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高麗史 卷90
대각국사(大覺國師) 후(煦)는 자(字)가 의천(義天)인데 송나라 철종(哲宗)의 이름자를 피하여 자로 이름을 대행하였다. 문종(文宗)이 하루는 여러 아들들에게 묻기를,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부처를 공양하고 공덕을 닦겠느냐?”라고 하니 후(煦)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제가 출가할 될 뜻을 품고 있사오니 다만 부왕께서 명령하시는대로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왕은 좋다고 허락하였다. 그는 드디어 스승을 따라 영통사(靈通寺)로 나가게 되었다.
후(煦)는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며 학문을 즐겼는데, 처음에 ≪화엄경≫을 배우니 5교(五敎)에 통달하였으며, 동시에 유가의 교리(儒術)도 연구하였는 바, 그는 정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호를 우세승통(祐世僧統)이라고 하였다. 후(煦)는 송나라로 가서 불도를 구하고 싶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선종(宣宗) 때에 이르러 여러 번 청하였으나 재상과 간관들이 그것이 불가하다고 역설하였다. 그래서 선종 2년 4월에 후(煦)는 슬며시 2명의 제자와 더불어 송나라 상인 임녕(林寧)의 배를 타고 갔다.
왕은 어사(御史) 위계정(魏繼廷) 등에게 명령하여, 여러 길로 나누어 배를 타고 쫓아가게 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으므로, 예빈승(禮賓丞) 정근(鄭僅) 등을 파견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넜는지 탐문케 하였다. 후(煦)가 송나라에 도착하니 황제가 수공전(垂拱殿)에서 그를 접견하였는데 손님 대접하는 예절로써 그를 대우하였으며 아주 후하게 대접하고 잘 돌봐 주었다. 후(煦)가 각지를 여행하면서 불법을 탐구할 것을 원하니, 황제의 명령으로 주객원외(主客員會) 양걸(楊傑)을 영접사(館伴)로 임명하여 동행케 하였다.
강소성(江蘇省) 절강성(浙江省) 등의 여러 절에 가니, 모두 다 대신들과 동일하게 그를 영접하고 전송하였다. 왕이 글을 황제에게 보내 후(煦)를 본국에 돌려보낼 것을 청하였더니, 황제는 조서로써 귀국을 허락하였다. 후(煦)가 예성강에 이르니 왕은 태후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까지 나와서 그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를 영접하고 안내하는 의식이 심히 성대하였다. 후(煦)는 불경과 경서(經書) 1천 권을 바쳤으며 또한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할 것을 왕에게 청하고, 요나라와 송나라에서 4천 권에 달하는 서적을 구입해 모두 간행하였다.
그래서 비로소 천태종(天台宗)을 창간하여 국청사에 두었다. 얼마 후에 남녘 땅을 유람하러 떠나 여러 명산을 널리 찾아 다녔고, 후에 해인사에 퇴거하였는데, 숙종이 즉위하자 사신을 파견하여 맞아오게 하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로 삼았다. 요나라 사신 왕악(王萼)이 흥왕사의 작은 종을 보고 경탄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이런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후(煦)가 왕악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황제가 불교를 독신하신다니 이 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더니 “좋습니다“하고 왕악이 찬성하였다.
그래서 후(煦)는 금종 두 개를 주조하여 요나라 황제에게 선물하기로 정하고, 드디어 답례사(回謝使)로 가는 공목관(孔目官) 이복(李復)에게 부탁하여 이 뜻을 먼저 요나라 황제에게 통지하였더니, 요나라 황제는 왕악이 사신으로 고려에 가서 제 마음대로 재물을 요구한 것으로 생각하여, 왕악을 엄벌에 처할 터이니 종을 바치지 말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복이 본국에 돌아온 후 형부(刑部)에서는 왕에게 아뢰고 그를 처벌하였다. 후(煦)가 병들자 왕이 총지사(摠持寺)로 가서 문병하였는데, 얼마 후에 죽었다.
