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후 지백호 묘비명
경주 남쪽 삼십리 되는 곳에 아늑한 동리가 있으니 곳 노곡동이다, 동리 북쪽에 한 봉의 웅장한 산줄기가 경주 남산으로 부터 뻗어 내려와서 앉은 호랑이가 웅크린 용처럼 생겨 남쪽을 향하여 대를 이룬 곳이 있으니 이곳이 백운대(白雲臺)이다,
백운대 위에 10여기의 큰 산소가 있는데 봉분의 높이나 묘역의 넓이가 왕릉 못지않아 새대가 오래된 오늘날에도 이 지방 사람들이 [鄭氏 시조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아 ! 슬프도다, 오늘날 날에서 신라 초 까지 2천여년이 지나는 동안 비와 바람의 재앙이 많았고 난리의 禍가 한 두번이 아니어서 언덕과 산 골짜기 까지도 여러 번 모양을 바뀔 정도였다, 또 하물며 잊기 쉬운 것이 사람의 일이고 보전 하기 어려운 것이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오직 이곳 백운대는 아무탈 없이 산소가 그대로 보전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간의 꾀로 만 될 수 있는 일이랴.
사실은 하늘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분명치 못한점은 일이 너무 오래되어 근거가 확실치 못하고 또 더군다나 위와 아래에 많은 산소가 있어서 어느 산소가 시조 산소가 됨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단비(壇碑)만을 세우고 시제(時祭)를 올린지가 또한 수 백년이 되었지만 끝내 마음에 만족치 못한점이 있었다,
정묘(서기 1987)년 봄에 모든 일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산소를 대대적으로 정화(淨化)할 것을 정하고 겸하여 전날 마음에 만족치 못한점을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산세로 볼 때 제일 위에 있는 산소가 가장 오래된 산소인 듯 하고 족위(族位:족장볍.즉 겨례붙이의 장사법]로 살펴볼 때 가장 오래된 산소가 분명 시조의 산소인 듯 하다,
사실로 그러하다면 당연 가장 오래되고 또 분명한 산소를 시조 낙랑후의 산소로하여야 될것이다,]하니 오늘날에 와서 수백년 동안 만족치 못한점이 만족하게 되었고 수십대 동안 갖추지 못하였던 석물을 갖추게 되었으니 누가 감히 전날 만족치 못하였던 점을 다시 되풀이 하겠는가 이와 함께 鄭氏 뿌리를 존중하고 시조를 공경하는 도리에 좀 더 가까이 가게될것이다, 회의가 끝난뒤에 宗人 동성,성균,기호,관섭,경호,채환,희곤,등이 종인들의 뜻으로 부족한 나에게 [시조 사적중에 가히 후세에 전 할 만한 것을 글로 적어라]부탁하니 돌아 보건대 부족한 내가 사실로 감당치 못 할 일이나 후손의 한사람으로 끝내 사양 할 수 없어 이에 옷깃을 여미고 글로 적노라.
시조의 휘자는 지백호(知伯虎)요, 처음 진한 땅 자산 진지촌(자山珍支村)에 강림 하시니 재목됨이 무리에 뛰어나고 德이 모든 사람의 으뜸이 되어 진지촌의 장이 되시었다,
이에 알천,돌산,무산,금산,명활 등등의 모든 촌장과 더불어 같은 때에 섯고 또 지역을 접하여 살으니 이분들이 바로 뒷 날 신라의 육촌장(六村長)이 되었다,
동경지(東京誌)에 잇는 [육부대인 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을 어느 사람은 거직이라 의심하는 이도 있으나 王儉이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에 강림 하였다는 것과 三乙라.가 땅속에서 솟아 나왔다는 것이 전에도 그러한 류의 말 이 있었고 더군다나 大人의 태어남이 어찌 보통 사람보다 특이한 점이 없겠는가,
한선제 시절 원년 임자(Bc 69)년 3월에 시조께서 5명의 촌장과 더불어 赫居世를 얻어 기른지 13년만인 갑자(Bc 57)년 4월에 혁거세를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고 임금을 도와 나라를 세움과 동시에 어진 신하가 되어 훌륭한 정치를 베푸시니 이 때문에 낙랑후(樂浪侯)로 봉하게 되었다,
임진(서기32)년에 임금이 6부를 고치고 姓을 하사 할 때에 진지촌을 본피부(本彼部)로 바꾸고 성을 鄭氏로 하사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鄭氏가 있게 된 시초이다,
어떤 자가,[모든 정씨가 다 여기에서 시작 되었는데 근원(根源)이 멀어 지면서 派가 나뉘어 본관을 각각 다르게 썼다,
여기에서 유독 경주정씨가 끝내 옛 경주의 본관을 그대로 쓴 것은 경주정씨가 모든 정씨중 에 서도 장파(長派)가 되기 때문이다,] 고 말한다,
또 그 뒤 484년이 지난 병신(서기516)년에 법흥왕이 문화(文和)로 시호를 주었고 또 그 뒤 138년이 지난 병진(서기656)년에 태종 무렬왕이 낙랑후의 후작(侯爵)이 그가 세운 功에 미치지 못한다,하여 봉호(封號)를 올려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 하였다,
대개 문화의 시호와 감문왕의 추봉을 놓고 어느 서람은 삼국사(三國史)에 없다는 점을 들어 말하는 이도 있다,
