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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문화유적 답사 계획
일시 : 2013년 4월19일(금)
장소 :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 보원사지. 남연군묘. 충의사.보부상유품전시관. 윤봉길의사생가 및 기념관. 도중도
반월당(08:00 출발) - (249.7km. 3시간) - 서산용현리마애삼존불(11:00 도착.관람 40분. 11:40 출발) - (1.5km. 7분) - 보원사지(11:47 도착. 관람 50분. 12:37 출발) - 점심(1시간.1:37 출발) - (6.8km. 20분) - 남연군묘(1:57 도착. 관람 1시간. 2:57 출발) - (7.4km. 20분) - 충의사. 보상상유품전시관.윤봉길의사기념관.윤봉길의사생가.도중도(3:17 도착.관람 2시간. 5:17 출발) - (239.0km. 2시간43분) - 반월당(8:00 도착)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국보 제84호.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여 형성되었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천의를 걸치지 않은 상체는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서산 보원사지(瑞山 普願寺址.사적 제31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05)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 사이인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나 백제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되어 백제 때의 절일 가능성도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가까이에 서산 마애삼존불을 비롯해 불교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어 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瑞山 普願寺址 石槽.보물 제102호.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0)
서산 보원사터에 위치한 석조이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큰 관심을 끌었던 곳이다. 석조는 승려들이 물을 담아 쓰던 돌그릇으로, 원형·팔각형·장방형 등이 있다. 이 석조는 화강석의 통돌을 파서 만든 직사각형 모양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형식을 보인다. 규모가 거대하며 표면에 아무 장식이 없어 장중해 보인다. 내부 각 면에도 조각한 흔적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약 8㎝정도의 원형 배수구가 있을 뿐이다. 안쪽과 윗쪽만 정교하게 다듬고 바깥쪽에는 거친 다듬자국이 그냥 남아 있어 땅에 묻어두고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 조각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약 4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커 웅장한 느낌을 주는데 이를 통해 당시 사찰의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瑞山 普願寺址 幢竿支柱.보물 제103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50)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은 옛 절터로, 지금은 주변이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는데, 땅을 갈 때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 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 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瑞山 普願寺址 五層石塔.보물 제104호.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1)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주가 높이 솟아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보물 제105호.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2)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은 사리탑 혹은 탑이라 하여 절의 한켠에 세워두며,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塔身)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基壇部)를 쌓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어둔다. 이 탑은 보원사(普願寺)터에 세워져있는 사리탑으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법인국사는 신라 말과 고려 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王師), 974년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 이 곳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에 왕이 ‘법인(法印)’이라 시호를 내리고, ‘보승(寶乘)’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기단부는 아래받침돌을 8각으로 된 2개의 돌로 쌓았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새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아무런 조각이 없는 8각의 배흘림기둥을 세웠으며, 윗받침돌은 윗면에 수직으로 새긴 난간조각이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탑신의 몸돌은 8각이며 각 모서리를 기둥처럼 새기고, 앞·뒷면에는 자물쇠가 달린 문짝모양을 새겨두었다. 그 양쪽에는 불교의 법을 지켜주는 사천왕(四天王)을 두었으며, 나머지 2면에는 높은 관을 쓴 인물상이 서있다. 지붕돌은 넓고 두꺼운데, 밑으로는 목조건축에서와 같은 서까래가 표현되어 있고, 윗면은 가파른 경사를 표현하였다. 각 모서리 선은 뚜렷하며, 끝에는 꽃조각을 하였으나 거의 남아있지 않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큼직한 연꽃이 조각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위로, 굽이 달려있는 3개의 보륜(寶輪:바퀴모양의 장식)이 차례로 놓여 있다. 이 탑은 법인이 입적한 해인 975년과 탑비(보물 제106호)를 세운 978년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8각의 기본양식을 잘 갖추고 있으며, 몸돌에서 보이는 여러 무늬와 지붕돌의 귀꽃조각 등은 고려 전기의 시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瑞山 普願寺址 法印國師塔碑.보물 제106호.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119-2)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 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예산가야사지(禮山伽倻寺址.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31외 22필)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석문봉의 동쪽 아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가야동이라고 불리는데 99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절터의 중심지라고 전해지는 곳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묘(南延君墓)가 자리 잡고 있다. 지금 대부분 개간되어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사지의 가람을 추정할 만한 유구(遺構)는 이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야동 계곡의 논과 밭에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과 석재, 자기조각으로 보아 넓은 골짜기에 걸쳐 거대한 규모로 사찰이 조영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원군이 남연군묘를 면례(緬禮 무덤을 옮겨서 다시 장사를 지냄. 유의어 : 개장(改葬), 굴이(掘移),이장(移葬),천묘(遷墓),천장(遷葬))하기 위해 절을 소각하고 절 뒤에 있던 고려시대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세운 금탑(金塔)을 철거함으로써 폐사(廢寺)가 되었으며, 이곳에 있던 금탑을 남연군묘 안에 부장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상태로는 사지의 가람을 확인할 수 없으나 사찰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남연군묘 부근에는 기와조각과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재가 흩어져 있다.
