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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81. [역경의 열매] 이상직 <1-13> “총선에서 실패 맛보게 하신 건 하나님의 뜻”
이스타항공 창업주 이상직 전 의원, 삶의 현장서 경험한 실물경제 바탕 19대 국회서 민생·생활 정치 보람
이스타항공 창업주인 이상직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3월 전북 전주의 국민연금공단 노조를 방문해 발언하고 있다.올해 총선을 코앞에 두고 당내 경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흔히 말하는 실패를 맛봤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욱 단단하게 하시려는 뜻이리라 생각한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제의를 받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봤다. 많은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4·13 총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대 국회가 개원한 지 3개월이 되어간다. 나에 대한 호칭도 ‘국회의원’에서 ‘전 국회의원’으로 바뀌었다. 돌이켜보면 초선 국회의원으로서 혈기왕성하게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평소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느꼈던 철학대로 ‘민생(乙)을 위한 정치’를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정무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경제민주화 법안으로 대형마트 의무휴업일과 영업시간 규제를 확대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재벌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횡포를 근절하기 위해 부당하게 납품 단가를 후려치면 징벌적 손해배상을 3배까지 요구할 수 있는 하도급법을 냈다. 대표적인 갑의 횡포로 불거진 남양유업 사태와 관련해서는 ‘대리점법’ 제정안을 대표 발의해 19대 국회 임기동안 끈질기게 여당과 정부를 설득해 통과시켰다.
또한 4년 동안 23차례 이상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한국외식업 중앙회와 100만 서명운동을 해 지난해 말에는 영세 가맹점을 포함, 가맹점 카드수수료 반값 인하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실물경제를 경험한 중소기업인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소신껏 ‘국민을 위한 생활정치’를 실천했다.
지역 현안과 관련해서도 동분서주했다. 4년 전 19대 국회 개원 첫 대정부 질문 경제 분야에 나서,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를 상대로 중소기업과 자영업 사장님들이 겪는 경제적 고통을 지적했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전북 이전도 요구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의 대선공약이 됐고, 야당이 대선 공약으로 내놓자 여당에서도 기금운용본부 이전을 약속했었다.
지난해에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안 조정(계수조정) 소위에 참여해 새만금 국제공항에 대한 정부의 약속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동안 김제공항이 실시설계까지 마쳤다가 백지화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 전북권 국제공항에 대한 필요성이 논의된 지 20년 만에 현실화 된 셈이다. 그보다 앞서 2014년에는 야당 국회의원으로서는 유일하게 전라도 땅 전주에 3D프린팅센터를 유치하기도 했다.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열심히 노력했더니 모 언론으로부터는 지역민원만 챙긴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새만금사업은 지역 현안인 동시에 국책사업이었고, 국제공항 역시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닌 국가 현안이라는 점에서 국회의원으로서 소신껏 했다고 자부한다.
나는 흔히 말하는 ‘86세대’와 함께 대학을 다니고 살아 온 81학번의 비교적 젊은 정치인이지만 운동권은 아니다. 태생이 ‘흙수저’이지만 현대증권 샐러리맨에서 노동조합 집행부, 중소기업 CEO, 이스타항공 창업자를 거친 나름 열심히 살아 온 경제인이다. 그리고 내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서 운용하셨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 "총선에서 실패 맛보게 하신 건 하나님의 뜻"
* [역경의 열매] 이상직 <2> 할아버지, 일본군에 처형 직전 살아나는 은혜
* [역경의 열매] 이상직 <3> 어려서 겪은 여러 난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 [역경의 열매] 이상직 <4> 수학 시험서 108점… 수리에 강한 재능 발견
* [역경의 열매] 이상직 <5> 친구가 항공대 원서 접수비 술값으로 탕진
* [역경의 열매] 이상직 <6> 불판닦기·푸시맨… 고된 일 하며 돈 모아
* [역경의 열매] 이상직 <7> 불의의 교통사고… 둘째 잃고 술·담배에 빠져
* [역경의 열매] 이상직 <8> 펀드매니저 접고 중소기업 경영자의 길로
* [역경의 열매] 이상직 <9> 금융위기 와중에 저비용 항공사 설립 '역발상'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0> 국민에게 희망 주는 입법에 의정활동 초점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1> "총선공약 지키게 해달라" 간구 들어주신 주님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2> "정치인들 말뿐 실천 않더라"는 말이 비수로 꽂혀
* [역경의 열매] 이상직 <13·끝> 하나님의 공의로 '경제민주화 꿈' 이루길 기도
◇약력=1963년 전북 김제 출생 △동국대 경영학과, 고려대 경영대학원 △전주대 객원교수, 전북대 초빙교수, 이스타항공 회장, 19대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금융소비자상 대상, 유권자시민행동 대한민국 유권자 대상, 국정감사 우수국회의원 대상 등 수상 △전주 바울교회 집사
***[역경의 열매] 이상직 <2> 할아버지, 일본군에 처형 직전 살아나는 은혜
지리산서 숨어살다 해방 이후 나와… ‘ㄱ자형’ 교회 금산교회 인근에 터전
이상직 전 의원 큰형의 졸업식에서 가족들과 찍은 사진. 왼쪽이 이 전 의원 어머니, 그 옆이 아버지. 어머니 품에 안긴 아기가 이 전 의원.4년의 국회 의정활동 가운데 많은 일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 중에 2014년 국무총리 인사청문회가 떠오른다. 당시 문창극 후보자의 조부가 독립운동가 문남규 선생이 맞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었는데, 내겐 특별한 기억이다.
