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 교리는 불필요한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바지만, 내 서재에 꽂혀 있는 책을 훑어보면, 교리 관련 책이 매우 드물다. 세어보니 스무 권 남짓하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책을 모아도 오십 여권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란 체계적으로 논증되고, 조직적으로 설명하면 안 되는 어떤 것, - 그것을 신비(mystery)라 한다. - 을 말로 다 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가상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을 어떤 형태로든지 본 모양을 뒤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탓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즐기고 노는 게 좋았다.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말하지 않고 남겨 둔 부분에는 멈추어 서서 침묵하고, 성서가 가는 곳까지 가고, 가지 않는 곳은 가고픈 욕망을 애써 누르고 돌아서는 것이 신자의 마땅한 도리라 믿었다. 그렇게 다가 온 성서의 말씀을 2000년의 역사적 거리를 넘어 우리 당대를 향해 선포하고 증언하기 위해서 철학과 역사, 문학을 읽는 것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교리 공부보다 재미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들은 교리와 달리 박제되거나 형해화되지 않고 펄펄 살아 있었다. 뼈도 있지만, 피가 있고, 살이 있고, 땀이 있고, 눈물이 있었다. 사람 냄새가 있었다.
그렇다고 교리를 부정한 적은 없다. 내가 특정한 상대를 싫어한다거나 마뜩치 않다 해서 그의 존재를 지워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냥 내버려두면 될 일이다. 게다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 역할과 의미가 있지 않은가? 성서의 창조 신앙은 이 세상에 있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생겨났고, 창조세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세계관의 결정체가 아니던가? 해서 교리의 영어인 ‘Dogma’는 독단이면서도 교의라는 모순적 의미를 내포한다. 잘못하면 신앙이 독선으로 길을 잘못 들 수도 있지만, 가야할 길을 잘 갈 수 있는 안내자랄까, 지도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선뜻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언젠가는 읽어야 하지 않나, 또는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곤 한다.
교리의 정의상, 교리는 이중적이다. 첫째, 기독교 신앙은 일련의 교리나 신조가 아니다. 교리를 많이 안다고 신앙이 성장하거나, 인격이 성숙하지 않는다. 다만 정보와 지식이 더 많이 축적했을 뿐이다. 예컨대, 기도에 관한 책을 수십, 수백 권을 읽었다고 하자. 십중팔구 기도 생활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잠깐 기도하게는 한다. 그러나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제일 잘 배울 수 있다. 독서는 곁에서 보조하는 역할에 그친다. 교리는 기도를 설명하고 도울 수는 있어도 기도를 대체할 수 없다, 결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말이다. “교리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고 기도하도록 돕는 것이다.”(「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23쪽)
한때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을 성서 못지않게 탐독한 적이 있었다. 가장 큰 감동은 조직신학 책이 설교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찌나 은혜가 되던지 붉은 펜으로 밑줄을 긋지 않은 곳이 거의 없고, 붉은 펜으로 ‘Amen!’이라고 얼마나 적었는지 모른다. 나뿐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그리고 본인도 밝혔듯이, 그는 교의학이란 모름지기 설교이어야 하고, 그렇게 책을 썼다. 그렇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성서도 제쳐두고 읽은 탓도 있지만, 성서에 견줄 수는 없었다. 어차피 성서에 비해 설교와 교의학은 2차 문헌이다. 아무리 뛰어난 교의학 책이라도 그것이 설명하려고 하는 신앙을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둘째, 기독교 신앙에는 교리가 필요하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는 전통적으로 신학의 과제는 전통적으로 영성 함양과 합리적 이해를 위한 지식으로 정리했다. 그는 여기에 남미적 상황에서 비판적 숙고로서의 신학을 추가한다. 신학 - 나는 지금 신학과 교리를 같이 사용한다. - 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이요 비판적 태도이다. 그러하기에 신학은 신앙에 앞서지 않고, 신앙을 반영하고 비판한다. 그는 정통 실천(orthopraxis)을 교리가 신앙에 최우선하지 않고 병행한다는 점, 더 나아가 기독교적 실천을 증진시킨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해방신학」, 26쪽)
그러면서도 “신학은 영성과 합리적 지식을 둘 다 필요로 한다. 이 두 가지는 모든 신학적 사고의 영속적이며 불가결한 기능이라 하겠다. 그러나 두 가지 기능을 다 살려야 할 것이며, 신학사에 얼룩진 분열과 왜곡이 없어야 한다.”(21쪽)는 점을 잊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학은 그 자체로 하나님과 성서에 대한 묵상으로서 영성적 행위이며 영성을 심화시키며, 지식의 체계로 성립하기 위한 규칙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앞의 둘이 역사적으로 지배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었던 과오를 돌이켜 볼 수 있는 장치가 신학에 있어야 하고, 지나치게 영성과 지성에만 함몰하여 몸으로 살아내는 실천적 삶을 간과했던 것을 반성하는 행위로서 신학과 교리의 역할이 필요하다.
교리는 불필요한가? 이 물음은 한완상 박사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를 읽은 것이 계기다. 그의 메시지 중 하나는 일관되게 교리화, 제도화되기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체취와 숨결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그 결론에는 십분 동의하나, 논리를 전개하고, 주장을 개전하는 과정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교회가 독선과 오만에 빠지게끔 만든 한 요소가 교리인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교리가 절대화되고, 유용성을 넘어 오남용 되고 있는 실정에서 한박사의 지적은 용기 있을 뿐 아니라 적절하다.
하지만 마치 교리의 존립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은 교리의 역사를 보건대, 당대의 물음과 도전에 대한 치열한 내적 투쟁과 토론의 산물이요 결실이라는 점을 놓친 듯싶다. 교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잖은가. 역사적 교리의 끈적끈적한 땀 냄새도 역사적 예수의 체취에 견주지 못해도 소중하기는 매한가지다. 본시 교리란 독단과 교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리는 진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교리가 비리의 온상도 아니다. 교리는 그저 교리일 뿐이다. 교리는 신자의 신앙과 실천에 있어서 필요하다. 갓 신앙 생활하는 이들에게 기초적인 교리는 얼마나 쓸모 있는지. 기존 신자도 예외가 아니다.
교리의 과잉을 비판하느라 교리 자체를 갖다 내버리지 않을까하는 쓸데없는 우려를 하느라 몇 자 적어 보았다. 그러나 소득이 없지 않다. 교리가 독단이 되지 않으면서도, 그리고 독선의 위험성을 제 스스로 인식하는 테두리 내에서 필요를 인정해야 하겠다. 그 길을 모색하기 전에 최소한의 합의는 이것이다. 교리는 필요하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