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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5월 23일부터 1598년 12월 16일까지 약 7년간 조선과 일본(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당사국인 조선 명나라 연합과 일본 외에도 여진족의 성장에도 간접적 영향을 끼친 16세기~1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전이었다.
동아시아 3국인 한중일의 정권이 바뀌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조선은 선조의 환국정치를 거쳐 광해군 이하 북인정권이 집권했고, 중국 대륙의 명-청 교체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 도요토미 정권도 막대한 국력 소모로 붕괴하여 에도 막부 수립으로 이어진다.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유럽까지도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는데 명나라의 몰락으로 인한 타이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공격, 대중 무역로(路) 및 갑함무역에서 공행무역으로의 전환, 청의 영토 대확장, 외교관계 격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2. 명칭
한국어
대한민국 국기 임진왜란(壬辰倭亂), 정유재란(丁酉再亂)
북한 국기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
중국어
만력조선지역(萬曆朝鮮之役정체자/万历朝鲜之役간체자), 항왜원조(抗倭援朝)
일본어
조선출병(朝鮮出兵), 분로쿠(문록)•게이초(경장)의 역(文禄・慶長の役, ぶんろく・けいちょうのえき, 분로쿠・케이쵸오노에키)
일반적으로 임진년에 일어난 왜국(일본)의 전란이란 뜻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칭한다. 그 밖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조일전쟁(朝日戰爭),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에서 임진전쟁(壬辰戰爭),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후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 하여 도자기 전쟁(陶瓷器戰爭)이라고도 한다. 중국과 대만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연호를 붙여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중국어는 萬曆朝鮮之役), 혹은 조선을 도와 왜국(일본)에 맞서 싸웠다 하여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문록)의 원정(文禄の役)이라 하며, 그냥 직관적으로 조선에 출병했다고 해서 조선출병(朝鮮出兵)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영향을 받아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 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학술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어느 한 나라식 표기가 아닌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한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1597년 8월에 일어난 정유재란은 일본이 임진왜란의 정전회담이 결렬됨에 따라 재차 조선을 침공하여 이듬해인 1598년 12월까지 지속된 전쟁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당시 고요제이 덴노의 연호를 따서 게이초(경장)의 원정(慶長の役)이라고 한다. 일부 사람들은 해당 명칭이 일본이 침략의 주체임을 숨기기 위함이라는 주장을 펴지만, 원나라의 일본 원정 또한 일본에서는 분에이의 원정, 고안의 원정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다.
흥미있게도 영·미권에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은 Stephen Turnbull이 쓴 《The Samurai Invasion of Korea 1592-98》과 Samuel Hawley가 쓴 《The Imjin War》인데, Turnbull은 일본 쪽 자료를 주로 인용해서 제목에 '사무라이'가 들어가고, Hawley는 한국 쪽 사료를 주로 인용해서 제목에 임진(壬辰)의 한국식 독음인 Imjin이 들어간다. 다만 96페이지에 불과한 《Samurai Invasion》보다 600페이지가 넘는 《Imjin War》 쪽이 더 내용이 충실한 건 당연한지라 자연스럽게 Imjin War라 부르는 서양인이 늘었다. 영어로 구글링을 하면 Imjin War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언어 위키피디아에서도 '임진 전쟁'을 표제어로 삼은 경우가 흔하다. 예를 들면 프랑스어(Guerre d'Imjin)나 독일어(Imjin-Krieg), 포르투갈어(Guerra Imjin), 터키어(Imjin Savaşı) 위키 등등.
2.1. 교과서
2011년 입학생부터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 적용되는 '동아시아사' 과목이 신설되었는데, 이 교과서에 '임진왜란' 표기를 '임진전쟁'으로 하는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는 취지로 한일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 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다만 손 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라고 언급해 논쟁의 여지는 있다.
동아시아사와는 별개로 세계사 과목에서는 아직도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2015년 개정 교육과정 적용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3. 전쟁의 배경
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을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 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
3.1. 일본의 상황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파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 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주변인들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 진출'이라는 이름의 침략 야욕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이미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히데요시가 충분히 영향을 받을 만 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에 일본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도요토미의 첫 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조선에 1588년 10월과 1589년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이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 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한 그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하면서 바닷길이 험하다면 자신들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과 도요토미 정권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군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보내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를 확답으로 만들기 위해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하는 노력을 보였고,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과 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동산도 원정으로 출정하여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궁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결국 11월 7일에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는데, 그리고 이 회견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인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한다.
저 오줌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과 징비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
츠루마츠와 오줌 문제에 비하면 소소한 면이지만 다른 접대 문제도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처럼, 당시 회담장에서의 접대 및 상차림은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식생활 또한 소박함을 지향했다지만, 당시 문헌을 보면 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하더라도 외국의 사신에게 대접하는 상차림과 예법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효게모노에서 도자기란 소재로 각색한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 뒤늦게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합하(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년 ~ 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한평생이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천정(天正) 18년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
이에 대해 통신사인 김성일은 답서의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다고 여겨, ‘만일 이 글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이 있을 뿐, 가져갈 수는 없다.’고 따졌더니 현소가 서신을 보내어 사과하면서 글을 짓는 자가 말을 잘못 만든 것이라 핑계를 댔다. 그러나 전하와 예폐 등의 글자만 고쳤을 뿐, 기타 거만하고 협박하는 식의 말에 대해서는 ‘이는 대명에 입조(入朝)한다는 뜻’이라고 핑계대면서 고치지 않았다.
고요제이 칙서
당시 천황이던 고요제이 덴노는 개전 초기에 조선으로 직접 건너가려고 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조선행을 만류하는 서신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히데요시의 조선행은 연기되었다 하고, 실제로 조선행은 최종적으로 성사되지 않았다.
3.1.1. 일본 내부 사정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측근들도 조선 정벌의 성공 가능성에는 의문을 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한 주요 일본군 무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만큼은 늙은 모친 오만도코로에게 "올해 가을은 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히데요시만큼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없었던 만큼, 그의 자신감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던 것이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이며, 성공만 한다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 진압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 체제의 안정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조선 침공을 계획한 것으로 이는 소속 무장이나 동맹 다이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에 파병된 군대 중 우에스기, 모리, 다테, 시마즈 등 대다이묘들도 일부분 참전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히데요시에게 가장 가까운 히데요시 측근들의 군대가 중심이었다. 당시 히데요시 다음가는 대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요청하기는 했는데, 전쟁에 나가봐야 좋을게 없다는 걸 알고있는 이에야스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그리고 존버는 결국 성공하고 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전을 강요하지 못했던 것은 이에야스의 세력이 히데요시가 섣불리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성했고 훌륭한 명분이 있었기 때문으로,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간 것은 외교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지 전쟁에서 패배해서가 아니었다. 오다 노부카츠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이에야스군은 산보시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히데요시 군에게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대승했었다. 당시 히데요시 측은 이케다 츠네오키가 전사할 정도로 참패당했다. 그런데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지능이 모자라다는 평가까지 받은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 편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히데요시 측에서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과 이에야스를 혼인시키고 자기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내가며 화친한 것이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히데요시가 이에야스파를 억지로 임란에 참전시키고자 했다면 조선 정벌은 커녕 일본 내전이 다시 일어났을 수도 있다. 즉 애초에 병력요청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임진왜란을 전 집권자의 삽질 탓으로 돌리면서 전후 조선과 다시 화친을 맺을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2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 성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만 ~ 17만 정도. 과장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짙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조선 측 전쟁 참전 병력수는 60,000여 명, 재란 참전 병력수는 37,600여 명이었다.
아래 편제를 보면 서 일본 내의 유력 가문의 다이묘들은 거진 다 참가했으나 동 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서 일본의 주요 다이묘는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타 가문, 규슈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쵸소카베 가문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반면에 동일본의 유력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이 빠졌다. 다만 초기 15만 대군에 포함 안되었을 뿐이지, 잠깐 짬을 내서 참전하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게카츠, 난부 노부나오 등은 이후에 잠깐씩이나마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의 경우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3개월간 전선 감독만 하고 돌아온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는 병 때문에 빠졌고 전쟁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 일본의 모리 데루모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내 석고 10대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 빼고 다 참전 했다. 다만 대부분의 유력 무장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전한 모리 가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두달 조선에 들렸다 돌아간 수준. 즉 서부지역의 중소규모 다이묘들만 참전 하였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의 신분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본인과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 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 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 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가신 중 유력했던 이가 바로 임진왜란 초기에는 수군 지휘관이었다가 정유재란 당시에 일본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한 도도 다카토라이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각 군에서 제일 크고 강력한 무장이기보다는, 각군을 통제하기 위해 히데요시와 그 동생 히데나가의 심복들을 한명씩 배치하여 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와 구로다 요시타카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고, 임진왜란 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4군 대장 모리 카츠노부는 주고쿠의 모리 가문과는 전혀 관계 없이 우연히 성이 같은 사람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고참 가신이다.
8군 대장이자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비젠의 효웅으로 유명했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로 가문빨은 상당하긴 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로 갓 20세의 어린 나이로 실제 총 사령관 역할은 커녕 자신의 부대 지휘도 고참 가신들이 대신 해주었다. 9군 대장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도요토미(하시바)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
그나마 6군 대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33만 석), 7군 대장 모리 데루모토(120만 석, 실지휘는 삼촌이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형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삼남 킷카와 히로이에) 정도가 거대 가문 출신의 다이묘이다. 이 둘은 숙질 관계이며 이른바 오대로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일본 전체의 중신들이다.
즉, 1~5군 대장들은 히데요시의 젊은 심복(4군대장만 고참 심복)이며 대부분 임진왜란 직전에 다이묘가 됨. 6~7군 대장은 히데요시와 좋은 관계인 모리가문. 8~9군 대장은 히데요시의 양자이다.
이런 시종 출신 무장들의 참여 때문에 임진왜란이 2선급 지휘관들만 참여한 전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후대에 가토 기요마사 등의 명성 등을 고려해보면 참전시 군공이 적을 뿐이지 역량이 충분한 뛰어난 장수들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참전한 병사들도 오랜 전란으로 인해 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힐만한 정예병들이었다. 당장 일본과 맞붙은 명나라의 기록을 보더라도 일본군의 용맹함에 대해 고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정유재란의 8명의 대장들은 심복들이 줄고, 유명 무장들이 전면 배치 되어 서일본의 올스타들이 전원 출전하였다(1~3, 8군 대장 동일. 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5군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단, 동일본의 무장은 여전히 불참.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 지휘관들을 꽤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일본측 사료에 남은 조선군과 명나라 장수들보다 훨씬 정확하다. 개전한지 반 년도 안되는 시점에 이미 주요 일본측 지휘관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관백 평수길은 대마도에 와 머물러 있고, 기집(岐集) 재상 평수충(平秀忠. 일본어로 읽으면 '다이라 히데타다'가 되는데, '기집 재상'은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별명이므로 오기인 듯)이란 자는 처음 경상도에 있었는데 전사하였으며, 가등(加藤) 주계두(主計頭)란 자는 함경도에 있으며, 흑전(黑田) 갑비수(甲斐守, 갑비의 태수라는 뜻)란 자는 황해도에 있으며, 봉두하(峰頭賀) 하파수(河波守, 하파의 태수)란 자는 충청도에 있으며, 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란 자는 개성부에 있으며, 삼(森)·일기(壹岐)·도진(島津)이란 자는 강원도에 있으며, 모리요원(毛利耀元)이란 자는 전라도에 있으며, 우시(羽柴) 비전(備前) 재상 평수가(平秀家)란 자는 대장(大將)으로 경성에 있는데, 목책을 설치하고 그 안에다 겹으로 담장을 치고 그 가운데는 누(樓)를 지어놓았다. 우리 백성들을 모두 목책 밖으로 내보내고서 자기 무리들만 살고 있다.
또 소서(少西) 섭진수(攝津守, 섭진의 태수) 평행장(平行長)·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평호(平戶) 도주(島主)란 자는 모두 평안도를 주관하면서 평양에 있는데 거느린 적병의 수가 많고 가장 정예하여 여러 왜적들이 따르지 못하므로 선봉을 꺾거나 진을 함락할 때는 모두 이 진(陣)을 힘입고 있다. 지금 만약 아군이 먼저 평양을 꺾는다면 파죽(破竹)의 형세일 것이다. 왜승 현소(玄蘇)란 자는 평양에서 종군하고 있는데, 별다른 기술은 없고 중국의 문자를 약간 해득하기 때문에 항상 군중에 있게 한다.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11월 11일 정묘 6번째 기사
또한 원정군 총대장이 우키타 히데이에고 부사령관이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대장이라도 별 실권없는 바지사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우키타를 상대로 교섭을 시도하지는 않고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직접 교섭했다.
참고로 조선 조정은 천황과 쇼군(관백) 및 각 다이묘들과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서 천황과 쇼군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 '천황은 국정과 외교 관계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개전 전에 통신사가 받아온 도요토미의 답서에서 히데요시 본인이 관백이라 칭했으니 조선 조정에서도 도요토미의 공식 호칭을 관백으로 불렀는데 관백(関白)은 '맡아 두고(関) 아뢴다(白)'는 뜻으로, 여기서는 물론 국정을 맡아서 천황에게 아뢰는 직책을 의미한다. 전한의 권신 곽광에게서 유래한 명칭이니, 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관백이 신하의 칭호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3.1.2.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21세기 근래의 일본발 설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쇼군에 즉위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는 설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출이기 때문에, 쇼군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오로지 지혜와 힘 만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히데요시가 죽으면, 도요토미 가문이 일본의 군통수권자로서의 권력을 대대손손 세습할 수 있는 명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쇼군이 되어 도요토미의 천하를 후대에 계승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데요시는 덴노가와의 연줄을 강화해 관백이라는 조정의 관직을 얻었으나, 이는 허수아비 덴노가 내려준 명예관직일 뿐 아무런 실용성도 없는 말 뿐인 관직이었기에, 어떻게든 덴노에게 합법적으로 일본을 다스릴 수 있는 직위인 쇼군직을 받아내야만 했으나, 아무리 덴노와 친해본들 쇼군이란 직위는 덴노가 독단으로 내려줄 수가 있는 관직이 아닌지라, 일본의 모든 다이묘들이 납득할만한 큰 업적을 세우는데 말년의 히데요시는 전심전력으로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쇼군이 될 수 있는 새로운 명분을 일본서기를 통해 발굴해내는데 성공하는데, 사실 일본 역사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쇼군은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최초의 막부를 세우기 위해 악용한 벼슬인 정이대장군이 아니라, 이보다 약 250년 앞선 정신라대장군이란 직위였고, 도요토미는 스스로 '정신라대장군'이 되어, 일본서기에 나와있는 한반도 남부의 영토(임나일본부설)를 탈환(?)하여, 이를 통해 합법적으로 쇼군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때문에, 히데요시는 임란 당시 명나라를 정복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어도, 정유재란 2년차로 들어가면 한반도 남부 일부의 땅만 어떻게든 확보하려 발악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반도 남부를 영구히 일본 영토로 확보해야만, 자신이 '정신라대장군'의 지위를 보존할 명분이 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모든 일본군은 한반도 남부에서 곧바로 철군해버리는데, 이는 일본땅 전체에서 한반도 남부를 경략하려는 확고한 목표의식을 지닌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단 한명 뿐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메이지 정부의 정한론자들은 이러한 히데요시의 정치적 사상과 신념, 역사관까지 그대로 계승했으며, 이들이 히데요시를 자신들의 대외 팽창주의의 롤모델로 삼은 이유는, 실제로 정한론자들이 히데요시의 정신적 유산을 그대로 계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히데요시가 쇼군이 되어 대대손손 일본을 다스리기 위한 명분으로 시작한 것이 조선 침공이라는 설이다.
3.1.2.1. 반론
이러한 설은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의 행적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만들어 낸 낭설에 가깝다. 히데요시는 쇼군이든 관백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관백이 된 것이지, 쇼군이 되지 못해서 관백이 된 게 아니다. 쇼군은 친왕과 후지와라씨, 미나모토 일문이 역임했고, 그 전신인 진수부 장군 같은 경우에는 여러 대귀족 가문이나 무가, 오슈 후지와라씨 같은 지역 호족 출신들도 역임한 바 있다. 그러나, 관백은 후지와라 일문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일본 최고위 관직이었다. 격을 따지면, 쇼군 따위보다 관백이 훨씬 더 높은 관직이고 훨씬 더 되기 어려운 지위이다.
후지와라씨의 양자가 되는 것으로 관백이 된 히데요시는 일본의 4대 성씨라 할 수 있는 원평등귤(源平藤橘. 겐페이토키츠)에 맞먹는 도요토미(豊臣)씨를 세웠다. 이것은 쇼군 따위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고 훨씬 더 파격적인 일을 행한 것이다. 따라서, 관백이 된 히데요시가 쇼군 직책에 연연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히데요시는 쇼군이라는 군 통수권자로서 대대손손 세습하는 게 아니라, 관백으로서 천황을 대리해 일본 전체를 통치하는 위치를 세습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는 히데츠구를 관백으로 삼고 자신은 태합이 된 것, 히데요리의 관백 승계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유언에서 그 계획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오닌의 난이 터지고 전국 시대가 본격화된 뒤에는 쇼군의 권위도 떨어져서 일본을 다스리는 건 고사하고 본진인 교토의 주인이 수없이 바뀌는 처지였고, 이 시기가 무려 한 세기가 넘었다. 즉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시점에서는 쇼군직이 관백보다 나을 건 없었다. 그런 점에선 오히려 대놓고 동네 북 신세가 된 쇼군직보다야 조정과 공가가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관백 쪽이 나았다.
이는 이전 아시카가 막부의 성립 과정과도 맥이 통하는데, 당초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목표는 새로운 막부를 세우는 게 아니라 덴노 중심의 율령제 국가를 복구하고 그 안에서 실권자 노릇을 하는 것이었고, 이게 고다이노 덴노 정권 하에서의 권력다툼으로 어그러지자 그제서야 무사 집단을 규합해 막부를 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정과 거리가 있는 신개척지 간토가 근거지인 역사상의 막부 가문들과 달리 도요토미는 애초에 근거지랄 것도 없는 한미한 가문으로 시작했고 이후에 받은 오우미의 영지든 오사카성이든 동일본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무가 기반의 막부 정권보다는 교토 조정의 율령제 기반 권력을 선호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오히려 이렇게 도요토미가 율령제 권력을 선점해버렸으니 반대로 도쿠가와는 안그래도 간토로 전봉당한 마당에 동일본 무가 기반의 막부 체제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
실제로 도쿠가와 가문은 에도 막부를 열고서도 오사카 전투 이전까지는 일단 도요토미를 도쿠가와와 동등한 위치로 인정해야 했다. 바로 서일본에서 조정과 공가의 권력을 인정해줘야 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초기 상황이 재현되었던 것이다. 어찌됐건 에도 막부는 이후 압도적인 무력으로 이 율령제 권력의 대표격이었던 도요토미가를 몰락시키고 쇼군의 권위를 조정과 동격으로 올려놓는데는 성공하지만 이는 끝내 성리학자들의 역린을 건드려 존황론자들의 토막운동을 부르고 말았다.
3.2. 건주여진 통일
1588년 누르하치에 의해 건주여진이 통일된다. 너무 급격한 통일에 명과 조선은 바짝 긴장했으나, 명 황제인 만력제가 태업을 하는 도중이라 제대로 된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조선은 북방에 정예병과 전쟁물자를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에 수차례 화친 의사를 담은 조공을 보내왔지만 당연히 아무도 믿지 않았고 긴장상태는 지속되었다.
흔히 조선의 전쟁준비가 미흡했다는 이야기가 나도는 원인은 남도에 전쟁준비가 부족해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위한 여력이 이미 임진왜란 징후 감지 이전 수년간 북방에 소모되었던 것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3.3. 조선의 대응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유구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선조 실록 1591년 10월 24일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 중이던 조정은 당파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김성일과 류성룡의 대화는 훗날 동인의 실책을 덮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이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巨儒)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 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간신으로 욕먹는다. 다만, 김성일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임진왜란이 터지고 난후 자기 책임을 지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을 했다. 일본군의 침입 주요루트였던 경상도 전장을 동분서주하며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중앙군과의 대립을 중재하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신경썼던 실무형 인물이 바로 김성일이다. 다만 발발 이전에는 조정에서 실시하는 전쟁준비에 쓸데없다는 집단 항소를 올릴때도 참여하는등, 지속적으로 전쟁준비를 저지하였기에 위의 전쟁 이후 활약을 아는 사람들에게도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한다. 애초에 경상도 전장을 가게된것 자체가 지속적인 전쟁반대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결자해지 하라고 조정에서 보낸 것이지 자진해서 간것이 아니다. 저런 노력도 자신의 책임이 있음을 알았기에 어떻게든 소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쳐보기 위해 열심히 한것이었다.
특히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남부 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경상 감사 김수와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선각은 각기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특히 김수가 두드러졌는데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와 경상 좌우병영성이 모두 증축되거나 새로 쌓았다. 단순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보지도 않았다. 기존 왜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섬이 많은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탈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왜구의 주 공격루트가 아니었던 경상 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2개의 첨사진만 있던 부산 - 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김수는 축성 인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 뿐 아니라 유생들까지 동원했다. 향교 교생을 뽑는 고강을 엄격히 실시하여 낙강 유생들을 모조리 충군시켰고 이로인해 지역 사족층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방군 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이나 식자층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김수는 사족층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쟁 발발 후에 곽재우와 크게 충돌했고 선조는 성을 높일수록 민심이 피폐해졌다며 전쟁 준비로 인한 민심 이반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동년배 친구였던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축성에 반대했다. 하지만 조정은 꿋꿋이 전쟁 준비를 진행시켰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이 반격을 감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김성일의 상소로 몇몇 공사를 중단하는 등, 사회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준비 속도는 상당히 더뎠다.
또한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수들을 남쪽 위주로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종 6품 지방의 현감였던 무명의 장수를 전쟁 발발 1년전인 1591년 2월 13일, 공을 세우라는 전교와 함께 단 하루만에 8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로 초수하기도 했다. 그 외에 이억기, 이천, 양응지, 원균 등 당시 이름 있는 장수들을 대거 남쪽으로 배치했다.
을묘왜변도 겪었던 조선이기에 전쟁 준비를 하고 있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비를 했고 김성일은 잘못된 보고를 한 탓에 파직되었다. 일본군의 규모를 수만 명 정도로 예상했다는 점과 통신사의 귀국(1591년) 이후 1년 남짓한 준비 기간은, 1585년부터 7년 이상 전쟁을 준비한 일본보다 부족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이 일본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가 컸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는 한편 일본이 조선으로 보낸 일본 국왕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일본 내부 정보를 꾸준히 수집했었다. 그러다 1467년 오닌의 난을 기점으로 일본이 전국시대에 돌입해 내부 사정이 혼란해지면서, 파견간 조선 통신사들이 조난당하거나 사망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1479년~1590년동안 조선 통신사 파견이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직접적으로 정보 수집을 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국왕사나 왜관에 들어온 일본인, 대마도를 통해 일본 관련 정보를 수집해야만 했다. 문제는 조선측에서 직접 정보를 수집할 방법이 없다보니 일본측에서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믿기가 어려웠다. 특히 공식적인 외교창구였던 대마도는 조선 일본 양국간의 이중 종속관계를 유지하고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보를 부분적 내지는 가공해서 조선에 제공했다. 대마도가 몇 안 되는 정보 창구인지라 조선으로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1590년 조선은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공 정보를 수집했으나 근 100여 년 동안 정보가 없어 이해하기 어려웠던 데다 이듬해 명나라가 조선이 일본을 인도하여 명을 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을 의심하는 외교적 마찰이 벌어지면서 일이 꼬였다. 즉 정확한 전쟁 정보를 입수했으나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겹치는 혼선이 발생하여 일본이 왜, 어떻게, 얼마나 쳐들어 오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조선으로선 조선 전기에 있었던 삼포왜란 등의 경험을 토대로 그저 규모가 좀 더 커진 (일반적인) 전쟁으로 예상해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589년 8월 1일 석강에서 을묘왜변의 일을 상고하면서 선조가 "왜적 수만명이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을까?"라고 묻자 비변사 제조 변협의 대답은 "걔네 배 한척에 100명밖에 못 태우는데 100척 띄워봤자 1만명밖에 안 될걸요?"였다. 변협은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워 출세가도를 달렸고 바로 2년 전에는 전라우도방어사로 녹도 일대를 침공한 왜적을 막아내기도 했는데 그런 군사전문가조차 일본의 대규모 침공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던 것이다.
이전까지 많은 사례가 있었던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서도 10만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해 쳐들어온 나라는 수나라, 당나라, 요나라 정도로 의외로 많지 않으며 마지막 사례인 요나라와의 전쟁도 16세기 말 기준으로 거의 600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여요전쟁 이후로도 14세기말 홍건적들이 10만~20만 수준의 규모로 고려에 쳐들어온적은 있었는데 이 사례 역시 당시 기준으로 거의 200년도 더 이전의 일이었는데다가 이마저도 홍건적이 워낙 강적이라 고전한게 아니라 당시 고려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고전한 것이다, 이 당시 홍건적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라 규모만 큰 도적떼나 다름없었다. 즉, 조선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비를 했다. 문제가 2개 있는데, 첫째는 그 상식이 백 년 전의 상식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백 년 이후의 상식으로 가늠해 봐도 히데요시가 미친 수준으로 대군을 모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규모의 대(大)재앙이 닥쳤다는 것.
