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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가(燕行歌)
- 홍순학(洪淳學)
아아, 하늘과 땅 사이에 남자 되기가 쉽지 않다.
변방에 위치한 나라에 사는 내가 중국 보기를 원했더니,
고종 3년 3월에 가례 책봉이 되오시니,
국가의 큰 경사요 백성의 복이라.
청나라에 청원하기 위해 세 명의 사신을 뽑아 내시니,
정사에는 우의정 유후조요, 부사에는 예조 시랑 서당보로다.
일행 중에 어사인 서장관은 직책이 소중하구나.
겸직으로 사복 판사와 어영 낭청을 하였으니,
이 때의 나이가 이십오 세라 이른 출세가 장하구나.
(중략) 줄거리
서울을 떠나 모화관, 무악재, 홍제원, 녹번, 박석 구파발, 창릉내, 고양, 파주목, 임진강, 진서루, 장단부, 송도, 만월대, 선죽교, 청석관, 금천, 청단역, 돌여울, 평산부, 곡산부, 중화참, 총수관, 서흥부, 검수관, 봉산군, 사인암, 황주, 월파루, 중화부, 이천역, 대동역, 평양에 이르며, 평양에서 연광정, 부벽루, 대동문, 청류벽, 전금문, 영명사, 칠성문, 기자문 등을 돌아본 뒤, 순안현, 숙천부, 안주성, 만경루, 백상루, 청천강, 박천, 가산, 샛별령, 납청정, 정주성, 북장대, 곽산군, 선천부, 의검정, 동림진, 차련관, 철산, 서림진, 양책관, 용천, 청류암, 석계교, 소곶관 등을 거쳐 의주에 들어가 취승당과 통군정을 구경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압록강을 건너기까지 고국의 산천과 거기에 얽힌 역사적 사실들을 사실적이면서도 정감있게 묘사하였다.
여름 5월 7일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짜로 정해졌네.
가지고 갈 물건을 점검하고 여행 장비를 잘 정돈하여
압록강가에 다다르니 송객정이 여기로구나.
의주 부윤이 나와 앉아서 다담상을 차려 놓고,
세 사신을 전별하는데 구슬프기도 한이 없다.
한 잔 한 잔 또 한잔으로 서로 앉아 권고하고,
상사별곡 한 곡조를 차마 듣기 어려워라.
장계를 봉투에 넣어 봉한 후에 떨뜨리고 일어나서,
나라를 떠나는 감회가 한이 없어서 억제하기 어려운 중
여인의 꽃다운 눈물이 마음 속의 회포를 더하게 하는구나.
육인교를 물려 놓으니 장독교를 대령하고,
가마 앞 통인이 하직하니 일산과 말고삐만 있고,
삼공형과 급창이 물러서니 마두와 서자만 남았구나.
한 조각 자그마한 배를 저어 점점 멀리 떠서 가니,
푸른 봉우리는 겹겹으로 쌓여 나를 보고 즐기는 듯,
흰구름은 멀리 아득하고 햇살의 빛깔이 참담하다.
어디에도 비하지 못할 이내 마음 오늘이 무슨 날인가?
세상에 태어난 지 25년 부모님을 모시고 자라나서
평소에 부모님 곁을 떠나서 오래 있어 본 적이 없다.
반년이나 어찌할 것인가? 부모님 곁을 떠나는 마음이 어려우며,
경기도 경계를 백 리 밖으로 벗어나 다녀 본 일이 없다.
허약하고 약한 기질에 만 리 여행길이 걱정일세,
한 줄기 압록강이 두 나라의 경계를 나누었으니
돌아보고, 돌아보니 우리 나라 다시 보자.
구련성에 다다라서 한 고개를 넘어서니
아까 보던 통군정이 그림자도 아니 보이고,
조금 보이던 백마산이 봉우리도 아니 보인다.
백여 리나 되는 사람 없는 곳에 인적이 고요하다.
