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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을 주목한다 / 김종경
시의 역설(逆說)을 읽다. /주영헌
시평을 써 달라고 부탁이 왔을 때, 고민했다.
시평을 쓴다는 것은 재미가 없는 작업이기도 하거니와,
오랜 시간에 대한 투자 그리고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할 위험성까지 지뢰밭같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처음 부탁을 받고 알았다고 얘기를 했지만, 쓰지 않기를 기대했고 부탁을 받은 이후 보름까지 도착하지 않자
나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물 건너 같다’라고. 하지만 이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편집자에게 얘기에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벌어 놀 것이니
그동안 시평을 써 달라고. 나는 달력을 먼저 봤다. 쓸 수 있는 시간이 있을까. 달력의 붉은 글씨가 눈에 보인다.
휴일이다. 나에게는 기적처럼 보이는 하루다. 날(日), 누구에게는 좋은 날이지만, 누구에게는 그렇지 못한 날이 될 수 있다. 누구에게는 행복한 날이지만, 누구에게는 가장 비극적인 날이 될 수도 있다. 날(日) 뿐이겠는가. 삶 자체가 그렇다. 몸에 죽음과 삶을 이식하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증거다. 이를 다른 말로 우리는 ‘역설(逆說)’이라고 부른다.
롤랑바트르는 그의 저서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저자의 죽음을 언급했다. 이는 저자의 죽음이 독자를 탄생시킨다고 했다. 이는 단순히 저자의 물리적 죽음이 아닌, 저자의 해체가 독자의 재탄생을 얘기한 것이다. 이는 롤랑바트르만의 얘기는 아니다. 역설은 철학의 모태다. 고대의 철학자로부터 현시대의 철학자까지 그들이 얘기는 모두 역설과 연관되어 있다. 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역설이 없다면 시가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역설을 담지 않은 시가 독자에게 어떤 파장도 주지 못하는 것에는 쉽게 반박할 수 없다.
별밤에 불을 지펴
실크로드 순례자들에게
어둠 속 길을 안내하던
오아시스, 가끔은
사형 집행을 하던
절체절명의 전탑이었다는
구원과 죽음의 등불이
동시에 타올랐던
사막에도 등대가 있다
「사막등대」 전문
이 시는 김종경 시인이 보내온 몇 편의 시 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역설이다. 사막에도 등대가 있을까? 우리는 등대를 떠올릴 때 바다를 생각한다. 망망대해를 떠돌던 배는 등대의 불빛을 보고 육지에 다다랐다고 드디어 안도한다. 등대는 생명의 빛이다. 사막의 등대라면 어떨까? 우리는 가끔 사막을 바다에 비유하기도 한다. 바다와 사막은 닮은꼴이다. 물질적으로 모래와 싼 물이 다를 뿐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인 『원피스』에선 사막을 항해하는 배가 있다. 또한, 바다에 물리적인 길이 없는 것처럼 사막에도 물리적인 길이 없다. 길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래바람이 쉬 덮어 버린다. 길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와 같다면 사막의 등대는 바다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역설에 도달할 수 있다. 바다가 아닌 내륙의 등대가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역설이 출발하는 힘은 사유(思惟)에서 나온다. 시 읽기를 즐겨하는 철학자 강신주는 그의 저서『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에서 ‘사유는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의무이다!’라고 얘기한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이라면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똥인지 된장인지는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역설이 시작할 수 있는 배경은 사유의 힘이다. 단순한 사유가 아닌 깊은 사유이다. 이는 애처로움이다. 다른 말로 사랑이다.
시인의 시 한 편을 거꾸로 읽어 보자.
산수유니 목련이니 버찌니……
봄은 꽃잎부터 왔다 가는 것을
풍어風魚는 텅 빈 암자를 통째로 매단 채
서둘러 바다로 향하고
세상은 날마다 꽃밭이거늘,
「바다로 가는 풍어」 부문
이 부분만 읽으면 전형적인 서정시이다. 봄의 어느 한 골목을 묘사하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아름다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역설(逆說)이다. 우리는 꽃의 역설에 대해서도 사유(思惟)할 수 있어야 한다. ‘꽃은 항상 아름다워야 하는가’다. 사실 꽃은 나무의 생식기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식기를 아름답다 표현하지 않는다. 도리어 흉측하다 감추기 바쁘다. 그렇다면 꽃은? 왜 유독 우리는 우리의 생식기를 꺼내어 보여 주며 사랑을 말하지 않고 나무의 생식기를 꺾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가?