여기에 전략적, 외교적 측면에서도 무한정 남부 지방 방위에 몰빵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재정 및 인구 여건상 남부 지방에 군단급 이상의 상비군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북방의 방위력을 일부 희생시켜야 했는데, 고려 초부터 지속된 북방에서의 군사적 위협을 생각하면 이것도 무작정 강행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니탕개의 난이 터진지 10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고, 200년 전 이야기지만 공요군 4만명을 일으켜 출정하자 남방이 다시 왜구로 들끓어 골머리를 앓던 역사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 역도 성립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초기 조선의 판단은 일단 삼남과 북병을 소집하면 막아볼 수 있다는 것이었고, 어쨌거나 5만이 넘는 남도근왕군이 소집되어 수도권 방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조선도 작정하면 10만 이상의 대군을 모을 수는 있었지만 그 막대한 생산인구를 징집해서 붙들고 있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명군에게 군량을 대주는 쪽이 싸게 먹힐 지경이었다. 중국발 군비제한도 문제인데, 당장 왜와 손잡고 명을 침공한다는 참소를 받는 마당에 10만 대군을 일으킨다고 하면 왜란을 걱정하기 이전에 명에서 어떻게 나올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실제로 중국 왕조들은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에도 조선의 군비에 지속적으로 제한을 가했으며 군비 확충 명분으로 일본의 재침을 거론해도 씨알도 안먹힐 지경이었다.
그 다음 문제는 남부 중에서도 어디가 1선이냐는 것이었다. 현대인들이야 임진왜란 사례와 오늘날 경부간선을 보고 당연히 부산으로 넘어오는 것이 상식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조선 정부가 생각한 주전장은 경상도가 아니라 전라도(+경상우도)였고, 당장 위의 1589년 8월 1일 석강 기사에서도 주전장을 전라도로 상정하고 토론하고 있었다. 임란 이후인 1601년에도 남부의 방비 문제를 논하면서 선조가 대놓고 "을묘왜변 이후에 왜적이 전라도로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산으로 와버렸잖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이전까지의 일본발 침공은 대부분 뜯어먹을 게 풍부한 전라도 등 서남해안 지역을 노리고 직공해왔고, 심지어 세종대에는 황해도 연안까지 왜구가 침공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대마도를 기준으로 부산과 그 서쪽의 거제는 거의 비슷한 거리이고, 전근대 조선의 교통여건 상 부산에서 출발해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한성행 육로는 효율이 심각할 정도로 낮아서 결국 호남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죽도 밥도 못 될 상황이었다.
즉, 조선 조정 입장에서 보면
1. 상륙해봤자 백두대간 넘다가 힘 다 빼고 보급도 제대로 안 될 경상도 방면 육로 방어선에 투자할까?
2. 서남해안 통해서 곡창지대 장악하고 수틀리면 경강까지 쳐들어올 수 있는 전라도 방면 육해로 방어선에 투자할까?
라는 문제였다.
김수가 유독 악명이 높았던 것도 경상도 지역은 대체적으로 왜변에 크게 노출된 경험이 없는지라 지역민들이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던 게 컸다. 결국 조선 측의 결정은 이미 수많은 사례가 쌓인 전라도 방면에 투자하는 것이었고, 이는 임란 초기 경상좌도 지상군의 총체적 붕괴에도 전라도를 굳건하게 지켜내어 반격의 발판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마지막으로, 신라 시대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봐도 삼국시대의 일본 열도는 제대로 된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없었으며, 통합된 나라가 아닌 한반도계 이주민세력과 본토 원주민들이 섞이며 부족간의 싸움을 거듭하는, 중앙집권되지 못했던 부족집단이었을 뿐더러 한반도 왕조에게 나라가 휘청거릴 위협이 될만한 침공을 감행한 전례가 없었다. 이전까지 한반도를 공격했던 일본 무력집단은 어디까지나 왜군이 아니라 대다수가 왜구였다. 군대가 아니라 해적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편제와 지휘체계가 정규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고 나약한 집단들이었으며, 그 수효 또한 수만 단위를 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목적성을 노략질로 볼 수밖에 없었다. 큰 규모의 전투 없이 수백년간 글공부와 당파싸움이 아닌 물리적인 싸움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평화에 찌들었던 조선과는 달리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한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국시대를 겪은 뒤 수십 수백명을 죽여본 경험풍부한 병사와 지휘관들을 거느린 일본의 조선 멸망전이라고 볼 수 있을 근거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현대 외교역학적으로도 상식을 초월한 수준의 전쟁 엄포는 보통 전쟁 위기보다는 그냥 미치광이 전략으로 본다.
사실 조선의 전쟁준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첫째는 병력의 규모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둘째는 그 예측치를 뛰어넘는 과도한(?) 전쟁준비를 추진하면서 그 필요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즉 왜적이 1~2만 정도라는 전제 하에서는 잘해야 해안가 지역 좀 축성하고 정 불안하면 남강 연안에 방어진지 정도 구축하면 될 것을 왜 구태여 유생까지 동원해가며 내륙지역에서까지 난리를 치냐는 것이 당시 경상우도 유림들의 불만사항이었다. 위에서 소개한 이로의 편지도 당대의 예측에 의거하면 꽤 상식적인 소리긴 하다. 해안가 요새들을 돌파해 남강 연안까지 당도할 때쯤이면 이미 그야말로 민병대에게도 썰려나갈 수준일테고, 실제로도 정암진에서의 전투 결과도 그랬으니까. 그럼에도 정작 전쟁이 터지자 관군이 일패도지하고 그동안 피땀흘려 준비한 전쟁대비책들이 아무 쓸모가 없는 꼴을 목도했으니 전쟁 초기 부왜배들이 속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붕당으로 싸우기만 하고 전쟁 가능성을 부정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남쪽 전장을 중심으로 전쟁에 대한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준비 기간이 너무 부족했고, 그 전의 왜구들의 왜적질보다 좀 더 큰 국지전 정도를 예상한 것과 달리 일본은 전처럼 적당히 싸우고 물러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고, 2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조선을 밟고 지나 바로 명나라로 진격하는 목적으로 한 대규모 출병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설령 정확히 예측을 했다 해도 고질적인 재정부족과 전략적, 외교적 고려사항 등 발목을 잡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즉, 어느 정도 전쟁에 대한 준비는 했으나, 오랜기간 지속된 평화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전쟁 준비로 인해 조선 내 사회의 반발이 심했고, 일본이 벌인 전쟁의 규모가 조선 조정의 예측을 아득히 넘어서버린 것이다.
4. 병력 구성
4.1. 조선의 병역 체계
조선의 군대는 크게 일반병인 정병과 수군 그리고 직업군인 오위로 나누어진다. 조선의 군역체계는 매우 복잡해 한국사 시험난이도를 높이는 주범 중 하나로 꼽힐 정도라 이 문서에서는 임진왜란과 연관된 내용 위주로 설명하고 자세한 내용은 해당 링크문서를 참고바람.
4.1.1. 정군(正軍)
원래 조선의 병력 체계는 양인개병제로 모든 양인(16세~60세)은 군역의 의무를 지며, 평소에 농사를 지다가 순번이 되면 1~2개월씩 현역복무를 해야 했다. 이 때까지는 양반도 군역을 져야했다. 3정1군의 자연호별로 편제해서 가족원 성인 남성 3명 중 한 명이 복무하면 나머지 두 사람이 면제되는 식이었으며 이것이 봉족제다.
그런데 아들이 없는 사람은 맨날 군역만 져야하고, 가난한 사람은 군역을 지면 농사를 못해 먹고 살길이 없었다. 세조때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유있는 사람이 정병이 되어 현역복무를 하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정병에 포를 바쳐 재정을 돕게 만들었다. 이렇게 군역을 지는 사람을 정군 혹은 정병(正兵)이라 하고, 군포를 바치는 사람을 보인(봉족)이라 하며 이것을 보법(保法)이라고 한다. 갑사는 2보(4명), 정군은 1보(2명), 수군은 1보1정(3명)에게서 포를 받는다.
한편 부득이한 사정으로 현역복무(입번(立番)이라 한다)할 수 없는 사람은 1달에 베 3필, 또는 쌀 9말을 징수하게 했는데 이것이 방군수포제였다. 그런데 보법의 시행으로 군역대상자는 늘었는데 보인의 수가 줄어들자 정병에 포를 바칠 사람이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현역으로 복무해야하는 사람도 입대하기 싫어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고 재물을 주는 행위도 빈번했다. 결국 원래 불법이지만 방군수포제가 워낙에 성행하여 결국 중종때 이를 법제화해 군적수포제로 바꾼다. 군적수포제는 지방 수령이 관할 지역의 장정으로부터 연간 군포 2 필을 징수하여 중앙에 올리면, 병조에서 이것을 다시 군사력이 필요한 지방에 보내어 군인을 고용하게 한 제도였다. 또한, 이때부터 양반은 모든 군역에서 면제되고 군포도 내지 않아도 되며, 양반이 다시 군역을 부담하게 되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호포제를 도입한 이후였다. 이렇게 조선의 군대는 모병제에 가깝게 변화한다.
즉, 조선의 군사 제도는 만인개병제→선별징병제→준모병제로 바뀌었다. 농사만 짓는 일반 농민은 군사가 되지 않고 면포를 받아 생활하는 정병이 조선의 군역을 책임지게 되었다. 물론, 정병도 완전 상비군이 아니라 평소에는 농사짓다 순번마다 돌아가며 복무하는 반농반병의 신분으로 모병제에 가까운 일본의 아시가루와 상당히 유사하다. 당연히 병력 수는 양인개병제였던 조선 초기보다는 크게 감소하게 되지만 그래도 이들이 전쟁 기간 내내 조선군의 주력이 된다.
학자들은 임진왜란 당시 인구를 약 1000만으로 보고 있는데 근거는 1626년 호패청의 기록에서 발급된 인구가 226만이라는 기록이다. 전쟁으로 감소한 인구가 약 30년간 회복되었을 것을 감안하면 1626년의 인구가 임란이 일어난 1592년과 비슷할 것으로 본다. 호패는 호패법에 따라 군역과 납세를 위해 성인 남성에게만 지급되니까 여성을 합치면 약 450만, 호패가 지급되지 않는 미성년자와 노령층을 합치면 약 800만, 기타 국가에서 파악하지 못한 인구를 약 200만 정도로 잡는다.
성인 남자 220만여 명 중 약 40%는 노비고, 7~8%는 양반이니 실제 군역을 담당하는 인구는 대략 120만 정도다. 이 중 직업군인이 약 2만 3천명에 1명당 보인 4명이 붙고, 수군은 약 4만 명에 1명당 보인 3명이 붙으니 대략 30만 명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남은 90만이 정군에 해당하는데 정병 1명당 보인 2명이 필요하니 수치상 동원가능 병력은 30만 정도이겠으나, 장부기록의 불일치는 여러 번 지적되었고,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복무가 힘든 인원, 늘상 따라붙는 행정적 착오 등을 종합하면 실제 동원가능한 정군은 약 20만 명(+보인 40만) 전후일 것이다. 이는 아래 기록된 실제 운용된 병력과 대략 일치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병력들은 상비군은 절대 아니고, 평소에는 상번군 약 4만 명이 돌아가면서 훈련받다가 전시에 전원 동원된다.
다만 인조 재위 초기에는 호패를 차고 다니지 않으면 효수하겠다는 강경책을 쓴 덕에 호적에 등록되어 호패를 차고 다니는 비율이 이전에 비해 증가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정군과 보인에는 양반층과 노비만 빠졌던 것이 아니다. 일단 향리, 율생, 의생등 중인층에 해당되는 사람 상당수가 정군과 보인에서 제외되어 잡색군에 소속되었다. 이들뿐만 아니라 여러 장인들, 고공, 무당, 백정 등을 포함한 여러 직역들도 정군과 보인 체계에서 제외되어 잡색군에 소속되었다. 양반들과 노비들도 마찬가지로 잡색군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위의 문단에서 호패청에서 발급된 호패의 수가 226만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당시의 남정 수가 226만이였다는 서술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전에 기록된 것이 103만, 호패청이 완성해 올리는 책에 나오는 것이 123만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1639년 만들어진 호구총수에 나오는 인구 수가 200만에 미치지 못하는 점, 그리고 인조 4년 호패법 시행 결과 전국의 인구가 120만 수준이였다는 장만의 발언 등과 종합해서 보면 인조 4년에 호적에 등록된 남정의 수는 123만 정도였고 226만은 이전에 조사된 결과가 중복 집계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직전 시기의 호적에 등록된 군정의 수는 35만명 정도이며 중종 20년 6월 13일의 기록에 따르면 중종 20년의 정군의 수는 18만 6,691명, 잡색군은 12만 5,074명이였다. 잡색군도 전시에는 동원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종 시기에 전시에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문서상으로는 30만 수준, 임진왜란 직전의 시기에는 35만 정도였다. 물론 잡색군의 경우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였기 때문에 동원해도 큰 도움은 안 됐다.
병력 수로는 상당하지만 200년간 평화가 지속되던 조선의 군사훈련이 대충대충이었을 거라는 점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 일본의 아시가루들은 오닌의 난부터 100년 넘게 이어진 전국시대로 실전에서 살아남고 단련된 베테랑 병사들이었으니 숫자만으로는 조선군이 도저히 상대가 안되었다. 용인 전투에서 동원된 8만(혹은 5만)의 근왕병 대다수가 바로 이 정군이었는데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한 고작 일본군 1600여 명에게 와해된 것으로 그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조선 병사들도 실전경험이 쌓이면서 전쟁 초반의 추태는 차츰 줄어들게 된다. 그 예가 방금 언급된 전라도 근왕군으로 용인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전라도로 밀고 들어왔을 때 웅치 전투, 이치 전투에서 숫적 열세 임에도 용인전투의 패잔병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자리를 사수하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나중에는 권율, 황진과 함께 다시 한번 북진하여 독성산성 전투, 행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4.1.2. 조선 수군
조선 수군도 기본적으로는 정병과 같은 제도를 따라 정병 대상자 중 일부를 수군으로 편제하는 식이었다. 수군은 대표적인 3D 직책으로 고되고 열악한 근무조건 탓에 아주 인기가 없던 군역이었다. 때문에 방군수포제로 돈 주고 빼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인원이 모자라서 양천불명자나, 죄인으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요역 담당자가 부담해야 하는 면포도 3필로 육군인 정군의 2필보다 많았다. 그래도 기피하는 사람이 많자 성종대에 아예 수군을 강제로 세습되게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고된 직책이라 조선 후기에는 수군이 칠반천역 중 하나로 천시되었다.
4.1.3. 오위(五衛)
한편 농민군인 정군만으로 모든 국방을 감당하기 힘드니 이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중앙군인 오위였다. 수도를 지키는 경군(한양에 주둔하던 군대) 대다수가 오위에 해당한다. 오위에는 시험을 통과한 직업군인인 갑사, 별시위, 파적위 등과 농민군인 정병, 그리고 왕실 종친 및 공신의 자제들로 구성된 충의위, 충찬위, 족친위 등이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즉 오위군 전부가 숙련된 직업군인은 아니었다.
갑사는 태종 1년부터 국가의 녹을 받는 상비군으로 편제되었다. 원래는 양반들이 주로 하던 직책으로 특히 기갑사(기병)는 서양의 기사들처럼 본인이 말을 준비해야 하니 부유한 자제가 아니면 하기 힘들었다. 일반 보병도 무장과 갑옷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맨앳암즈와 비슷해 서양에서는 맨앳암즈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대우도 좋아서 과전과 녹봉을 받았고, 만호(종4품의 무관)나 지방관으로 승진할 수도 있어서 조선 초기에는 경쟁이 심해 시험도 어려웠다. 어차피 이때는 양반도 군역을 져야 했는데, 갑사가 되면 일반 군역에서 빠지는 데다 봉록도 받고 잘하면 벼슬도 할 수 있으니 인기가 좋았다. (현대 단기하사처럼 어차피 가야할 군대면 월급이라도 받자! 정도)
하지만 군적수포제 실시 이후 어차피 양반은 군 면제 대상이 되어 군역을 질 필요가 없어지니 갑사도 기피하는 경향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갑사가 되는 것은 일반 양인들이었고 대우와 지위도 조선 초기에 비해 나빠지게 되었다. 그래도 직업군인인 만큼 일반 농민병인 정병보다는 훨씬 정예병력이었다.
갑사의 규모는 편제상으로는 14800명이였고 중종 때 정원이 초과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보면 이 때까지는 수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종~선조 시기에 갑사의 수가 감소하면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현대의 대통령 경호처에 상당하는 금군(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은 병력 약 7백여 명을 거느렸고, 그 밖에 국왕의 친위군이라 할 수 있는 별시위와 한량들을 모아 만든 특별 군사조직인 정로위가 있었다. 이들은 취재를 통해 선발된 직업군인인 만큼 일반 농민병인 정군보다는 상당한 훈련도를 자랑했다.
신립이 경군에서 기병 8천여 명을 경군 중 차출해서 탄금대 전투에 참전하였다는 기록을 보건데, 여타 경군 병력도 최소 8천여 명은 되어 보인다. 물론 8천 명의 자질과 숙련도는 별개지만 말을 탈 수 있었다는 점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직업군인인 기마갑사 및 별시위임을 추측할 수 있다.
후술하는 류성룡의 자료에 의하면 이들은 약 2만 3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4.1.4. 조선의 방어 체계
조선의 기본적인 방어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로 전시에 각 군의 병력을 한데 합친다음 중앙에서 장수를 내려보내서 이를 지휘하게 하는 체제로 전쟁 당시 여러 문제점을 보여 전후 속오군체제로 개편되었다.
4.1.5. 조선군의 병력 구성
위 병역 제도를 통하여 조선이 실제로 가용한 병력이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병력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파악하기 힘드나 개전 1년 뒤인 1593년 1월 조선군의 병력이 얼마인지는 사료가 남아있다. 이하는 장부상 병력이 아니라 실제 운용중이던, 혹은 최소한 운용중이라고 조선 조정에 보고된 병력들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경기도> - 19,300명
강화부(江華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000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00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000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000명
수원부(水原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000명
양주(楊州)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000명
양근군(楊根郡) 의병장 이일(李軼)의 군사 600명
여주(驪州)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000명
안성군(安城郡)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00명
<충청도> - 10,800명
직산현(稷山縣)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800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합해서 약 3,000여 명
각처의 의병 합해서 약 5,000여 명
<경상도> - 77,000명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0,000명
울산군(蔚山郡) 절도사 박진(朴晉)의 군사 25,000명
창녕현(昌寧縣) 의병장 성안(成安)의 의병 1,000명
영산현(靈山縣)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000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5,000명
창원부(昌原府)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5,000명
합천군(陜川郡)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000명
의령현(宜寧縣)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000명
거창현(居昌縣)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000명
<전라도> - 25,000명
순천부(順天府)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5,000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0,000명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0,000명
<함경도> - 10,200명
함흥부(咸興府)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5,000명
경성부(鏡城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군사 5,000명
안변부(安邊府)·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의 군사 100명
조방장 김신원(金信元)의 군사 100명
<강원도> - 2,000명
인제현(麟蹄縣) 순찰사 강신(姜紳)의 군사 2,000명
<평안도> - 17,903명
순안현(順安縣)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5,680명
법흥사(法興寺)에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273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00명
용강현(龍崗縣)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7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090명
대동강 하류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420명
<황해도> - 8,800명
황주(黃州)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800명
재령군(載寧郡)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000명
연안부(廷安府)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군사 4,000명
이상 합계 172,400명.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1593) 1월 11일 병인 15번째 기사)
다만 이 기록에서도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중복집계 되거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참고.
이중 의병의 병력 20,000여 명을 제외하면 조선 정규군은 15만 명 정도라고 사료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1593년 1월은 선조가 의주에 피난가 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가토 키요마사의 2군은 함경도로 진격중인 임진왜란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때문에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등이 멀쩡하던 임진왜란 개전 당시 최대 동원 가능한 병력은 이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또 다른 자료로는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인 '진시무차'(1594년 4월)의 내용이다. 군적상 조선군 전체 군인수 145,620명, 그 중 정로위, 갑사, 별시위가 23,620명, 정예군 중 군사 7,920명 보인 15,700명. 위 자료와는 달리 의병은 기록에서 빠졌다.
그 밖의 다른 자료로 1509년의 조선 병력은 "이 해에 군적(軍籍)을 고쳤는데, 정군(正軍)이 177,322명, 잡군(雜軍)이 123,958명이었다."(중종실록 10권, 중종 4년 12월 30일 정사 7번째 기사) 전쟁 당시에도 이 병력과 큰 차이가 없다면 총 병력은 30만, 전투병인 정군은 18만 정도를 동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때 개전 당시 조선이 운용한 관군의 전투 병력은 약 18만 내외인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조선 수군의 개전 초기 병력은 약 3~4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위 1593년 1월의 자료에 남아있는 기록상으로는 15,420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개전초기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주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유 군선을 자침시켜 조선 수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했던 경상도 수군이 통째로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많은 조선군이 어디서 뭘했길래 주요 전투에 안보였냐고 묻는다면, 원래 전쟁이란게 최일선 병력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일본군도 임진왜란 초반 핵심전투인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성 전투 등은 모두 고니시 1군의 18,000여 명이 주도적으로 치루었고, 가토의 2군 22,000여 명이 그 다음으로 많이 싸웠고, 나머지 10만이 넘는 일본군들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등 조선팔도 각지에 흩어졌는데 이들과 대치한게 이 병력들이다.
양적으로 조선의 병력은 상당했지만, 누차 언급되었다시피 이 병력들은 질적으로는 좋지 못했다.
이상은 임란 초반의 병력 상황이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조선의 재정이 그 동안의 전란으로 많이 악화된 데다 선조가 전후 복구를 위해 병력들 상당수를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바람에 병력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그 빈 자리들을 명나라 군이 상당 부분 다시 채워주었다.
4.2. 일본군 병력 구성
제1군 - 큐슈 서부 세력, 18,700명(선봉 겸 평안도 정벌군)
고니시 유키나가(7,000명)
소 요시토시(5,000명)
마쓰라 시게노부(3,000명)
아리마 하루노부(2,000명)
고토 스미하루(700명)
오오무라 요시아키(1천 명)
제2군 - 큐슈 중부 세력, 22,800명(선봉 겸 함경도 정벌군)
가토 기요마사(1만 명)
나베시마 나오시게(12,000명)
사가라 요리후사(800명)
제3군 - 큐슈 동부 세력, 11,000명(황해도 정벌군)
구로다 나가마사(6,000명)
오토모 요시무네(5,000명)
제4군 - 큐슈 남부 세력, 17,000명(강원도 정벌군)
모리 요시나리(2,000명)
시마즈 요시히로(10,000명)
아키즈키 다네나가(1,000명)
이토 스케타카(1,000명)
다카하시 누로(1,000명)
다카하시 모토타네
시마즈 다다토요
제5군 - 시코쿠 세력, 24,700명(충청도 정벌군)
후쿠시마 마사노리(5,000명)
토다 카츠타카(4,000명)
쵸소카베 모토치카(3,000명)
이코마 치카마사(5,500명)
하치스카 이에마사(7,200명)
제6군 - 큐슈 북쪽 세력, 15,700명(전라도 정벌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10,000명)
고바야카와 히데카네(1,500명)
타치바나 무네시게(2,500명)
타치바나 나오츠구(800명)
쓰쿠시 히로카도(900명)
제7군 - 주코쿠 서쪽 세력, 30,000명(경상도 정벌군)
모리 데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제8군 - 주코쿠 동쪽 세력, 10,000명
우키타 히데이에
나카가와 히데마사
우키타 타다이에
제9군 - 간사이 세력, 11,500명
도요토미 히데카츠
호소카와 타다오키
수군 9,450명
구키 요시타카(1,500명)
도도 다카토라(2,000명)
와키자카 야스하루(1,500명)
가토 요시아키(1,000명)
구루시마 미치후사(700명)
구와야마 마사하루(1,000명)
도쿠이 미치토시(700명)
스가이 에몬쇼(250명)
호리우치 요지요사(850명)
스기와카 덴사부로(650명)
이상 합계 170,850명
부교(奉行) • 군감(軍監)
이시다 미츠나리: 부교로 끝나지 않고 행주대첩에도 참전했지만, 본인의 처참한 군재만 입증하고 참패했다.