나의 증조부는 구한말 무장 의병전쟁에 관여한 독립운동가였다. 1905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들이 을사늑약을 맺고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자 병조참의 벼슬을 살던 증조부 죽포 이규현 선생은 의병거사에 뜻을 함께하기로 한다. 그는 보관하던 병참물품들을 아무도 모르게 다락 뒤주에 숨겨두었다. 나락 마흔 섬을 퍼내고 그 속에 총을 숨겼던 증조부는 지리산 호랑이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석상용을 만나 총을 건넸다. 안타깝게도 당시 독립운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의병전쟁에 뜻을 함께한 의인 113명의 명단을 기록한 ‘동맹록(同盟錄)’에 증조부의 이름이 남아있다.
당시 증조부의 활동은 일본군에게 알려졌고 일본군은 연로하신 증조부 대신 장남을 잡아가 죽이겠다고 했다.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걱정해 아들을 피신시키자 일본군은 가족을 찾아와 매일같이 행패를 부리며 집안을 몰살시키겠다고 겁박했다. 이때 셋째인 나의 조부 이종식이 나서 “이미 도망간 큰형님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오. 형 대신 나를 데려가고 이제 그만 행패를 멈추라”고 말했다. 조부는 일본군에 끌려갔다.
당시 일본군은 전라도에 남원·군산·광주부대 등 세 부대가 있었다. 특히 남원부대는 지리산 일대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의병들을 잡기 위해 만들어졌다. 붙잡힌 의병들은 남원 실상사에 끌려가 처형당했다. 조부가 실상사에 가보니 일본군의 가혹한 고문에 병색이 짙어진 사형수 네 명이 있었다. 실상사 마당에는 꽤나 잘 차려진 점심밥상이 준비됐고, 일본군은 “이게 마지막 밥이다. 귀신도 배가 불러야 잘 간다더라”며 그들을 조롱했다. 때마침 그곳에 있던 일본군 앞잡이 중에 이전에 조부와 남원 인월장 주막에서 만나 술을 마시면서 호형호제를 약속한 건달이 있었다. 그 건달이 일본군을 설득해 조부는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조부는 근 10년간 지리산 금대암에서 숨어 살아야만 했다. 해방 이후에 지리산에서 나왔고, 그 후 태어난 부친이 조부의 뜻을 받들어 김제 금산면 모악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8남매 가운데 늦둥이 막내로 내가 태어났다. 부친의 호는 적선(積善)인데, 그 뜻대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살다 작고하셨다.
돌이켜 보니 나의 뿌리부터 현재의 내 모습으로 이어진 것은 모두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뤄진 것임을 깨닫는다. 우선 조부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형 대신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것부터 은혜다. 우리 가족이 지리산에서 피신하다가 큰형이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김제 금산면 용화부락으로 가족들이 이사를 오게 된 것도 의미가 있다. 금산에는 조세형 전 민주당 상임고문의 조부 조덕삼 선생께서 설립한 일명 ‘ㄱ’자 교회인 금산교회가 있었다. 나는 늦둥이에 막내로 태어나 어렵게 자랐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샐러리맨과 중소기업 CEO, 이스타항공 창업까지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3> 어려서 겪은 여러 난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
가세 기울어 큰형집에서 기거… 많은 조카들 틈에서 눈칫밥, 농사가 싫어 가출해 중국집으로
전주고 2학년 재학시절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 두 번째가 이상직 전 의원.의병활동을 하신 증조부의 영향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죽을 뻔한 조부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조부는 일본군을 피해 지리산에 숨어살았다. 그렇게 10년 동안 칩거하다 산에서 내려와 ‘지천명’의 나이 50세에 첫 아들을 낳으니 나의 부친이다. 훗날 부친은 “서쪽으로 가라”는 조부의 유언에 따라 지리산에서 전북 김제 금산면으로 동생과 가족을 이끌고 이사했다.
아버지는 나전칠기 사업으로 크게 자수성가했다. 덕분에 첫째, 둘째 형들은 서울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 가업을 큰형님에게 물려주시고는 다시 김제 금산면에 터를 잡으시고 김제 만경 광활에서 농사를 지었다.
70년대 후반 가구시장의 풍토는 서양식 목재가구가 주를 이루는 방향으로 변해갔다. 큰형님이 물려받은 가업은 실패했고, 집안 전체가 기울었다.
부친의 나이 마흔 다섯에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김제 금산면 원평초와 금산초를 다니다가 6학년 때 전주 중앙초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러면서 전주에 계시던 큰형님 댁에서 머물렀다. 집안도 기울어진 마당에 형 집에서라도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 한구석엔 찬밥신세가 된 것 같아 서럽기도 했다. 그렇게 중앙초와 전라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한창 미래에 대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서 “김제 광활에 와서 농사일을 돕는 게 어떠냐”고 어렵게 말씀하셨다. 이 무렵 큰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게 어떠냐”면서 넌지시 내게 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명문 전주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나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큰형님은 6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조카들 틈에 끼어 생활하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무작정 그 집에서 나오고 싶어졌다. 그러다 어릴 적 친하게 지냈던 고향 형을 우연히 시내에서 만났다. 익산에 있는 중화 요리집에서 주방장으로 일한다고 했다. 그 길로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돼지 저금통을 털어 익산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린 내 눈에는 농사일보다 중국집 주방장이 훨씬 더 멋져 보였다. 자장면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후회가 밀려왔다. 손님이 밀리면 그릇을 다 씻기도 전에 다시 자장면을 담아야 했다. 손님들이 배달가방을 든 형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도 싫었다. 결국 중국집 주방장도 일단 대학을 나온 후에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가게 앞에 나를 찾아 온 큰형수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큰형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만감이 교차했다.