모든 꽃이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꽃에도 아픔이 있다. 화려함이 감추고 있는 그 이면을 바라볼 수 있다면 말이다. 그의 시의 앞부분을 읽어보면 우리는 꽃에 대한 생각을 달리할 수 있다.
철거가 미뤄진 꽃밭들,
꽃불이 활활 번진 골목길 소란스럽다
화염花焰에 질식한 사람들
일일구 구급차와
앰뷸런스 경광등이 분주하고
「바다로 가는 풍어」 부문
의문이 풀렸다. 꽃은 물리적인 꽃이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을 시인은 꽃이라고 표현을 했다. 꽃이 떼를 이룬 화전(花田). 불(火) 밭이다.
모든 꽃이 아름다운가? 화전(花田)이 아니라 화전(火田)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싸움구경과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불이 활활 차오를 때 정말 장관이다. 끌끌 거리며 혀를 찰지라도 쉬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불이 가진 마력(魔力)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자. 만약 그 불이 우리 집에 난 불이라면. 그 불로 모든 가산이 탕진한 것이라면. 화전(火田)이 화전(花田)으로 보일 수 있겠는가? 이왕 불난 것 편한 마음으로 불구경 하자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러한‘입장 바꿈’은 역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중요한 지시적 의미를 지닌다. 누구도 역설의 딜레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언젠가부터 내 몸속에서도 풀벌레 울음소리 들리기 시작했는데, 왜 그 흔한 꽃 한 송이 바람 한줌 몸 안에 들이지 못했는지,…씨발…, 젖은 수건처럼 타일 바닥에 널브러져 게거품만 질질 흘리고
「時發」 부문
역설에 대하여 좀 더 깊게 들어가 보자. 역설을 이루는 몸(體) 문장이 있고 단어가 있다. 단어와 단어가 만나 역설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단어 자체가 역설이 되기도 한다. 시인의 시「時發」이 그것이다. 「時發」이 무엇인가.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시발’이다. 시발은 사람들이 된소리로 가장 흔하게 말하는 욕이다. 길을 가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운전하다가도, TV를 보다가도 마법의 단어처럼 읊조린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청갈색책』에서 단어의 의미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다. ‘단어의 정의는 언어적 정의와 지시적 정의로 나뉠 수 있는데, 지시적 정의는 온갖 종류의 방식대로 해석될 수 있다’라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을 거론하지 않아도 단어란 때와 장소 말하는 어투, 음의 높이에 따라서 다양한 지시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는‘예’라는 말 하나만 가지고도 설명이 가능하다.‘예’의 뒷소리를 낮추면 긍정의 의미이지만, ‘예’의 뒷소리를 높이면 부정의나 의문을 나타내는 말이다.‘예’를 영어로 해석할 때 ‘YES'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상황에 따라 'NO'나 'Why'로도 해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인의 시 「時發」은 음으로만 읽으면 흔한 욕이겠지만, 지시적 의미로 재해석하면 ‘시의 출발‘이다. 시의 모티브가 특별하게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발’이라는 일상적인 욕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발한다는 지시적 의미를 담고 있다.
재벌가 월담을 감행하던 혁명가는 최첨단 CCTV에 노출되어 사살됐다 공원과 놀이터 아이들을 납치해 구원하려던 휴머니스트는 보기 좋게 개죽음을 당했고 병원 응급실 잠입에 성공한 테러리스트들은 미모의 간호사 주사 한방에 포획됐다 도심 속에 출몰해 혁명을 꿈꾸던 놈들이 한 결 같이 사살됐거나 도주했다는 속보가 끊이지 않았다
「평화주의자의 꿈」 부문
평화주의자의 꿈은 무엇일까? 최근 개봉한 영화 『킹스맨』에는 특별한 악당이 출현한다. 이 악당은 지구를 위해 획기적인 계획을 하나 세우는데, 지구를 살리기 위해 바이러스인 인간을 적정한 수준까지 줄이는 것이다. 물론 결론은 당연히 주인공이 악당을 무찌르고 공주와 뒤로 사랑을 나눈다는 얘기지만, 악당의 내면에는 평화주의가 있다는 역설(逆說)이 있다.