왕이 그에게 대각(大覺)이라는 시호를 주려고 하니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서 아뢰기를 “대각이라는 것은 부처라는 말인데, 부처의 이름을 외람하게 쓰는 것은 후(煦)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이때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오(李䫨)가 말하기를 “왕후는 비록 왕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여도 예법에 의하면 출가한 중이니 복(服)이 없습니다. 그러나 재주와 덕행이 모두 우수하며 명망이 요나라와 송나라에까지 드높아, 국사(國師)로 추존하려 하는 터이니 복(服)을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왕과 여러 신하들이 현관(玄冠) 소복(素服)하고 3일간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부의를 매우 후하게 하였고, 마침내는 책명을 내려 대각국사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또 제자들에게도 교서로서 위로하였다.
(원문) 高麗史 卷90 - 列傳 卷第3 - 宗室1 - 大覺國師煦
大覺國師煦字義天, 避宋哲宗諱, 以字行. 文宗, 一日, 謂諸子曰: “孰能爲僧, 作福田利益耶?” 煦起曰: “臣有出世志, 惟上所命.” 王曰: “善.” 遂隨師, 出居靈通寺. 煦, 性聰慧, 嗜學, 始業華嚴, 便通五敎, 旁涉儒術, 莫不精識, 號祐世僧統. 煦欲入宋求法, 王不許, 至宣宗時, 數請, 宰臣諫官, 極言不可, 二年四月, 煦潛與弟子二人, 隨宋商林寧船而去, 王命御史魏繼廷等, 分道乘船追之, 不及, 遣禮賓丞鄭僅等, 問過海安否. 煦至宋, 帝引見垂拱殿, 待以客禮, 寵數渥縟. 煦請遊方問法, 詔以主客員外楊傑爲館伴, 至吳中諸寺, 皆迎餞如王臣. 王上表乞令還國, 詔許東還. 煦至禮成江, 王奉太后出奉恩寺以待, 其迎迓導儀甚盛. 煦獻釋典及經書一千卷, 又於興王寺, 奏置敎藏都監, 購書於遼․宋, 多至四千卷, 悉皆刋行, 始創天台宗, 置于國淸寺. 已而南遊, 徧歷名山後退居海印寺, 及肅宗卽位, 遣使迎還, 住持興王寺.
遼使王萼, 見興王寺小鐘, 歎美曰: “我朝所未有.” 煦謂萼曰: “吾聞, 皇帝崇信佛敎, 請以此鐘獻之.” 萼曰: “可.” 煦請鑄金鐘二簴, 將獻于遼帝, 遂屬回謝使孔目官李復, 先奏其意. 遼帝以萼奉使, 妄有求索, 加峻刑, 令勿獻, 及復還, 刑部奏治其罪. 煦病, 王幸摠持寺, 問疾, 尋卒, 王欲謚大覺, 中書門下省奏: “大覺者, 佛也. 僭佛號, 非煦意.” 王不從, 政堂文學李䫨言: “煦於上, 雖周親, 而按禮, 出家無服, 然才行俱優, 名重遼․宋, 欲追贈國師, 不可不服.” 於是王與群臣, 玄冠素服, 輟朝三日, 賜賻甚厚, 遂冊贈大覺國師, 又賜敎門徒弔慰.
(144-142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141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41일차에도 계속 '충렬공 관련 고려사 기록' 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충렬공 관련 고려사 기록]
(앞에서 이어서, 7- 6회차)/ 무곡
'어사 위계정'이라는 직함이 등장하는 것을 볼때
충렬공께서는 어사 임무도 수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선종때 어사(御使)로서 의천(문종의 아들, 선종의 동생)의 행방을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래의 글은 위씨요람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무곡
2011년도 우수한 인재를 공직에 많이 유치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던
행정안전부 주관 "공직채용박람회 " 준비유인물 입니다.
공무원 직책과 품계가 잘 정리된 도표가 보입니다.
(행사 참여 연도 2011년, 게재자)
'왕은 어사(御史) 위계정(魏繼廷) 등에게 명령하여'
어사란 관직을 보니 암행어사란 단어가 새삼 기억나네요.
결국 매우 중요한 국가의 대사를 충렬공께서 맡으셨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王命 御史 魏繼廷 等 ᆢ"
고려사 원문에 있는 어사의 史자가 혼용이 되는지
'使'자가 아닌 '史' 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글자 한자가 때로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머뭇거리게 합니다./ 무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