위험한 만 겹의 산중 빽빽이 우거진 나무들이며
적막한 새 소리는 곳곳에 구슬프고,
한가한 들의 꽃은 누구를 위해 피었느냐?
아깝도다. 이러한 꽃 두 나라가 버린 땅에,
사람도 아니 살고 논밭도 없다 하되,
곳곳이 깊은 골짜기에서 닭과 개 소리가 들리는 듯,
끝없이 이어지는 험한 산세 범과 표범에게 해를 입을까 겁이 난다.
밥 짓는 곳에서 상을 차려 점심을 가져오니,
맨 땅에 내려 앉아서 점심을 먹어 보자.
아까까지 귀하던 몸이 어이하여 갑자기 천해져서,
일등 명창이 오락가락하던 수청하던 기생은 어디 가고,
상에 가득한 좋은 반찬이나 곁들인 반찬도 없지마는,
건량청에서 준 밥 한 그릇을 이렇듯이 달게 먹으니,
가엾게 되었지만 어찌 아니 우스우랴.
금석산을 지나가니 온정평이 여기로구나,
날의 형세가 황혼이 되니 한데서 잠자리를 정하자.
세 사신이 자는 곳은 군사들 쓰는 장막을 높이 치고,
삿자리를 둘러 막아 임시로 꾸민 방처럼 하였으되,
역관이며 비장 방장 불쌍하여 못 보겠다.
사방에서 외풍이 들이부니 밤 지니기가 어렵도다.
군막이라고 말은 하지만 무명 한 겹으로 가렸으니,
오히려 이번 길은 오뉴월 더운 때라,
하룻밤 지내기가 과히 어렵지 아니하나,
동지섣달 긴긴 밤에 바람과 눈이 들이칠 때
그 고생이 어떠하랴? 참혹하다고들 하데그려,
곳곳에 피운 화토불은 하인들이 들러앉고,
밤새도록 나팔 소리를 냄은 짐승이 올까 염려함이로다.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책문으로 향해 가니,
나무로 울타리를 하고 문 하나를 열어 놓고
봉황성의 장이 나와 앉아 사람과 말을 점검하며,
차례로 들어오니 묻고 경계함이 엄숙하고 철저하다.
녹색 창과 붉은 문의 여염집은 오색이 영롱하고,
화려한 집과 채색한 난간의 시가지는 만물이 번화하다.
집집마다 만주 사람들은 길에 나와 구경하니,
옷차림이 괴이하여 처음 보기에 놀랍도다.
머리는 앞을 깎아 뒤만 땋아 늘어뜨려
당사실로 댕기를 드리고 마래기라는 모자를 눌러 쓰며,
일 년 삼백 육십 일에 양치질 한 번도 아니하여
이빨은 황금빛이요 손톱은 다섯 치나 된다.
검은 빛의 저고리는 깃이 없이 지었으되,
옷고름은 아니 달고 단추 달아 입었으며,
검푸른 바지와 짙은 남빛 속옷 허리 띠로 눌러 매고,
두 다리에 행전 모양으로 맨 것을 타오구라 이름하여,
발목에서 오금까지 가뜬하게 들이끼우고
깃 없는 푸른 두루마기 단추가 여럿이요,
좁은 소매가 손등을 덮어 손이 겨우 드나들고,
두루마기 위에 덧저고리 입고 무릎 위에는 슬갑이라.
곰방대와 옥 물뿌리 담배 넣는 주머니에,
부시까지 들고 뒷짐을 지는 것이 버릇이라.
사람마다 그 모양이 천만 사람이 한 모습이라.
소국 사람 온다 하고 저희끼리 수군대며
무엇이라고 인사 하나 한 마디도 모르겠다.
계집년들 볼 만하다. 그 모양은 어떻더냐.