예전에 TV 광고에서 유행했던 말처럼 정말 ‘집 나가면 개고생’을 경험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이런 난관들조차도 훗날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단련시키신 게 아닌가 싶다. 대가족 틈바구니에서 눈칫밥도 먹어보고 가출해서 고생도 해봤다. 이런 경험들이 없었다면 꿈을 이루기 전에 조금만 힘들어도 주저앉아버렸을지 모른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는 걸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확실하게 느꼈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4> 수학 시험서 108점… 수리에 강한 재능 발견
“풀이 과정 독창적” 선생님 칭찬… 수리력·승부욕, 증권맨으로 성공
전주고 졸업식 당시 교실에서 친구들과 졸업장을 보고 있는 이상직 전 의원(오른쪽).사람들은 저마다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어둠에서 빛이 나와 이 세상이 창조되고, 흙으로 인간이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강한 체력을 갖고 있어 운동이라면 자신 있었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지만 그림도 제법 잘 그렸다. 통기타를 치면서 유행가 노래도 곧잘 부르는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재능은 수학이었다. 숫자에 매우 강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월례고사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집안 형편상 참고서 살 여유조차 없었던 때였다. 과외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오로지 수업시간에 듣고 배운 것으로 시험을 봤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수학점수를 108점을 받았다. 처음엔 이해가 안됐다. 만점은 100점인데 108점이라니. 분명 선생님께서 착각하신 것이라 여겼다.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제 점수를 잘못 주셨는가 보네요. 100점이 만점인데 여기 보세요. 108점이라고 쓰셨네요.” 되돌아온 선생님의 대답은 “108점이 맞다”였다. 어리둥절했다. 선생님께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주관식 문제 풀이가 틀리지 않았고, 그 풀이가 하도 독창적이라 108점을 주었지”라고 답하셨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변별력을 위해 문제를 어렵게 출제했고, 점수가 낮게 나올 것을 걱정해 주관식 문제에 배점을 높게 두셨다. 전교 2등한 친구조차도 수학은 75점을 받았다. 그 기준에서 채점을 하니 내 점수는 108점이었다는 거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처럼 그때 선생님 덕분에 나는 수리에 강한 재능을 발견했다.
수리에 강한 재능은 공부에서만 발휘된 것은 아니었다. 커가면서 친구들과 어울려 카드놀이, 구슬 등의 홀짝 맞추기 게임 등을 할 때도 능력자로 통했다. 머리를 쓰는 치열한 승부가 좋았다. 공부보다는 이런 게임을 즐기기도 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용돈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하는 게임이었지만 승률이 좋았다.
한 번은 이런 일화도 있었다. 힘센 한 녀석이 게임을 빙자해 반 친구들 돈을 모두 털어갔지만 친구들은 아무도 말을 못했다. 그래서 힘과 게임에 자신 있던 내가 붙어서 모두 되찾아준 적도 있다. 대학 다닐 때는 두 친구가 가져온 등록금을 하룻밤 사이에 모두 딴 적도 있다. 물론 게임만 즐겼을 뿐 모두 돌려줬다.
대학 졸업 후 나는 현대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현대증권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는 펀드매니저가 의사보다 더 좋은 신랑감으로 인정받았다. 어려서부터 수리에 강하고, 게임을 하며 스릴을 즐겼던 내게 정글과 같은 자본시장에서의 승부는 강한 승리욕을 느끼게 했다. 게임의 확률을 즐기면서도 수학적 사고력이 필요한 증권맨, 펀드매니저는 어찌 보면 내겐 천직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수리에 대한 큰 재능 덕분에 훗날 자본시장에서 나름대로 크게 성공한 증권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5> 친구가 항공대 원서 접수비 술값으로 탕진
파일럿 꿈꿨으나 시력 나빠 포기… 항공사 창업 때 경영학 공부 큰 도움
동국대 재학 시절 전주고 동창들과 찍은 사진. 오른쪽 기타를 매고 있는 이가 이상직 전 의원.나라의 미래와 운명은 교육을 통해서 달라지는 법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의 정점에는 대학입시제도가 있다. 그런데 이 대학입시제도 만큼 자주 바뀌는 것도 드물다. 내가 대학을 입학하려고 하던 당시에도 그랬다.
나는 전주고등학교에 다녔다. 1978년 입학할 당시 경기고 경북고 부산고 광주일고 등 전국의 명문고교들이 대부분 평준화가 됐다. 비평준화 고교 가운데 전주고는 전국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혔다. 함께 입학한 동기들 중에 서울대만 200명가량 합격했다.