오타니 요시츠구
마시타 나가모리
가토 미츠야스
마에노 나가야스
기타 참전 인원
구로다 요시타카: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아사노 요시나가
미야베 나가후사
난조 모토키요
이나바 사다미치
가메이 고레노리
다테 마사무네
안코쿠지 에케이
키노시타 시게카타
사이무라 마사히로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요시하루
가키야 츠네후사
후속 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 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로 총 7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 ~ 9군의 지역을 보면 주로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이 참전했다. 동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 ~ 16군 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비대 총 병력: (117,860명)
10번대 17,550명: 난쵸 모토키요, 미야베 나가히로, 기노시타 시게카타, 가키야 츠네후사, 마에노 나가야스, 사이무라 히로히데, 아카시 노리자네, 벳쇼 요시하루, 나가오카 다다오키, 기노시타 가츠토시, 기노시타 도시후사, 기노시타 노시토부, 나카가와 히데마사
11번대 24,960명: 아사노 나가요시, 오타니 요시츠구, 기무라 시게코레, 오오다 카즈노리, 야마다 도사부로, 하세가와 히데카즈,오야마 타다모토, 아오키 가즈노리, 호리 히데하루, 호리 치카요시, 미조
12번대 10,000명: 마에다 도시이에, 마에다 도시나가
13번대 6,450명: 오카모토 시게마사, 히토츠야나기 가유, 하토리 가즈타다, 미즈노 다다시게, 오다 노부카네, 마키무라 세이겐
14번대 13,750: 하시바 히데카츠, 이토 모리카게, 이바나 사다미치, 모리 다다마사, 카네모리 가시게, 사토 가타마사
15번대 4,100명: 히데노 다카아키, 모리 히데, 이시카와 카즈마사, 센고쿠 히데히사, 가토 미츠야스
16번대 12,050명: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테 마사무네, 우츠노미야 구니즈나, 나스 슈우, 사타케 요시노부, 사토미 요시야스, 사나다 마사유키, 우에스기 카게카츠, 모가미 요시아키, 사노 료하쿠, 난부 도시나오
특수부대: 29,000명 예비대(6,400명), 오다 노부카츠 (2,200명), 조총수(1,800명), 기마무사(12,000명), 후방부대(7,600명)
최종 동원 병력 288,710명 + @
동원 선박 2,100여 척 이상
5. 전쟁의 경과
5.1. 전쟁의 시작
8천 조선군, 16만 대군과 맞서다
전쟁 발발 전인 3월 23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슈인조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에게 조선출병을 명했으니 너(가토 기요마사)도 전장에 나가라. 이국(조선)의 자(者)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방심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공문을 전국에 보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척 18,700명(경상 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 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갑작스레 적의 대군을 맞은 부산진 첨사 정발은 매뉴얼대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배 3척을 자침시킨(전선, 중선, 방패선 각 1척) 다음 6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개전 직전 서평포(부산 사하구 일대)와 통합된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 아래 14일 ~ 15일 이틀에 걸쳐 싸우다 전멸했다. 남동부 방위 중심지인 동래성에는 개전 하루도 채 되지 않은 4월 14일 경상 좌병사 이각과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다. 경주 판관 박의장과 밀양 부사 박진이 도착하기 전에 동래성은 이미 포위되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외침에 대비한 매뉴얼이 사전에 만들어져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너무 많고, 또 강했다. 동래성도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친 박진의 군사 500여 명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손쉽게 무너졌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구원에 실패한 후 경상 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킨 후 경주로 퇴각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 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따라 울산과 경상좌도 지역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관군에 의하여 방어되지 못하였다. 결국 회야강 전투에서 관군이 패배하고 경상좌병영과 울산군이 순식간에 함락되면서, 경주와 언양 등지에서 방어는 사실상 전무하게 되었다. 이후 울산과 경주지역 의병들이 모여서 경상좌병영과 일대 지역을 탈환해보려고 하였는데, 바로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이다.
분군법에 따라 동래성을 지키러 떠난 양산 군수 대신 양산을 지키던 영산 현감 강효윤은 4월 17일 일본군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동래읍성 북문으로 빠져나와 밀양으로 퇴각했다. 4월 18일 고니시 군의 본대가 양산에 입성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박진은 영남에서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낙동강변 험로 황산과 작원 잔도에 2차 방어선을 쳤다. 진주에서 개전 소식을 접한 경상 감사 김수는 4월 16일 낮 밀양에 도착해 도내 총동원령을 내리고 진주와 함안의 군사들을 동원해 박진을 지원하고자 했다. 당시 박진이 거느린 군사는 너무 적어서 황산과 작원관 전체 구간을 방어하긴 무리라고 판단한 후, 작원관의 끝부분만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산 잔도를 건넌 고니시 군 선봉대는 작원관에서 박진 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는데 선두가 차단된 고니시 군 선봉대는 주력 일부를 금병산 능선으로 우회시켜 조선군의 배후를 차단해 포위 섬멸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박진 군은 무너지고 박진은 간신히 빠져나와 밀양성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대피시킨 다음 빠져나왔다. 이로써 영남의 2차 방어선도 무너졌다. 4월 17일 영산으로 물러났던 김수는 18일 박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초계로 물러났다.
경상 우도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란에 휩싸였다,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초계 군수 이유검이 먼저 서문으로 달아나버렸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으려고 성을 나갔다 그대로 진주로 도망쳤지만 사충신의 주도로 의병들과 백성들이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결국 함락되었다. 창원에 있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이 지원하려 했으나 급하게 모은 병력 2백여 명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초계 군수 이유검은 4월 26일 김수에게 참수되었고 병력 운송 중에 사고가 생겨 아예 지원도 못 간 의령 군수 오응창 역시 6월에 처형되었다.
한편 유사시 비상 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선조 수정 실록 4월자에 실린 경상 좌병사 이각의 장계에는 봉수군 오장이 일본선 400척을 목격하고 즉시 보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화 체계가 완전히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일 저녁에 한양으로 들어와야 했던 봉화는 들어오지 않았고,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봉수군이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것. 한성부의 조정은 4월 17실 신시, 저녁 무렵에나 상황을 파악했으며 그리고 이 속도는 그냥 마편으로도 도달 가능한 속도인 만큼, 봉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맞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데 중앙에서 경장을 파견하는 건 진관체제도 똑같다. 진관 체제는 소규모 병력이 각지에서 분산되어 방어하게 되어있고 각 진관이 윗선의 허가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일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일개 고을 내지는 도 단위로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공격에 대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1개 ~ 2개 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이들을 지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진관 체제라고 현지 지휘관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북방 지역은 현지 병사가 지휘하게 하고 남방도 지방군과 중앙군의 역할을 나눠 상당 부분 재량권을 부여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제승방략은 상당히 진보된 제도였다. 왜침이 전례없는 대규모에 속도가 빨랐고 지방군의 훈련도가 워낙 저열했기 때문이지 제승방략이 병력 모아놓고 경장만 기다리는 제도라서 무너진게 아니다. 결정적으로 조선 육군이 임란 최대 규모로 투입된 용인 전투가 경장이 아닌 전라감사가 지휘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경장의 파견 문제가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 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 기마 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 기병 전술로 보병 중심인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문제는 전쟁 후 명의 절강 병법을 받아들인 후에 개선되었다. 이 절강병법도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몰래 들여와서 해냈고, 그 전까지는 한양이 불타오를 때 전술서 등이 같이 불타버리며 손자병법 수준의 기본서 외에 제대로 된 전술 군략서가 없어 "아 이거 군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상도의 1선 방어군들은 어쨋든 필사적으로 일본군과 맞아 싸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 등의 9천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가토 기요마사 → 2만 2천 명, 조령 / 고니시 유키나가 → 1만 9천 명, 조령 / 구로다 나가마사 → 1만 1천 명 추풍령 등 15만 8천 명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 - 양산(梁山) - 청도(淸道) - 대구(大邱) - 인동(仁同) - 선산(善山) - 상주(尙州) - 조령(鳥嶺) - 충주(忠州) - 여주(驪州) - 양근(楊根) - 용진(龍津) 나루 - 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 - 언양(彦陽) - 울산(蔚山) - 경주(慶州) - 영천(永川) - 신녕(新寧) - 군위(軍威) - 용궁(龍宮) - 조령 - 충주 - 죽산(竹山) - 용인(龍仁) - 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 - 성주(星州) - 무계(茂溪) - 지례(知禮) - 등산(登山) - 추풍령(秋風嶺) - 영동(永同) - 청주(淸州) - 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북상하였다.
5.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이런 상황임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고니시에 의해 패배하였고 이일은 갑옷은 물론 융복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쳤으며,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신립이 이끌었던 경군(京軍) 기병대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 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 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 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탄금대 자체가 육계도 사주 지형이라 말을 달리기에는 장애물이 많은 곳이었던데다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군은 이 충격력이 급전직하한 궁기병을 제압하고 남한강변에 몰린 조선군 주력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경군 기병 8천여 명, 혹은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 명을 합하며 1만 6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부대가 오합지졸이었다는 설은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프로이스 신부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차례 - 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전쟁 발발 초기 조선군이 부산진-탄금대에 이르기까지 투입한 병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으나 탄금대 전투의 전력 규모를 보면 일본 1~3군의 절반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정도면 방자(防自)의 이점을 살려 적을 완전히 격퇴시키지는 못해도 지연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너무 쉽게 대패했으며,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수급 3천 개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한양과 일본군 사이를 가로막는 야전군은 사라졌고(설령 신립이 조령을 틀어막았어도 일본군은 3로로 진격하는 중이었다.) 방법이 없어진 선조는 수도인 한성부에서의 방어 대신에 북쪽으로의 피난을 선택하였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한양 농성이란 선택지는 불가능했다. 신립이 이끈 경군이 탄금대에서 섬멸되면서 한양을 지킬 만한 병력부터가 사실상 없었고, 그 전에 한양도성 자체가 방어에는 매우 불리했다. 특히 당대 한양도성은 조선후기와 달리 성곽에 치성이나 곡성 등이 전무한 상황이었으며, 성이 너무 넓고 교통로의 대부분이 평지에 접한 형태라서 대군으로 공성전을 펼치면 쉽게 뚫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한강 전투의 패배후 개전 20일 만인 5월 3일 한양이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하였으나 이미 선조가 파천을 떠나서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한다. 그리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기반으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나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또한 임진왜란이 시작된지 1년이 지나자 일본군 20만명 중 동원이 가능한 병력이 7만 안팎이었는데 이는 점령지 관리로 빠진 병력도 있지만 대부분이 전사, 부상, 탈영 등에 의한 것으로, 일본군도 초기에 많은 승리를 했지만 그만큼 손실을 보았다는 뜻이 된다.
5.3. 반격의 시작
정의를 위하여 일어서라
(전략)
강개한 심정으로 곳곳마다 조국을 그리는 노래 부르고 도의를 숭상하려 집집마다 예절을 닦는 글을 읽었건만 불행하게도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져서 섬 오랑캐들이 이 땅을 침범하였다.
조정 신하들은 북으로 물러서고 임금의 행차도 서울을 떠났다.
사직이 위태로워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
바라노니 씩씩하고 용감한 여러 선비들이여! 나의 이 글을 읽고 나의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찬란한 지금의 문물은 모두 선왕들이 쌓아놓은 업적들이다.
흉악한 저 원수를 치려는데 그 누가 충성을 다하고 용맹을 떨치려는가?
절개 높은 용사들이 대열에 모여드니 나라 위한 싸움에 내닫는 병사들의 의기도 드높으니라.
지사들이 군중을 불러일으키니 죽음을 아끼지 않는 의병들은 모여들라.
남쪽 지방이 비록 좁지만 몸과 마음을 바치려는 군중들이 그 얼마인가.
나라의 혜택이 널리 퍼졌으매 반드시 한 마음으로 협력하려는 장사들이 많으리라.
우리 함께 힘을 모아 일편단심 싸워 나간다면 여러 의병들의 충성된 공훈과 장렬한 절의는 천추에 길이 빛나고 역사에 영원히 남으리라.
- 의병장 김천일의 격문
가만히 생각건대,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예기의 큰 의리이고, 9대의 원수도 반드시 갚으려 하는 것이 춘추의 아름다운 말이다.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제거해야 하니, 신민(臣民)으로서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 의병장 박춘무의 격문, 花遷堂集 卷1, 「檄文」
지금 이 잔악한 왜적의 소행은 짐승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백성들을 살육함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연물을 모질게 해침에 가옥과 식량을 모두 불살랐다. 길에서 아낙네 한 명을 만나면 사내 열 명이 다투어 淫行을 하니,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수많은 오랑캐들도 하지 않고 지각이 없는 짐승도 오히려 하지 않는 짓이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비록 감히 막는 자가 없지만 천지 산천의 귀신이 모두 은밀히 주벌할 것을 의논하고 중국과 오랑캐들이 모두 드러내 처형할 것을 생각하니 비록 죽음을 앞두고 잠시 목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天定人勝의 날에 그 죄를 자복할 것이다.
- 의병장 조헌의 격문, 「告諭本國人爲倭所擄君文」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 의병장 고경명의 격문. 『제봉선생집』권7, 정기록, 마상격문
조선군 전위(前衛)가 맥없이 붕괴한 초기 전황과는 달리 개전 후 2달이 지나자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곽재우, 조헌,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의 재야 인사들, 정부에서 내려보낸 수령들의 주도로 집결한 지방군들이 일본군의 육상 보급로를 압박하며 각지에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초반부에 너무나 빠른 진격에 놀라 급격하게 와해됐던 군세는 후퇴 후 본격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일본군의 공세에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1592년 6월 이후 당 해 말까지 벌어진 주요 지상전투가 약 17회였는데, 일본군이 주도해서 공격해온 횟수는 고작 4회뿐이었고, 나머지는 조선군과 의병이 오히려 선공을 날렸다. 승률에 있어서도 조선 측이 8번의 승리와 3회의 무승부를 기록한 반면 일본은 6회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적인 판세는 일본 측이 쥐고 조선 팔도 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되고 있던 것이다. 거기다 겨울이 전보다 일찍 찾아오고 조선군 경기병대가 산골을 따라 기습을 감행하여 땔감의 공급을 차단하자 육지에서의 일본군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손실분을 메꿔줄 일본의 보급 선단은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의해 모조리 고기밥이 되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전략인 수륙병진에 차질이 생기고 전황은 고착되었다. 일본군은 손자병법의 기본 방침대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칠 구상을 하고 여름에 대비한 보급품을 위주로 준비했는데, 날이 추워지자 이게 그대로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다. 특히 군량보급 문제가 심각하여 일본군은 뒤로 갈수록 노략질로 버티는 형편에 이르게 된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문헌인 난중잡록에서는 임진왜란 시절 정인홍이 의병을 이끌고 싸운 활약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고 한다.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난중잡록
내가 지금 그 곳으로 출진한다면, 안변에 병력을 잘 남겨두고 뒷일을 신경 쓸 필요 없이 조처를 해두고 가야하기 때문에 기요마사가 이끌고가는 병력은 잡병 3천에도 못 미칠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그 곳까지 가게된다면 병력의 반은 지쳐버려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왕자를 안변에 두고 갈 수는 없으므로, 만약 전투에 나선다면 데리고 갈 수밖에 없다. 왕자의 경호를 위해서도 병력을 할당한다면 전투에 임하는 병력은 천명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렇기에 가더라도 제대로 싸울 수 없을 것이니 해가 바뀌어 눈서리가 조금 녹을 때까지 성을 잘 방비하도록, 길주에 병력을 보내므로 너희들의 주둔지도 잘 지키도록 하라. (중략) 길주 지역을 지키지 못하고 모두 죽었는가? 그렇지 않고 倉所 까지 후퇴했다면, 倉所도 버리고 단천을 한계로 하여 잘 방비하도록 하라.
1592년 11월 21일 가토 기요마사가 단천의 구키 히로타카 등에 보낸 서장 - 구귀문서(九鬼文書11).
그 곳에서 잇키를 일으킨 惡逆한 놈들을 처단하기 위해 출진하려하였으나, 군무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 마시타 나가모리, 오타니 요시츠구로부터 경상도 지역에서 잇키가 일어나서 부산으로부터 한성까지의 길이 막혔으며, 게다가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였기에 우리들이 함경도에서 나와 전투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는 요청이 수차례 들어왔다.그 곳으로 직접 출진할 필요는 없다고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말하므로, 퇴각하는 병력을 지원하기 위해 사사 히라자에몬, 쇼바야시 하야토, 마츠시타 코에몬, 3인을 보낸다. 퇴각시의 군법은 적어서 보낸다. 이를 조금도 위반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서둘러 돌아오는 일이 중요하다.
(1593년) 1월 11일 구귀문서(九鬼文書 14)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행태를 보인다.
왕이 몽진하자 분노한 민중이 선조의 도주행렬을 가로막는 등 반발했고,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한양에서 도주한 직후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 장예원에서 불을 질러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반론이 많은게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 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편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하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망명의사를 타진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 온 것을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 걸로 의심한 명에서는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했다. 수행원 100명은 지방 고을 수령 정도의 의전에 해당되는 인원이었고, 일국 군주의 수행원이라 하기에 턱없이 적었다. 사실상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국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단념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을 의심하기에 이유가 충분하였는데 명나라는 홍무제 이래로 조선을 수나라를 아예 멸망으로 몰아넣었고 당나라 최고의 군주인 이세민조차 정복하지 못했던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바로 얼마 전 니탕개의 난을 평정했었던 만큼 조선의 군세는 예로부터 강대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이 일순간에 주력군이 섬멸당하고 일본에 수도를 내주었다는 소식에 명은 조선이 일본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라는 루머가 퍼진 것이다. 명의 의심에 조선은 명나라에 여러차례 사신을 보내고 염탐하기 위해 보내오는 사신에게 조선이 정말로 일본과 한 통속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양사가 아뢰었다.
"옛부터 국가가 재난을 당하면 재난을 구제하는 데는 만 사람도 부족하고 국가를 망치는 데는 한마디의 말로도 넉넉하다고 하였습니다. 전일 유근이 파견되어 갔을 적에 영위(迎慰)한다는 명분을 갖고 갔지만 실지는 거절하여 물리치는 뜻을 보인 것은 이미 부당한 일입니다. 변신(邊臣)이 잘못 대하여 왕인(王人)028) 이 성을 내기까지 했으니 별도로 시신(侍臣)을 보내서 왕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정례(情禮)로 보아 마땅한데도 무단히 정지했습니다. 만일 중국의 관원이 전보다 더 의심하게 된다면 2백 년 동안 해온 사대(事大)의 정성이 이제 와서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장차 하소연할 데가 없게 됩니다. 막중한 국가의 일을 일개 역관에게 일임하여 마치 평범하게 왕복하는 것처럼 조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속히 시신(侍臣)을 파견하소서."
이때 변란이 창졸간에 발생하였으므로 와언(訛言)이 전파되었다. 요좌(僚佐)에서 ‘조선과 일본이 서로 짜고 침략당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국왕과 본국(本國)의 용맹한 병사들은 북도(北道)로 피해서 들어가 있고 다른 사람을 가짜왕으로 내세워서 침략을 받았다고 칭탁하지만 실은 일본을 위해서 향도(嚮導)가 된 것이다.’는 말이 일어났는데, 이 유언 비어가 중국에 들어간 것이다. 중국 조정에서는 반신 반의하다가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이 비밀히 요동(遼東)에 유시(諭示)하여 최세신(崔世臣)과 임세록(林世祿) 등을 파견시켰다. 그들은 명분상은 왜적의 실정을 살핀다고 하였지만 실은 평양으로 달려가서 우리의 국왕과 만나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돌아오려는 의도였다. 이때 우리는 중국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려 했었는데 대신들의 말이 요동·광동 사람들은 성품이 매우 포악하여 그들이 강을 건너와서 우리 나라를 유린한다면 적에게 함락되지 않은 패강(浿江) 이서(以西)의 여러 고을들도 모두 황폐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두 의견이 서로 논쟁하느라 오랫동안 해결이 나지 않은 상태였는데 중국에서 최세신과 임세록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대신들은 유근(柳根)을 파견하되 겉으로는 영위(迎慰)를 표방하고 내용은 우리 나라의 피폐한 사정을 직접 호소하여 중국 구원병이 오래도록 머물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 차관(差官)이 평양에 오지 않고 의주(義州)에서 돌아갔으므로 양사가 이렇게 아뢴 것이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 5월 29일 무자 8번째기사
대가가 저녁에 선천에서 유숙하였다. 요동 순안 어사(遼東巡按御使) 이시자(李時孶)가 지휘(指揮) 송국신(宋國臣)을 보내어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그 자문에 ‘그대 나라가 불궤(不軌)를 도모한다.’고 하고, 또,
"팔도(八道)의 관찰사가 어찌 한마디도 왜적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없고, 팔도의 군현(郡縣)에서 어찌 한 사람도 대의(大義)를 부르짖는 자가 없는가. 어느날 아무 도(道)가 함락당하였고, 어느날 아무 주(州)가 함락당하였으며, 어떤 사람이 왜적에게 죽고, 어떤 사람이 왜적에게 붙었으며, 왜적이 장수는 몇 명이고, 군사는 몇만 명인가? 우리 나라는 본시 개산대포(開山大砲)·대장군포(大將軍砲)·신화표창(神火鏢鎗) 등이 있고, 맹장(猛將)과 정병(精兵)들이 안개처럼 벌여 있고 구름처럼 달리니, 왜병 백만쯤이야 세잘 것도 없다. 더구나 문무(文武)의 지략을 갖춘 선비가 간사한 모의를 환하게 꿰뚫어 보고 음흉한 조짐을 미리 꺾어버릴 수 있으니, 아무리 소진(蘇秦)·장의(張儀)·상앙(商鞅)·범저(范雎)의 무리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 하더라도 어떻게 우리 나라의 천심(淺深)을 엿볼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상이 자문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대개 우리가 왜적과 동모한 것으로 의심하여 이렇게 공갈하는 말을 하여 우리의 대답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앞서 명나라 복건성(福建省)의 행상(行商) 허의후(許儀後) 등이 명나라에 은밀히 보고하기를,
"조선이 일본에 나귀를 바치고 일본과 모의하여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면서 조선이 그의 선봉이 되기로 하였다."
하니, 명나라에서는 자못 우리 나라를 의심하였으므로 우리 나라의 패전 소식이 명나라에 이르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의논이 흉흉하였는데, 각로(閣老) 허국(許國)이 홀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조선에 사신으로 간 적이 있어 그 실정을 익히 아는데, 조선은 예의(禮義)의 나라이니 결코 이와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구원병을 요청하는 주계(奏啓)가 이르자 요동(遼東) 사람이 전언(傳言)하기를,
"조선이 실지로는 왜노(倭奴)와 함께 배반하고는 거짓으로 가짜 왕(王)을 정해 길을 인도하여 쳐들어온다."
하였다. 당시 송국신(宋國臣)이란 사람이 전에 명사(明使) 왕경민(王敬民)을 수행하여 와서 주상(主上)의 얼굴을 보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국신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사신의 두목(頭目)으로서 조선에 이르러 그 국왕을 보았으니, 내가 지금 가서 보면 반드시 기억하여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하니, 명나라에서는 그의 말에 의하여 자문을 전달한다는 핑계로 와서 살펴보도록 하였다. 국신이 주상을 뵙고 나와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순안(巡按)이 내가 일찍이 사신을 따라 와서 국왕의 얼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와서 진위를 살피도록 한 것뿐이고, 지금 자문 중에 말한 것은 모두 가설로 한 말이니 의아스럽게 여기지 마오."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8일 병오 5번째기사
윤근수가 아뢰기를,
"서일관(徐一貫)·황응양(黃應陽)·하시(夏時) 등 세 사람이 왜서(倭書)를 보고는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의심을 깨끗이 푸는 듯한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응양이 ‘평양으로 가지 않고 바로 중국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하였습니다. 아마 우리 나라가 왜국의 향도(嚮導)가 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여 그 진위(眞僞)를 탐지하려고 왔을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왜서를 주어 보냄이 무방하니, 자문을 속히 마련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10번째기사
명나라는 건국 초기 15만 병력으로 북원을 쓸어버리고, 베트남에 20만 군대를 보내 베트남 호 왕조를 무너트렸지만 유독 왜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는 이 시기 동남부 해안을 왜구들에게 유린당했다. 반면 200여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런 왜구들의 소굴까지 쳐들어가서 박살낸 전력이 있는 데다 조선이 한때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이유로 전쟁에 능할 것이란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의 군대를 과대평가했고, 그런 조선에서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온다는 사실은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과 일본은 교린 관계로 우호적이었으니, 명나라에서도 더욱 그 저의를 의심했다. 임진왜란 전 조선과 일본은 교역도 활발해서 삼포에 머무는 왜인들 숫자만 3000명이 넘었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불행하여 적세가 온 나라에 가득 찬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수상(水上)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현재에는 다만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 바다로 나가는 것, 수상으로 가는 것 이 세 계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장전보(長奠堡)에 머물러 있기만을 허락했을 뿐이니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의당 정주(定州)에 가서 사변의 추이를 살피든지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수상으로 가든지 편의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수상은 위험할 듯하니 해로(海路)가 합당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로 나가려 하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가는 데는 적도 갈 것이다"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강계는 길이 험하니 피란할 만합니다"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이곳은 두 강(江)이 앞에 있으므로 중국군이 구원하면 적은 반드시 바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요동을 침범하려 하는데 어찌 소소한 원병(援兵)을 꺼리겠는가. 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드시 간사한 계책이 있어서일 것이다"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인심이 차츰 안정되는 까닭은 대가(大駕)가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이 도(道)의 인심이 크게 소란한 까닭은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일 장전(長奠)으로 간다면 그 중간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만 난에 임하여 강을 건너게 될 때 그곳의 인심 또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지나치다"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성중은 아뢰기를,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 중국에서 적을 막지 못하여 그들과 화친(和親)한다면 뜻밖의 변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하였다.