머리만 치거슬러 가르마는 아니 타고,
뒤통수에 모아다가 맵시 있게 장식하고,
오색으로 만든 꽃은 사면으로 꽂았으며,
도화색 분으로 단장하여 반쯤 취한 모양같이
불그스레 고운 태도 눈썹 치장을 하였고,
귀밑머리 고이 끼고 붓으로 그렸으니,
입술 아래 연지빛은 붉은 입술이 분명하고,
귓방울 뚫은 구멍에 귀고리를 달았으며,
의복을 볼 것 같으면 사나이 제도로되,
다홍빛 바지에다 푸른빛 저고리요,
연두색 두루마기를 발등까지 길게 지어,
목도리며 소매 끝동에 꽃무늬로 수를 놓고,
품이 너르고 소매가 넓어 풍채 좋게 떨쳐 입고,
고운 손의 금가락지는 한 짝만 넓적하고
손목에 낀 옥고리는 굵게 사려서 둥글구나,
손톱을 길게 길러 한 치만큼 길렀으며,
발 맵시를 볼 것 같으면 수를 놓은 당혜를 신었으며,
청나라 여자는 발이 커서 남자의 발같이 생겼으나,
한족의 여자는 발이 작아 두 치쯤 되는 것을
비단으로 꼭 동이고 신 뒤축에 굽을 달아
뒤뚱뒤뚱 가는 모양이 넘어질까 위태롭다.
그렇다고 웃지 마라. 명나라가 남긴 제도
져 계집의 발 한 가지가 지금까지 볼 것 있다.
아이들도 나와 구경하느라 옹기종기 몰려 서 있다.
이삼 세 먹은 아이들은 어른 년이 추켜 안고
오륙 세 되는 것은 앞뒤로 이끈다.
머리는 다 깎아다가 좌우로 한 줌씩
뾰족하니 땋았으되 붉은 당사로 댕기를 드려
복주감투 마래기 모자에 채색 비단 수를 놓아
검은 공단 선을 둘러 붉은 단추로 꼭지하고,
바지와 저고리도 오색으로 무늬를 놓고,
옷소매 아래 배라기라고 하는 것은 보자기에 끈을 달아
모가지에 걸었으니 배꼽 가린 꼴이로구나.
십여 세 처녀들은 대문 밖에 나와 서 있네.
머리는 아니 깎고 한 편 옆에 모아다가
쪽지는 머리 모양처럼 여러 번 접어서 잡아매고,
꽃가지를 꽂았으니 풍속이 그러하다.
호호 백발 늙은 년도 머리마다 조화(造花)로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담배들을 즐기는구나.
팔구 세 이하의 아이들도 곰방대를 물었으며,
묵을 곳이라고 찾아가니 집 제도가 우습도다.
보 다섯 줄로 된 집 두 칸 반에 벽돌을 곱게 깔고,
반 칸씩 캉이라는 걸 지어 좌우로 마주 보게 하니,
캉의 모양이 어떻더냐. 캉 제도를 못 보았으면
우리 나라의 부뚜막이 그것과 거의 흡사하여,
그 밑에 구들을 놓아 불을 땔 수 있게 마련하고,
그 위에 자리 펴고 밤이면 누워 자며
낮이면 손님 접대 걸터앉기에 매우 좋고,
기름칠을 한 완자창과 회를 바른 벽돌담은
미천한 오랑캐 주제에 집치레가 지나치구나.
때도 없이 먹는 밥은 기장, 좁쌀, 수수쌀을
푹 삶아 내어 냉수에 채워 두고,
끈끈한 기운은 다 빠져서 아무 맛도 없는 것을,
남녀 노소 식구대로 부모 형제 처자 권속
한 상에 둘러앉아, 한 그릇씩 밥을 떠서
젓가락으로 긁어 먹고, 부족하면 더 떠다 먹는다.