훗날 동기 중 의사가 된 친구가 200여명, 사법고시 합격자만 해도 35명이나 될 만큼 머리 좋은 이들이 많았고, 공부 경쟁이 뜨거웠다. 나를 비롯해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 본고사를 겨냥해 국어 영어 수학에 집중했다. 스스로 수학에 강하다고 자부한 만큼 소위 ‘SKY’라 불리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진학을 꿈꿨다. 그런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고3이었던 1980년 5월 광주를 유혈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정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제도를 바꿨다. 그중 하나가 교육이었고, 핵심은 물론 대학입시제도의 개혁이었다. 본고사를 폐지하고 예비고사 성적과 내신 성적만으로 대학 입시를 치른다는 것이었다. 대학입시를 불과 4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이는 사전 예고조차 없이 발표됐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본고사 준비에 매달린 채 내신 성적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나와 친구들은 모두 요즘말로 ‘멘붕(멘탈붕괴)’ 상태가 됐다. 더구나 중국집 주방장이 되겠다면서 가출했던 그 시간동안 시험을 치르지 않았던 나는 내신 성적이 꼴찌 등급이었다. 결국 81년 대학입시는 극심한 눈치작전이 펼쳐졌다. 이때 고교를 졸업한 소위 ‘81학번’들은 모두 신군부 교육개혁의 피해자이다.
나는 일단 전북대 농대 81학번으로 입학했다. 농사나 농업에 대한 꿈이 없었던 탓에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학업을 포기하고 옛집으로 돌아가 다시 몇 달간 공부를 했다. 학력고사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올렸지만 평소 원했던 대학은 갈 수 없었다. 꼴찌등급 고교 내신이 계속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1차 진로를 ‘꿈’으로 정했다. 어릴 적에 고향에서 비행기를 바라보면서 가졌던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어졌다. 그래서 항공대 진학을 결심했다. 그러나 시력이 문제였다. 결국 항공운항 대신 항공경영을 선택하기로 했다.
당시 수중에는 원서를 접수할 정도의 돈밖에 없었다. 서울까지 기차를 타고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친구에게 원서 접수를 부탁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의 믿음을 배신했다. 그는 항공대 접수 비용을 자신의 술값으로 날렸고, 복수지원으로 선택했던 동국대 경영학과에만 접수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동국대가 등록금을 면제해준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이스타항공의 창업주가 됐다. 파일럿이 됐다면 항공사 창업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경영학을 공부한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됐다. 항공대 입학원서를 술과 바꿔먹은 친구가 원망스러웠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이런 사건들 역시 내 삶을 운용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인 것 같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6> 불판닦기·푸시맨… 고된 일 하며 돈 모아
학비 벌기 안간힘, 너무 지쳐 코피도… 현대 입사 후 첫 월급은 빨간 내의
1990년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 번째 줄 왼쪽 네 번째가 이상직 전 의원.친구가 술값과 바꿔버린 대입원서 덕분에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동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대는 사회적으로 암울한 시절이었다. 둘째 형이 대학입학 기념으로 양복을 사서 입으라며 준 20만원으로 그 당시 갖고 싶었던 기타를 샀다. 고교 2년 때 같은 반 중 절친했던 9명이 있었다. 이 중 한 친구가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밴드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기에 옷보다는 기타가 필요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학교 매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다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명문대에 다녔던 천재성 있는 친구였다. 그즈음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졸병을 면한 뒤로는 기타 연주를 즐겼다. 병장 시절에 중대 장기자랑대회에서 후임과 함께 ‘꿈의 대화’를 불러 포상휴가증을 받고 대학가요제에 나가지 못한 한을 풀었다. 휴가증은 애인과 헤어지게 생겼다면서 새벽녘에 숨어서 혼자 훌쩍거리던 신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신참은 애인의 마음을 다시 잡아 내가 제대할 때까지는 군 생활을 잘했다.
제대한 뒤에는 서울 구로에 있는 둘째 형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야쿠르트 배달을 하던 누나가 등록금을 보태주는 것이 미안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때로는 너무 지쳐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식당에서 고기불판을 닦기도 했고, 아침 출근시간에는 만원버스에 승객들을 밀어 넣는 ‘푸시맨’ 일도 했다. 버스비를 아끼려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점심 값이 없을 때는 친구들 틈에 얻어먹는 게 미안해 아예 학교를 안가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악착같이 모으니 통장에 100만원이 생겼다. 당시 대학등록금이 약 60만원, 버스요금이 130원이었다. 100만원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리고 암울했던 80년대 그 시절에 해직기자들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00만원을 거기에 아낌없이 투자했고 ‘주권번호 35610’으로 여전히 주주명단에 남아 있다. 내 삶은 다시 팍팍하고 고단하게 됐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그렇게 촌놈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은 한 선배가 내게 물었다. “상직아,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한 이유가 있어.” 울컥했지만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분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선배에 대한 반감이 컸지만 난 스스로를 봤을 때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밤 나는 20년 뒤 삶에 대한 목표를 세웠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선배의 한 마디는 내게 긍정적인 독기를 품게 했다. 지나고 보니 고맙기까지 하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현대그룹에 지원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이 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룹 연수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역시 정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꿈에 도전해보세요. 해 보셨습니까. 안 해 보셨다면 지금 당장 그걸 해보세요.” 그룹연수를 마치고 현대증권에 지원했다. 입사동기 2000명 가운데 20명이 현대증권에 배치됐다. 첫 월급으로 어머니께 빨간 내의를 사드렸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7> 불의의 교통사고… 둘째 잃고 술·담배에 빠져
증권사 입사 후 승승장구 하던 시절… 혹독한 고통의 시간 지나고 셋째 얻어
이상직 전 의원 가족사진. 아내와 막내아들, 맏딸, 이 전 의원(왼쪽부터).현대증권 입사 후엔 고된 야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24시간 동안 일만 생각했다. 일하는 꿈만 꿔도 왠지 즐거웠다. 재야의 투자 고수를 찾아가 한 수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아무리 두꺼운 책도 밤새 읽어가면서 노력했다. 이런 열정으로 증권협회 교육성적 1등을 차지했고 신설 점포를 매번 전국 1등 점포로 만들어 업계에 널리 알려졌다.
