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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촛불(마 1:18-25)
<본문 속으로 들어가기>
*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로 오늘 켜는 초는 천사들의 초라 불리며 사랑을 상징한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비로운 탄생 과정을 창안한 마태만의 독창적인 이야기지만 실제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한 남자로서 결코 기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 이유는 정혼한 여인이 자신과 상관없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녀의 결합이 아닌 성령에 의한 잉태를 알게 된 요셉의 대처 방식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전하려한다.
* 일단 유대사회에서 본문과 같은 상황이 실제 일어났을 때 요셉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겠다. 신 22:13-30에는 여성의 혼전 순결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결혼하거나 약혼한 여성이 다른 남성과 정을 통하다 발각됐을 때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신 24:1에는 남녀가 결혼한 후 남편이 아내에게서 뭔가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에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요셉은 첫 번째를 택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두 번째를 선택하려고 했다.
* 아마 마태복음의 저자가 19절에서 요셉을 의롭다고 표현한 것은 유대사회에서 모세의 율법을 따라야 하는 입장에 있던 요셉이 가혹한 사형보다 덜 가혹한 파혼을 택하려 했기 때문이고 정혼녀인 마리아를 망신주기 위해 소란을 떨기보다 가만히(남모르게) 일을 진행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요셉과 같은 처지에 처한 유대 남자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보여주기 위해 여자의 부정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알려 부정을 정죄하고 파혼을 선포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던 요셉의 시도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 그럼에도 여기까지는 일반적이던 특이하던 일어날 법한 일이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이 일어나는데 바로 요셉이 꿈에서 천사의 말을 들은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를 의미하는 말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와 같은 말이다. 즉 요셉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들은 것이다. 이후 그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고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가톨릭에서는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해 요셉이 마리아와 영원히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삶에 적용하기>
*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태복음의 저자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이런 요셉의 변화에 놀라운 복선이 깔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바로 율법을 중시하던 유대 사회에서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해받은 요셉이 율법을 넘는 사랑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예수의 생애를 통해 드러나는 숱한 사건들 속에서도 드러나는 사랑의 전초와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예수의 신비로운 탄생을 알리기 위한 이야기의 차원이 아니라(비록 저자의 의도는 그랬을지 몰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 복음서에서 예수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은 율법의 준수 여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리새(바리사이)'라는 말의 어원은 ‘분리된 사람, 구분된 사람’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일반 대중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율법을 통해 거룩함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율법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이스라엘의 자유를 회복시켜 줄 메시아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다.
* 신약 성경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단식이나 이혼, 또는 맹세 등 매사에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고자 했다. 특히 안식일과 정결 예식 그리고 십일조에 관한 규정은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철저하게 지켰다. 그리고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래서 율법에서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 이방인들은 물론이고, 율법을 알지 못하거나 안식일과 정결례의 규정 등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다른 유대인들과도 접촉하기를 꺼렸다.
* 더 나아가 세리나 매춘부, 병자나 죄인들을 부정한 존재로 여기고 무시하거나 멸시했다. 이처럼 편협한 사고에 매몰되어 있었음에도 나름 민족적 정통성을 확보하고 있어 친로마적인 사두개인들보다 대중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고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지킬 수 있었다. 복음서가 바리새인들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붕괴된 유대 사회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주도권 다툼을 벌였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 예수는 바리새인들이 중시한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를 넘
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안식일 규정에 얽매인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향벽설위->향아설위)하거나 간음한 여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로 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면서 여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정결례 때문에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진정한 이웃이라는 비유도 마찬가지다.
* 가장 결정적인 가르침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이다. 아시는 대로 예수의 답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 가는 계명)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라는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마 22: 34-40) 예수는 결코 율법이 필요 없다고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다만 그 해석과 적용이 편협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있다고 비판했을 뿐이다.('원수 사랑'까지 제시)
* 예수 당시 구전(口傳)이나 성문(成文)의 형태로 전해 내려온 계명들이 무려 613개나 되었고, 그중 248개는 “~하라”는 계명이며, 365개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었다. 율법학자들이 다 외울 수 있을 뿐 일반인들은 기억하기도 힘든 수많은 계명들의 본질적 의미는 망각한 채 계명의 준수 여부에만 관심이 있던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율법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두 계명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제시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진정한 사랑의 가치나 의미까지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 "사랑은 고약한 사람을 향해 오래 참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질투하지 않으며, 이생의 자랑을 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를 세우지 않으며, 기본예의와 권위질서를 지키며, 이기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며, 혈기를 부리지 않으며, 악을 도모하지 않으며, 아첨과 뇌물, 불의한 삯을 추구하지 않으며, 진리 되신 예수님 안에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들을 행하여, 기뻐하고 모든 연약함과 차이점에 대해 용납하며, 모든 것을 주께 맡기며 모든 환경과 사람을 향하여 소망을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약속과 목적을 잊지 않고 인생 끝까지 완주한다.”