그가 악당이 된 까닭은 아무리 자신이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지구의 이상 기후에 대해서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세계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설득해도 결론은 같았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핵 폐기에, 무력 사용 반대에 찬성하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다. 나와 내 재산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한다는 어느 재미교포의 인터뷰는 충격이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 한다는, 평화를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논리는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다. 이는 향기로운 커피를 값싸게 마시기 위해 저소득국가의 노동력이 착취 되도 된다는 커피 로드의 아이러니와도 같다.
그의 시에서도 이를 말하고 있다.‘공원과 놀이터 아이들을 납치해 구원하려던 휴머니스트’라고. 얼마나 시원한 역설인가. 무엇이 구원이고 무엇이 휴머니스트인가. 무엇이 평화이고 무엇이 폭력이란 말인가. 비트겐슈타인의 ‘지시적 정의는 온갖 종류의 방식대로 해석될 수 있다’는 말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평화가 평화가 아닌 폭력으로 들리며, 폭력이 폭력이 아닌 평화로 들리는. 평화는 폭력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실천한 인도의 사상가 ‘간디’와 망국의 티베트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이유가 평화를 폭력이라는 수단이 아닌 평화 그 자체로 실천했기 때문이다.
유모차에 조간신문을 차곡차곡 싣고 달리는 그녀. 삶과 죽음을 외면한 보수와 진보가 뒤엉켜 싸우는 세상을 새벽부터 배달한다.
한 평생 신문에 난적 없는 자기 삶보다 남의 삶이 비에 젖을까봐 더 전전긍긍하는, 시장 골목에 쓰러져 잠든 취객에게 신문지 이불을 덮어 주며 안녕하라고 말하는, 내일이면 폐지가 될 세상과 인생을 위해, 더 이상 돌아갈 세상이 없다는 그녀.
유모차는 편의점 알바의 긴 하품과 쓰레기차에 매달린 사내들의 가쁜 숨소리까지 싣고 달린다.
「돌싱 그녀」 전문
그의 시는 최근 모더니즘적이기도 하지만 그의 출발은 리얼리즘이다. 리얼리즘의 출발은 어디인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눈, 그래서 리얼리즘에는 역설(逆說)이 담겨 있을 수 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지금껏 어떤 활동을 해 왔는지 알고 있다. 80년대 용인에서 이뤄진 문예운동이 그것이다. 가난한 청년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실천이었다. 현장이었다. 이것은 사람을 보다 진지하게 보는 특별한 눈을 만들었을 것이다.
「돌싱 그녀」라는 시 제목만을 읽어보면 이혼녀의 얘기를 다루지 않을까 우리는 지래 짐작한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무참하게도 깨진다. 「돌싱 그녀」는 이혼녀가 아니라, 남편 없이 살아가는 노인의 얘기다. 맞지 않는가. 꼭 젊은 여자만을 두고 「돌싱 그녀」라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시 제목의 역설은 사람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있어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시가 더 구슬픈 것이고, 큰 울림통이 있는 것처럼 시가 울리는 것이다.
김종경 시인의 시 몇 편을 읽었다. 솔직히 나는 그가 시를 잘 쓰는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려한 미사여구도 없고, 말장난도 부리지 못한다. 요즘 인기가 있는 미래파와의 시풍(詩風)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사랑을 속삭이지도 않는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문장과 의미로 시가 충만하다. 그래서 그의 시를 읽는다. 그의 시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지는 못해도 불편한 무엇, 바로 역설(逆說)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으며 불편함을 느끼고, 내가 시를 쓴다는 그 사실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읽는 동안은 나의 영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한줄기 헛된 희망도 함께. 이것이 내가 그와 그의 시를 주목하는 까닭이다.
도(道)를 읽으며 길(道)을 걷다.
주영헌(yhjoo1@naver.com)
Ⅰ 박제천 시집 『달마나무』
1. 도덕경을 먼저 읽다.