그 무렵 주변에서 현대증권 노조위원장에 나서라는 강력한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입사 동기를 추천했다. 그리고 그의 노조위원장 당선을 위해 앞장서 뛰었다. 친구가 당선되자 나는 노조의 체육부장을 맡았다. 노조원들과 주말마다 축구를 하면서 팀워크을 다졌다. 풍물패도 만들어 노조의 단합을 위해 몸으로 뛰었다. 그런데 “노조위원장 위에 이상직”이라는 뒷말이 들렸다. 허탈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축구로 인해 검게 그을린 얼굴을 두고는 “골프를 많이 쳐서 얼굴이 탔다. 임원급 대리 나셨다”고 비아냥거리기는 소리도 들렸다. 사실이 아니기에 개의치 않았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정말 힘든 시련이 찾아왔다.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간 아내로부터 서울로 출발한다는 전화를 받고나서 두 시간 뒤 낯선 사람의 전화가 걸려왔다. 상경하던 중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차가 뒤집혔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린 듯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상에 누워있는 두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아내와 첫째 딸아이는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둘째인 아들은 상태가 위중했다.
나와 너무도 닮아 모두가 ‘리틀 이상직’이라고 했던 그 아들은 일주일 뒤에 천국으로 떠났다. 아침마다 “회사 잘 다녀오세요”라며 인사해주던 아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우리 가족은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세상 모든 일이 싫어졌고 오로지 술만 마셨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슬픔은 세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지금도 그 슬픔은 잊혀지지를 않는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 그 애절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지켜보면서 아들을 잃은 아픔이 오롯이 되살아났다. 팽목항에서 마음속으로 통곡을 하며, 천국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자녀들을 가슴에 묻은 유가족들을 위해 가장 슬픈 기도를 올렸다.
나는 가끔 학교에서 강연을 하곤 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 요청은 거절한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할 때도 말을 잘하는 강사는 아니다. 그럼에도 강연을 하는 이유는 훌쩍 떠나버린 둘째 아이 때문이다. 강의를 할 때마다 ‘그 녀석이 계속 성장했다면 지금쯤 이 학생들과 친구가 됐을 텐데’ ‘둘째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등 많은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꿈은 소중하다. 맨주먹일지라도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다”라는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어 강연에 나선다. 지금 내겐 둘째인 셋째 아들이 있다. 둘째가 떠나고 몇 년 뒤에 태어난 아들은 무탈하게 잘 성장하고 있다.
인생의 굴곡이 없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알게 된 후로는 그동안 내게 주어졌던 견디기 힘든 모든 시련들이 나를 굳세고 단단하게 단련하시려는 계획임을 믿는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역경의 열매] 이상직 <8> 펀드매니저 접고 중소기업 경영자의 길로
투자하고 싶은 회사 만들겠다는 꿈 생겨… 막막했지만 긴 기도 끝에 새 출발 결심
현대증권 재직 당시 미국 뉴욕을 방문한 이상직 전 의원.펀드매니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30대 시절 많은 사람들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련도 있었다. 코스닥에 상장되기 직전의 기업 열 곳에 투자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달랑 두 곳을 제외한 나머지 회사들이 문을 닫아버렸다. 투자검토 자료를 몇 번이나 다시 들춰보고 분석해본 결과 미래 투자가치가 충분한 회사들이었다. 증권맨 10년 만에 엄청난 회의감과 실패를 맛봤다.
자료에 나타난 기업분석은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경영진의 무능과 도덕적 해이였다. 투자를 받거나 회사가 영업이익을 남기면 그 돈은 설비투자나 R&D, 인재양성 등 회사의 미래를 위해 써야 한다. 그러나 CEO가 흥청망청 써버리면 회사는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이후로는 투자에 앞서서 회사의 재무재표보다 경영진을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일을 하는가.’ ‘도덕적 해이에 빠진 경영주에게 이토록 고생해서 투자금을 몰아준 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막막한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한참을 기도한 끝에 마음속에 결심이 섰다. 새로운 꿈을 꾸기로 했다. 투자할 회사를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투자하고 싶은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39세에 펀드매니저 생활을 접었다.
펀드매니저를 하면서 경영에 직·간접적인 관여를 하고 조언을 했던 회사가 여럿 있었다. 그 가운데 K라는 회사의 창업주로부터 근 40년 된 회사의 간판을 내리지 말고 경영을 직접 맡아 달라는 인수 제안이 들어왔다. 받아들였다. 이후 중소기업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
처음 시작할 때 연매출 300억원 정도의 회사는 몇 년 사이 연결 매출 3000억원 규모에 계열사 10개를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아픔도 많았다.
