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희망#믿음
■서평: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함께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불리는, 덴마크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모두가 절망하고 불행해질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람은 전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불손한 생각을 했을까?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의 이르는 병’은 암(癌)처럼 몸에 깃든 병이 아니다. 이 병은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인 정신에 감염되어 있고. ‘인간은 결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기에, 절망하여 죽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전한다.
언뜻 보면, 키르케고르의 생각은 우울증 환자의 말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병들어 있는 사람은 의사가 진단 내리기 전까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절망 상태임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환자는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의사를 찾아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얼마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절망에서 빠져나올 길도 찾을 수 있다.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이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 같은 상황이다. 술꾼은 맨정신으로 있을 때가 가장 괴롭다. 그래서 자신이 취해있음을 잊기 위해 더욱더 마신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삶이 무의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고민을 잊기 위해서 또 다른 즐거움에 눈을 돌릴 뿐이다. “돈 5달러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이들도 정작 자기를 잃어버린 데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그는 ‘속물근성’이란 말로 절망에서 애써 눈 돌리려는 이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부유하고 안락한 일상이 곧 인간다운 삶이라고 착각하는 탓이다. “행복의 깊숙한 곳, 이곳이야말로 절망이 가장 편안하게 머무는 곳이다.” 이런 부유함과 안락함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현명한 충고와 처세술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쾌락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좇지만, 결국 절망감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들 것이다. 늘어난 아파트 평수와 차의 배기량이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빨리 증발해 버리는지 생각해 보라.
키르케고르는 절망 속의 사람들을 지하와 지상 이층으로 되어 있는 집에 빗대어서도 설명한다. 절망한 사람들은 이층에서 살 수 있는데도 굳이 지하층을 고집하는 이들과 같다. 이들은 이층이 비어있으니, 그곳으로 옮기라고 하면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인간은 정신을 최고로 발휘할 때 가장 인간적이지만, 사람들은 굳이 그보다 낮은 감성과 쾌감에의 상태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뜻이다.
이보다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이다. 이 단계에 이른 자들은 삶의 허무함과 고통을 더 이상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괴로움이 돈 없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덧없고 무의미한 삶 자체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절망 안에서 주저앉아 버린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은 나머지 ‘마치 옷을 바꿔 입듯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는 유능하고 똑똑하고 훌륭한 인물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또다시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일어나지 않을지를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절망 속으로 움츠러든다.
드물게도 이 수준을 넘어서서 절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진 이들이다. 이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들거나, 다른 이들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왜 절망하는 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삶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끝까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이들 역시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절망은 ‘반항’에 지나지 않으며, 급기야는 아무 희망 없음에 좌절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곤 한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다.” 하나님은 죽어 사라져 버려서 의미 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절망은 변증법적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가장 높은 단계인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은 하나님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이렇듯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첫째는 스스로 그 실존의 의의를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는 직접적인 생존의 단계인, 미적 실존이다. 여기에서는 그저 “인생은 즐겨야 한다”를 신조로 삼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향락을 추구하다 보면 피로와 권태가 따르기 마련이고, 결국 실망하고 만다.
둘째는 인간이 자기 실존의 의의를 잘 알고 윤리적인 사명에 충실하려고 하는 윤리적 실존이다. 여기에서는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만, 인간은 이미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셋째는 그러한 불안과 절망을 극복하고 종교적 실존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겨낸 사람만이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된다. 이것이 바로 종교적 실존이다.
우리에게 믿음은 그저 상식과 어긋난 역설로 들릴 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내용이 역설적이면 역설적일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백 살 때야 얻은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귀한 아들을 잡아 피를 뽑고 사지를 잘라 제단에 올린 다음, 재가 될 때까지 태우라는 명령에 군말 없이 순종한다. 이 장면에서 그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통해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의 관계를 말한다.
이처럼, 믿음이란 무조건 순종하는 행위다. 믿음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모든 것을 무시하라고 요구한다. 머리로 이해될 수 없는 역설이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구원이냐 아니면 땅에서의 향락이냐, 혹은 그리스도냐 아담이냐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에게는 오직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만이 남아 있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 아닌 ‘믿음’
<죽음의 이르는 병>은 우리가 과연 진짜로 행복한 삶을 좇는지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현대인의 삶은 복잡하고 절박함으로 휩싸여 있다. 반대로, 그 대가로 얻어지는 일상은 가볍고도 단순하며 유쾌하다. 키르케고르식으로 설명하자면, 우리는 삶의 무의미함에서 이중으로 도망치고 있는 셈이다. 경쟁의 무거움은 덧없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물음 자체를 한가하고 쓸데없는 소리로 만들어 버린다. 무겁고도 치열한 삶에서 잠시 비켜 나오면, 이번에는 가볍고도 단순한 오락거리가 우리네 일상을 가득 채우곤 한다. 어디에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
과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쾌락은 우리 마음을 만족하게 채워줄 수 있을까?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약을 더 많이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자기 처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여, 건강한 삶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야 절망에서 탈출할 길도 열린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것은 우리의 결단을 위한 토대이고, ‘죽음에 이르는 병’은 초월로 향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며, ‘불안과 절망’은 인간을 믿음으로 몰고 가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라고 한다.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그 답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좋은 물음은 훌륭한 답을 이끌어 낸다. 문제는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같은 논리로, 삶에 대한 깊고도 정확한 의문은 가치 있고 높은 경지의 인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짚는 의문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내 삶에 들어붙어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인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글: <월간샤밧>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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