세상에 모두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착한 것을 착한 것으로 알아보는 자체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가지고 못 가짐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어렵고 쉬움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길고 짧음도 서로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
『도덕경』의 부분
도덕경으로 글을 시작한다. 도덕경으로 글을 시작하는 이유 ‘道’를 전파한다거나 ‘道德’과 같은 사상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견은 없다. 단지 의도라고 한다면 시를 읽어 나갈 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도덕경의 여러 부분 중 위의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시 뿐만 아니라 森羅萬象의 모든 것들이 상대성에서 출발한다는 의미를 상기시켜 주기 위함이다. 아름다운 것이나 추한 것, 큰 것 작은 것, 넓은 것 좁은 것 이 모든 것이 상대적 개념을 가지고 있고 상대적 개념이 있어야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나의 존재 가치가 타자로부터 출발한다는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는 사물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까지도 포함이 된다. 착한 것이나 악한 것, 어려운 것 쉬운 것 또한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와 같은 상대적인 개념을 동시에 보도록 한 것이 바로 도가의 가르침이며 이를 개념적으로 말하자면 ‘비본질적사고(non-essentialist view)'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서양 철학으로 표현하자면 ’이원론적 세계관‘이 아닌,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변증법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시는 이와 같은 상대적인 개념들이 잘 녹아있다. 물론 그것이 명확한 무엇은 아니겠으나 ‘사상의 관습’과도 같은 구조주의적 모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든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시의 구조에서 실제적, 실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으로 그 의의가 높다. 그럼 긴 말보다 도덕경을 기본 토대로 박제천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자.
2.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드렴
박제천 시인의 시집은 도덕경과 아주 잘 어울린다. 시집 자체가 법문과도 같은 시로 가득 차 있어 시를 읽으면 그 깊음이 오래 남는다. 눈 오는 날 깊은 방에 앉아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동안거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굳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거나 요즘 유행하는 템플스테이를 하지 않더라도 수행에 이르는 방법, 시인의 시와 같은 선시를 읽는 것이다. 오늘은 눈도 오고 어둠도 깊은 날이면 시인의 시를 읽는 맛이 깊다. 시 한편을 같이 읽어 보도록 하자.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망상이다
너에게 벽돌 하나를 주노니
갈아서 거울을 만드렴
그 거울에 너의 무엇이 비치겠는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도조차 모른다면
그때 비로소 너는 너를 보게된다
너는
이 아침의 나뭇잎에 도르르 말리는 이슬 한 방울
그 이슬 속에서 우레처럼 터져나오는
계명성鷄鳴聲
너를 버림으로써
이 세상이 살아 있는 것들의 웃음소리가
만발하게 된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의 전문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있겠는가. 보이는 것은 없되 보이는 것이 있다. 이 말장난과도 같은 말 속에도 깊은 의미가 있다. 모든 말에는 두께와 깊이가 있다고 했다. 서양 철학자 소쉬르는 이를 ‘가치(valeur)’라고 불렀다. 말이란 어떤 말이 가진 가치 즉 그 의미의 폭은 그 언어 시스템 속에서 다른 말과의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눈은 단순히 目일 수도 있으나 또 다른 눈, 정지용 시의 「유리창」처럼 무엇인가를 반사하는 것이나 투과시키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사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눈이라는 신체기관의 역할은 사실 보는 것을 위함이 아니라 유리창의 창처럼 안과 밖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의 역할일 뿐이다. 사실 단단한 뼈 속에 둘려 쌓여 한 톨의 빛도 투과하지 못하는 곳에 있는 뇌, 그것의 역할이 바로 실제적으로 보는 것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꿈을 꾸는 것조차 같은 방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실사처럼 꿈속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도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다.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을 눈을 감아야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을 감고 바라보는 것들은 그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망상에 불과하다 치부할 수 있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그 망상이라는 개념에 선문답을 던진다. 「너에게 벽돌 하나를 주노니/갈아서 거울을 만드렴」
벽돌로 거울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거울을 만들 수 있는 형질은 쇠나 유리와 같은 윤을 내서 반사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임에도 당연한 듯 말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 벽돌은 하나의 ‘기호(signe)’로 작용한다. 비췬다는 것과 벽돌사이에 아무런 연관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개념을 더 연장하여 「그 거울에 너의 무엇이 비치겠는가」라고 얘기를 한다.
이 시는 ‘본질론적 사고(essentialist view)’로 접근을 하면 문장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처음 두 문장의 경우 논리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세 번째 문장의 벽돌 얘기가 등장을 하면서 그 논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론적 사고’보다는 ‘비 본질론적 사고’로 접근을 해야 한다.
아무리 눈을 뜨고 감고 벽돌을 갈아 보아도 벽돌에 비출 수 있는 무엇인가는 없다. 이 문장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덕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도덕경의 첫 문장이「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다. 이를 해석하면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름을 짓고 개념화 할 수 있는 이름이나 도라는 개념은 영원하지 않다는 道의 영원성, 탈 시간성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에서도 이러한 ‘기호(signe)’가 있다. 벽돌로 만든 거울은 단순한 거울이 아닌 ‘기의(signifie)’로서의 ‘깨달음’이라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사실 거울의 본질적 기표인 보인다는 것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개념이 머릿속에 개념화 되었다면 비 본질이 본질이 되어 「이 아침의 나뭇잎에 도르르 말리는 이슬 한 방울」과도 같은 사소하다 생각했던 부분까지도 즐길 수 있는 사유가 가능한 것이다. 망상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사유로 바뀌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이다.