계열사 가운데 자동차 고무부품을 생산하는 제조회사가 있었다. 국내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업력이 30년 넘은 곳이었다. 열심히 품질을 향상시키려 했지만 매년 회사의 영업이익은 마이너스이거나 아주 저조한 실적만 되돌아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기업들이 납품협력업체들에게 부당하게 납품단가를 책정하거나 경기불황이나 노사문제로 생산이 줄면 납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또 원재료비 상승 원가를 다음해에 인상시켜 주는 등 악순환이 이어졌다. 중소기업 경영자가 아무리 죽기 살기로 노력해도 겨우 부도를 모면하고, 직원들의 월급도 올려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경험은 훗날 정치를 꿈꾸게 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됐다. 실제로 19대 국회에 들어와서 정부의 업무보고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수백군데 협력업체의 매년 평균 영업이익률을 파악해 보니 대부분 물가 상승률을 밑돌고 있었다. 하도급 공정화에 관한 법률을 국회에서 대표 발의해 통과시키게 된 배경이었다.
펀드매니저와 중소기업 경영자로서의 경험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새로운 꿈을 꾸게 했다. 이 무렵 전주 바울교회에 등록했다. 새로운 도전은 늘 가슴 떨리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9> 금융위기 와중에 저비용 항공사 설립 ‘역발상’
주변의 외면 속에 기도로 난관 극복… ‘동방의 별’ 꿈꾸는 8년차 항공사로
2009년 이스타항공 첫 출항을 기념하며 이상직 전 의원이 이스타항공 1호 항공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2008년은 1929년 세계 경제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위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역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하면서 ‘동방의 별(East Star)’이 되겠다는 뜻을 담은 이스타항공 창업을 선언했다. 고유가·고환율·고금리의 3고 현상에 내일의 경제상황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저비용 항공사 창업에 도전한다고 하자 “이스타항공이 날게 되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저항이 많았다. 힘들수록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기도 속에서 나는 안전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경영철학을 세웠다. 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기종으로 인정받는 제트여객기 B-737 NG(Next Generation) 차세대기종을 선택했다. 2008년 국토해양부로부터 운항면허를 취득하고 2009년 1월부터 국내선 첫 취항에 나선 이스타항공에 대한 탑승객들의 반응은 다행히 호의적이었다. 운항 첫날 예약서버가 다운될 정도였고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한국소비자원이 선정한 서비스만족도 1위도 기록했다.
지금은 오래된 기종을 운용하는 일부 항공사를 제외하고는 국내 거의 모든 저비용 항공사들이 B-737 NG 기종을 운용하고 있다. 저비용 항공사는 단일기종을 운용하면서 부품과 정비에 소요되는 낭비요소를 없애고 승무원들도 기내청소를 함께하는 등 협업을 통해 소비자인 국민들에게 실용적인 요금으로 보답할 수 있다.
이스타항공의 유니폼은 동대문에서 나왔다. 동대문 패션산업 상인들의 연합체인 ‘MK패션산업발전협회’ 고문이었던 나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열심히 일하시는 동대문 사람들을 돕기 위해 MK패션산업발전협회 측에 이스타항공의 유니폼를 맡겼다. 몇 차례 실패를 거친 뒤 나온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스타항공은 원가를 절감할 수 있었고 유니폼을 제작한 동대문의 업체들은 항공사 승무원 유니폼을 만들었다는 실적이 생겨 국내 유명은행과 공공기관의 유니폼 제작을 수주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윈윈’ 사례를 이뤄냈다.
지금 이스타항공은 취항 8년차가 됐고 국내를 대표하는 저비용 항공사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스타항공이 성공하면 손에 장을 지진다던 사람들도 이제는 조용하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말이 아닌 실천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매일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이스타항공의 성장이 이뤄지고 있다. 이스타항공은 2013년부터 청주에서 홍콩과 선양 상하이 옌지 등 7개 중국 노선에 정기취항을 시작했다.
펀드매니저, 중소기업 경영, 이스타항공 창업 등을 통해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나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됐다. 지역을 발전시키고 지역이 발전하면 결국 나라가 잘 되는 그런 세상은 정치를 통해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08년 총선을 겨냥해 정치권에 대한 노크를 했으나 ‘컷 오프’의 아픔을 경험했다. 이후 2012년 전직 국회의원 및 장관 출신과 맞붙은 3자 대결에서 재수에 성공했다. 하나님께서 민생현장을 알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하시고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이끌어 주셨다는 생각에 감격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10> 국민에게 희망 주는 입법에 의정활동 초점
대기업 횡포방지 하도급법 등 발의… “올바른 판단의 지혜 주세요” 기도
전국소상공인 연합회 기자회견에서 이상직 전 의원(앞줄 오른쪽 세 번째)이 참가자들과 대형마트의 독과점을 규탄하고 있다.국회의원이 되고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암담했다. 국가부채가 1000조원을 넘어서는 것은 물론 가계부채가 1200조원을 넘어섰다. 청년실업률은 10%에 육박하고 노인빈곤율은 OECD국가 중 가장 꼴찌였다.
통신 자동차 정유 은행 전기 카드 항공 주택 등은 국민 누구나 공기나 물처럼 필수불가결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공공소비재이다. ‘공영화’를 통해서 공공성을 강화함으로써 적절한 가격통제를 하는 정책을 펼쳐야 된다는 것은 외국의 사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히려 민영화 시킨 것도 모자라 독과점 시장으로 보호해 주는 정책을 펴고 있다.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셈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와 휴대폰을 인구수 기준으로 국민이 5000만대를 보유하고 있다 가정했을 때 자동차 1대를 외국보다 근거 없이 100만원 비싸게 팔았다면 그 금액은 얼마나 될까. 휴대폰 1대당 통신비를 1년에 10만원씩 10년간 바가지를 씌웠다면 그 가계의 피해액은 어느 정도일까. 각각 50조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다. 다시 말해 어마어마한 돈이 독과점 기업의 주머니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독과점은 독이다.