남연군묘(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1)
흥선대원군의 부친이신 남연군의 묘로, 이 남연군묘가 위치한 자리는 본래 가야산 일대에서 제일 큰 절인 가야사가 있던 곳이다. 풍수지리설의 좌청룡, 우백호가 웅장하게 뻗어있어 "이대 천자지지" 즉 2대에 걸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곳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를 경기도 연천의 남송정에서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이때 대원군은 왕권에 야심을 품고 안동 김씨들로부터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생활을 하던터라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99개의 암자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던 가야사를 불사르게 하고 금탑을 허물게 하여 이 묘자리를 차지하였으며 뒷날의 도굴을 염려하여 철 수 만근을 붓고 강회로 비비고 봉분을 했다. 임시 묘가 있던 곳은 ‘구광지’라하여 지금도 움푹 패여 있으며 묘 전방의 석조물 2조의 석양과 2기의 석주를 묘지의 좌우에 세우고 있으며 묘의 전방에는 “이대천자지지”라 명문된 석등이 있다. 1869년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있었고, 전주 이씨가 멸망한 후 묘소는 황폐화 되었으나, 왕실 묘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잘 보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연군분묘 도굴 사건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은 1868년(고종 5년) 독일 상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 J. Oppert:1832 - ?)가 충청도 덕산(德山)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Oppert盜掘事件)으로도 불린다.
1866년(고종 3년) 두 번에 걸친 통상 요구가 거절당하자 오페르트는 1868년(고종 5년) 차이나호(號)를 빌려 충청도 아산만에 내항하여, 덕산군에 상륙하여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했다. 급보를 받고 충청감사가 군병을 급히 파견했을 때는 오페르트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였다. 그들 일행은 다시 북항(北航)하여 인천 영종도(永宗島) 앞바다에 들어와 개국통상 교섭을 위해 관리 파견을 요청했으나, 조선 수비병과 충돌하여 아무 성과도 없이 상하이로 돌아갔다.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은 훗날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된다.(출처:위키백과)
남연군묘의 전설(예산군청 자료에서 발췌)
기억력이 없어서 모르는데 뭐 남연군에 얽힌 이야기는 많이 있지요. 사실은 정만영이가 그때 당시 구한말, 고종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정만영이라는 사람은 지금 당시 육관도사 손석우만큼이나 유명했던 지사였다. 정만영이를 찾아서 자기 아버지 이장을 좀 해야 되겠다. 자기 아버지 묘가 경기도 연천에 지금 있는데 명당자리를 좀 모셔야 되겠다. 내적으로는 사실은 그때 당시 아주 몰락해 버린 종친 왕권을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 되겠다고는 생각과 왕권을 잡기위한 방편으로 자기 아버지 남연군을 이장을 하기 위해서 명당자리를 한번 찾아봐라 해서 정만영이가 찾은 것이 지금 남연군 그 묘 자리 입니다. 그래서 정만영은 현지를 답사를 하고서 대원군에게 충청도 덕산 땅에 명당자리가 두 자리가 있는데 하나는 이대천자지지요, 하나는 만대영화지지인데 어느 명당을 원하십니까? 하니까 만대영화지지는 싫고, 지금 아주 땅에 떨어진 우리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이대 천자지지를 나는 원한다. 그래서 그 천자지지 자리를 알려다오. 그래서 정만영이와 함께 여기를 와 보니까 과연 뭐 이 구만리에서부터 봐도, 예산 쪽에서 봐도 청룡 백호라든가 그 혈맥을 봐서든지 다, 뭐 우리가 그렇기 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때 당시에도 두 사람이 한 이야기가 과연 명당은 명당자리다 해가면서 그 자리를 찾아가서 보니까 천년이나 된 가야사 절터에 금색이 나오는 탑이 하나 있었다는데, 바로 이 금탑 이 자리가 이대 천자지지입니다. 절 안에, 그래 절을 불사르고 금탑을 없애야 되는데 지금처럼 뭐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형제가 여기 내려와서 금탑을 불 지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야사도 많이 있고, 연못에 나무꾼이 불 지르는 것을 봐 가지고,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나무꾼을 칼로 찔러서 연못에 빠트려서 죽인 그런 이야기도 있고, 금탑을 부수는데 사형제 중 대원군이 제일 막내가 금탑을 부시는데, 자기 형들은 벌벌 떨면서 부시질 못했다는 거요. 그래서 대원군이 형님들이 못하는 것을 대원군하였답니다. 더 이상 왕권을 김씨들에게 조롱당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도끼로 부셨다고 하는데 지금과 같이 장비가 있으면 얼마나 좋았었어요. 