3. 꽃이 피면, 바람은? 비는? 시는?
꽃이 피면
꽃이 지고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멈춰도
비를 맞으면
비를 그으며
시를 쓰고
시를 버리고
무제라는 제목의 시를 한편 써나가고 있다.
언제 끝이 날지는 그대와 나만 아는 시를 쓰고 있다.
「무제-심우도」의 전문
또 한편의 철학적 시이다. 깊이 생각한다면 깊을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시이다. 만약 이 시가 ‘김제천’이라는 시인의 시에 포함되지 않고 ‘주영헌’이나 다른 어떤 시인의 시집에 수록되었다고 한다면 이 시는 그 어떤 가치를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텍스트가 그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주체를 결정한다는 바르트의 논리를 역으로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러한 관점은 선시의 최대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은 생각을 거부하고 시각적인 쾌락을 쫒고자 원하는 요즘의 추세에는 맞지 않는, 고집스러움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그것이 시인 품은 맹毒의 최대 장점이 될 수 도 있겠다.
시인의 시를 읽기 전에 도덕경을 먼저 읽은 것이 이 글을 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시인의 시는 사유의 눈높이를 일반적 상식에 맞춰서 그 해설을 써 낼 수 있는 시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도덕경을 읽으면「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요. 此兩者同, 出而異名」이라고 했다. 이 문구를 해석을 하면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신비함을 볼 수 있고, 언제나 욕심이 있으면 그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
사실 이 문장 이상의 해석은 필요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읽은 텍스트만으로도(비록 바르트의 논리를 빌려 말하지 않아도) 이 글의 논리에 충분히 길들여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시 「무제-심우도」는 욕심이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써 가고 있다. 사실 그 욕심이란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꽃은 필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으며 바람도 불수도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지극한 일상적 문장만을 가지고는 시를 만들어 낼 수가 없다. 이는 시가 상징하고자 하는 의미적 효과를 찾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장들이 시가 되는 이유는 마지막 연 때문이다. 「무제라는 제목의 시를 한편 써나가고 있다./언제 끝이 날지는 그대와 나만 아는 시를 쓰고 있다.」
도덕경에서 ‘둘 다 근원은 같은 것 다만 그 이름이 다르다’고 했다. 바람의 행위, 시의 행위, 비의 행위, 어느 관점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어느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의미는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는 것. 내가 의미가 있다면 그대와 나만 아는 그 시가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내게 의미가 없다면 그도 의미가 있을 수 없다. 또한 의미를 찾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없을 수 있다. 문장 그 자체에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존재란 그 존재 자체에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실증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가치가 없을 수 있겠으나, 아무런 가치가 없는 존재도 누구에게는 커다란 존재의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으로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앞서 얘기한 ‘비본질적사고(non-essentialist view)’와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는 행위 자체도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꼭 무엇을 해야만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에 대한 부분은 순수하게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겠다.
Ⅱ. 김경성 시집 『와온』
1. 길을 걷다.
길이란 그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다. 들뢰즈의 ‘시간’에 대한 말처럼 길도 그 존재로서 지금 순간의 길만 있을 뿐 과거의 길이나 미래의 길은 없다. 길은 리좀 과도 같은 존재다. 우노 쿠니이치에 따르면 ‘리좀’에는 계층도 중심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단지 끝없이 연결되고 도약하며 이탈하는 요소의 연쇄, 길은 ‘구근’과도 같다. 그 얽혀있는 모양새는 끝은 있으되 끝이 보이지 않는 연속체다. 끝은 다른 끝과 연결된다. 또한 길은 그 스스로 나타나지 않으며 누군가의 호명으로 만들어지는 타자, 그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되었던 것처럼 길은 사람과 아주 많이 닮았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사람들은 기록을 한다. 누구는 여행기를 쓰고 누구는 사진을 찍고 누구는 그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쓴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다소 모순되지만 시인이 소재로 삼는 길이란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그리 아름답지 않다. 최근 가장 많은 소재가 되는 것이 바로 ‘로드킬’과 같은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물론 죽음이라는 것이 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초월적인 무엇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길에는 죽음이라는 명제가 길처럼 넓게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생명과 삶이라는 명제도 일반적이지만 다소 진부한 면이 있기 때문에 시에서는 보통 사용되어지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대면하는 죽음의 상당부분은 집이나 병원이라기보다 길에서 죽은 객사가 많았다는 것, 그 불행한 증명이기도 하다.