*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고전 13:4-7)의 내용을 헬라어 원어의 의미에 좀 더 가깝게 풀어 옮긴 내용이다. 말씀이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사랑에 대해 가장 아름답고 구체적인 이런 정의를 머리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실천하는 일이다. 누가 뭐래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과 가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랑을 올바르게 실천하지 않는 현실이지 사랑 그 자체는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는 하지만 실천은 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 바울은 사랑의 15가지 속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을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줄지라도, 자랑스러운 일을 하려고 내 몸을 넘겨 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전 13:1-3)
* 한국 교회가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되어 사회에 유익하지 못한 존재라는 비판을 받는다면 그 이유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가 진보적이고 자유롭고 이러저런 장점을 갖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 그리고 우리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 예언하는 능력,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 나눔과 헌신 이전에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믿는다.(전자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 설교를 준비하면서 고전 13장의 내용을 묵상하는 오래 참는다는 말이 유독 마음을 찔렀다. 4절부터 7절까지 제시된 사랑의 15가지 속성 중 첫 부분이 '오래 참는 것'(4절)이고 마지막이 '모든 것을 견디는 것'(7절)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면서 결국 진정한 사랑이란 오래 참음에서 시작해서 모든 것을 견디는 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두 속성의 의미는 비슷하게 들리지만 조금 다르다. 전자는 원수 또는 고약한 사람에 대해 오래 참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약속과 목적을 잊지 않고 완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럼에도 우리는 이 두 가지 속성만을 기준 삼아 판단해보더라도 나와 상대의 사랑의 온전한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또는 율법학자들)은 이런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함부로 상대를 죄인이라고 규정하곤 했다. 우리 안에도 이런 속성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의 기준은 율법이었지만 그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잊은 채 비본질적이고 부수적인 계명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런 편협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바리새파 같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 한국 교회에는 무늬만 기독교인일 뿐 삶은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한국 교회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이유도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대신한 교리(동정녀 탄생, 육체 부활, 성삼위일체 등)는 강조하는 사람들은 넘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가장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대림절을 맞아 네 가지 촛불의 의미들을 살펴보았는데 예언, 소망, 기쁨 등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사랑이라는 사실, 다른 모든 것을 잊어도 사랑의 중요성만큼은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오늘 본문에서 요셉의 태도 변화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율법과 사랑의 올바른 관계이다. 율법은 우리를 훈련시키는 기준이기 때문에 소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래 정신을 잃고 기준 자체에 얽매이면 족쇄가 되고 만다. 율법이 없다면 아무 기준이 없게 되기 때문에 무법천지와 같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랑 없이 율법만을 강조하면 삭막하고 스산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 가지만을 택하라면 사랑 없는 율법보다 율법 없는 사랑이 나을 수 있다. 이왕이면 사랑에 기반한 율법/교리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말이다.
* 그런 점에서 율법과 사랑(은혜)을 7가지로 구별한 M. R. 디한 박사의 말을 기억하자. 1) 율법은 가장 선한 사람도 정죄하지만, 사랑은 가장 악한 사람도 구원. 2) 율법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라고 말함. 3) 율법은 죄의 빚을 갚으라고 하지만, 사랑은 이미 죄값은 지불했다고 말함. 4)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사랑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함. 5) 율법은 돌에 새겼으나 사랑은 마음에 기록. 6) 율법은 두려움을 가져오지만 사랑은 화평과 확신을 가져옴. 7) 율법은 복종을 강요하지만 사랑은 순종하는 능력을 줌.
<마무리하기>
* 대림절의 촛불은 하나의 상징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결단을 요구하는 도구이다. 2천년 전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났음을 기억하고 그 사실에 감사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전해진 복음,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정신을 통해 올곧게 전하는 일이다. 때문에 우리가 켜는 촛불은 교회 안의 일부만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더 넓은 세상을 밝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 지키고 계승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묵상할 필요가 있다.
* 그동안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수많은 촛불이 켜졌다. 옥성삼 크로스미디어랩 원장의 말대로 1968년 미국의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때 촛불은 침묵 비폭력 평화 생명을 상징했고, 1981년 11월 당시 공산주의 동독의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촛불기도회는 독일통일의 초석이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효선·미선 학생 추모 촛불집회에서부터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에 저항했던 촛불, 2019년 검찰 개혁을 요구하는 촛불들이 연이어 켜지고 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의의 촛불을 들고, 세상의 어두움을 밝혀야 하는 것이 시대를 초월한 기독교인들의 의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예언, 소망, 기쁨, 사랑의 촛불을 켜야 한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도 한 개의 촛불이 켜지면 길을 찾을 수 있다. 촛불의 수가 많아질수록 길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나라로 가는 길을 밝히는 촛불을 켜고 그런 촛불이 되는 일이라 믿는다. 우리가 켜는 촛불은 예수 탄생은 물론 요셉의 태도 변화를 통해서 전해진 온전한 사랑의 의미를 담은 촛불이어야 할 것이다.
* 그 사랑의 촛불을 켜기 위해, 사랑을 전하는 촛불이 되기 위해 우리가 회복하고 실천하며 계승해야 할 온전한 사랑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복된 소식이 이 땅에 이뤄지기를 소망하며 사랑의 촛불을 켜는 하늘씨앗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