대내외 환경을 잘 파악한 후에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9대 국회에서 의정활동 내내 “정부가 격차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하고,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9’ ‘88’은 대한민국 경제구조를 보여주는 숫자들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99%는 중소기업이고, 이들 중소기업이 전체 일자리의 88%를 만들고 있다. 내가 이스타항공사를 창업한 것은 항공산업과 노선의 독과점을 깨뜨려 국민 누구나 저렴하게 실용적으로 항공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도 있지만 그 뒤에는 청년들의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낙후된 지방경제 활성화에 일조하고 싶다는 촌놈의 바람이 있었다.
국회에 입성하면서 가장 먼저 발의한 법안은 재벌 대기업들이 납품단가를 비합리적으로 책정하거나 부당하게 반품할 경우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하도급법’ 개정안이었다. 두 번째 발의한 법안은 골목상권을 지키기 위해 대형마트 의무휴업일과 영업시간 규제를 확대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이었다. 이후에도 남양유업 사태를 보면서 을(乙)의 눈물을 닦아 줄 ‘대리점법’을 대표 발의했다. 자영업을 하는 분들은 세금보다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에 더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영세가맹점의 수수료율을 반값으로 인하하는 정부의 약속이행을 끌어냈다. 신용카드의 매출채권을 신용카드사 이외에 은행에서도 매입할 수 있도록 했다.
위 법안들의 공통점은 실질적인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는 것들이다. 법안 발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올바른 판단력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 국민들이 팍팍한 삶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열어달라고 구했다. 다행히 법안발의 결과는 좋았다. 국회의원에서는 물러났지만 기업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린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11> “총선공약 지키게 해달라” 간구 들어주신 주님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전북 이전… 많은 장애 극복하고 법률에 못박아
2012년 7월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상직 전 의원(앞쪽)이 발언하고 있다.국회의원이 되고나서 나는 큰 시험대에 서게 됐다. 2012년 4월 총선 과정에서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를 전북혁신도시에 끌어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국회에 입성하면 전북혁신도시로 오기로 한 토지주택공사(LH)를 진주로 강탈당한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펀드매니저 출신으로 자본시장을 경험한 전문성을 살려야겠기에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MB정부는 LH 대신 국민연금공단을 전북혁신도시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앙꼬 없는 찐빵’처럼 기금운용본부를 제외하고 보낸다는 게 문제였다. 전북의 분위기는 사실상 포기 상태였다.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정부가 안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중요성과 미래 잠재력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총선에서 약속해버렸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를 반드시 전북혁신도시에 이전할 수 있게 도와주시고 지혜를 달라고 간청했다.
제19대 국회가 열리면서 첫 대정부 질문 기회가 돌아왔다. 나는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을 신청했다. 당시 김황식 국무총리를 상대로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를 포함한 국민연금공단의 일괄 이전을 요구했다. 하지만 총리는 정부의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
12월 대선이 다가왔다.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인 문재인 후보의 중앙당 대선캠프에서 동행본부장으로 참여했던 나는 문 후보에게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일괄 이전을 전북지역 대선공약으로 하자고 건의했다. 문 후보는 이 건의를 받아들였고, 2012년 대선 전북선대위 출범식 자리에서 대선공약으로 발표했다. 반응은 뜨거웠고, 다급해진 새누리당은 당대표 등이 내려와 ‘우리도 한다’면서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전북이전 약속이 적힌 붉은색 현수막을 거리 곳곳에 걸었다. 그렇게 해서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전북 이전은 여야 대선후보의 약속이 됐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이듬해 대통령 취임 후 정부의 입장은 ‘대통령이 약속한 적 없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나를 포함한 전북지역 국회의원 11명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 당시 거리 곳곳에 붙어 있던 새누리당 현수막 사진을 공개했다. 그리고 여야 당대표 회담에서 전격 합의가 이뤄졌고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의 소재지를 전북으로 한다는 규정이 못 박힌 ‘국민연금법’ 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온전히 하나님을 알게 된 후 간절하게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뿌듯했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를 혁신도시에 유치하겠다는 총선 공약을 이뤄내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나는 금방 하나님께 또다시 도와달라는 기도를 해야 했다.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를 놓치지 않으려던 모피아 금융권력의 방해가 집요했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조직은 전주로 이전해도 기금운용본부를 포함한 핵심조직은 서울에 남아 있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19대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 같은 내용의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원화 방안 연구용역이 비밀리에 진행됐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12> “정치인들 말뿐 실천 않더라”는 말이 비수로 꽂혀
시장골목 등 찾아 현장 목소리 들어…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 인하 성과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며 시장 상인을 만나서 고충을 듣고 있는 이상직 전 의원.국회의원 재임 시절 국정감사나 임시국회, 정기국회 정부 업무보고 때마다 빠트리지 않고 매번 질의한 주제가 있다. 바로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를 확 낮추는 일이었다.
19대 국회에서 민주통합당(현 더불어 민주당)은 대표가 여섯 차례가 바뀌었지만 나는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당의 직능사령관을 맡았다. 직능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직능위원회를 전국직능위원회로 확대 개편했다. 전국위원회는 당대표가 당연직 위원장을 맡기 때문에 사실상 위원장 역할은 수석부의장이 한다.