김경성 시인의 시집인 『와온』은 길에 대한 얘기와 그 길 중간 중간에 있는 것에 대한 얘기가 많다. 그 시중에서 한편 골라 본 것이 바로 다음에 소개할 시이다.
2. 저수지로 이어지는 길의 풍경
저수지를 가 본적이 있는가? 계속해서 도시에 살았다거나 도시 밖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저수지는 친숙해 보이지만 사실 낮선 개념이다. 저수지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왜 저수지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져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사실 저수지의 주된 역할은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관계시설이다. 만약 그 저수지가 대규모라면 홍수도 대비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읍면에 있는 저수지는 그 용량이 작아 홍수에 대비하기 보다는 물을 저장하며, 가뭄 때 주변의 논에 물을 대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런 저수지에서 가끔씩 불행한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끊어진 마음을 품은 누군가가 끊어진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시가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왜, 그 순간 물 빠진 저수지의 속 길이 생각났는지 몰라
가뭄 끝,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
각질이 일어난 저수지의 발바닥쯤이었을까, 지문이
다 지워진 손바닥이었을지도 모르지
저수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였던 거야
목젖 근처에서 뻗어나가는 길 강둑까지 이어져 있었지
물속에 잠겨 있는 동안 그가 걸어 다녔던 길이었을까
둑에 갇힌 채
제 속에 담긴 것들의 전생을 읽거나
한없이 뛰어드는 붙잡을 수 없는 것들 끌어당겨서
길의 끝에 올려놓았을지도....
이른 아침 부리를 씻어내는 새들이
먼 곳에서부터 그어놓은 어떤 기류의 끝자락이며
어린 새들의 처음, 목을 적시는
저수지 안쪽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는
길의 끝이 아니고 길의 시작이었으니
모든 것 다 퍼내고
아프게, 제 속의 거 다 드러내야 보이는
송진 같은
저수지의 속 길
「저수지의 속 길」의 전문
저 저수지로 이어져 있는 길은 길의 끝인지 시작인가? 저수지 속에 은밀한 죽음을 숨기러 온 사람이었다면 그 길은 끝이었을 것이고(또 다른 길의 시작이었을 것이고, 모든 사건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저수지 관리인처럼 일을 하고 다시 집으로 출발을 했다고 한다면 그 길은 출발점일 것이다. 사실 저수지를 물리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시작과 출발 이 두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숨겨진 또 다른 길이 있다. 바로 수면 아래에 있는 길이다.
시인은 왜 보이지 않는 저수지 속 길에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사실 습관성이다)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사물의 겉을 바라보기보다 그 내부나 그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사유하기가 시인들의 일반적 습관이다. 그냥 생각만 하고 끝낸다면 일종의 공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공상적인 부분들을 논리적으로 옮겨놓아 한편의 시를 만든 것이다.
보통 수면 아래의 길은 농번기, 물이 빠진 후에야 드러난다. 걸쭉한 송진 같은 진흙으로 가득 차 있는 길, 사실 길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한 길, 바로 그런 길이다. 사실 위 시와 같은 소규모 저수지 속의 길이란 보잘 것 없다. 하지만 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마을의 물속 길은 그 길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댐이 무너지고 물만 빠진다면 자동차나 자전거가 달릴 수 있는 그런 길이다. ‘물속의 길 = 현재의 길’이 될 수 도 있는 길이다.