그렇지만 옛날 범공(范公:중국의 명신.범충엄)의 맥주(麥舟:석만경의상에 보리를 보내도움)을 일로 세상에서 이 사실이 범공의 행상에 없다고 해서 의심하는 이는 없다,
더군다나 후손으로써 조상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 아무리 사적인 기록 이지만 이미 증거 할만한 것이 있는 것을 어찌 그 기록이 사적인 것을 흠잡아 빼놓음을 범공의 맥주처럼 할 수 있겠는가,
또 그 뒤 1315년이 지난 신해(1971년)에 시조의 德을 생각하는 이있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니 그 사당의 이름은 입덕묘(立德廟)로 엣말의 [성대한 덕은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아 제사를 올린다는 겻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이 대개 시조께서 생전에 공을 세우시고 사후에 국가로 부터 받은 예우의 대강인데
시조의 높은 공(功) 큰이름에 비교할 때 태산호망에 불가하다,
그러나 물건을 잘보는 사람은 한개의 깃털에서도 봉의 전체를 볼 수 있고 한점의 고기에서도 솥전체의 맛을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신라와 고려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 까지 세대가 멀어 질수록 시조를 사모함은 더욱 더 간절하고 사적이 오래 될수록 시조를 경모함은 더욱 더 돈독하여 마침내는 사람들이 신라를 말하면 노인 어린아이 구별없이 모두 신라는 6대인이 세운것임을 알고 경주지방에서 배군대를 말하면 멀고 가까움의 차이 없이 배군대는 낙랑후의 산소가 있는 곳 임을 알 정도가 되었다,
설령 시조의 위대한 업적과 큰 사적이 하나 하나 모두 기록이 있고 일과 얼이 유실됨이 없어 봉의 전체맛의 전정과 같이 되었더라도 시조의 이름이 당시에 혁혁하고 후세에 빛남을 누가 꼭 오늘날 이것보다 낫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도 이보다도 큰 점은 시조께서 仁을 쌓고 德을 닦아서 경이 후손에게 미쳐 큰 벼슬을 역임하고 높은공을 세운 인물이 앞뒤에 게속 되었고 큰덕과 깊은 학문이 있는 사람이 안밖에 가득하여 나무의 뿌리가 굳건함에 가지가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음에 흐름이 깊은것과 같으니,...
***연일鄭氏의 파조 길모(佶模)*와 동래정씨의 파조 교림(僑林)은 모두 시조의 32세손이 되고,
다음으로,
온양정씨의 파조 보천(普天)은 시조의 34세손이 되며, 초계정씨의 파조 배걸(倍傑)은 36세손이 되고, 하동정씨 파조 손위(遜位)는40세손이 되는등 등나무의 성대한 잎과 그늘이 팔도에 가득할 정도임과 동시에 시조에게 있어서는 모두 멀고 빛나는 후손이 되니 마치 물의 천파만가지가 같은 근원에서 시작 되었고 나무의 남쪽가지 북쪽가지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것과 같아 나무로 말하면 직간,이요~ 물로 말하면 원파와 같은 우리 경주정씨 만이 영구히 시조의 선휴(先休)를 받을 뿐 아니라 나무로 말하면 방지,요. 물로 말하면 지류와 같은 모든 정씨들도 또한 함께 시조의 유은(遺恩)을 받을 것이다,
이점으로 볼 때 천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 백운대의 산소가 천지와 함께 안전 할 것이고 일월(日月)이 항상 밝은 한 시조의 위대한 사적이 일월과 함께 빛날 것임을 알 수 있다,
인하여 삼가 명사를 지어 이르기를......
[우리나라 모든 씨족 중에 오직 鄭氏가 가장 거대 하도다,
우리 자산에 대인이 강림 하시었도다, 임금이 일을 홀로 이루지 못 하니 반드시 신하의 도움을 기다리 도다,
참으로 훌륭하신 낙랑후께서 이에 임금을 도우 시도다, 그 공은 주무왕의 十난신에 비교 할 만 하고 그 헤택은 먼 백대에 까지 흐르리로다,
여경이 뻗히는 것은 대대로 정승 판서가 배출 되도다, 이것이 어찌 신라 千年만 그러 했으랴,! 고려.조선에서도 그러 하였도다, 또 어찌 고려.조선 두 나라에서 만 그러 하였으랴,! 무궁한 뒷 세상까지 그러 하리로다, 비록 오래된 씨족 이지만 그 명만은 오직 새롭도다, 저 백운대를 바라볼 때 시조의 산소가 안전 하도다,
이것은 사람의 꾀로 만 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하늘의 도움이 있음 이로다, 우리 많은 후손들이 시조의 德을 어찌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까 이에 좋은 碑石을 다듬어 글을 새기도다,
높고 높은 꽃다운 이름은 길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는 영원하리라,
경주후손 동휘 는 삼가 撰 하고,
오천후생 玎容 은 기록하다,
後文: 오천정씨 후생은 지백호 선조님에 대한 검정과 두터운 연구를 겸하여 더욱 밝은
묘문을 기록하여 주길 간절히 바라며 언제 어느 군자가 되실지 기다려 보리라!
첫댓글 한번 가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