군신들이 차례로 나갔다. 신잡이 나가려 하자, 상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의당 전진하여 수습할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형세로 보건대 정주(定州)에는 결코 갈 수가 없다"하였다.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당시 선조와 함께 의주까지 몽진했던 대신들도 하나같이 요동으로의 망명은 반대했는데, 강과 바다를 통한 피난 의견은 제시하면서도 중국 망명은 결사반대했다. 6월쯤에 처음 선조가 요동 망명을 이야기했을 때 신하들의 반응은 예의를 갖추어 달래는 느낌이었다면, 가면 갈수록 표현의 수위가 높아진다. 6월 13일 기사에서는 '요동으로 가려고 해도 중국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정도였다면, 8월에는 당시 선조와 동행한 대신 중 한명인 신잡이 국왕, 심지어 그 선조 앞에서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 보통의 남성)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협박에 가까운 말투로 반대했다. 즉 '요동으로 가면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다'라는 뜻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국왕을 평소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면 평소 같았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수위의 발언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느 누구도 신잡의 발언이 심하다고 비판하지 않았으며, 말을 마치고 나가는 신하를 붙잡고 조언을 구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때 여진족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몇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한 것은 1613년이고 대칸의 직위에 오른 것, 즉 완전 평정이 끝난 것은 1616년이지만, 이때의 누르하치는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이미 이성량 등의 지원을 받아 거병한 지 10년이 넘은 다음으로, 1586년에 벌써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고 건주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건주 여진의 칸이 되었고, 건주 여진의 수도까지 새롭게 축성할 정도로 강한 세를 키운 상태였고, 여진족 중 가장 강한 라이벌이었던 예허부와는 사돈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어 사실상 여진족 최강자로서 주변에 대적할 자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지만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뭐로 보나 믿을수가 없는, 임진왜란 이전 최고 주적이었던 여진족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조선 조정이 분별이 없진 않았다(임란 와중에도 여진족 분파와 조선의 군사충돌은 지속되었다). 또한 실제로 여진족에 대한 위협은 자세한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정말 엄청나게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에 원병을 거절한다. 일본에는 마상에서 돌격하는 기병이 없으며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 이북에서 오랑캐들에게 발려서 진군을 그만 둔 기록이 있으니 원병이 왔다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진족이 남의 나라 전쟁에 과연 제대로 싸우기는 했을지가 의문이니 선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누르하치 쪽에서도 조선에 파병을 하지 못한 게 신의 한수가 되었는데, 파병 제안 다음 해에 사돈 관계를 맺었던 하다 부족과 예허부 등이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누르하치의 뒤통수를 쳐서 각 여진 부락을 규합, 무려 9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주 여진을 침공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명나라는 이미 조선에 파병하고 벽제관 전투로 주력이 터진 상황이라 누르하치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1595년에 누르하치를 용호 장군으로 봉하며 지원해준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이 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여진에서 부동의 No.1 세력이 되었고, 명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그제서야 누르하치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하였다.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임해군과 순화군은 현지에서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조선인의 밀고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을 시험 삼아 두만강 너머의 용정시에서 여진족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하여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 침공에 성공했지만 이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하지만..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와 벌인 북관대첩에서 패하고 함경도의 혹한으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000명에 이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데다가 명군이 참전하면서 할 수 없이 철병하였다.
5.4. 명나라의 참전
5.4.1. 참전 사유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사실 이 전쟁의 목적부터도 그렇고 전략적으로 봐도 명나라가 참전할 이유는 충분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명분은 명나라를 정복[唐入り]하여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 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며 이러한 의도를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일본의 경계에 위치하여 양속관계에 있던 대마도의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 그마저도 가도입명(假途入明), 즉 명을 치러 가려 하니 조선은 그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만력제는 비전투지원은 물론이고 대규모 파병을 실시했다.
따라서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 데다가 병력을 20만 이상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까지 위협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그 대가로 막대한 군비를 감당해야 한다. 반면, 조선 왕조는 개창 전부터 조공국으로서 큰 마찰없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으니 당연히 변경의 울타리 역할을 맡은 조선을 살려두는 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주변에 적국을 늘리는 것은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을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만력제 본인에게도 임진왜란 참전은 상당히 매력적인 수단이었다. 이미 임진왜란 발발 전부터 만력제는 후계자 문제로 인한 쟁국본과 본인의 태업으로 인해 신하들과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따라서 만력제는 권위를 확보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터진 임진왜란은 만력제로선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위기에 처한 번국인 조선을 구원하고 감히 천조의 질서를 어지럽힌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명분은 천자로서의 위엄을 떨치고 권위를 확보할 매우 확실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이는 만력제 본인 뿐만 아니라 명나라 전체의 국가 위신과도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 건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 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 때문에 조선을 도운 게 아니라 병부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5.4.2. 명나라군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든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나라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
명나라군의 참전은 의의가 없지는 않았지만 명나라군이 지나치게 폄하당하는것에 대한 반발인지 재평가를 넘어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군 덕분에 이긴 전투는 실질적으로 4차 평양성 전투밖에 없다. 심지어 4차 평양성 전투도 제대로 이겼다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는 전투이고 조선군도 1만명이 함께 싸웠기에 승리할 수 있었던 전투이다. 명나라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나라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다만 명나라가 건국 초기 15만 군대로 북원을 쓸어버리고, 20만 군대로 베트남까지 원정가서 베트남 호왕조를 무너뜨릴 정도의 군세를 자랑했지만 유독 왜구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명나라 초부터 국토 동남해안을 탈탈 털렀으니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몇십년 전 정규군도 아닌 사실 이 왜구들이 이후 정규군으로 편제되었지만 아무튼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 남부가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군이생각보다 약했다고도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왜군의 전투력이 생각보다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이때 파병된 명군은 (해외파병의 성격상 당연히) 정예군이었고 열심히는 싸웠다.
제1차 조승훈의 3,000~5,000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0,000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불랑기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육상군 주제에 대포 500문을 퍼붓는 중국의 스케일을 보여주었다)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대패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나라군과 동장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연합군과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다만 한양 수복을 위해 12만 대군을 박박 긁어모은 조선은 벽제관에서 패배하고 그대로 셧다운 상태가 되어버린 명나라군 5만까지 17만의 보급물자를 대느라 하루하루 말라죽었고, 결국 한타 싸움이 아니라 장기전 압박과 협상으로 한양을 탈환하긴 했지만, 이때는 보급물자도 민생도 파탄나버린 후였다. 이렇게 올인 한타를 벌였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식량소비량 급증 +식량생산량 급감) 조선은 병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여송이 평양부를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일본군도 조총으로 명나라군을 엄청나게 사살한 끝에 고니시와 그의 군대는 안전하게 평양에서 빠져나온다. 그렇다고 해도 평양성 탈환으로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당장 고니시가 평양부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것도 고니시군이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여력이 없었던 점도 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한다. 만약 고니시군이 지치지 않고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지원이 없었다면 이순신이나 조선군과 의병의 활약도 의미가 없이 전쟁이 거기서 끝장났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원나라 시대에 쓴 《송사》에는 한세충과 같은 사기적 명장이 있어도 지도자인 황제가 한심해서 금나라에게 결과적으로 지고 있었는데, 선조도 명나라로 도주할 생각까지 했던 만큼 그와 비슷한 한심한 작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명나라군은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본인들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전란 중 각지에서 명나라군은 조선군과 연합해 활약했다. 비록 많은 추태와 패배를 하기도 했지만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싸우긴 했다. 대표적으로 노량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철수하므로 명군은 더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진린은 끝까지 이순신과 협조했고, 자신이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비록 조선 수군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이순신은 물론 자신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을 잃었다.
더불어 명나라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가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나라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나라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커 역할을 수행한 셈이었고, 정유재란 때는 대규모 파병으로 아예 명나라군이 주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나라군은 약 5만~7만 4천 명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나라군은 9만~11만 7천 명에 달했다.
조선인에 대한 약탈이 엄청나게 심했던 명나라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나라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나라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나라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경략 송응창은 조선에서 명나라 병사들의 대민약탈을 항의했을때 사과했고 군대와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군령삼십조(軍令三十條)를 하달하여 군기를 확립시켜 조선의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군령 삼십조'에는 조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명하는 조항이 3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과 장졸들은 조선의 지방을 지나며 개와 닭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도록 하여 조금도 범하지 말 것, 감히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5조), '조선 부녀자를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6조), '조선의 강산은 곧 황상의 강산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황상의 백성이니 함부로 조선의 남녀를 죽이거나, 투항한 자나 부역한 자를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20조)]였다. 게다가 명나라군의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나라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나라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횡포 또한 극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야 조선까지 와놓고 정작 식량 구하는게 어려운 사정이 있어서 굶어죽을 수는 없으니 시도했다고 하더라도 명나라 장군들의 횡포도 만만찮아서 예를 들어 1597년 병조참판 박진이 죽었는데 죽은 사유가 황당하게도 명나라 장군 누승선에 의한 구타였다. 병조참판이라면 현재로 치면 국방부라 할 수 있는 병조의 수장인 병조판서 바로 아래로 오늘날로 치면 국방부 차관에 해당된다. 국방부 말단 관리도 아니고 차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외국 장군에게 맞아죽는 일이 벌어진 것. 고위 관료조차도 맞아죽었는데 그보다 못한 이들은 얼마나 맞았을지 알 수 없다.
5.4.3. 명나라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상기한 이유로 참전한 만큼의 몫을 해준 명나라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나라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나라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 명나라가 초기 파병한 병력은 조총 및 홍이포, 불랑기포를 운영하는 화기 위주 남병이 아니라 기병으로만 구성된 북병으로 북병은 몽골인, 여진족, 거란족 계통인 다우르족의 혼성부대로 대부분 만주나 연해주, 시베리아 그리고 내몽골 출신이었으며 한족 기병들도 이들 몽골이나 여진 등 유목민 흉내를 내서 유목민과 한족의 구분이 불가능했을 정도였다. 명나라 사료들에서도 북방 한족 기병들이 오랑캐 기병들을 흉내내어 둘이 용모가 비슷해졌다고 언급한다. 변발, 호복 등 오랑캐 스타일을 본받아 모습이 얼추 비슷해졌던 것이다.
특히 이 중에 내몽골 차하르부 밑 투메드부, 칼간부 출신 몽골족 기마부대의 약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수천 문의 화포를 동원해 성 안에서 방어만 하고 있어도 적 지휘관이나 부대를 전멸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시대가 발전해서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더 나아진 무기들도 있었지만 과거에는 무장의 질적 구성이 좋았던 반면 이 시기에는 암군들의 영향으로 기강이 개판이라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보병들이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전차랑 자주포의 지원, 보급도 풍부한 반면에 이쯤 오면 보병들이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전차와 자주포 등의 지원이나 보급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과거 서달의 북벌군만 해도 사막과 혹독한 기후를 넘어 북원의 근거지인 내몽골은 물론 막북의 카라코룸, 울란바토르까지 가서 오이라트를 전멸시키고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보급을 유지할 체계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서의 삽질이 있었다고 해도 손실된 군마나 장비 등을 쉽게 보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은 화약무기는 조총만 있고 화포가 없었기 때문에 화력이 딸린 건 아니었지만, 초기 북병들의 경우 화포를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만구다이로 불리는 궁기병 위주에다 보급체계가 허접했다. 남병이 오자 비로소 보급도 나아지고 일본군이 갖지 못했던 화포의 위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에는 조총만 전래되고 화포는 없었으며, 화포 대용으로 대구경 조총인 대조총을 사용했다. 이 대조총도 원본은 조총인지라 50보 내의 유효사거리밖에 안 되어 사거리가 더 긴 화포에는 무력화되었다. 이순신의 경우는 절대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안 들어가고 화포를 퍼부어 조총수가 대거 탑승한 적선을 격침시켜 승전이 가능했으며,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녹도 만호 정운은 적을 추격하다 조총 유효사거리 내에 들어오는 바람에 대조총에 맞아 전사한 것이었다.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나라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장수와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나라는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이 임진왜란에서의 조선 지원이 꼽힐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당시의 명나라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가 나타난 것도 명나라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나라군의 식량 보급이 명나라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 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이때까지도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나라는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나라 중앙 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나라가 은본위 경제 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나라 병참 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 경제 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인들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제값 주고 음식 사먹으려고 돈 챙겨 왔더니만 여기서는 돈이 아예 쓰이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나라는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 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심지어 협조하는 상인들조차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 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 체계 하에서 명나라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 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나라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 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지 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 없이 현지 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 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런 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명나라군에게는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 조달이 일상화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나라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 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
여기에 명나라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나라군은 내몽골 및 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과 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 (거란 잔존 세력) 혼성 부대인 북병과 조총 및 불랑기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족 차하르부 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 및 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 유목민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명나라군의 차하르 몽골 기마부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조선은 명나라에게 북병의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명나라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나라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 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명군보다 덜하진 않았다. 히데요시는 조선 관리고 백성이고 가리지 않고 처단하라고 지시했고, 심지어 조선의 닭과 개도 남기지 말라고 말했다. 히데요시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조선 재침략 일본군 지휘관으로 임명하면서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조선인을 다 죽여 빈 땅을 만든 후에 일본 서도의 사람을 이주시키길 10년을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고 한다. 조선에 포로로 잡힌 일본군 장수 후쿠다에 의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포로로 잡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이며 후에 중국까지 정복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일본 좌군을 따라 함께 움직인 종군 의승 게이넨도 자신의 일기에서 일본군이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악귀나 저승사자 같다고 적었다. 물론 히데요시의 명령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돈을 받으면 살려주기도 하고 이순신과 지방 양반들의 저항이 격렬한 전라남도에서는 대대적인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성과도 없지는 않아서 전라남도에서 일본에 붙은 양반들이나 백성들도 꽤 많았다고 하며 대부분 경상도에 설치된 왜성 중 유일하게 전라남도에 축성된 순천 왜성은 순천에 사는 양반인 박사유의 공이 컸다.
물론 이에 대해서 명나라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명군의 숫적 우세가 그래도 필요했다. 조선군은 의병들이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보니 조선으로서는 명나라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명나라군에게는 일본에는 아예 있지도 않았던 대포인 불랑기포가 대거 있어서 화력전에서 일본군을 확실하게 압도가 가능했다.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명군의 화포가 쏟아져 버리니 일본군이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000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조선 군인 10,000여 명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바다에서 제해권을 뺏겨 보급이 되질 않고 있던 일본군 입장에서 명나라군의 참전은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전선에 있던 일본 장수들의 의견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감에도 망상에 사로잡혀 명나라 수도 연경에 황궁을 만들고 칭기즈 칸처럼 중국 대륙을 정복할 것이다니 조선 8도 중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의 조선 4도를 일본에 편입할 것이다 등의 뻘생각이나 하고 있었고 결국 죽을 때까지 현실감각이 없이 망상 속에서 지내다 죽었으며, 조선군이 반격을 거칠게 하자 정유재란 때는 조선인의 씨를 말리고 조선을 빈땅으로 만든 후 일본인들을 이주시키겠다며 일명 귀무덤, 코무덤을 만들기까지 했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전쟁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 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또한 명나라에서는 왜란 이후 이 재조지은을 빌미로 조선에게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했는데 이는 만력제의 잘못으로 명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만력제는 자신의 국고를 여는 대신 광세라고 하여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국의 은을 긁어모았으며 불똥이 조선으로도 튀어 조선에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한 것이다. 즉 재조지은을 빌미로 명나라는 조선에게 무리한 은 지출을 요구했고 이게 후대 한국에서 명나라의 이미지를 악화시키는데 일조했다.
5.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
전쟁이 교착상태가 되면서 강화 회담이 시작되었다. 히데요시는 회담의 진행에 적당히 개입하고 강화 조건을 조절하였다. 명나라의 '책봉은 가능하지만 무역은 안 된다'는 일관적인 입장에 대해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고 조선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책봉을 받고 나서 '조선에서 사죄의 표시로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화를 낸 후 전쟁은 모두 조선의 탓이라는 내용의 세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책봉 당시 받았던 책봉 교서, 만력제의 칙유, 관복, 인장이 지금까지도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5.5.1. 기존에 잘못 알려진 설
20세기까지만 해도 강화파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이 전쟁을 끝내려고 국서를 조작해 양쪽을 구슬려 삶으려다 승려 사이쇼 조타이에 의해 탄로가 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노하고 강화가 파기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었다.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 명나라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고, 일본국왕 책봉 따위는 필요없다며 분노한 히데요시가 외교문서를 찢고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고 민간에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심유경은 문서 조작과 강화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 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리고,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 추궁으로 처형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해 이듬해(1597년) 정유년 정유재란이 발발했다는 설이 대략적인 이야기이다.
5.5.2. 왜 잘못 알려졌는가?
민간에 널리 퍼진 설이 거짓이라는 것은 사료만 찾아봐도 알 수 있었다. 1900년대 초 도쿠토미 이이치로(도쿠토미 호소)의 근세일본국민사(1918)에서도 사실이 아님이 지적된 바 있었다. 2010년대 한중일 학계의 연구 역시 속설이 가짜임을 밝히고 있다. 다음 내용은 이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을 요약한 것이다.
사료를 검토해 본 한중일 학계의 결론은 이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유학자와 병법가들이 내용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이게 민간에 널리 퍼지면서 해당 이야기가 실제 사실인냥 알려졌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 일본적인 것을 강조하는 국학이 등장하면서 자국을 높이고 타국을 깎아내리는 풍조가 성행했다. 책봉의 진상을 알고 히데요시가 화를 내고 강화를 깼다는 왜곡된 이야기는 임진왜란 당시가 아닌, 에도시대의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의 제자인 호리 교안(堀杏庵)이 1659년 출판한 '조선정벌기(朝鮮征伐記)'에서 처음 등장하였다. 이것은 이후 병법가인 야가마 소코(山鹿素行)의 '무사가기', '신편무사가기'(1673년)에서 책봉문을 찢었다는 내용으로 발전하였고, 유학자 하야시 라잔의 '풍신수길보'에 윤색되었다. 이는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가 1796년 펴낸 어융개언(馭戒慨言)에서 임진왜란이 한반도를 재복속하는 것이고 조선통신사는 조공사라는 내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당대 유명한 학자들이 쓴 것은 맞지만 사실을 기록했다기보다 당시 유행한 국수주의적 국학의 관념을 깔고 있는 것이었고 일본을 미화하는데에 집중한 것들이었다. 이 책들이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히데요시의 강화 파기에 대한 잘못된 사실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일본의 자국 찬양과 한반도의 멸시, 나아가 정한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5.5.3. 21세기 연구에 따른 실제 사실
일본군은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의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내어 진주성 함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선의 전라도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그러다보니 일본군 내부에서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드니 물러서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 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다. 주로 조선군은 진주 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 9만 명이 넘는 적을 상대로 9일 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성을 함락한다고 피해가 심각했다.
또한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을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평화 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군사 17만 5천이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 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와 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블러핑이 섞였다곤 해도 히데요시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강화사로 위장한 송응창 부하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지 질문하자 순의왕(順義王, 알탄 칸)의 예가 있다면서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 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공주와 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가 끊긴 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송응창이 내세웠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
일본의 요구조건들은 조선과 명나라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대명일본화평조건(大明日本和平条件)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조항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 황녀 문제: 화번공주라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와 공식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분명 많았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최소한 실권자인 히데요시를 명나라 황제가 일본 국왕으로 봉한 다음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이었으니 이는 고려하고 말고가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2, 3. 무역 증서제 부활 및 각서 교환: 무역 증서제란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와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명나라 조정은 책봉은 하되 무역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관철되기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4. 조선 4도의 할양: 항목 중에도 제일 황당한 조건이며, 조선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조건. 명나라가 강화 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을 평화롭게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영토 절반을 빼앗길 판에 명나라가 강요한다고 해서 조선이 들을 리 만무하다. 히데요시가 주장한 4도 할양은 사실상 일본군이 그 시점에서 점령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 남부 지역 4도(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 경기도 또는 강원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황무지로만 가득찬 변방 지역이라고 해도 조선 측에서 수용할 리가 없는데, 이 지역은 인구나 경제력이나 다 수위권에 드는 조선의 금싸라기 땅이다. 이걸 내놓으라는 건 조선 전체를 갖다바치라는 얘기나 진배없다. 게다가 이 중 경상도를 제외한 지역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태도 아니었다.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철군한 뒤 조선에게 전쟁을 맡기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질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그건 히데요시 입장이고 명과 조선이 이걸 신경써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거기다 이 요구는 들어줘도 문제인 게 당장 전라도, 경상도부터가 의병이 들끓고 있어서 군대를 주둔시켜도 통제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어찌어찌 조선의 4도를 일본이 먹었다 쳐도 해당 지역 조선인들이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도 없고, 정복이 아니라 통치를 해야할 상황이 오면 민중의 호응 없이는 불가능하다. 당시 일본은 전국시대가 막 끝나가는 참이라 자국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 할거 상황이었고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바다 건너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임나일본부 실사판이나 찍다가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확률이 훨씬 높다. 설령 만에 하나 정말로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결국은 조선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도요토미가 있는 본국에 반기를 일으킬 것이 뻔했다. 어차피 바다 건너에 있는 도요토미의 명령이 조선땅에 와 있는 다이묘한테 먹힐 리도 없을 테니.
5, 6. 왕자의 석방 및 볼모 송환: 임진왜란 이전의 한국사에서 일반 신하도 아니고 왕자를 해외에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이 복호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 때 여몽전쟁 및 이후의 원 간섭기 시절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다. 그나마 전자는 인질을 빌미로 선왕의 아들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고,후자는 고려가 몽골에게 굴복하여 보낸 것이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조선 측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7.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해석해야 하는데, 여기서 권신이란 류성룡같은 조선의 재상이 아닌 국왕인 선조를 지칭했을 확률이 높아보인다. 만약 그렇다면 히데요시는 알았건 몰랐건 선조를 왕으로 여기진 않았다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국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조선을 침공한 책임은 엄연히 일본에게 있었는데, 이 책임은 전혀 대가를 치루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게 신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으로 조선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소리였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을 명 조정에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국왕으로 책봉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라고 허위 보고한다. 사실 명 조정에는 '일본의 본심을 믿을 수 없다',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면 일본과의 무역도 허해야 되고 이는 경제적 손해로 이어질 수 있다', '양쯔강 이남 지역이 위험해진다' 등의 논리로 일본과의 강화 반대에 반대하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명 내의 강화론자들은 조선까지 끌어들여, '조선 역시 강화를 원한다'고 강변했다. 일본과의 강화는 생각조차 않았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격앙되었으나, '강화에 반대하면 명군을 모두 철수시키고 다시는 조선을 돕지 않겠다'는 경략 고양겸의 으름장에 못 이겨 끝내 선조의 이름으로 '왜를 책봉하여 전쟁을 멈춤으로써 우리 나라 사직을 보존케 해 달라'는 굴욕적인 상주문을 명에 보내게 된다.
조선을 끌어들임으로써 강화론이 대세가 된 명나라 조정에서는 강화의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조안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 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하였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요구한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책봉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조선과 화해하고 (일본이) 명나라의 번속국이 됐으므로 (같은 번속국인)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이후 명나라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다. 명 사절단 측은 일본이 조선에서 완전히 철군해야 일본으로 출발하겠다고 했으나, 일본은 병력을 찔끔찔끔 물리고만 있었던 것. 이런 줄다리기 속에서 명나라 내 강화론자들은 행여 강화가 파탄 나지는 않을까 몸이 달아, 조선 내 주둔 중인 일본군을 해치지 말라고(?) 조선인들에게 요구하는 무리수까지 둔다. 특히 명의 강화론자 심유경은 사실상 일본군의 권익을 대표하게 되어, 조선에 잔류 중인 일본군들에게 표첩(증서)을 내려 준 후, 표첩을 소지한 일본군을 건드리지 말라고 조선 관민들에게 엄포를 놓는다. 1596년 이원익이 조선 조정에 올린 보고에 따르면, 왜군들이 이 '심유경 표첩'을 휴대한 상태라 이들이 횡행해도 조선 관민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고 한다. 명이 조선을 도와 철천지 원수 왜군을 몰아내 줄 거라는 기대를 품었던 조선 백성들로서는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일이었을 터.
각설하고, 고니시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을 살펴보면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이 일본 국왕에 책봉됨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서를 지참하는 것, 무역을 하게 될 경우 금인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였다.