만약 그 길에만 집중했다면 이 시의 절반만 읽은 것이다(만약 물속의 길을 망자의 길이라는 기호로 읽었다면 절반을 조금 더 읽은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단순히 물리적인 길만을 바라본 것 같지 않다. 시의 뒷부분을 읽어 보면「저수지 안쪽으로 흘러들어 가는 물줄기는/길의 끝이 아니고 길의 시작이었으니」란 문장이 나온다. 처음의 길은 단순히 저수지로 연결된 길이었으나, 길이 흘러들어간 그 저수지를 하나의 유기체로 인식하여 저수지로부터 시작한 물줄기를 또 다른 길로 재탄생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겠는가? 앞서 설명했던 들뢰즈의 ‘리좀’의 개념처럼 그 처음과 끝을 알 수 없는 유기체처럼 흘러갈 것이다. 시인도 어쩌면 그 사유만큼 이처럼 멀리 흘러가고 싶은 것은 아닌지 생각 해 본다. 그 길에 와온 같은 지명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3. 와온(臥溫)으로 이어지는 길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니
멈추는 곳이 와온(臥溫)이다
일방통행으로 걷는 길 바람만이 스쳐갈 뿐
오래전 낡은 옷을 벗어놓고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곁을 지나서
해국 앞에서도 멈추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바람이 비단 실에 묶여서 휘청거리는
바람의 집으로 들어선다
눈가에 맺힌 눈물 읽으려고
나를 오래 바라봤던 사람이여
그 눈빛만으로도 눈부셨던 시간
실타래 속으로 밀어 넣는다
흔들리는 것은 바람만이 아니다
흘러가버린 시간의 날줄에 걸쳐 있는
비릿한 추억, 삼키면 울컥 심장이 울리는 떨림
엮어서 갈비뼈에 걸어 놓는다
휘발성이 사소한 상처는
꼭꼭 밟아서 날아가지 못하게 하고
너무 깊은 상처는 흩어지게 펼쳐 놓는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의 집
네 가슴 한껏 열고 들어가서
뜨거운 기억 한 두릅에
그대로 엮이고 싶은 날이다.
「와온(臥溫)」의 전문
혹시 와온(臥溫)이라는 지명을 아는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어느 지방의 지명으로 나온다. 아니면 시인이 전북 고창출생이니 아마도 알려지지 않은 그쪽 어딘가의 지명일 수도 있다. 시에서 제공되는 정보로 추측해 본다면 아마도 어느 바닷가의 마을일 가능성이 높다. 시에서 말한「일방통행으로 걷는 길/해국/바람의 집/비릿한 추억」등 바람과 관련된 기표(signifier)가 그 정보다. 하지만 사실 이 지명의 실제 지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 바닷가 지명이 한국이든 일본이든 아니면 유럽의 어느 지점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도착한 곳이 와온(臥溫)이라고 한다면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이 ‘와온(臥溫)’이라는 상징적 지명으로 향하고 있는 시인의 감정, ‘기의(signifie)’이다.
바닷가를 홀로 걸어본 기억이 있는가? 바닷가가 아니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강변의 어느 지점을 찬바람을 맞으면서 걸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이 시는 설명이라는 것이 필요가 없다. 시인의 감정으로 느끼면 되는 것이다. 마치 니체의 방법처럼 말이다. 니체는 다른 곳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의 신체적 경험을 바로 그 몸이 되어 내부에서 상상적으로 추체험 했다고 했다. 우리는 니체처럼 고전문헌학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바닷가를 걸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시인의 감성을 추체험 할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바닷가를 걷는 기분으로 와온(臥溫)의 시구를 되새겨 보면 된다. 「비릿한 추억, 삼키면 울컥 심장이 울리는 떨림」들을 「갈비뼈」에 걸어 날아가게 내버려 놓고 「흔들리는 것은 바람만이 아니다」라는 시인의 시간을 상기하며 해변에 찍힌 발자국을 따라 걷는 걷다 보면 시인이 말한 와온(臥溫)의 어느 지점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이란 단순히 물리적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은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으며 앞과 뒤에도 있고 연결이 되어 있기도 하며 단절되어 있기도 하다. 단절된 길은 어떤 다른 끝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끝의 끝은 또 다른 끝과 연결되어 있다. 마치 지금도 팽창하고 있는 우주처럼 어디론가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길이란 내게 속한 것이어서(=내가 그 길에 속해 있는 것이어서) 각자의 역량만큼 연결 고리를 만들고 있기도 하다. 그 길이 뻗어나간 구근이 저수지 속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길일 수도 있으며 시인의 시 「맷돌」에서처럼 누구의 가슴으로도 이어져 있기도 하다. 길이란 어쩌면 우리의 인생 자체일수도 있다. 우리가 태어나고 살아가며 죽는 것 그 길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며,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의 구근이 되어 오늘 하루를 마치 ‘길’처럼 뻗어나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의 사명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것이 ‘길(=우리)’이라는 존재성, 그 가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수도 있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