실물경제인 출신인 내게 수석부의장 임무가 계속 주어졌다. 4년 동안 직능사령관으로 전국직능경제인총연합회 산하 약 200여 중앙회, 전국소상공인연합회와 중소벤처기업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현장을 누볐다. 중소기업과 벤처기업, 자영업자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의 목소리를 담은 경제민주화의 입법적 발의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가 세금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었다. 카드회사들이 받는 가맹점수수료는 재벌대기업들에게는 1%이하로 받고, 일반가맹점들에게는 2∼3%가 넘는 고율의 수수료를 받아 챙기는 구조였다.
결국 나는 2015년 3월에 신용카드 가맹점 수수료는 최대 2%를 넘지 않도록 ‘상한제’를 두는 ‘여신전문금융업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또 법률안 대표발의와 동시에 한국외식업중앙회,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 등 전국의 직능단체들과 함께 ‘신용카드수수료 인하를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서명운동이 벌어지자 정부의 반응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2015년 말 정부는 영세사업자의 신용카드 수수료 반값 인하를 발표했다. 19대 국회의 마지막까지 논의를 거듭해 신용카드 매출전표를 신용카드사가 아닌 은행에서 매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여신전문금융업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일반가맹점 반값수수료의 길도 열린 것이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한 마디가 있다. 서명운동을 할 당시, 골목 안 음식점에 들어가 사장님께 서명을 부탁드렸다. 그 분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 있게 서명용지를 들이 민 내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매번 서명은 해줬지만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기대 안 합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인들이 자신을 위한 구호로 외쳤지만 실천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분의 말씀은 내게 비수처럼 꽂혔다. 그래서 더 열심히 정부를 설득하고 따지기도 했다. 그리고 성과를 이뤄냈다. 제19대 국회를 마치면서 그때 그 조그마한 음식점 사장님이 해주신 그 말이 기억났고, 그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결과를 만들어낸 것 같아 뿌듯했다.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과거 선거운동을 하며 시장의 소상공인 등을 만나 현장의 소리를 들었던 그 기억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또한 모든 일을 준비하고 진행하며 나타난 성과들은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보이신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매일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용기로 해냈다.
***[역경의 열매] 이상직 <13·끝> 하나님의 공의로 ‘경제민주화 꿈’ 이루길 기도
주님 알고 믿을 수 없는 일 많이 겪어… 경영복귀 앞뒀지만 선교의 사명 품어
최근 봉사활동을 위해 전주시의 한 식당을 찾은 이상직 전 의원이 주민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왜, 경제민주화를 해야 하는가.’ 이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고민을 하다보니 우리나라가 경제민주화를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떠오른다.
2016년 반기보고서를 살펴봤다. 국내 30대 기업 중 영업이익률이 가장 높은 ‘톱5’에 정유사가 3곳이나 포함됐고, 공기업인 KT&G와 한국전력은 각각 영업이익률 33.89%와 21.8%의 경이로운 실적을 거뒀다. 이들의 공통점은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공공성소비재 시장에서 독과점지위를 이용해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는 점이다.
4년 전 공정거래위원회가 시중은행들의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의 담합을 적발했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담합은 안타깝게도 ‘무혐의’로 심리가 종료됐다. DJ 정부시절 벤처정책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온라인증권사인 키움증권이 2000년 1월 출범했다. 주식을 사고파는 매매수수료를 파격적으로 낮춘 결과 거의 0.5%에 이르는 바가지 수수료를 챙기던 20여개 기존 증권사의 담합구조가 깨지면서 평균매매수수료가 반값으로 떨어졌다. 독과점시장이 경쟁시장으로 바뀌어야 하는 좋은 사례다.
미국이나 중국 정부는 민간기업들과 발 맞춰 전기차 등 스마트자동차 산업을 미래전략산업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 모든 정책의 근본은 미래를 준비하고 독과점을 공정경쟁으로 바꾸려는 기조에서 출발했다. 항공산업의 경우도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매각대상이던 청주국제공항을 이스타항공과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이 협심해 활성화시킨 경험이 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인천공항 김포공항 중심의 독과점노선 정책기조를 지방공항으로 분산하는 적극적이고 특화된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IMF 사태 이후 DJ 정부가 적극적인 IT·벤처 정책을 펼쳐 네이버 다음 인터파크 엔씨소프트 안랩 등을 성장시키면서 재벌대기업 위주의 산업생태계를 벤처생태계로 바꿔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듯 우리만이 할 수 있는 특화된 정책에 집중할 때이다.
국민연금의 최근 3년 평균수익률은 4.7%인 반면, 캘리포니아연기금(CalPERS)은 10.3%다. 매년 국민연금 재원이 고갈될 것을 우려해 ‘많이 내고 덜 받자’는 식의 논리는 젊은 세대들에게 매력도 없을뿐더러 기성세대의 ‘민폐’일 뿐이다. 외국의 공적연기금들로부터 안정성을 해치지 않고 수익률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벤치마킹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회의원에서 물러나고 나는 선교의 사명을 이뤄내기 위해 다시 이스타항공 경영 참여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스타항공은 얼마 전 출범한 아시아·태평양지역 저비용항공사(LCC) 얼라이언스인 ‘U-FLY 얼라이언스’에 가입함으로써 95대의 항공기와 170여 곳의 노선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의 전주시 을 당내 경선에서도 승리해 비록 원외지만 다시 지역위원장에도 복귀했다. 신앙을 갖고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이뤄졌다. 나는 헌법 제123조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며 헌법 제119조 ‘경제민주화’의 꿈을 가슴에 품고 여전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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