대명조선여일본화평조목(大明朝鮮與日本和平条目)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나라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군영 2/3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였고 책봉사의 일정이 지체되는 것을 다시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때 정사 이종성이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고 더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책봉사절은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로 승격되고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1596년 6월에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8월에 사절단을 보낸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조선 사절의 접견을 거부하였기에 이들은 명나라 관리들에게 책봉식장의 상황을 전해듣는 데에 그쳤다. 거부 이유는 왕자가 안왔다는 점, 사절의 벼슬이 낮은 점, 늑장을 부려 책봉사보다 늦게 도착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단순한 트집잡기는 아니였는데 이미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요시라가 경고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구경꾼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만력 24년(1596년) 9월 2일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일본국왕으로 책봉되었다. 다이묘들 또한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책봉문, 금인, 관면을 수령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장면을 기록한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이 일본의 승려 겐소(현소)의 선소고, 유럽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조선 사절의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이다. 이들 모든 사료에 다이묘들은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히데요시의 명나라 관복 착용 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다소 다른데, 선소고,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 황신의 일본왕환일기와 조선왕조실록 내 황신의 보고에는 입었다고 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 내 조덕수의 보고에는 입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추가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명나라 책봉사 양방향과 심유경의 말에 의하면 봉작례 때 히데요시는 신종 황제(만력제)의 칙서에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五拜三叩頭禮)를 행하고 만세까지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 측의 기록인 '선소고'에서도 '만세'를 '삼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선소고
'太閤(태합) 秀吉(수길)은 기쁨에 들떠서 金印(금인)을 拜領(배령)하고 冠服(관복)을 몸에 걸쳤다. 그리고 ‘만세’를 삼창했다'
太閤喜氣溢眉, 領金印著衣冠, 唱萬歳者三次,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
조선 측 기록은 두 가지이다.
'듣건대, 관백이 이미 책봉(冊封)을 받고, 모든 왜장(倭將) 40인이 관디를 갖추고 벼슬을 받는다고 하였다.'
조선 사신단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9월 3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조가 자세한 내용을 묻자
' 다음날 두 중국 사신이 봉작례(封爵禮)를 행하였는데, 관백은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五拜三扣頭)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 인이 모두 차등 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은 관백이 출입을 금지하여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친히 보지 못하여 그간의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고 인편으로 전해 들었으나 또한 모두 믿기가 어렵습니다.'
1596년(선조 29년, 만력 24년) 12월 21일 황신의 보고, 선조실록
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덕수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
1596년(선조 29년, 만력 24년) 11월 6일, 선조실록
라고 황신과 다르게 보고한다.
두 가지 다른 보고에 대해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
1596년(선조 29년, 만력 24년) 11월 6일, 선조실록
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요구 조건 중 하나였던 '조선의 왕자'가 일본에 와야 한다는 건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책봉식 이전부터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히데요시는 이어진 명나라 책봉사와의 회담에서 일방적인 철군 요구가 이어지자 격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천조(天朝)는 사신을 보내어 나를 책봉(冊封)하였으므로 내가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을 허락할 수 없으므로 나는 다시 전쟁하기를 바랄 뿐이다. 천사(天使)도 오래 머무를 것 없으니, 내일 곧 배를 타도록 하라. 나는 병마(兵馬)를 다시 징발하여 조선에 가서 전쟁하겠다."
어제 적승(賊僧) 장성(長成)이 나에게 말하기를 『관백이 왕자가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더욱 성내어 처음에는 사신을 책살(磔殺)하려 하였으나 나와 삼성(三成) 등이 겨우 구제하였다.
선조 29년 11월 10일
‘우리가 4~5년 고통을 받았습니다. 당초에 우리가 조선에 부탁하여 전주(轉奏)하도록 하여 책봉을 청구하였는데 조선에서 즐겨하지 않았고, 또한 길을 빌려 조공하려 하였는데 조선에서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는 조선이 우리를 경홀히 여김이 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출동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는 이미 지난 일이니, 다시 제기(提起)할 것이 없습니다. 그 뒤에 노야(老爺)께서 왔다 갔다 하며 좋게 지내기를 강구하는데도, 조선에서는 힘을 다해 무너뜨렸고, 소서(少西)가 급히 들어가 아뢰던 날에도 조선에서 상본(上本)하여 군사를 청하여, 단지 다 죽이기로만 하였으며, 천사가 이미 왔는데도 조선에서 통신(通信)하지 않으려고 하여, 앞서는 노야를 따라오지 않았고, 또한 양 노야(楊老爺)도 따라오지 않다가 이제야 비로소 이르러 왔습니다. 또한 우리가 일찍이 두 왕자(王子)를 놓아 보냈는데, 큰 왕자는 비록 오지 못하더라도 작은 왕자는 와서 사례할 수 있을 텐데, 끝내 보내려 하지 않으니, 나는 매우 조선에 노했습니다. 이제 온 사신을 볼 필요 없고, 가든지 머물든지 그에게 맡기겠습니다.……’
일본왕환일기 9월 4일
이에 명나라 사절들은 자리를 파했고, 며칠 후 히데요시는 책봉에 대한 사은표문과 함께 별폭을 제출하며 전쟁을 재개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은표문(謝恩表文)
일본 국왕 신(臣) 풍신수길은 진실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해와 달이 비추니 대명(大明)을 만국에서 우러러 보고, 강과 바다처럼 흠뻑 적셔 주니 성화(聖化)를 한없이 유지하실 것입니다. 천자의 운수를 높이 받드니 황제의 은혜가 널리 미치셨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조종(祖宗)의 덕을 밝혀서 인민의 마음을 안정시키시니, 원근(遠近)과 대소(大小)가 은혜를 입은 것이 요순(堯舜)의 성세(聖世)보다 못하지 않으며 위의(威儀)와 진퇴(進退)가 예절(禮節)에 합한 것이 주(周)·하(夏)의 융성한 기풍보다 넘치는데, 어찌 동해(東海)의 소신(小臣)이 직접 중화(中華)의 성전(盛典)을 받을 것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고명(誥命)·금인(金印)과 예악(禮樂)·의관(衣冠)에 모두 은총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은 일일이 감격스럽고 지극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날을 택해 반드시 방물(方物)을 갖추어 구중 궁궐에 감사함을 표하겠습니다. 삼가 충심에서 우러나는 정성을 다하겠으니, 원하건대 어리석은 정성을 굽어 살펴 주소서. 천사(天使)가 먼저 돌아가는 편에, 우선 삼가 표문(表文)을 올립니다.
1596년(만력 24년, 선조29년)
진천조별폭(進天朝別幅)
지나간 해 조선의 사절이 와서 잔치하였을 때부터 하정(下情)을 잘 알고도 끝내 천조에 아뢰지 않았고, 그 뒤에도 무례한 일이 매우 많았으니 그 죄가 하나입니다. 조선이 맹약을 어겼으므로 정토하여 군중(軍中)에서 두 왕자와 부처(婦妻) 이하를 사로잡았으나, 심 도지휘(沈都指揮)가 칙명(勑命)을 전하였으므로 너그러이 용서하였으니 곧 먼저 사례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분수인데, 천조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온 뒤에도 몇 달을 흘려 보냈으니, 그 죄가 둘입니다. 대명(大明)과 일본의 화교(和交)가 조선의 반간(反間)으로 인해 몇 해나 지나갔으니, 그 죄가 셋입니다. 우리 나라의 군사가 노고하고 세월을 오래 보내게 한 것이 처음에는 황도(皇都)의 계략인 줄 알았으나, 조선이 천조의 사신보다 뒤져서 온 것만 보아도 조선이 일마다 속이려고 꾀한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죄를 지은 것이 한둘이 아닌데, 대명에서 정벌할 것입니까, 우리 나라에서 정토할 것입니까. 대개 또한 칙명에 따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자기만 일방적으로 철군을 하면 손해라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명과의 통교를 희망했는데 조선이 이간질했으니 오히려 명에서든(!) 일본에서든 조선을 징벌해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를 폈다. 개전 당시의 목적과 포부는 조선을 길잡이 삼은 명백한 명나라 '정복'이었음에도 전황이 좋지 않자 그것이 어느새 명과의 '통교' 시도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자국 방어 목적은 물론이고 책봉-조공 관계로 엮인 명과의 의리도 있기에 일본과 싸웠던 조선의 행동을 명과 일본 양국의 화교 시도를 가로막은 이간질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정신승리이자 현실적으로 보면 명나라 정복은 이미 글렀으니 전쟁을 주도한 자신의 권위와 체면을 위해서라도 조선 땅 일부라도 차지해야겠다는 집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결국 그렇게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심유경은 자신을 천거하기도 했던 병부상서 석성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했으나, 정유재란 발발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려다 경남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황제와 조정을 기만한 죄로 참형에 처해진다.
5.6. 정유재란 발발과 전쟁 종결
1597년 8월 27일, 일본은 총 14만의 군세를 이끌고 다시 조선을 침공한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임진년에는 발도 못 붙였던 전라도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정유재란 당시의 군 편성>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제2군 가토 기요마사 10,000명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13,300명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11,100명
제8군 모리 히데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40,000명
이상 합계 121,100명. (수군 제외)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 전투 전후로 일본군 장수들이 소금에 절여 나무통에 담아 일본으로 바친 코 숫자가 3,500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나중에는 일본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코 베기를 하지 않으며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조선 백성들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조선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한다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성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 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5;000명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 한성을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4,000 명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다. 이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은 정황은 없다.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한양이 지었다는 것과 추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일본군의 종군 승려였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재차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수군은 앞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다고 판단, 300여척의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해 진출을 시도하는데...
서해로 통하는 길목인 울돌목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단 13척 전력의 조선 수군에 다시 한 번 대패한다. 이로 인해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전라도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조명연합군은 전쟁을 끝낼 총공격으로서 사로병진책을 실행한다. 비록 조선 영내로의 진격 가능성이 완전히 좌절되고 의지도 꺾인 상황이긴 했지만, 이 전투 양식은 일본의 장기를 가장 잘 살린 것으로서 전쟁을 장기화시켰다. 일본의 성은 본래 전투 요새의 기능을 극대화한 형태의 성이었고, 개머리판이 없는 일본의 순발식 조총은 이런 성 내에 숨어 총안구를 통해 사격하는 것에 적합했다. 그 결과 공격하는 조명연합군의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잘 무너지지도 않는 성에서 총알이 쏟아지니 공략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조명연합군이 포병 전력에 있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긴 했지만,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야전에서 적군 진형을 갈아버리는 데 쓰이는 불랑기, 현자총통, 호준포, 변이중 화차같은 중소형 대포 및 오르간 건을 주력으로 굴렸고, 대형 화포는 효율성 문제로 인해 거의 운용하지 않았던데다 공성전에 사용한 경험도 적었다. 그래서 포병이 강해도 성을 공격하는 데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공성전에 적합한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가 명나라에 도입되는 것은 임란이 끝난 지 몇 년 지난 후였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 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1598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히 철수하려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일본군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 간의 전투인 노량 해전, 그리고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한 이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왜성 소탕전을 끝으로 7년 간의 대전쟁이 종결됐다.
다만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전쟁이 이 시점에서 공식적으로 종결된 건 아니다. 조선과 일본 양국 모두 합의하에 공식적인 종전선언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 왜냐하면 정유재란 직후 조선은 조선대로 피해 복구에 여념이 없었고 일본도 세키가하라 전투라는 내부 싸움으로 다른 일에 신경쓰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사상 초유의 대규모 전쟁에 휘말린 만큼 상대국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달해서 종전이고 뭐고 없었다. 오히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로 설립된 도쿠가와 막부는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벌인 일이고 자신은 거기에 병사 한명 쌀 한 톨도 안 보탰으니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에 교류를 재개하자고 요청하자, 조선에서는 도쿠가와인지 도요토미인지는 알 바 아니니 너도 책임을 지라고 날선 반응을 보여서 제2차 당포 해전이 발생하는 등 갈등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다 양국이 싸우면 싸울수록 손해가 커지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양국이 주고받는 국서를 중간에 모두 조작해서 서로의 요구사항이 매우 잘 협상되는 것처럼 주작을 하기에 이르렀고, 양국은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긴 했으나 계속 일을 키우긴 싫었으므로 결국 1609년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서 1609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임진왜란이 종결된다.
5.6.1. 일본군의 퇴각 이유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막부 체계로,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연합국가 성격이 강했다. 그것이 전국시대를 거치며 그 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래 무력으로 통합되었지만, 여전히 기타 다이묘들은 사병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군의 경우, 경기도 수원부(水原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천 명이라고 한다면, 권율이 이끈 군사 4천 명은 조선군이지 권율의 사병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군의 경우,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 7,000명이라고 하면, 고니시 가문에 소속되어 있는 고니시군이다.
왜장들은 피로 피를 씻고, 자식이 아비를 축출하거나 죽이고, 가신이 주군을 죽여 다이묘가 되던 센고쿠 시대의 인물들이었던 만큼 철저히 출세 지향적이었고, 의심이 많았다. 조선으로 출병을 결정한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바치려 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 땅을 넓혀 더 크게 성장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병한 경우가 많았다. 이후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 한가닥 하던 다이묘들은 언제든지 도요토미의 뒤통수를 칠 기회도 노리고 있었다.
한편, 규슈 정벌을 끝으로 일본 전역을 통일한 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신들에게 더 줄 것이 없었다. 일본 자체가 영주들이 우글거리는 봉건 국가였기에, 전공에 대한 보상은 '고쿠다카' 즉, 토지 였고, 토지여야만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해 숙청과 개역을 벌여 논공행상을 정리하였고, 히데요시도 전봉 조치나 개역을 하지 않은 건 아니나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휘하 가신과 다이묘의 불만을 누를 겸, 본인의 과대망상도 실현하고자 명나라와 조선이라는 외부의 적을 설정해 침공한 것이다.
여기서도 도요토미 정권의 한계가 드러나는데, 히데요시 최대 정적인데다 세력도 가장 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물론, 일부 다이묘들은 끝까지 이런저런 핑계로 출전을 미루며 가문의 병사들을 최대한 보전시켰다. 80만석 이상의 대영주이자 히데요시에게 충심이 깊었던 마에다 토시이에는 참전하지 않았고, 모리(+코바야카와), 시마즈를 제외한 기타 대영주들도 참전하지 않거나, 참전해도 조선땅 찍고 다시 돌아갔다.
조선 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 선봉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모리, 코바야카와, 쵸소카베, 시마즈 등 센고쿠 시대에서도 이름난 대가문을 출동시켰는데, 거기에다가 딱히 전공도 없는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앉혀놨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키타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사실상 무시당했고, 오죽하면 그나마 총지휘를 했다는 행주대첩조차 본인은 얼굴마담이고 실제 지휘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전투가 아니면 협력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침략의 선봉이던 1군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 오죽하면 침공 루트도 아예 동서로 전혀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엔 결국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고니시에게 1군을, 가토에게 2군을 맡긴 것 자체가 둘의 안 좋은 사이를 이용해 선봉 경쟁을 하게 만들어 잘 싸우게 하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을 다 한 셈이다.
이런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선에 출병해있던 다이묘와 병사들은 얼마 안가 일본 내에서 영주들 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승산 없는 전장인 조선에서 시간 질질 끌고 있어봐야 이미 무의미한 상황이었기에 황급히 철군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자신에게 충성스럽고 능력 있던 고니시는 이 전쟁에서 군대를 거의 다 잃어 이후 도쿠가와파와의 싸움에서 제대로 기여하지 못한 채 본인은 참수당하고 가문은 멸족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이 전쟁에서 자기 살만 과하게 깎아먹은 탓에 이후 정적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5.7. 조선의 보복 논의
1598년 12월 노량해전 이후 왜란이 종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명군이 아직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당시 전라도 관찰사 황신(黃愼)은 상소로 대마도에 대한 보복전을 건의했다. 왜란 중에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황신은 대마도가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에서 구원하기 어려운 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명군과의 연합작전을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1591년 조헌의 지부상소 때와 달리, 다년간의 왜란으로 시달려서 일본에 이를 갈고 있던 선조는 이번엔 이 상소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비변사에 진지하게 논의하게끔 한다. 특히 당시 선조가 하루 안에 이 안을 논의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공격전에 상당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변사는 왜란으로 인해 조선군이 손실이 커서 병력이 부족하고, 황신의 견해와 달리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서의 구원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이에 우의정 이덕형은 명군과 상의했는데, 명군도 대마도를 점령한 후에 지켜내야 하는 문제가 있고, 황신이 봤을 때와 달리 전황이 달라져서 대마도에 방어 병력을 두었을거라며 역시 난색을 표하고, 점령 후 수성이 아닌 단순 응징차원의 공격이라면, 선 정탐 후 움직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대마도를 직접 정벌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후 실록의 기록상,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기사가 없기에 그 사이에 진행되던 명군의 철군이나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중앙 조정에서 논의되는 수준의 움직임은 없었다. 항왜 소운대를 일본에 첩자로 보낸다거나, 정벌 목적의 정탐 움직임은 있었던 정도였다.
다만 지방 차원에서는 이 작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지, 이후 1599년 4월에 경상 좌병사 김응서가 김경립 등 10인을 시켜 일본 내에서 배를 탈취하는 등의 작은 전과를 기록하며, 정탐한 결과가 조정에 보고되었다. 특히 대마도에서 조명연합군의 응징 공격이 두려워 겁을 먹고 성을 쌓고 밤낮을 쉬지 못한다고 했다는 보고 내용으로 보면 당시 일본 측에서는 조명연합군의 보복 공격에 대한 방어 의도가 확실히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김응서는 이 치계(보고서)에서 명군에 통보해서 같이 대마도를 치자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마무리지었으나, 실록에서는 이 치계에 대해서 조정 차원에서 논의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김응서 부대의 작은 전과는 민간에도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소설 임진록에서는 일본을 응징한다는 가상 이야기에서 김응서가 꽤 중요한 인물로 부각된다.
6. 각종 논쟁들
6.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조정?
임진왜란 때 정부 측(특히 선조)이 잘 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전쟁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 한국인의 인식은 상당히 나쁘다. 당시의 조정 인사들이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 측에서도 나름대로 가능성을 인지하고 대비를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비한 점이 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별 볼일 없는 탁상공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찌질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윤두수도, 이순신을 험담한 것 때문에 폄하받으나 전시 조정을 이끄는 기둥으로 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 전쟁 초반에 선조와 조정이 북쪽으로 도망가고 중앙군이 패퇴하는 등 세가 크게 꺾였던 것은 사실이나, 초반의 충격 효과가 사라지고 첫번째 겨울이 올 즈음이 되어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군관들과 각 지방 수령들의 노력으로 조선의 군세가 어느정도 복구된 상황이었다. 의병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일어난 경우도 있지만 이런 병력 동원에 호응하여 결성된 경우도 많다. 이들 의병은 전쟁 초반이라면 모를까, 전열이 정비된 이후부터는 독자행동을 하지 않고 조선 조정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다. 조선군은 이를 기반으로 지원 온 명군과 합세하여, 이미 1593년이면 일본군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그들을 남부 해안 지역으로 도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당시 퇴각하던 일본군이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맞아 입은 피해는 전근대의 전쟁임을 감안해도 매우 컸는데, 총병력 22만 중 절반인 대략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개전 1년 만에 사라졌으며 나고야에 주둔하던 예비대가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바로 투입되었다.
6.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십만 양병설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주장'이며, 후대에 이이의 제자들(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는 단 한 줄만 적혀있다. 기록을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남기는 조선을 고려하면, 실제로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는 굉장히 미심쩍어진다. 때문에 서인들이 이이를 추앙시키기 위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당시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군대 10만 이상을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에 조선이 정규군만 17만 이상을 동원한 걸 보면 10만 양병설의 진의가 더욱 미심쩍어진다. 현재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 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6.3.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수?
동래성 전투 같은 전쟁 초기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전투들이나 행주 대첩 등 소수의 조선군이 다수의 적을 격파한 승전들 탓에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소수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군의 절대적인 물량은 그렇게까지 적지 않았다. 임란 초기에 실록에 나오는 병력들을 전부 다 합치면 최소 10만 명이 넘는다.
부산진, 동래성에서 격파된 조선군이 3,000명. 상주 전투에서 손실 1,000명, 탄금대 전투에서 경군과 충청도 야전군 8,000명 이상. 이것만 해도 12,000명 이상.
임진강 방어선에서 붕괴된 평안도, 황해도 조선군이 13,000명. 여기까지 25,000명 이상.
용인 전투로 인해 박살난 경상 - 충청 - 전라 3도 근왕군이 50,000명 ~ 80,000명. 50,000명 이상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약 80,000명 이상.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피난민들까지 전부 다 합쳐진 병력 수라고 한다. 여기서는 피난민들까지 전부 다 포함해서 130,000명이라고 기록.)
평양 방어전에서 3,000명의 조선군 손실. 83,000명 이상.
이순신이 이끈 3도 수군이 10,000명 이상. 여기까지 90,000명 이상.
이후 강원도, 함경도에서 가토에게 박살난 조선군과 진주성을 비롯하여 아직 일본에게 점령되지 않고 남은 남부 지방. 주로,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그리고 선조의 호위 부대가 1만 이상.
대충 추려서 합쳐도 조선군은 100,000명 이상의 대군이 나온다. 그리고 실록에 나온 집계로는 임진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40,000명이 넘는다. 단, 누적으로 집계된 병력 수인지라 중복집계된 인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임진년 중반쯤 조선이 임진강 방어선에 13,000명을 투입하고, 후방에서 하삼도 근왕군 50,000명 ~ 80,000명이 북상하자 일본 측에선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이 당시엔 일본은 1군, 2군, 3군만 한양에 있고 나머지 병력들은 전부 후방에만 있어서 병력의 질과는 별개로 전선에서의 병력의 수는 되려 조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요격에는 성공했지만 애초에 농민들 긁어모아서 일단 북상하고 본 거고 또 와키자카에게 요격당하고 나서 전멸한 게 아니라 대부분 도망쳤기 때문에 조선 정규군에게 실질적으로 입힌 타격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구가 더 적고 행정체계도 부실했고 흑사병으로 국가가 거의 무너져가던 고려말에도 홍건적과 맞서서 일시적으로나마 20만을 동원했고 위화도 회군 당시에는 공요군이 5만을 동원했는데, 조선이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는 전쟁이 터진 마당에 10만을 동원 못할 리는 없다.
물론 조선측 기록에서도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즉, 전근대의 한계상 정확한 집계는 매우 힘들었으니 당시 조선군의 총 병력 수는 어느 정도 중복집계 되거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참고.
다만 농업국가에서 이 생산인구를 마냥 군대에 붙잡아둘 수는 없었고 또 용인 전투에서 보듯이 야전에서 제대로 활용하기에는 질적 수준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는 대부분의 조선군을 농사를 짓기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육군의 주력은 명군이 된다. 물론 일본군을 상대로 농민병으로 백병전을 벌일 수 없다는 점도 고려된 게 맞다. 이 시기를 기준 잡으면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소수인 것이 맞다. 당장 울산성 전투만 봐도 명군이 숫적으로 주력이었다.
6.4. 육전은 의병과 승병의 독무대?
과거 조선의 군사·행정체계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미진하던 시기에는 '조선 정규군은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한 것이 없고 육군 중에도 권율같은 일부 명장을 제외하고 무능해서 의병으로 때웠다'는 인식이 팽배하였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조선 관군은 비록 임란 초기에 상정한 규모를 넘어서는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중반기에 실전 경험이 쌓이면서 좋은 성과를 낸다.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소규모의 유격전, 공성전 등의 승리는 관군이 이루어낸 것이다. 의병은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도 했지만 관군과도 자주 힘을 합쳐 활동했다.
제승방략에 의해 조정에서 보낸 장수가 농민병인 정병을 집결시켜 지휘하면 그게 관군이고, 그 장수가 없을 때 (싸워야 할 의무는 없었음에도) 지방 유력자가 정병들을 모집해 지휘하면 그게 의병이다. 물론 의병 중에는 병역 의무가 없는 천민이나 양반들이 지원한 경우도 많았으나 기본적으로는 군사훈련을 조금이라도 받아본 적 있는 정병 출신 의병들이 당연히 더 많았다. 그나마 1593년 기준으로 의병의 수는 22,600명으로 관군의 4분의 1 정도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의병의 숫자는 점차 감소 추세에 접어드는데, 임진년 이후에 발생한 계사 - 갑오년 기근으로 군 유지가 어려워진 점, 의병들의 관군 편입, 조정에서 의병들을 물자 운송에 동원했던 일 등이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부에서는 관군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놀고먹으면서 의병들을 모함하고 공적을 가로채는 막장으로 표현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병력은 관군이 주전력이었고 의병은 일종의 보조군으로 활동하였다. 거기다 전쟁으로 생긴 혼란시 의병을 사칭하면서 재물을 약탈하던 자들이 관군에게 토벌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무엇보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해도 공권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군대는 개인 사병이나 반란군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기에 조선조정과 관군이 이들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6.5. 조총 때문에 초반에 무너졌다?
