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8장 패공(覇公) 탄생 (6)
주장왕(周莊王) 시절의 일이다.
주장왕에게는 총애하던 후궁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요희.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왕요라 불렀다. 왕요의 소생으로 퇴(頹)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주장왕은 왕자 퇴를 몹시 사랑하여 특별히 대부 위국(蔿國)을 사부로 삼아 보좌하게 했다.
그런데 퇴(頹)에게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
소를 유난히 좋아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온통 외양간으로 만들었고, 왕자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친히 소를 수백 마리나 길렀다. 심지어는 소에게 오곡을 먹이고 화려한 옷을 입히기까지 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의 소들을 '문수'라고 불렀다. 그는 출입할 때면 항상 소를 탔고, 그의 시종들 또한 소를 타고 다녔다.
왕자 퇴(頹)는 주장왕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벼슬아치들이 들끓었다. 그 중 사부 위국(蔿國)을 비롯하여 변백(邊伯), 자금(子禽), 축궤, 첨부(詹夫) 등의 대부 및 왕의 식단을 관리하는 선부 석속(石束) 등과 각별히 지내며 공공연히 당(黨)을 만들어 모임을 갖기도 했다.
이런 행동은 주희왕(周僖王) 시대에도 이어졌다. 주희왕은 퇴의 형이었으나, 동생의 방약무인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 다시 주희왕이 붕어하고 주혜왕이 신왕으로 즉위하였다. 퇴(頹)의 신분은 이제 천자의 숙부가 되었다. 왕자 퇴를 따르는 오대부는 이를 믿고서 더욱 교만방자해졌다.
이것이 주혜왕(周惠王)의 눈에 거슬렸다. 마침내 주혜왕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금, 축궤, 첨부의 전답을 몰수하고, 위국의 채원(菜園)을 빼앗아 정원으로 만들고, 변백의 저택이 왕궁 가까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역시 몰수해버렸다. 또한 선부 석속이 바치는 음식상이 맛이 없다고 트집잡아 그의 녹봉을 줄여버렸다.
이에 위국, 변백 등 오대부와 석속은 주혜왕을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졌다. 매일 한자리에 모여 울분을 토로하던 중 누군가의 입에서,
- 퇴(頹) 왕자가 천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 퇴 왕자라고 해서 천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런 말도 나왔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의 어조가 낮아졌고, 표정이 진지해졌다.
얼마 후, 그들은 자신들의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왕실을 지키는 신하들과 군사들이라고 해서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주공 기보(忌父), 소백(召伯) 요 등이 힘을 다해 싸워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왕자 퇴와 다섯 대부들은 소(蘇) 땅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서 다시 음모를 꾸미고 주왕실과 사이가 나쁜 위(衛)와 연(燕)나라를 꼬드겨 그들과 함께 재차 왕성을 공격했다.
제2차 싸움에서는 반란군이 승리했다.
그리하여 주공 기보(忌父)와 소백 요는 주혜왕을 모시고 온(溫) 땅으로 피해 달아났고, 위국, 변백 등 다섯 대부는 왕자 퇴(頹)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사숙(師叔)으로부터 그간의 경위를 들은 정여공은 실망의 표정을 지었다.
모처럼 주왕실과 손을 잡으려 했던 그의 계획도 깨졌다.
- 운이 따르지 않음인가.
그때 사숙의 얘기를 함께 듣고 있던 정경 숙첨(叔詹)이 눈을 빛내며 정여공을 돌아보았다.
"주공께서는 낙심하지 마십시오. 사숙(師叔)의 말에 의하면 지금 주왕실은 적당의 소굴로 변하고, 민심은 물끓듯 하는 모양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우리나라에게 좋은 일입니다. 이 기회에 군대를 일으켜 주혜왕을 도와 환궁케 하면 이보다 더 큰 공로는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정나라는 낙양에 매우 가깝게 위치해 있습니다. 맹주를 자처하는 제환공이 개입하기 전에 속히 군사를 일으키십시오."
"묘책이다."
정여공은 무릎을 쳤다. 숙첨(叔詹)의 말대로 주왕실의 신뢰를 얻는데 이 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었다.
정여공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사숙을 급히 온 땅으로 보내어 그곳에 피신해 있는 주혜왕(周惠王) 일행을 역성으로 모셔 들였다. 이어 그 자신 직접 역성으로 달려가 주혜왕에게 조례했다. 그의 행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봄, 정여공은 왕실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을 앞세워 군사를 몰고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왕궁을 지키고 있던 위(衛)와 연(燕)나라 군대에 패해 아무런 소득없이 역성으로 돌아왔다.
혼자 힘으로는 왕궁을 탈환하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정여공은 괵나라와 연합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차례 사자가 오간 끝에 정과 괵나라 군대는 두 길로 나누어 왕성으로 진격했다. 이때가 주혜왕 4년이었다.
정여공은 주혜왕(周惠王)과 더불어 병차에 올라 친히 군사를 독려하며 낙양성의 남문을 쳤고, 괵공은 북문을 향해 쳐들어갔다. 이때는 위나라와 연나라 군대가 모두 철수한 뒤였다. 위국, 변백 등이 이끄는 왕성 군사만으로는 정, 괵 두 나라 연합군을 상대하기에 어림도 없었다. 삽시간에 낙양성은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 빠졌다.
오대부 중 한 사람인 위국(蔿國)이 퇴에게 위급함을 알리기 위해 황급히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때 퇴(頹)는 후원에서 소들에게 여물을 먹이고 있었다. 성밖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는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는 수 없이 위국은 집으로 돌아와 위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국서(國書)를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낙양성 안의 백성들은 성밖에 주혜왕(周惠王)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지르며 몰려나가 성문을 열어제쳤다. 이로써 주혜왕과 정여공은 손쉽게 남문을 통과하여 성안으로 진입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원군을 청하는 국서를 쓰던 위국(蔿國)은 사방에서 북소리와 종소리가 크게 일자 비로소 사세가 기울어졌음을 알았다.
"소 때문에 다 잡은 천하를 놓치는구나."
이렇게 탄식하고는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었다.
다른 대부들인 축궤, 자금 등은 백성들에게 사로잡혀 맞아죽었다.
그러나 퇴(頹)만은 요행히 서문으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가.
그의 뒤로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소들이 떼를 지어 몰려가고 있질 않은가. 퇴(頹)는 자신을 호위하며 따라온 선부 석속에게 연신 소리치고 있었다.
"어서 소를 몰아라!"
그러나 왕궁 안에서 길러진 소들은 잘 걷지 못했다. 이 때문에 도망가는 속도가 매우 늦었다. 결국 퇴(頹)는 추격해온 정나라 군사들에 의해 사로잡혔다. 얼마 후 낙양성 백성들은 남문 밖에 내걸린 퇴의 잘린 목을 볼 수가 있었다.
훗날의 한 시인은 왕자 퇴(頹)의 어리석음을 두고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총애에 의지하여 마음대로 행동하더니
마침내는 간악한 자들과 사귀어 모반을 일으켰구나.
일 년 남짓 왕위에 있으면서 무엇을 했던고
차라리 관문 밖에 나가 소나 길렀더라면.
주혜왕(周惠王)은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이 정여공과 괵공의 공이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