 열렸다.
“널 지금 죽이지 않으마........ 똑똑히 지켜봐라. 저 중원 놈이든 해남도의 놈들이건 모두다. 죽여주마. 그렇게 멍청히 서서 한번 지켜보란 말이다! 아하하하하”
그의 신형이 돌아선다. 고죽노인쪽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무정을 향하는 나우중이었다.
이것이 다인가? 이것이 쾌의 수비법인가? 그렇다면 공격법은? 공격법은 없는 것인가? 아니 이게 법칙이고 투로란 말인가?
끝없는 의문이 생겨나는 무정이었다. 단순히 쾌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심오했다. 그가 보는 것은 세상이다. 무공의 투로를 보는 것이 아니다.
선들이 다시 나타난다. 그것들이 뭉친다. 그러자 면이 되었다. 아주 잘 선검이 되었다. 그리고는 무정에게 폭사되었다. 수십여 개의 환영을 나타낸다. 무정은 조용히 눈을 감는다.
검의 궤적이 느껴진다. 그의 묵기는 이미 공기 중으로 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공기의 흐름이 그에게 말해준다. 흡사 그가 공기를 타고 신형을 날리듯이............
“차차차차창.....”
“ ! ”
나우중의 눈이 커진다. 이자는 상당했다. 해남도 출신이라고 하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그였다. 헌데 일곱 개의 환영을 모조리 막는다. 쾌검의 이치를 아는 자였다.
“그리 이상한 눈으로 보지마라! 방금 검해 어르신의 움직임을 본 해남도의 무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
쓰러져 있던 만시명이 눈을 크게 뜬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말 해남의 쾌검을 진실로 연구한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해남의 검만으로 따진다면, 저 노인은 아마도 당대의 해남제일검일 것이다.
“이놈저놈. 말들이 많구만........오냐, 이것도 받아봐라! 기꺼이 무공의 이름도 알려주지! 성수천검(星水天劍)이라고 한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보자!”
일갈이 터져 나온다. 나우중의 몸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다가온다. 그의 검이 쳐들린다. 그 검의 흐르는 궤적에서 수많은 검이 고죽노인의 신형을 향해 들어왔다.
“타앗!”
고죽노인의 신형이 움직인다. 날아오는 검의 움직임을 무시하는 그였다.
단창을 아래에서 위로 치켜 올리면서 어느 순간 길게 뻗는다. 그의 단창에 서 기력이 쏟아진다.
“파파파팟”
“파앗”
둘의 신형이 다시 떨어진다. 고죽노인의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나있다. 나우중은........놀랍게도 팔의 상박에 옷이 찢겼다. 고죽노인은 부지불식간이루기 전에 섬과 동을 쳐 내며 만(晩)에 해당하는 곳을 노렸던 것이다. 아직 모호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근접한 그였다. 그가 배운 쾌검의 묘리가 어느 순간 맞추어진 것이다.
“나도 기꺼이 알려주지! 해남삼십육검 중 해룡출해라고 한다. 제대로 다시 알라는 뜻이다!”
“...................”
나우중의 눈이 완연한 혈광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분명히 그가 아는 검이다. 아니 아는 검정도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나게 수련해온 그였다.
그런 검이 이렇게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사실
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