조선이 전쟁이 터지고 나서야 조총이란 걸 처음 접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당시 신립 등 조선군 지휘관들과 관리들은 조총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자체는 잘 알고 있었다. 당장에 조선과 전쟁을 할 이유가 하등 없는 대마도주부터가 히데요시의 침략을 경고하는 뜻으로 조총을 보내기도 했다. 또 조총은 위력은 강력하지만 장전 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었으며 이것도 조선은 알고 있었다. 문제는 병력을 시간차로 투입해서 단점을 극복해낸 오다 노부나가의 전술이 조선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일본군의 경우 조총병을 사격조와 대기조로 나눠 분리하거나 활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선 육군도 조총'만' 없었을 뿐이지 총통과 같은 화포들은 고려말 우왕 때부터 왜구를 상대로 운용해 왔으며, 장전 방식과 운용면에서 조총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 화기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군 지휘관들이 조총을 과소평가한 것과 일선의 조선군들이 조총을 접해본 적이 없다는 건 분명 문제였다. 일선 병사들은 조총에 대응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고, 일선지휘관들도 조총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조선군 지휘부조차 한성의 최고수뇌부가 조총으로 시험 사격해본 정도가 전부이지 정규군이 집단적으로 운용하는 위력은 임진왜란에서 처음 경험한 것이다. 당시 조총의 유효 사거리 자체는 50m를 넘지 않았다. 따라서 유효사거리가 130~150m 정도인 국궁을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원래 머스킷으로 무장한 군대의 위력은 단발의 명중률이 아니라 집단으로 쏘는 화망에서 구축된다. 이를 조선군 수뇌부가 경험한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일 것이다. 반면 조선 각궁의 그 우수한 사거리는 정작 사수들의 저열한 훈련상태로 인해 제대로 발휘될수가 없었을뿐더러 사거리와 별개로 저지력은 총에 비해 한참 밀렸다. 총의 강력한 장점은 살상력이 압도적으로 우수해 갑옷을 무력화한다는 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조총에 의한 피해를 기록한 사료가 무수히 나온다.
의외로 일본군의 조총 비중은 생각보다 적었다.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 등의 창작물에서는 아직도 일본군의 절대 다수가 조총으로 무장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조총병의 비중은 최대 20% 수준이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의병으로 활동한 조경남이 쓴 문헌인 난중잡록을 보면, 1592년 5월 8일 한양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염탐하였더니 조총에 들어가는 총알을 가진 자는 4~5명 중에서 겨우 1명이고 그나마 1명이 가진 총알의 개수도 15~16알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전통적인 창과 칼, 그리고 활 등이었다. 다만 이걸보고 적다고 하는것 또한 과소평가다. 당대 일본의 조총 보급률은 세계 최고였다. 당대는 총기의 초기단계라 서양에서도 총병의 수는 적었고, 총기가 본격적으로 서양 전쟁사에서 두각을 드러낸것도 임진왜란이 종전하고도 70여년 전인 1525년 파비아 전투 부터다. 총알이 15~16발에 불과하다는것도, 애초에 1800년대 서양 전쟁사에서도 십여발 이상 총을 쏘는 경우는 적었기에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매치락 화승총은 느린 장전 속도 때문에 이를 보조하는 전술을 잘 활용해야 한다. 예를들어 병자호란 당시 쌍령 전투에서 조선군이 병력2천 대부분이 조총병이었음에도 기병이 부족하고 장창병을 제대로 운용하지 않아서 청나라 기병대의 돌격에 패하게 된다. 대기병 전술이 부재하고 대단위 조총병을 처음 운용해 보았기 때문에 나온 실책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지 전국시대에서 조총을 운영해 보았기에 어느정도 경험이 있었고, 그래서 이런 문제도 적었다.
그렇기에 조선에서, 후대가 아닌 당대에도 조총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순신도 조총의 성능에 감탄하여 정철총통을 개발해 찍어댔을 뿐 아니라, 명군조차 앞에서는 화포 앞에 조총 따위 뭔 소용이냐며 까다가도 뒤로는 조선에게 조총 좀 구해달라고 사정했을 정도였다. 이는 일본과는 전혀 다른 조선의 전장 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다. 왜군의 숫적 주력을 차지했던 장창병대는 무지막지한 리치의 대가로 실제 찌르기 성능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넓은 전장에서 보병간의 회전이 벌어져야 했는데, 조선군이 보병을 대규모로 동원해 평원에서 회전을 시도해본 것은 용인 전투가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나마 여기서도 일본군은 장창대로 정면대응하기보다는 문소산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조총으로 사격하며 농성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를 조선군 기병이 제대로 파훼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로 임진왜란의 전투는 조선군이 최대한 회전을 피하는 가운데 주구장창 공·농성전, 고지전, 유격전 위주로 치러졌고,(조명연합군이 공세를 벌일 때도 마찬가지) 야전을 치를 때는 조선군이나 명군이나 기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어느 쪽이든 낭창낭창한 일본식 장창이 역할을 맡을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조선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기마대를 다 소진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당장 용인 전투만 해도 삼도근왕군은 다수의 기병을 보유하고 이를 과신해서 패전의 빌미가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후로도 함경도 북병 기병전력은 건재해서 동북전선에서는 해정창 전투나 북관 대첩 등 조선군 기병이 주력을 맡은 전투도 여럿 있었고, 서북전선도 벽제관 전투나 직산 전투 등 명 기병이 중심이 된 굵직굵직한 전투를 치렀다.관련 포스팅 심지어 조선 의병조차 기병이 적지 않았다. 보병 간 전투 역시 일본과는 달리 너죽고 나죽자는 진짜배기 공성전과 고지전의 연속이었고, 자연히 원거리 병기의 역할이 높아진 상황에서 화포 전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궁병 역시 능력이 저열한 일본군이 동원할 수 있는 원거리 전력은 조총 뿐이었다. 당장 초전인 부산진 전투에서부터 철포대가 언덕을 점거해 공격하면서 공세에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조총의 가장 큰 약점인 사격속도와 명중률 때문에 야전의 일본군은 이와 병행해 근접전도 자주 치렀다. 당장 조선도 전쟁도중 항왜들로부터 적극적으로 근접전을 배웠고 이들이 몇십년이 지난 이괄의 난때도 근접전 전문부대로 활약하고 실록같은 조선기록에도 일본의 단병접전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이 근접전에 밀려 조선군이 밀렸다는 기록들이 상당하다. 다만 상술했듯이 야전에서는 주로 기마대를 상대했기 때문에 장창보다는 '큰 칼', 즉 오오타치를 주로 활용했다. 조선 측에서 임진왜란 초기 전역을 가장 자세하게 기록했다고 평가받는 신흠의 상촌집에서는 탄금대 전투 파트에서 조령을 넘어오는 일본군의 '칼빛'이 번쩍였다(劍光閃爍)고 기록했고, 벽제관 전투에서도 징비록&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을 보면 왜군이 긴 칼을 휘두르며 돌격해 들어왔다(賊奮長刀, 左右突鬪)고 적고 있다. 이러한 노다치 운용능력과 효과를 높게 평가한 조선군은 이후 중국식 쌍수도를 도입하여 무예도보통지에도 포함시킨다.
조선군도 일본군과의 전투경험을 쌓아가면서부터는 전투의 양상이 바뀌게 된다. 예를 들어서 동래성 전투에서는 병력 3천 - 4천으로 일본군 2만 명에게 반나절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지만, 전투경험이 쌓인 이후로는 1:7의 병력차에도 불구하고 5일간이나 버티면서 수성 성공(제1차 진주성 전투), 조총보다 훨씬 우월한 사거리와 화력을 갖춘 각종 화포와 신기전등 화약무기를 이용한 (행주 대첩) 등, 우수한 전과를 거두었다. 화차, 현자총통, 비격진천뢰등 조선의 화약무기로 역관광시키는 양상의 전투도 많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조선군은 오랜 내전으로 전투경험이 쌓인 일본군의 근접전과 조총을 활용한 선진 전쟁기술에 초반에 많은 고전을 했으나, 계속된 전쟁으로 일본군들의 전술에 익숙해지면서부터 대등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총이 전쟁 자체의 향방을 결정지었다고 보기엔 어려우나 유의미한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는 셈.
이와 같이 조선이 전쟁을 치루면서 실제로 상대해 본 뒤에는 조총이 전쟁병기로서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들이 수두룩하다. 조선왕조실록 이외의 각종 기록들에서도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일단 활의 경우 활은 물론이고 화살도 까다로운 관리가 필요하다. 화살은 조총탄보다 부피도 크고 습기에 예민하다. 아교로 만들어진 활은 덥고 습하면 녹아내려 활시위가 풀리기 일수이며 목재 특성상 틀어질 수도 있다. 더욱이 활은 정확히 쏘기 위해서는 자세와 탄도를 바람에 따라 계산해야하고 사수의 활시위를 당기기 위한 근력 등의 많은 숙련도를 요하는 등 조총보다 마냥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없다.
무엇보다 왜란 이전에는 총통에도 사용되는 화약의 재료인 유황 대부분을 일본이나 명나라등 외국에서 수입에 의지하고 있었고 조선 내부의 유황광산에서 유황을 수급하는 유황점이 설립된 것은 왜란 이후 17세기 일이다. 총통에 쓸 양도 부족했을 것인데 조총을 대량양산하여 배치하기엔 큰 무리수였을 것이다.
7. 평가
7.1. 한국에서의 평가
수천년의 한국사 모든 전쟁을 통틀어서도 대중적 관심도가 가장 높은 축에 드는 전쟁이다. 전쟁의 기간이 7년에 이르는 장기전이었고,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있었던 전쟁이라 기록도 상세하게 남아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사명대사 등 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들의 무용담이나 민간전설도 많다. 비록 피해가 컸을지언정 전쟁의 끝도 결과적으로 방어와 반격에 성공하고 승리로 귀결되었기에, 몇십년 후 일방적으로 밀리다 종국엔 왕이 굴복하여 한국 역사의 최대 흑역사 중 하나로 남은 병자호란과 비교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경우도 많다.
역사학자들도 임진왜란이 남긴 전쟁의 여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지닌다고 말할 정도다. 심지어 20세기까지는 조선시대의 시대 구분을 양란을 기준으로 해서 전기/후기로 양분하는 관점이 일반적이었을 정도.
현대 대한민국에서는 근대의 일제강점기와 더불어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취급되기도 한다. 비교적 가까운 근세에 있었던 사건이며, 전란 시기의 전투가 워낙 참혹했고 현재까지도 왜란의 참상이 발굴되기에 고대부터 조선 전기까지 있었던 전쟁과 비교해 보다 생생한 역사로 인지된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아도 상당한 국력을 가졌던 중견국이자 문명국인 전기 조선이 왜란을 기점으로 국력이 약화되고 도공 등 기술력이 대거 유출되었기에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욱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심지어 현대 들어서도 왜란 초기 전투에서 학살당한 조선군과 민간인들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유골까지 대거 출토된다는 점에서 임진왜란의 역사적 상처는 여전히 유효하다.
전기 조선의 사회적 모순이 누적되어가던 와중에 터진 이 미증유의 재난은 이후 양자 호란과 경신대기근으로 이어지는 1세기에 걸친 중기 조선의 고난의 행군을 알리는 시발점이었고 결국 늦어진 사회 발전은 세도정치 등 기형적 정치체제와 국력 쇠퇴를 낳는다. 반면 일본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도자기 등 조선의 소프트파워를 흡수했고 패전으로 도요토미 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에도 막부가 수립된 것이 되려 전화위복이 되어 급격한 경제, 사회, 문화 발전을 이루게 된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기존의 봉건적인 체제인 도요토미 정권과 명이 무너지고 에도 막부와 청이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져 부국강병을 이룩했던 일본, 중국과 비교하여 한국이 임진왜란 이후 낡은 체제의 조선왕조가 무너져 개혁적인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지 않고 후기 조선으로 이어져 17세기~19세기의 긴 시간을 정체 상태로 보내 무늬만 근대적 국가인 대한제국으로 20세기를 맞이한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명에서 청으로 교체된 중국은 정통 중국의 역사가 아니기에 경우에 따라선 해석을 달리 할 수도 있다.
일각에선 전쟁 양상이나 국제전 성격 등에서 6.25 전쟁과 임진왜란의 유사점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지도부(선조, 이승만)의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초기에 수도 서울을 함락당하여 국가 멸망 직전까지 수세에 몰렸다. 지원군(명, 미국)과 극적인 반격을 통해 장기전에 돌입하고 결과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방어에 성공했다. 두 전쟁을 일으킨 일본, 북한(중국, 소련)의 주요 정치 세력이 전쟁에 부정적 견해를 내비쳤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김일성이라는 독선적 1인자의 고집으로 벌어진 무모한 국제전이기도 하다. 여기에 정전 협정에 있어 당사국인 한국과 조선 대신 미국과 명이 대표로 나섰다는 점도 비슷하며,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에 한국의 친미, 조선의 친명 성향이 더욱 강해져 미국과 명의 전쟁에 지원, 참전했다는 역사도 유사하다. 물론 차이점도 있는데 선조는 개성-평양-의주로 북쪽을 향해 피난갔지만 이승만은 대전-대구-부산으로 남쪽으로 피난갔다는 점, 임진왜란은 끝내 일본군을 몰아냈지만, 한국전쟁은 종전이 아닌 정전으로 끝난 것이 다르다. 또 6.25는 한민족끼리 이념에 사로잡혀 서로 학살하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잔인한 민간인 학살이라는 부분에선 공통점도 있겠다.
7.2. 일본에서의 평가
일반적으로는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집으로 일으킨 실책으로 취급하거나 가만 있던 이웃나라 조선과 명나라를 건드려서 고립을 자초한 부질없는 일로 기록을 한다. 명분상으로도 밀리는 침략자의 입장이며 조선 정복 및 대륙 진출이라는 본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만 초래한 패전이기에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임진왜란(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일본은 패전으로 전국시대를 거치며 양성한 막강한 군대와 인재들을 대거 잃고 돌아와야만 했고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는 사죄를 받으러 온 조선의 사절단을 두고 해당 전란을 도요토미의 독단적인 횡포로 규탄하며 포로교환과 배상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오사카성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패널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패널 하나를 할애하여 조선에서의 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어 설명에서도 genocide라고 표현하고 있는만큼 임진왜란을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한다.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걸었으나 국가적으로는 각종 인적 물적 자원을 조선으로부터 약탈해 도자기 제조 기술이나 금속활자의 약탈, 성리학 유입과 같은 문화적인 수혜를 얻었다. 또한 7세기 백강 전투의 패배 이후 섬에서 웅크려 살던 일본이 천여년만에 대규모 정규군을 바다 너머로 투입시켜 동아시아의 발전한 문명국인 조선 및 패권국 명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제적인 존재감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일본이 더 이상 동방의 일개 변방국이 아니라 원정으로 해상 다자전을 치르는 것이 가능한 국력을 가진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했음을 각인시켰다. 이때문에 일본에서는 국학의 영향을 받은 자국중심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여 조선통신사를 조공사절단으로 왜곡하거나 부산이 일본의 영토라는 등 잘못된 인식이 퍼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 일본 제국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제국주의 시대 일본에서는 대외 정벌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임진왜란을 일본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해석하여 항왜와 같이 당시 일본측 입맞에 맞지 않는 사실을 부정하고 조선보다는 명나라와의 대결을 크게 부각하곤 하였다. 특히 히데요시를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진출을 시도한 영웅으로 재평가를 하는 작업이 이루어 졌는데, 이에 따라 에도시대에는 신사 하나 없던 히데요시의 신사를 세우기에 이른다. 한편 그동안 군담소설에 가까웠던 일본측 자료를 근대적으로 연구하였고 1924년에는 히데요시의 서신이나 각 무장들의 개인 기록을 모은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戦史 朝鮮役)을 일본군 참모본부가 발행하였다. 다만 교차검증되지 않는 일화가 많고 당시 지휘관들이 히데요시에게 거짓보고를 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조선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고 있던 세력이 명나라 정복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과소평가하고 조선 조정과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의 의사소통을 왜곡함으로써 전쟁을 초래했다고 독창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 상인 세력들은 해당 전쟁이 교역에 방해가 될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고 서술한다. 조선에서 벌어진 전투 자체는 소략하게 다루지만 왜란이 초래한 일본 정치의 혼란상이 잘 드러난다.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한 당대 에도 시대 일본 식자층은 임진왜란을 보다 솔직하게 비판하고 있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 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의 전역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일본지세변급 격조선론
강항의 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한 일본 교수는 임진왜란이 도요토미가 일으킨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엔 동의하면서도, 그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지에 대해선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사실 색다른 주장이랄 것도 없는게 상기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 언급한 것과도 유사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 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나라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본인이 명나라를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합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배신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본에서는 아무래도 명분이 안 서는 전쟁이라 그런지 인지도가 높은 전국시대 도중에 일어난 일임에도 공중파 매체에서는 자세한 행적은 다루길 꺼리는 듯한 모습도 있었는데, 21세기 들어 인터넷과 유튜브 활성화 등으로 역사, 전쟁사 덕후들이 자체 발굴해서 언급하는 경우도 늘어나는 편이다. 하지만 전국시대 이후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사라고 할만한게 없고 각 가문의 위상을 추켜세울 목적으로 영웅담처럼 곡해한 자료가 난립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 내 자료만 가지고 임진왜란을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이다. 그래서 일본 역사학자들이 전국시대와 에도시대를 연구 할땐 각 지방의 자료를 긁어모으고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고된 작업을 하곤하는데 아마추어 네티즌들이 이정도 수준의 지식이 있을리는 거의 만무하다보니 주로 다루는 것도 일본 내에선 조회수가 나올법한 임진왜란-정유재란 사이 일본측이 승전한 전투들 위주가 많고, 그것도 일본 기록에만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혐한 성향이 강한 일본어 위키백과는 임진왜란에 관한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료 취사 선택과 폐쇄성으로 악명이 높다.
7.3. 당시 명나라측의 평가
"명조 200년 이래 적국이 없었지만 이제부터 적국이 생겼는데, 이를 어찌 세월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볼 수 있겠는가!"
주공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여러 왜구는 돛을 올려 돌아가고, 조선의 환란 역시 평온해졌다. 그러나 관백이 동국을 침략하면서부터 전후 7년 동안 수십만의 군대가 손상되고 수백만 량의 군향이 소모되어, 중국 조정과 조선은 최후까지 승산이 없었다. 관백이 사망하여 전쟁의 재앙이 비로소 그칠 수 있었고, 여러 왜구 역시 모두 퇴각하여 열도의 소굴을 지키게 되어 동남 지역에 조금씩 편안하게 잠잘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히데요시는 모두 2대만에 망하였다. 명나라가 끝날 때까지 왜와 통교를 금지하는 법령은 대단히 엄했으며, 마을의 평민들은 왜구를 지칭하면서 서로 모욕을 주었는데, 심지어 이를 통해 어린 아이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한다.
명사 일본전
7.4.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의 평가
당시 예수회 선교사들은 일반적으로 히데요시가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가 1592년에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
Alessandro Valignano, Adiciones(1592) del Sumario de Japon, Adicion 4, IV, 487.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조차도 일본군의 침략에 비판적인 글을 남겼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무모함에 의해 저질러졌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보고서 中
다만 이들 선교사들이 임진왜란을 비판한 기록들은 모두 개전 후에 남긴 글들이며, 임진왜란 개전 직전, 그러니까 히데요시가 이른바 ‘대륙 출병’을 계획하기 전의 선교사들의 관점 및 그러한 관점 뒤의 저간 사정이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예수회, 나아가 일본에서의 예수회 및 기독교라는 종교의 위치에 대해 조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센고쿠 시대 일본에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처음으로 오우치 가문으로부터 다이도지라는 빈 절간 하나를 받아 일본 최초의 교회를 세우고 일본에 기독교 전도를 시작한 뒤, 일본에서 기독교는 규슈 지역을 중심으로 조금씩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규슈 지역에서는 심지어 다이묘들까지 개종하는 경우가 나타나, ‘기리시탄 다이묘’라고 불린다.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1587년 바테렌 추방령을 내린다.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써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기독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
일본인 노예들은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팔려나갔고, 이를 불쾌하게 본 히데요시는 16세기 말에 기독교 금압과 함께 일본 내에서 노예매매 또한 금지시키면서 노예로 전락시키는 대상을 임진왜란 당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로 바꿨다. 하지만 일본의 노예무역은 17세기 초 에도 막부 시절에 가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면서 조선인 노예들은 전국시대 당시 일본인 노예들만큼 많이 팔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강하게 밀어 붙이지 않은 것은 지나치게 밀어붙였다가는 자칫 남만 무역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선교사들이 포르투갈 상인과의 통역까지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 무역에 대해 예수회 선교사들은 원칙적으로는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를 팔아 넘기는 상인들에게 "자꾸 사람을 노예로 팔아 넘기면 아예 파문시켜 버리겠다"며 위협하여 제재하기까지 했다(물론 이런 강경한 조치도 바테렌 추방령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것은 선교사들 때문이 아니라 상인들이 문제라는 걸 히데요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노예 무역은 좀처럼 근절되지 않았고, 여전히 일본인들은 기리시탄 다이묘나 포르투갈 상인들의 협잡으로 국외에 노예로 팔려 나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이를 가스파르 코엘류에게 힐문하면서 "니네들은 왜 기독교 전도도 모자라서 일본 사람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 먹느냐"고 항의했고, 가스파르 코엘류의 대답은 "파는 사람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 코엘류의 말처럼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에는 판매자 역할을 하던 일본인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다는 것을 당시의 기록인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히데요시나 노예 무역에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코엘류의 말은 "그럼 니들이 대놓고 파는 데 안 사가냐? 대놓고 팔든 말든 니들이 안 사면 되잖아"라고 반발을 품기 충분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그리스도인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전통적인 일본 문화가 기독교 선교사나 신자들에 의해 '야만' 내지 '이단'으로 몰려 부정당하고 신사나 사찰이 '우상숭배'라고 매도당해 헐려나가면서 충돌이 벌어진다. 히데요시로써는 자신의 돈줄인 남만 무역을 중지해 버릴 수도 없고 또 서양 상인들과 무역하려면 선교사들의 통역이 필요한데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세를 키우고 자신의 정치 권력까지 위협하고 있는 것은 참아 넘기기 어려운, 즉 서양과의 관계에 있어서 종교와 무역을 어떻게 하면 분리해서 관리할 수 있겠는가의 문제가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문제를 히데요시 정권 패망 뒤에 들어선 에도 막부는 일본 국내에 금교령을 선포해 일본에서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금지하고 그리스도인 신자는 국외 영구 추방 내지는 강제 개종, 그리고 서양과의 무역은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등 기독교 국가를 비롯한 다른 서양 국가와의 무역은 일절 끊어 버리고 개신교 국가로 가톨릭과는 연이 없고 또한 종교 전도에는 일절 관심이 없고 관심이 있어도 그게 일본과의 무역에 대한 욕구만큼 우선하지는 않는 네덜란드(화란)와의 제한된 무역만을 허가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사실 오다 노부나가가 예수회 선교사들을 밀어준 것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제재에 나선 것도 모두 종교적인 이유만큼이나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한 결정이었다. 다이묘들뿐 아니라 혼간지를 중심으로 하는 정토진종(일향종)이 노부나가에 저항해 벌이는 잇코잇키 등 불교 세력과의 마찰도 잦았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들과 맞서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쓸모가 있다는 걸 알고 중용했고 애초에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은 에도 막부의 금교령처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리시탄 박해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바테렌 추방령의 내용은 신토나 불교에 대한 기리시탄들의 훼철 행위 그리고 강제개종(하거나 혹은 시키거나)을 금지하되, 백성들이 자기 의사에 따라 기독교를 믿는 생각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고 다만 다이묘가 기리시탄(그리스도인)이 되려거든 내 허락 받고 되라고 함으로써, 예수회가 다이묘들에게 선교를 빌미로 접촉해 연계하고 나아가 그들을 지원하는 상황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히데요시가 살아있던 시절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나 호소카와 가라샤, 쿠로다 간베에 등 기리시탄 인사들이 이런저런 보이지 않는 제재는 있을 망정 버젓이 살아서 활동했다.
선교사 자체는 이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시절부터 여러 차례 보아왔던 것이었지만,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히데요시가 달리 보게 된 것은 대체로 규슈 정벌(1586.7~1587.4)을 전후해서의 일이다. 당시 규슈 지역에는 고니시 유키나가, 아리마 하루노부, 타카야마 우콘, 오토모 소린, 오무라 스미타다, 가모 우지사토 같은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꽤 많이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통해 '남만'이라 불리던 유럽 국가들의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조총이나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 다이묘의 생활 및 영지 백성에 대한 통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에 따르면 규슈 정벌이 시작되기 전인 덴쇼 14년(1586년) 3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Gaspar Coelho)와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할 것이고 명나라와 인도까지 점령할 것이다”는 자신의 계획을 코엘류에게 털어 놓으면서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 줄 테니까,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과 항해사를 나한테 좀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명나라 정복에 성공하면 내가 조선과 중국 전역에 교회를 지어 줄 것이고 기독교 전도도 적극 지원하겠다”며 회유했다.