그런데 그 도끼로 얼마를 부셔서 부셨는지 모르지마는 부실 때 뭐 천둥 번개도 뭐 쳤다고 그러는데 천둥 번개를 무릅쓰고서 뭐 대원군이 도끼로 그 금탑을 부셨다는 거요. 그래서 바로 그 자리에다가 이장을 하는데 물론 처음에 경기도 연천에서 시신을 옮겨왔어 바로 그 자리에다 쓰질 않았어요.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다가 가묘를 해 놨다가 완전 묏자리를 만든 다음에 이장을 했지요. 근데 지금 예산 지방이나 덕산 지방의 향토 사학자들은 지금도 그 남연군 묏자리를 보존할 것이 아니라 파묘를 시키고 옛날 가야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도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禮山 尹奉吉 義士 遺蹟.사적 제229호.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산40-1)
윤봉길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윤봉길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따로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는 새로운 문화의 습득에 주력하면서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또한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승리 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는데, 이것이 4·29의거였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2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국가에서는 윤봉길 의사가 이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5년에 기념탑을 세우고 1968년에는 충의사를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윤의사의 생가, 성장가 등이 복원되고 유물전시관과 농촌 계몽운동을 벌였던 부흥원이 세워진 것은 1970년 이후이다.
충의사는 윤봉길 의사의 사당으로서 초상을 모시고 있으며, 그가 평소에 사용했던 유품들은 보물 제568호로 지정되어 현재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충의관을 세워 윤의사의 농촌 계몽운동과 4·29의거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11경도를 전시해 역사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윤의사를 추모하는 매헌 문화재가 열린다.
윤봉길의사(尹奉吉義士)
윤봉길의사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봉길의사 유품(尹奉吉義士 遺品.보물 제568호.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윤봉길의사 기념관 등 외 (시량리))
윤봉길의사 유품(尹奉吉義士 遺品)은 윤봉길 의사께서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 공원의 거사시에 가지셨던 시계, 지갑, 화폐와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문과 입단 이력서와 윤의사의 창작친서로서 월진회 창립취지서, 일기, 농민양본, 서신(4신), 순국하실 때의 형틀 태 등 이다.
윤봉길의사유품 - 회중시계(尹奉吉義士遺品 - 懷中時計)
윤봉길의사 유품-회중시계(尹奉吉義士 遺品-懷中時計)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거사를 위해 떠나는 날 아침 김구선생과 바꾸어 찬 낡은 시계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이다.
윤봉길의사유품 - 농민독본(尹奉吉義士遺品 - 農民讀本)
윤봉길의사 유품-농민독본(尹奉吉義士 遺品-農民讀本)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깨우치고자 펴낸 농민계몽서이다.
교과서 제1권 8과, 제2권 7과로 되어있으며, 2권 모두 프린트한 것이다
윤봉길의사유품 - 편지 (尹奉吉義士遺品 - 便紙)
윤봉길의사 유품-편지(尹奉吉義士 遺品-便紙)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편지이다.
이 편지들은 총 4통으로 되어 있으며, 충의사에 보관되어 있다.
윤봉길의사유품 - 월진회통장(尹奉吉義士遺品 - 月進會通帳)
윤봉길의사 유품-월진회통장(尹奉吉義士 遺品-月進會通帳)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월진회 통장이다.
보부상 예산덕산유품(禮山德山遺品.중요민속문화재 제30-2호.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19-1)
예산과 덕산을 중심으로 당진, 면천 지역까지 주관했던 보부상의 조직과 기능을 알 수 있는 유품이다. 조선 초기 보부상은 총본부인 임방의 허가를 받아야만 상품 판매권이 인정되었다.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양곡 운반을 담당하기도 하고, 정찰이나 기타 참여로 그들의 지위를 강화하였다. 예덕상무사이외에 홍산, 임천, 원홍주 육군 상무사의 유품이 남아있다.
* 참고자료 : 문화재청. 서산시청자료. 예산군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