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인연(因緣) 청구야담4

장동(壯洞)의 한약 거간꾼은 늙도록 홀아비로 살면서 자식도 없고 집도 없이 약사(藥肆)를 돌아다니며 숙식하였다. 4월 어느 날 영조(英祖)께서 육상궁(毓祥宮-조선조 역대 임금 중 정궁 출신이 아닌 임금의 생모 신위를 안치한 사당)에 행차하셨는데 소나기가 내리퍼부어 도랑물이 넘쳐흘렀다. 임금님 행차를 구경하려고 나왔던 사람들이 약사에서 비를 피한 지라 약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방과 처마 밑에 빽빽이 서 있었다. 약 거간꾼이 그 때 방안에 있다가 문득 말하였다. "오늘 비는 꼭 내가 젊었을 시절 조령(鳥嶺-새재. 문경과 괴산 사이에 있는 재)을 넘던 때에 만났던 비 같군!" 곁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비에 어찌 고금(古今)이 있소?""그 때 가히 웃을 만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곁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그 사연을 얻어들을 수 있을까요?" "모년 여름에 왜황련(倭黃連-일본산 황련. 황련은 깽깽이풀의 뿌리로 한약재에 쓰임)이 떨어져서 나는 급한 걸음으로 동래부에 가서 이것을 사오려고 길을 떠났었소. 한낮에 조령을 넘어 겨우 진영의 점사를 지났는데 그만 무인지경 속에서 소나기가 급하게 퍼부었다오.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웠으므로 비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산기슭에 있는 한 초막을 발견하고 곧바로 초막으로 들어가니 한 노처녀가 있었소. 나는 먼저 젖은 옷을 벗어 빨았는데, 처녀는 곁에 있으면서 피하지 않았소. 갑자기 나는 마음이 동하여 그녀와 상관(常關)을 하였는데도 그녀는 난감해하는 기색이 없었소. 조금 후 비가 그쳐. 나는 그녀의 거주지도 묻지 않고 곧장 그 곳을 떠났었소. 오늘 내리는 비가 꼭 그 때의 소나기 같으므로 우연히 생각이 난 것이오." (이야기가 끝나고)조금 있자 처마 밖에서 한 평 두건을 쓴 아이가 곧장 마루로 올라와 물었다."조금 전에 조령 비 이야기를 한 분이 어느 분이신지요?"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약 거간꾼을 가리켜주자 그 동자는 곧장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지금에서야 비로소 아버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천행입니다."무수히 많은 구경꾼들은 모두 의아해하였고 약 거간꾼 또한 이상하게 여겨 말하였다."이것이 무슨 말이오?" 동자가 말하였다. "부친의 몸 위에 표식 될 만한 것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청하옵건대 잠시 옷을 벗어보시지요."이내 옷을 벗으니, 동자는 약 거간꾼의 허리 밑을 본 후에 더욱 의심할 바가 없다고 생각하며 말하였다."진실로 저의 아버님이십니다."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였다."그 연유나 들어보세."동자가 말하였다. "저의 모친이 젊었을 시절 초막을 지키다가 우중에 행인과 한번 지내고 난 후 그로 인해 임신하여 저를 낳았답니다. 저는 점점 자라면서 말을 배웠는데, 이웃 집 아이들은 아버지를 불렀지만 저는 부를 수 있는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저의 모친께 자세히 물었었지요, 그런데 저의 모친께서 말씀해주셨던 것이 조금 전 부친이 말씀하셨던 것 과 똑 같았습니다. 또 어머님말씀이 그 때 언뜻 보니 왼쪽 볼기에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었다고 하셨었지요. 어머님 말씀을 들은 후 저는 12살 때 집을 떠나 아버지를 찾아 8도를 두루 돌아다녔고 경성에는 세 차례나 들어왔습니다. 그런지가 지금 6년이 되었는데 다행히도 아버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하신 일입니다. 어찌 천만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동자가 이번에는 자기 부친에게 말하였다."아버님은 경성에 오래 머무르실 필요가 없으니 저와 같이 가십시다. 제가 마땅히 힘써 농사를 지어 봉양하겠습니다. 또 모친께서는 지금 수절하고 계시고, 모친의 친가 또한 빈곤하지 않으므로 끼니 걱정은 거의 없습니다." 같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혀를 차며 기이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약사 주인이 그 때 내실에 있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밖으로 나와 말하였다. "아무개가 아들을 얻었다고 하던데, 세상에 어찌 이같이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겠소? 친지들의 마음도 이렇게 뛸 듯이 기쁜데, 하물며 당사자의 마음이야 더욱 어떠하겠소?" 약사 주인 또한 아들과 함께 같이 가라고 권유하였다. 약 거간꾼은 기쁘기는 하였지만 경성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지라 졸지에 떠나가려니 초창한 마음도 없지 않았고 또 노자 돈도 걱정이었다. 동자가 말하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저의 행랑 속에 약간의 돈이 있습니다."사람들도 모두 아이를 따라가라고 힘써 권하며, 모두 행랑 속에 가지고 있던 돈을 모아 그를 도와주었는데 5,6량은 되었다. 주인 또한 10여량을 주었다. 비가 갠 후에 모든 사람들과 작별하고 아들과 더불어 동행하였다. 약 거간꾼은 집도 생기고 처도 생기고 아들과 먹을 것도 생겼으므로 넉넉하게 유유자적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출처 : 자료의 원문은 조선 후기(19세기)에 편찬된 <청구야담 권4>번역문은 이우성, 임영택의 <이조한문단편집(일조각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