사실 선교사들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의 전쟁 계획을 찬성할 이유보다는 반대할 이유가 더 많았다. 아니, 반대할 이유가 그냥 차고 넘쳤다. 단순히 성직자로서의 양심 때문만이 아니어도, 당장 일본보다 먼저 중국에 들어가 기독교를 전도하면서 명나라의 국력에 비하면 일본의 국력은 애초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선교사들 본인이니까. 나중에 가서 히데요시의 전쟁은 명분도 정의도 없다고 비판하기는 했지만, 정작 히데요시의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처음 들었던 그 오사카 성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히데요시의 중국 침공 계획을 대놓고 말리거나 또는 우회적으로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나서서 히데요시의 계획을 적극 돕겠다고 맞장구를 쳤다. 루이스 프로이스에 따르면 가스파르 코엘류는 장차 조선을 치고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선교사인 제가 주선할 테니까, 그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보도록 하시지요. 필요하다면 포르투갈 본국의 군함과 항해사도 추가로 더 지원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제안했다.
히데요시가 예수회 선교사들 앞에서 '중국 들어가기(唐入り) 작전' 즉 임진왜란 계획을 밝혔던 1586년 3월 16일의 오사카 성에는 루이스 프로이스나 가스파르 코엘류 말고도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Gnecchi-Soldo Organtino),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로렌소 등 30명이 넘는 예수회 신부 및 수도사도 함께 있었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과는 정반대이다. 히데요시가 조만간 조선과 명을 공격할 것이라는 계획을 천명하고, 여기에 필요한 서양식 군함과 항해사를 히데요시에게 제공한다는 안건을 논의한 이 날의 자리에서 프로이스나 코엘류와 함께 히데요시를 접견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 신부는 "서양식 군함 및 항해사를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맞춰 제공하는 안건은 히데요시가 아니라 프로이스와 코엘류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전12권)를 일본어로 완역한 일본의 사학자 마쓰다 기이치(松田毅一)는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남만인>에서 정황상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의 증언대로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대한 서양 군함과 항해사 제공에 대해 히데요시가 아니라 루이스 프로이스와 가스파르 코엘류가 먼저 제안한 것이 맞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써 이미 코엘류 본인부터가 히데요시와 접견하기 2년 전인 1583년부터 "일본의 기독교를 군사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루손의 에스파냐 총독에게 지속적으로 군사 지원 요청을 보내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에 루손에서 활동하던 사제 알론소 산체스(Alonso Sánchez, 1547~1593)는 코엘류와 시기를 같이 해서 (필리핀과 멕시코에서 한 것처럼) 에스파냐가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해서,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오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명나라 정복 구상을 1586년에 루손 총독은 실제로 승인하고, 산체스를 마드리드로 보내어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구상하기 이전에 이미 에스파냐나 예수회의 종교적인 '콩키스타도르' 대상에 엄연히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애초에 산체스를 비롯한 이들 기독교 신부들은 당시 명에서 활동하며 기독교 전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던 마테오 리치를 앞세우면 쉽게 명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나중의 일이지만)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한 규슈의 예수회 영지를 되찾겠다며 에스파냐 병력을 일본으로 지원해 달라는 코엘류의 요청을 거절하고 본국에 보내는 편지에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고 딱 잘라 말할 정도로 온건파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뇨조차 히데요시의 중국 정복 구상에는 찬성했다. 한국의 학자 김시덕도 루이스 프로이스가 원래 중국에서의 전도를 꿈꾸던 인물이었음을 지적하며 히데요시가 "내가 조만간 조선 및 명에까지 침공하겠다"고 호언하는 것을 듣고 중국을 기독교 국가로 '복음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가스파르 코엘류와 루이스 프로이스가 먼저 히데요시에게 "저희가 군사적으로 서양 군함과 항해사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히데요시에게 제안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선교사들이 먼저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나라 침략에 대한 지원을 제안했든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으로의 침략 계획에 못 이기는 척 맞장구친 것이든, 분명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를 더욱 수월하게 하고, 나아가 중국(+조선)이라는 더 넓은 (전도) 시장을 얻어 그곳에까지 기독교를 전도하고 싶다는 욕심이 당시 히데요시를 접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가톨릭 언론인 지금여기에서는 이에 대해서 상당히 방어적인 내용의 입장을 내놓은 바 있는데, 그 논지는 "임진왜란은 바티칸 예수회가 배후에서 조종해서 일어난 동아시아판 십자군 전쟁이라느니 예수회 세력과의 대규모 전쟁이었다느니 하는 것은 과장"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며 "원하신다면 서양식 군함과 항해사도 지원하겠습니다"라고 약속은 했어도 실제로 서양 군함이 조선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당시 항해 기술의 한계상 서유럽과 남유럽에서 일본까지 거리는 사실상 지구 반바퀴가 넘는 거리로 일본까지 가는 데만 1년이 걸렸기에 보급 문제 때문에서도 지원은 곤란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히데요시에게 서양식 군함을 제공하겠다고 한 약속과 달리 막상 임진왜란 때 당시 일본군 함대에 서양식 군함은 거의 없었고 거의 대부분의 전선은 조선의 판옥선보다 훨씬 작은 세키부네들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배후에 예수회가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선교사들을 오사카 성으로 불러 자신의 대륙 침략 계획을 밝히며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조선 및 중국 정복 이후 그곳에서의 전도 활동 지원을 조건으로 서양 군함 및 항해사를 지원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던 날, 이러한 히데요시의 말 같지도 않은 제의에 당시 중국과 일본의 국력 차이가 말 그대로 넘사벽이라는 것을 결코 몰랐을 리가 없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히데요시의 전쟁 계획에 '찬성' 내지 '지지'를 표명했으며, 그 배경에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을 계기로 삼아 조선, 나아가 중국에까지 그들의 '전도 시장'을 넓히고 싶다는 '욕심'이 작용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혹자는 임진왜란의 발발은 예수회가 아니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욕망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며 그 근거로 조선왕조실록을 가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직후 조선에 보낸 국서에도 '본인이 태양의 아들이니 본인의 소원은 중국을 정벌해서 자신의 명성을 전세계에 영원히 오랫동안 펼치고 싶기 때문에 나중에 중국에 군대를 보낼 때 길을 비켜 달라'고 말할 뿐 기독교란 종교를 소개하면서 대륙에까지 기독교를 전파하겠다는 언급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지만, 애초에 기록으로 남은 히데요시의 발화 대상과 목적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다르고 예수회측 기록에서 다른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기록이 모든 사실을 전해 주지도 않고 기록되어 있다고 모두 사실인 것도 아니다. 이쪽 기록에 없다고 해서 이쪽 기록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만 딱 잘라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히데요시의 발언은 조선 조정을 향해 "우리가 이번에 통일한 김에 명나라까지 점령해야겠으니까 니들이 앞장서서 책임지고 길 내놔라"라고 히데요시의 힘을 과시하고 협박(+통보)하는 것이 발화의 목적이고, 루이스 프로이스 등 예수회 선교사측 기록에 나온 히데요시와의 면담과 그의 발언은 일본이 중국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기독교 전도를 위해서라는 목적을 밝힌 게 아니라 그냥 예수회에 기독교 전도 허락을 떡밥으로 서양식 군함 지원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행동은 기독교 신학교의 표현을 빌리면 분명한 '판단력 부족(내지 결핍)'이다. 그리고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판단력 부족'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선에 상륙해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뇨가 히데요시의 중국 정복 구상에 찬성하고, 루이스 프로이스나 가스파르 코엘류가 장차 조선을 치고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 봅시다.”, "저희가 나서서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중재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 본국(에스파냐)의 군함과 항해사도 추가로 불러와 제공할 수 있습니다"라며 맞장구치고 나온 것은 히데요시가 표면적으로 말한 목표가 아무리 중국이었다고 한들 그 길이 어디를 거치게 되는지를 생각할 때, 히데요시의 명나라 공격에 찬동한 그 시점에서 선교사들은 조선에 대한 침략까지도 묵인(내지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더 넓은 전도 시장을 얻겠다는 욕심에 "우리가 나서서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교섭을 돕겠다. 그들과 함께 작전을 짜 보자. 본국에 말해서 항해사와 군함도 지원해 줄 수 있다"라며 자신의 대륙 침공 계획에 찬동하는 선교사들을 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이들 선교사들을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안 그래도 규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각지의 사찰이나 신사를 '우상숭배' 내지 '미신'으로 몰아 파괴해 버리는가 하면 나가사키에서 일본인이 기리시탄 다이묘나 남만 상인들의 협잡으로 노예로 팔려나가는 상황이 통치자로서의 히데요시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민심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반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었던 히데요시였다. 아울러 대놓고 소와 말을 식용으로 도살한다는 것도 눈에 거슬리던 참에 코엘류나 프로이스, 오르간티노 등 선교사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으며 또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주선해서 기리시탄 다이묘들로부터 지원을 이끌어내겠다는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을 보면서 "이놈들 봐라? 위험한데?"라며 위기감을 품게 된다. 코엘류가 히데요시의 중국 대륙으로의 침공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그 사람들하고 주선해 드릴 테니까 그들과 함께 작전을 짜 봅시다"라고 호언하는 것은 히데요시에게 센고쿠 시대 당시 불교가 그랬던 종교가 정치 권력과 결탁해서 그 뒷배가 되어 주고 있는 모양새를 그대로 연상시켰다.
히데요시는 이후 다시 한번 기리시탄 다이묘 뒤에 있는 예수회나 기독교라는 종교의 잠재적인 '위험성'을 자각하게 되는데,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덴쇼 15년(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가스파르 코엘류는 다시 자신이 타고 온 범선인 푸스타(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다. 이때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예수회 소유의 범선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본 히데요시는 군함이 아니냐, 나에게도 이런 군함을 만들어 줄 수 있느냐며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도 히데요시에게 서양의 군사력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다. 선교사로써 코엘류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전도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히데요시님 당신의 편에 서서 당신을 위해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며 환심사기용으로 예수회가 가진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굳이 평화적으로 종교를 전도하러 왔다는 인간들이 무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했을 뿐더러 또 그 무장력이 확실히 히데요시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함을 확인하고서 코엘류가 보여준 푸스타 호를 히데요시를 은근하게 압박하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정도의 무장력을 가지고 있으니 권력자라고 히데요시 네가 우리를 무시하려 들면 어떻게 될지 생각 잘 해라."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오무라 스미타다가 덴쇼 8년(1580년) 예수회에 기증한 나가사키, 모테기(茂木), 아리마 하루노부가 1584년에 예수회에 기증한 우라카미(浦上)의 '교회령'도 바테렌 추방령과 시기를 같이해서 모조리 몰수당해 히데요시의 직할령이 되었다.
몰수당한 예수회 영지를 되찾으려 가스파르 코엘류는 기리시탄 다이묘들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고, 필리핀에 "일본으로 2,300명의 병력을 보내 달라"고 한 것도 알레산드로 발리냐뇨에 의해 무산되었다. 1590년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선물한다. 이는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 즉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시켜보려는 목적이었고,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선 침략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다시금 밝히게 된다. 이때, 발리냐뇨와 함께 히데요시를 만난 게 덴쇼 소년사절단이다. 물론 이들 역시 각지에서 노예로 팔려온 이들과 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일본인을 목격했다.
8. 전후 영향
임진왜란은 조선과, 원군을 보내준 명이 승리한 전쟁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조선의 영토를 교두보로 삼은 명의 침략과 조선 정복이었고 조선의 전략 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정권 일본은 원했던 전략 목표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조선을 떠나야 했고 퇴각 과정에서도 조명 연합의 노량 해전을 통해 철저하게 응징되었으므로 도요토미 정권 일본이 패배한 전쟁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결국 일본 측에서는 패배한 전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닌 도요토미 세력이 일으키고 패배한 동란 정도로 축소시키는 시각도 있다.
전후 처리와 결과 측면에서도 조선은 기유약조를 통해 침공 행위에 대한 공식 사죄와 포로 쇄환 등을 받으며 새로 수립된 에도 막부와 국교를 회복하였다. 광해군 시대 원년에 맺어진 이 기유약조는 한일 양국의 조속한 관계 개선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조작으로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에도 막부의 공식 입장이 되었고 이후 조선과 일본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가 동아시아에 도래하기 전까지 우호관계를 구축한다.
8.1. 조선의 전후
조선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문화와 인적 자원도 잃었다. 사실상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조선의 경제와 사회를 통째로 뒤바꾼 계기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패한 도요토미 정권 일본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고 결국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져 나라의 주인조차 바뀌었다는 점에서 실속없는 전쟁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약탈함으로써 얻었던 인적, 물적 자원을 토대로 에도시대에는 경제적, 문화적 수혜를 얻었다. 반면 조선은 국가의 멸망을 막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폐허가 된 국토만이 남은 상처 뿐인 승리였다.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농업을 제 1의 산업으로 치는 농경국가에서 이정도면 아예 파산상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이는 농토를 조사할 행정력이 일시적으로 붕괴한 것도 크다.
이렇듯 개간한 대부분 땅이 전쟁기간 동안 관리되지 않아 황폐화 되었으며 춘궁기를 견디게 해줄 환곡미는 일본군과 조선군의 군량으로 소모되거나 소실되었다. 이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전염병으로 굶어 죽어 인구가 급감한다. 여기에 조선의 재앙은 계속되어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 등의 천재가 겹친다. 그래도 전후 복구가 이어져 이전의 경제력을 급속도로 회복한다. 대략 17세기 초중반에 조선은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넘어섰다.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신분을 증명할 문서 대부분이 소실되고 16세기 내내 예산이 부족한 정부에서 공명첩을 남발하며 신분제 자체가 흔들렸다. 덕분에 관직 대신 족보가 양반임을 증명하는 물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점차 세습적인 특성을 띄게 된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과 종묘가 방화로 없어졌고 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기록한다. 선정릉은 도굴되어 내부의 부장품과 시신이 유실되어버렸다. 불국사와 일부 사찰들도 일본군의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버렸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혹은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그 외의 관련 사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 매우 소략하게 되었으며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만 남아 있다. 조선 왕들의 어진 역시 태조, 문종, 세조을 제외하면 전부 유실되었다. 현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해당하는 대다수 유물들이 소실 되었다는 것만 봐도 문화적 피해가 얼마나 큰지 실감나게 해준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는 중요한 성격도 띈다. 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상호 외교 관계 또한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임진왜란의 여파는 곧 만주족의 흥기로 이어졌다. 만주족은 급속히 강성해져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명나라로부터 분리시키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임진왜란은 중국에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가 들어서게 만들었고, 조선의 대외관계도 뒤바꾸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조선은 그 폐쇄적인 지형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의 교류 덕분에 임란 이전에 비해 서양과 더 빈번하게 접촉한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조선 내부에 서양식 과학이 소개되고, 청나라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청-일 직접 교역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양국 간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상당한 무역 흑자를 누리게 된다. 이후 농업 측면에서도 전란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농업 생산량이 급증한다.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재정비되기도 했다.
군사력의 경우 크게 약화된 것은 아니며 주적인 여진족들을 정벌할 수준의 군사력은 남아 있었는지라 왜란 직후 여진정벌을 나간 기록이 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해서 여진족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전후 조선에서는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끝나면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전쟁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장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순신과 김시민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다. 전쟁의 피해를 져야할 국왕과 양반 세력이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고,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겪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겪고도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보다 주목하는 추세다. 과거 조선 세조가 심어놓은 사회적 모순이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러 16세기 조선의 사회는 천인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던 노비 국가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개혁할 의지를 보였던 당대 인사도 조광조와 이이 정도밖에 없었다. 이런 국가 체제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인구의 감소와 신분을 규정하던 노비 문서 등이 소실되면서 결과적으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된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농노 수가 감소하자 이후 농노에 대한 지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다만 전란 때문에 국토가 황폐화된 바람에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진 양민들이 양반들에게 생계를 보장받는 대가로 양반들의 사노비가 되는 협호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 17세기에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40%에 이르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해석대로라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보통 사회를 노비 국가로 만든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15~16세기 호적자료는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시기의 노비비율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노비비율을 높인 사건인지 낮춘 사건인지 의견이 서로 갈릴 수 밖에 없다.
승병들이 많이 활약한 전쟁이기도 해서 사대부들이 이들을 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기록도 남겼다. 사명대사는 일본인들이 승려와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전후 사실상의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인 광해군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승병들의 전공에 대한 대가로 조정 측에서는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였는데 덕분에 ‘전장’이 되어버려 불타버린 사찰들을 급속히 복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숭유억불 기조 하의 조선 불교가 이전보다는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8.2. 명나라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던 명나라는 자신들의 군사적 방패막이 되어줄 조선이 왜에 함락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더욱더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과 일본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 청 왕조가 성립되어 명나라에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 것.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까지 겹치며 재정이 파탄나고 이자성, 장헌충 등의 농민 반란까지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말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임진왜란(1592)에서 명나라 멸망(1644)까지는 몇십 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암군인 만력제 치하의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국가적인 활력을 잃었다. 임진왜란이 이미 침체된 명의 쇠퇴를 가속화 했을 수는 있겠지만, 명나라가 전쟁 이전에는 잘 나가다가 전후에 갑자기 쇠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8.3. 일본
조선이 입은 피해에만 주목하는 역사계의 관행과 달리 일본 입장에서도 이 전쟁의 피해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은 10년간 전쟁을 준비하고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채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정권은 애초부터 명분도 없고 승산 가능성도 낮은 전란을 일으켜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영주들의 원성이 높았다. 당장 병적인 고구려 공격으로 수나라가 무너졌는데 바다 건너 조선을 공격하려 드는 히데요시의 전쟁은 자신의 권력을 걸고한 도박에 가까웠다. 반면 출정 명령을 받은 영주 개개인 입장에서는 자기 영지에서 인력과 자비를 들여 출정한 것이었고 조선 점령 혹은 통지조차 실패할 경우 싹다 잃는 전쟁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긴 전란으로 인해 착실하게 쌓아온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후유증이 심했다.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 서쪽의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렸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지고 병력은 더 많이 보냈으며, 그리고 패배하기까지 한 일본이 아무 문제가 없었을 리가 없다.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 등을 맡은 인부들도 조선땅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陣夫라고 불렀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1594년에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 측 유력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 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지라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직접적으로 집계하기가 힘들다. 임진왜란이 일본에게 부를 가져다 준 실리를 얻은 전쟁이라는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일본 역시 명분과 물질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실리 이전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신이 걸린 상징적인 대외사업에서 실패하고, 더욱 중요한 명분을 잃은 것이다! 실리를 얻었으므로 일본이 이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국가의 위신을 무시한 정신승리에 불과하며, 이는 일본의 이후 행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무려 수십만에 달하는 일본의 총력을 들여 진행한 대대적인 원정을 당대부터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 스스로 이를 수치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에게 있어 곧 트라우마이고, 지우고 싶은 치욕이었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 참전한 병사들과 장수들의 숫자와 질을 생각하면 일본이 후에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한 근대화된 일본군이 나오기 전까지 최대이자 최강의 원정군이었고, 그런 이들이 목숨만 건진 채 돌아왔다는 것은 100년 전국시대를 거친 강군, 무사의 나라 일본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전란을 주도한 무리의 후손들은 300여년 뒤에 조선 식민지배, 중국 침공에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히데요시와 같은 팽창욕을 거하게 불태우며 대대적인 전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엔 무조건 항복이라는 훨씬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관계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 보내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조선은 일본에 문위행과 조선 통신사를, 일본은 차왜와 국왕사를 파견하게 된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는 얼마간의 외교충돌은 있었을지언정 조선을 침략하지 않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를 엎어버린 것은 도쿠가와에 대항하며 그와 대적했던 도요토미의 유지를 받든 후손들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과 달리 국토가 황폐화되지 않았기에 전란으로 입은 피해는 오래가지 않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권을 빼앗겨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도요토미 개인의 자업자득일 뿐이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국력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존재감을 높였다. 이후 260년간 에도 시대에 발전을 거듭하여 겐로쿠 시대의 경제적 호황을 누렸으니 패전과 별개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득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또 하나의 거대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세력이 계속 힘을 키우고 있었던 탓이 크다.
경제적 측면에서 상당한 비약도 존재했는데, 특히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재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8.4. 조선인 포로
8.4.1. 정착, 또는 귀환한 경우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종군 승려 케이넨(慶念). 1597년 11월 19일자
일본군은 전쟁 중 수많은 조선인을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노예 시장에 팔아 넘겼다. 특히 나가사키의 노예 상인들은 인신매매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
조선은 "쇄환사"를 통해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 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 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 제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한 병합 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우루산마치(蔚山町)라는 마을이 있다.
이들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귀환 포로들을 잘 대해준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신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비참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연려실기술 17권에 보면 1605년에 승려 유정이 데리고 온 귀환 포로 3천 명은 통제사(제6대/제9대) 이경준(李慶濬)이 맡았고 해군 선장들에게 일임했는데 선장들이 출생한 곳을 물어도 어릴 때 포로가 되어서 본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모두 자기의 노비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그 남편을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 강홍중이 포로 146명을 데려왔지만 부둣가에 방치되어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이런 추태가 소문으로 퍼지자 이문창이란 조선인이 "본국으로 돌아가 봐야 좋을 게 없다"는 말을 퍼트려 송환을 기피하는 조선인들이 많아져 더욱더 송환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에 끌려 왔던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에서 농노로 정착했던 부류가 많은데 고국말도 잊은지 오래된 상황에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은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가려는 포로들은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다도 문화가 발달하여 훌륭한 도자기를 얻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 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 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이삼평 등 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이 있다. 다만 도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끌고 간 도공들 중에서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서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했고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 일본에서 굶어죽은 조선인 도공들 도공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도자기에 시를 담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두부 장인 아키츠키 타네노부 등이 일본에 정착하였다.
8.4.2. 노예화
물론 상술한 도공 같은 기술자, 또는 다이묘의 참모진이나 일본 학자들에게 초빙된 일부 유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인 포로의 대우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최대 70% 정도의 악명높은 세율을 기록하던 막번체제 하에서 평범한 조선인 포로가 일본에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과 교류하던 유럽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나갔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백 년째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 딱히 내다팔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노예무역이 성행하였다. 일개 아시가루 부터 다케다 신겐 같은 유력 지배층조차 수입을 위해 노예사냥을 벌일정도였고 상대 번과 전쟁을 벌여 얻은 포로나 천민들, 옆 동네 주민들, 또는 왜구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유럽 상인에게 노예로 내다 팔고 그 대가로 화약과 조총을 사오곤 했다. 이들 일본인 노예들의 몸값은 서아프리카 흑인의 절반 이하였고, 수십만 명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이 노예무역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의 왜구 및 지방 다이묘들이었는데, 이들의 노예무역은 안그래도 전쟁 때문에 손실이 극심한 일본의 인구 유출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지방 번국들의 무장을 강화하고 전쟁을 격화시켰다. 유럽에 상대 부족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군자금과 머스킷을 구매하던 당대 서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상황이 비슷했던 것이다.
자국민도 잡아다 팔아치우는 상황에 조선인 포로라고 예외는 없어서, 이들은 당시 최고의 해상 유통망으로 전성기를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일본 학자들의 경우 해외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혐오하며 노예 상인들에게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에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에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701년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노예무역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구 유출과 지방 영주의 군사력 강화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일개 다이묘가 아닌 통일 일본의 위정자들에게는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노예무역의 실상을 본 후 가톨릭과 유럽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던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고 노예 매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이어지던 노예무역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조선인 노예가 팔려나간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노예무역은 후에 에도 막부가 키리시탄 공동체와 다이묘들을 군사적으로 토벌하거나 가이에키시키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서양 상인들을 다 쫒아버린 뒤에서야 사라졌다. 물론 조선인 포로를 겨냥했다기 보다는 일본 사람이 노예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다.
후에 서양 국가 중 막부의 유일한 무역 파트너가 된 네덜란드는, 통상을 허가받기에 앞서서 가톨릭과 자신들이 믿는 개신교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와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데지마를 벗어나지 않을 것과 포교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막부의 가톨릭 탄압에 동참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전부 거치고 나서야 제한적인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에 표류한 박연이 일본으로 갈 수 없던 이유도, 조선이 일본으로 보내주려 했던 것을 일본이 서양 키리시탄이라며 거부해서였다고. 오랜 포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거의 없는 이유, 그리고 근세 일본이 쇄국을 고수했던 이유 중에는 이런 노예 무역과 얽힌 역사적인 영향이 있었다.
9. 기타
조선과 오늘날 한국에선 주로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제1차 진주성 전투,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 언급된다. 반대로 일본 측에선 3대 대첩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1597년 ~ 1598년),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전투(1598년)를 주로 꼽는다. 재미있는건 서로 자기들 대첩만 챙기지 남의 나라 대첩에 대한 대중적 인지도는 많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한일 둘 다 승리한 전쟁만 주로 기억하고 싶을테니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그나마 모쿠소 호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일본에서도 좀 유명한 정도다. 행주 산성 전투는 조선 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패배한 전투라 알 법도 하지만 잘 모르는 모양.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까지, 일본인들은 행주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 내 주요 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 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선 인지도가 매우 낮은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 중요도에 비해 일본 측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이다.
조선에선 3대 패전을 쌍령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지만, 웬일인지 일본은 이 전투들을 빼놓고 한국에선 인지도가 많이 낮은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 용인 전투야 역덕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존재했는지도 모를법한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다이묘가 기병 수십 명으로 공격하자, 밥 먹고 있던 조선군 5만 명이 모랄빵 났던(...)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전투인데, 일본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은 것 같다. 2000년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설정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보고 "아!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왜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었지?"하는 일본 측 반응이 나올 정도.
조선의 가장 큰 패배였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인지도가 장땡. 그 외 조선과 일본만 온전히 붙은 전투가 아니라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일본군 간의 전투였기 때문에 더 유명하다는 시각도 있는데, 사실 사천성 전투처럼 조선군 20만이 쳐들어왔는데 그걸 물리쳤다는 뻥카가 일본 일각에 퍼져있는거 보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조선의 역할을 강조하는 경우는 이치 전투,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를 꼽기도 한다. 일본 쪽 연구에선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기도 하는 모양.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곡창지대인 호남을 방어하고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수적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
명나라에서는 평양성 전투, 행주대첩, 벽제관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치기도 한 모양.
임진왜란사에서 잊혀진 부분이지만, 사실 조선과 일본은 1593년 8월 이후부터 1597년 8월 27일까지 휴전 상태에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일본군 못지않게 조선에 위협적인 적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도적들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1594년 12월 1일 기사를 보면 전라도와 경상도와 경기도에서 도적들이 일어났는데, 광주와 이천 및 지리산으로부터 남원의 회문산과 장성 노령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그들의 소굴이 되었다고 한다. 도적들을 이끈 두목들의 이름은 각기 김희(金希), 강대수(姜大水), 고파(高波), 현몽(玄夢), 이능(李能)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제각기 활동한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도적질을 함께 했으며, 그로 인해 관군이 처음에는 토벌에 실패하였다가, 도적 괴수들을 죽이면 현상금을 준다고 내부 분열을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이능은 자기 패거리한테 죽임을 당하고, 가장 사나운 도적이었던 현몽의 패거리는 관군에게 항복하거나 도망쳤고 현몽 본인도 도망쳐 사라졌다. 또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양주에는 이능수(李能水 이능?)가 있었고, 이천에는 현몽(玄夢)이 있었으며, 대략 1594년 여름부터 이 도적떼들이 조선 각지를 휩쓸었는데, 그 규모가 적게는 1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이나 되었고, 이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도적질을 일삼았는데, 그들의 기세가 워낙 강해서 관아에서도 막지 못했다. 이 도적들 중에서 남원의 김희(金希)와 영남의 임걸년(林傑年)이 가장 세력이 강했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장수인 전라 병사 김응서(金應瑞)와 상주 목사 정기룡(鄭起龍) 등을 동원하였다. 1594년 8월에 정기룡이 이복(李福)이라는 도적의 목을 베자, 그 무리들이 김희에게로 몰려갔다. 김희와는 다르게 남원에서 활동하던 도적인 고파(高波)는 그 무리를 거느리고 몰래 이교점(梨橋店)에 왔는데, 주민의 고발을 받고 출동한 판관 김류(金瑠)가 4백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교점을 덮쳤으나, 고파 일당은 전혀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밥을 지어 먹고 활을 힘껏 당기어 갑자기 관군에게 쏘아대니 관군이 무너져 달아났고 김류도 물러났다. 고파 일당은 김류가 돌아가는 길에 먼저 가서 매복하였다가 김류가 오는 것을 기다려 일시에 갑자기 활을 쏘아서 김류의 말안장을 맞혔고, 김류는 간신히 성중으로 말을 달려 도망쳤다. 결국 해가 바뀐 1595년 봄에 경상도의 관군이 김희와 강대수를 토벌하여 죽였고, 고파는 장성의 주민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마침내 조선의 도적들은 평정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경상도로 들어온 일본군 장수 모리 테루모토가 본국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굶주린 조선 백성들이 일본군한테 가서 식량을 달라고 구걸을 했으나 일본군 병사들이 모조리 베어 죽이는 바람에 테루모토 자신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배를 타고 한반도에 건너왔는데, 이들이 이용한 배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 써있는 깃발이 있었다고 알려졌다. 임진왜란 당시 각 왜군 장수들은 스스로를 상징하는 깃발(軍旗)을 달았는데, 일련종(日蓮宗)의 일파인 '미노부파' 신도였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자신의 군기에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써넣었던 것. 가토 기요마사의 그런 행동은 전쟁에 나가는 장수로서 무사귀환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듯하다. 또 묘법연화경은 조선에서도 가장 많이 읽힌 불교 경전 중 하나였다.
9.1. 후일담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 아이를 주워다 자신의 양녀 혹은 하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바로 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 おたあ)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믿고,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미인으로 성장했다고 하는데, 때문인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애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타아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타아는 이를 거부하고 끝까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타아를 유배 보냈는데 이후의 삶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지만 결국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키타 히데이에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사람을 전사시키고 그 아들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그가 자라서 어른이 된 후 마에다 가문의 가신이 되었는데 와키타 나오카타(김여철)이다. 와키타 나오카타는 상당히 유능해서 마에다 가문에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중 전사한 다이묘급은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와 수원에서 매사냥하다가 조선군에게 전사한 나카가와 히데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인 고니시 토모노모스케 총 3명으로 그 외에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했다. (대표적으로 9군 선봉대장 도요토미 히데카츠나 에가미 가문의 당주인 에가미 이에타네등이 병사했고 그밖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 그밖에 죽지 않은 나머지는 대부분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 물론 다이묘들도 죽을 위기에 처한 다이묘들은 많아서. 행주대첩 당시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 사단장급인 이시다 미츠나리, 참군 안코쿠지 에케이, 연대장급인 깃카와 히로이에 이들 장수들이 모두 승자총통에 맞고 중상을 입었지만 병사들이 업고 뛴 덕에 다들 목숨은 부지했다. 수군에서는 함대사령관급 인물인 도도 다카토라가 명량 해전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노량해전에서도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대는 다이묘 하나 살리기 위해 거의 50%의 손실을 감수해가며 도주한다. 이렇게 일본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중앙 집권제 국가인 명, 조선과 다르게 일본 각번의 군대들은 자신을 지휘하는 다이묘가 왕 혹은 도원수, 도체찰사급의 중요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고 작은 다이묘들이 참전한 세키하라 전투에서 마저도 군이 완전히 격파되어 사망한 사례 이외에는 동군이 패하자 할복한 것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다이묘 같은 최중요 인물은 야전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고 시마즈처럼 부하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조선, 명나라 등 군인이 국가의 소속이고 상관이 전사해도 자신의 책임이 크게 없으면 평범하게 직무를 유지하는 관료제 국가와 달리, 봉건제 국가 일본에서는 군인은 국가가 아닌 다이묘의 소속이고 다이묘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사무라이들은 보통 로닌이 되어 알거지로 떠돌며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 것으로 실제 노량 해전의 경우처럼 일본군은 병사들은 다 죽더라도 다이묘 한 명은 살리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다.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주도를 공격 점령했다면 고립된 제주도는 일본에게 장기간 점거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나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목사 이경록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언어 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에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 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 시기 즈음에 생겨났다. 아래아의 음가가 많이 불안정해진 것도 이때쯤이며, 일본이 건드리지 않은 제주도에서는 아래아의 음가가 (중세 한국어와는 다를지언정) 변별적 자질로서 살아남았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과정 국어와 한국사를 공부하면 관련 내용을 알 수 있다.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 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도 존재한다. 일부 책에서 인선 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 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 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 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 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가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 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가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흑인 용병들이 조선군에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참전시킨 것. 임무는 잠수 후 일본 군함에 구멍을 내서 침몰시키는 것이었다고 하며 이들은 해귀(海鬼)라 불리는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다.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 사실 이들이 전투 중에 딱히 남긴 큰 업적은 없었지만, 이들을 만나본 선조 임금이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로 인식하긴 한 모양. 연회 한자리를 주고 음식과 술을 제공해 주었고 잘 먹고 잘 돌아갔다고 하며, 당시 기록을 보면 머리는 곱슬거리고 피부는 칠흑같으며 푸른 눈을 띄고 기골이 장대하였다고 한다.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던 고추와 담배가 임진왜란 때 국내에 들어왔다.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 짠지에 가까웠다.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망이 나는 시점으로 표현했다 / 본작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많이 띄워주는 편이라 임진왜란을 보고 이에야스가 "저 인간이 미친거 아닌가?"하고 히데요시를 까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다테 마사무네는 히데요시를 "조선이 순순히 길을 내줄 거라 믿은 멍청한 노인네"로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실재로 일본에서도 도요토미는 영민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만인지상에 앉은 말년에는 권력에 도취해 노망이 난 용두사미의 대명사격인 인물로 봤다. 개화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도요토미에 대해 풍신 공은 진 땅을 피해 마른 땅에 오른 인물이나, 다만 진 땅에서 마른 땅으로 갔을 뿐 아무 것도 바꾼 것이 없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즉, 본인의 패업과 영달을 위해 모험적인 인생을 살았을지는 모르지만, 만민의 복락을 책임지는 천하인으로서는 명백히 실격을 했다는 뜻이다. 도요토미는 일본의 시황제같다는 말도 이것과 상통한다.
유튜브에 미국인인 Matthew Carrick은 이 8개월간의 한, 중, 일의 자료 조사를 토대로 9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있다. 영어로 되어 있으나 상당히 자세하고 양질의 자료를 정리해두었다. 1화 전투신은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 임진왜란 1592 등에서 따왔는데 일부는 제작자가 별도의 편집(효과음 및 배경음악 추가, 컷신 조정 등)을 가했다. 그 외에도 제작자가 보충을 위해 직접 단 댓글을 보면 상당히 디테일하게 자료를 조사했다는 흔적이 역력하다. 권율이 46세까지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거나 행주 대첩 때 일본군이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했으나 격퇴된 상황도 자세히 정리하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에게 원군을 청하자 명나라가 '혹시 조선이 명나라를 속이고 일본과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 드는게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대목에서는 한국사에서 역대 중국 왕조와 벌인 전쟁들의 목록(왕검성 전투,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 나당전쟁, 고려-거란 전쟁 등)을 열거하며 '역사상의 경험으로 인해 명나라는 조선이 그토록 빨리 무너진 것을 믿을 수 없었다'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때 배경으로 나오는 삽화는 안시성 전투를 묘사한 기록화이다. 또한 이순신은 거의 주인공처럼 묘사되며 이순신에 대한 해외 네티즌들의 찬사는 덤. 국명을 '명'(Ming), '조선'(Joseon)이 아닌 '중국'(China), '한국'(Korea)으로 통일하였는데, 유럽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인 명칭이라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 저리 표기한 것일 수도 있다.
호남은 한국전쟁의 낙동강방어선 역할을 하며 조선군이 임진왜란에 승리하는데 일조했다. 비록 정유재란시기 남원성전투에서 지며 잠시 점령된적이 있지만 이치와 웅치전투 그리고 먼치킨장수인 이순신 권율등이 호남의 육군과 수군을 이끈덕에 일본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신나게 공격했지만 먼치킨들의 활약덕에 패하고 우회해 진주성을 공격하며 진출을 시도했지만 진주성은 철벽방어선 역할을 하며 실패했다. 그 예가 바로 경상우수영 좌수영은 일본군에게 불타 소실되었지만 전라좌수영 우수영은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가 처음 발견되었다고 아사히 신문이 2019년 3월 28일에 보도했다.
한양이 함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육군의 보급선이 두절되었을 당시 한양에 첩자를 투입하여 일본군의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조사 결과 일본군의 한끼 식사량이 약 2홉(약 120cc)밖에 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 성인 남성 기준으로 한 끼 식사량이 7홉(420cc) 정도 되었는데, 이 때문에 '왜놈들은 대체 밥을 먹는거냐, 마는거냐?'하는 말이 오갔고, 심지어 '이건 궁지에 빠진 상태에서 왜장이 몸소 부하들에게 본을 보이려는 것이다'라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는데, 이 당시에는 보급선이 끊어졌을 뿐이지 아직 육군의 식량이 거덜난 상황은 아니었다. 즉, 하루에 한 되도 안되는 한 끼 식사량이 일본군 본인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식사량이었던 것.
하마터면 더 큰 국제전으로 확대될 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개념을 밥말아먹었는지 태국(아유타야 왕국)과 류큐 왕국(오키나와)에게 "너네 나라도 정복할꺼임."(...)이라는 어그로성의 국서를 보내는 바람에 빡친 태국과 류큐 왕국이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자국 군대의 조선 파병을 제안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좋지 않던 명나라도 태국군과 류큐군을 명나라 군대의 휘하에 편제해 넣어 싸우면 이득일 것이라는 생각에 고민을 해봤지만, 더 큰 전쟁으로 번지기 싫어하던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명나라는 마음만 받겠다는 답서를 보내며 두 국가의 군대 파병을 거절했다. 이때 기록을 보면 아유타야 왕국쪽에서는 일본 놈들이 조선 출병으로 나라가 빈 상태이니 동쪽 해안으로 병력을 투사하겠다라고 했고 류큐왕국은 바로 북진할 수 있다고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만주의 지금 기준으로 말하자면 대규모 군벌쯤 되는 여진계들도 명나라와 조선측에 참전 요청을 했으나 건주 여진의 속내를 몰라 거절했다. 만약 이 모든 계획이 승낙되었다면 전 아시아로 확전될 수도 있었던 일이다.
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 왕실의 자손, 특히 아들이 매우 귀해지기 시작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즉위한 선조만 해도 적자는 전후 태어난 영창대군 뿐이긴 하지만 대신 서자만 14명을 두면서 다산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출생해서 즉위한 효종부터는 적자인 현종 1명만 태어나고, 이후에는 적통은 고사하고 서자도 제대로 남지 않는 상황이 되면서 왕위 계승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유래없는 국난이라서 전후 야담들을 보면 전쟁 발발 직전 일종의 갖은 징조는(태조의 건원릉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류의) 물론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가 사회 각지에 형성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산해의 아들 이경전, 정언신의 아들 정협,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 등 명문 양반가 자제들이 술을 먹고 무리를 지어 등등곡(登登曲)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무당의 춤을 따라하는 등 퇴폐적인 기행을 벌이다가 폐인이 되거나 가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또한 남사고, 금선자 등 도인들은 물론, 당대의 명사들인 조식, 서경덕, 이지함 등이 임진왜란을 예견하고 대비할 것을 주변에 강구했다는 설화도 많은데 이들이 실제로는 유학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란 후 정계에서 배제된 서경덕과 조식 학파에서 자신들을 돋보이기 위해 일부러 퍼트린 소문으로 추정된다.
먼 훗날 일본 제국은 미국에게 진주만 공습을 통해 어그로를 끌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고, 대외적으로는 우린 3천년간 외세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지 않았다는 구라를 쳐 아돌프 히틀러도 이 말을 듣고 낚여 의기양양했다. 물론 임진왜란을 비롯해 신라 성덕왕 시절 일본과의 전쟁에서 일본의 침입을 격퇴한 기록, 백제와 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백강 전투 등 이미 일본이 명백히 패전하고 물러난 사례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 원수이던 체스터 니미츠도 임진왜란에서 맹활약한 이순신을 거론하면서 이미 일본은 임진왜란 때 패배했음을 상기시켜준다.
조선 시대 제주도 태생 선비인 장한철(張漢喆 1744~?)이 1771년에 쓴 기행문인 표해록(漂海錄)에서는 임진왜란을 두고 "왜노(倭奴)는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이다. 선릉(조선의 9번째 임금인 성종의 무덤)과 정릉(조선의 11번째 임금인 중종의 무덤)이 (일본군한테) 도굴을 당한 일(을 떠올리면) 간이 소리를 치고 피가 끓으며 운다. 사람들이 천 번으로 칼로 왜노를 찌를 만하다. 하늘이 내린 생물은 모두 사람에게 이롭지만, 오직 왜노란 종자는 사람한테 터럭만한 이로움도 주지 못하고 그 해로움이 호랑이나 뱀보다 더 심하다. 하늘이 어찌하여 왜노란 종자를 만들었는가."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언급된 왜노는 일본인을 왜국 종놈이라고 폄하하는 멸칭인데, 임진왜란 이후 극에 달한 조선의 반일감정을 볼 수 있는 자료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처음에는 선조를 따라 피난길에 동참했던 사관들인 조존세, 박정현, 임취정, 김선여 등이 1592년 6월 1일 밤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행을 결정하자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그리하여 정묘년(1567년 선조 즉위년)부터 신묘년(1591년 임진왜란 직전)까지 25년 동안의 역사기록이 죄다 알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 사관들의 도주에 대해 기자헌은 "사초책을 불태운 것이 아니라 그냥 버리고 갔을 뿐이다."라고 변명했으나 선조 임금은 "길가에 버려진 사초를 주워 아무개 조신(朝臣 벼슬하는 신하)에게 주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불태웠는지, 버리고 도망갔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오십보백보 아니냐. 그렇게 변론할 필요없다."라고 화를 냈다. 그로 인해 1609년(광해군 1년), 춘추관이 선조실록을 편찬해야 하는데 평시의 사초책이 전혀 없으니 역사 기록을 만들 수가 없다고 상소를 올렸다. 고심 끝에 조정에서는 "그동안 사대부들이 작성한 일기 같은 개인 기록이나 각 지방의 관아에 보관된 문서들을 전부 조정에 갖다 바쳐라."고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모은 기록들을 바탕으로 간신히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분량이 적고 그 정확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연구하려면 난중일기, 징비록, 난중잡록, 임진일기, 난적휘찬 같이 임진왜란을 직접 보고 경험한 사람들이 작성한 기록들도 함께 보아야 한다.
10. 관련 문서
10.1. 조선 측 주요 인물
10.1.1. 조정
선조 - 조선 제 14대 국왕
광해군 - 조선 제 15대 국왕, 왕세자
류성룡
윤근수
윤두수
이덕형
이산해
이원익
이항복
김응남
정철
정탁
신잡
10.1.2. 정규군 지휘관
김명원 - 전 도원수이자, 좌의정.
충장공 권율 - 도원수
권준 - 전 순천 부사이자, 충청 수사
충무공 김시민† - 진주 목사
김완 - 전 사도 첨사이자, 조방장
나대용 - 전라좌수군 군관
무의공 이순신 - 전 방답 첨사이자 경상우수사
박진 -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
선거이 - 전라도 수군 절도사→전라도 병마 절도사→충청도 병마 절도사→충청수사→황해도 병마 절도사
송상현 - 동래부사
송희립 - 전라좌수군 군관
신각 - 부원수
신립 - 삼도 순변사
신흠 - 도체찰사 종사관
심대 - 경기도 관찰사
원균 - 전 경상우수사, 제2대 삼도 수군 통제사,
우치적 - 전 영등포 만호,순천 부사
유성룡 - 영의정이자 도체찰사
윤흥신 - 다대포 첨사
충무공 이순신 - 제1대, 3대 삼도수군통제사이자, 전라 좌수사
이억기 - 전라 우수사
이영남 - 전 경상 우수군 권관이자, 가리포 첨사
이운룡 - 경상 좌수사
이일 - 평안도 병마 절도사이자, 삼도 순변사
정기룡 -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정발 - 부산진 첨사
최경회 -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황진 - 충청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 -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허성 - 강원도 순무어사
10.1.3. 의병장
고경명
곽재우
권응수
김덕령
김득기 - 임진왜란 첫 의병장
김면
김성립 - 허난설헌의 남편. 의병으로 참전하다 전사했다.
김천일
류식 - 임진왜란 첫 의병장
류종개
송빈 - 임진왜란 첫 의병장으로 김해성 전투 당시 순절.
영규 - 승병장
오유
유정 - 승병장
이대형 - 임진왜란 첫 의병장
이산겸
이정암
이정란
이종문
조경남
정문부
정인홍
조헌
최담령
허균
홍계남
휴정 - 승병장
황대중
10.1.4. 기타 조선 측 인물
강항
10.1.5. 조선에 투항한 항왜
김충선
준사
고효내
사쇄문
서아지
여여문
10.2. 명나라 측 주요 인물
마귀
송응창
심유경
양호
이여매
이여송
유정
조승훈
진린
오유충
10.3. 일본 측 주요 인물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고니시 유키나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고토 마타베에
구로다 나가마사
구루시마 미치후사
구와나 치카카츠
구키 요시타카
나오에 카네츠구
나카가와 히데마사
다테 마사무네
다치바나 야스히로
도도 다카토라
도요토미 히데카츠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이 미치유키
모리 무라하루
모리 카츠노부
소 요시토시
시마 사콘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 토요히사
오오타니 요시츠구
와키자카 야스하루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
이시다 미츠나리
쵸소카베 모토치카
호소카와 타다오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10.4. 전투 전개 과정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부산진 전투 (1592년 4월 14일)
동래성 전투 (1592년 4월 15일)
김해성 전투 (1592년 4월 17일)
상주 전투 (1592년 4월 25일)
충주 탄금대 전투 (1592년 4월 28일)
옥포 해전 (1592년 5월 7일)
합포 해전 (1592년 5월 7일)
적진포 해전 (1592년 5월 8일)
해유령 전투 (1592년 5월 16일)
임진강 전투 (1592년 5월 18일)
정암진 전투 (1592년 5월 24일)
사천 해전 (1592년 5월 29일)
당포 해전 (1592년 6월 2일)
당항포 해전 (1592년 6월 5일)
용인 전투 (1592년 6월 5일 - 6일)
율포 해전 (1592년 6월 7일)
제1차 평양성 전투 (1592년 6월 13일 - 14일)
웅치 전투 (1592년 7월 7일)
이치 전투 (1592년 7월 8일 혹은 8월 17일 혹은 28일)
한산도 대첩 (1592년 7월 8일)
안골포 해전 (1592년 7월 10일)
금산 전투 (1592년 7월 9일, 8월 18일)
제2차 평양성 전투 (1592년 7월 17일)
해정창 전투 (1592년 7월 18일)
영천성 전투 (1592년 7월 24일 - 28일)
제3차 평양성 전투 (1592년 8월 1일)
창녕 ‧ 현풍 ‧ 영산 탈환전 (1592년 7월 - 9월)
경주 전투 (1592년 8월 20일, 9월 8일)
연안성 전투 (1592년 8월 28일)
장림포 해전 (1592년 8월 29일)
절영도 해전 (1592년 9월 1일)
초량목 해전 (1592년 9월 1일)
부산포 해전 (1592년 9월 1일)
사천 ‧ 고성 ‧ 창원 공방전 (1592년 9월)
북관 대첩 (1592년 9월 16일 - 1593년 1월 28일)
제1차 진주성 전투 (1592년 10월 5일)
독성산성 전투 (1592년 10월 18일 - 11월)
제4차 평양성 전투 (1593년 1월 6일 - 9일)
성주성 전투 (1593년 1월 15일)
벽제관 전투 (1593년 1월 27일)
웅포 해전 (1593년 2월 10일)
행주대첩 (1593년 2월 12일)
노원평 전투 (1593년 3월 25일~27일)
제2차 진주성 전투 (1593년 6월 21일 - 29일)
제2차 당항포 해전 (1594년 3월 4일)
장문포 해전 (1594년 9월 29일 - 10월 1일)
칠천량 해전 (1597년 7월 15일)
남원 전투 (1597년 8월 12일 - 16일)
직산 전투 (1597년 9월 7일)
명량 해전 (1597년 9월 16일)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 (음력 1597년 12월 6일 ~ 1597년 12월 8일)
제1차 울산성 전투 (1597년 12월 23일 - 1598년 1월 4일)
절이도 해전 (1598년 7월 19일)
사로병진책 (1598년 8월 - 10월)
사천성 전투 (1598년 9월 19일 - 10월 1일)
왜교성 전투 (1598년 9월 20일 - 1598년 10월 7일)
제2차 울산성 전투 (1598년 10월 21일)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남해왜성 소탕전 (11월 21일 - 24일)
10.5. 기타 전투
다대포진성 전투 (1592년 4월 13일 - 4월 14일 또는 1592년 4월 14일 - 4월 15일)
전주성 전투
10.6. 기타
간양록
거북선
거영일기
계암일록
고대일록
권응수 장군 유물 장검
귀무덤
금계일기
기재사초
낙재일기
난중일기
난중잡록
동래부순절도
만사록
만취선조관동일록
모의당일기
무예제보
부산진순절도
비격진천뢰
서정일기
서정일록
송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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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상체일기
완구(화포)
양호당일기
오리일기
용사일기
용사일록
월봉해상록
의병
일본왕환일기
임진일록
장계별책
정만록
정유피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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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 임진란기록 일괄
조총
죽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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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천자총통
최희량 임란관련 고문서
한글이 적혀 있는 찻잔
향병일기
현은산일기
호구록
호재진사일록
호종일기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자료
서애집
명 실록
경략복국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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