반찬이라 하는 것은 돼지 기름과 날파 나물,
큰 독에 담근 장은 소금물에 메주 넣고,
날마다 가끔가끔 막대기로 휘저으니,
죽 같은 된장물을 장이라고 떠나 먹네
오랑캐의 풍속들이 가축치기를 숭상하여,
잘 달리는 좋은 말들이며 범 같은 큰 노새를
굴레도 씌우지 않고 재갈도 물리지 않은 채
백여 필씩 앞세우고 한 사람이 몰아가되,
구유에 들어서서 달래는 것 못 보겠고,
양이며 돼지를 수백 마리 떼를 지어
조그마한 아이놈이 한둘이 몰아가되,
대가리를 한데 모아 흩어지지 아니하고,
집채 같은 황소라도 코 안 뚫고 잘 부리며,
조그마한 당나귀도 맷돌질을 능히 하고,
댓닭, 장닭, 오리, 거위, 개, 고양이까지 기르며,
발바리라 하는 개는 계집년들이 품고 자네.
심지어 초롱 속에 온갖 새를 넣었으니,
앵무새며 지빠귀는 사람의 말을 능히 한다.
어린아이 기르는 법은 풍속이 괴상하다.
작은 상자에 줄을 매어 그네 매듯 추켜 달고,
우는 아이 젖을 먹여 포대기로 대강 싸서
행담 속에 뉘어 놓고 줄을 잡아 흔들며는
아무 소리 아니하고 보채는 일없다 하대.
농사하기, 길쌈하기 부지런히 일을 한다.
집집마다 대문 앞에 쌓은 거름이 태산 같고,
논은 없고 밭만 있어 온갖 곡식을 다 심는다.
나귀와 말에게 쟁기를 메어 소 없어도 능히 갈며,
호미자루 길게 하여 김매기를 서서 한다.
씨아질에 물레질과 실꾸리 감는 계집이라.
도투마리 날을 맬 때 풀칠을 하지 않고 잘들하며,
베틀이라 하는 것은 가뿐하고 재치가 있다.
쇠꼬리가 없더라도 잉아 사용 어렵지 않고,
북을 집어 던지며는 바디질은 저절로 한다.
(후략)
나머지 부분의 내용
봉황성을 떠나 청석령에 이르러서는 효종 대왕이 볼모로 잡혀갈 때의 일을 비감해 하고, 넓고 넓은 요동벌을 바라보며 감격해 하기도 하고, 관제묠를 둘러 보고 여러 가지 놀음을 구경하기도 하고, 봉천성과 영원성, 산해관, 통주성의 동악묘 등의 풍물을 구경한 뒤 북경에 이른다.
북경에서는 노독에 잠깐 동안 고향과 부모님을 생각하고, 이어 예부에 나아가 임무를 마치고 시내 구경을 한다. 북경의 여러 문과 궁성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며, 만불사와 천부사 등의 사찰, 성인을 모신 대성전, 왕래하는 거리, 시장인 유리창, 진귀하고 많은 물품들, 낙타며 잔나비 등 처음보는 동물 모양과 상가의 풍속 등을 묘사했다. 이어 천녕사와 만수사의 승방이며, 건물, 요술 공연, 초청 받아 간 여러 집안의 장식과 갖가지 음식을 구경하고, 거리에서는 서양 사람들을 보고, '다팔다팔 빨간 머리 샛노란 둥근 눈깔, 정녕히 짐승이지 사람 종자 아니로다'라는 생각도 한다.
가을이 되는 7월 18일에 길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심양에서는 마적의 머리를 베어 매단 것을 보고, 만주의 석문령에서는 집에서 부쳐 온 편지를 받아 보고 부모님의 은혜를 다시 생각하며 돌아와 인정전에서 임금님을 뵙고,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뵙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일동장유가와 쌍벽을 이루는 장편 기행 가사로 '연행가'는 총 3,924구로 된 장편 기행 가사로 고종 3년(1866)에 고종이 왕비를 맞이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중국에 사신을 보낸 진하사은겸주청사행(進賀謝恩兼奏請使行)에, 지은이 홍순학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가서 북경에 갔다가 일행이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6월 6일 북경에 당도하고 40일간의 북경 체류 후, 8월 23일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30여 일 간의 여정과 견문을 노래한 작품이다.
가사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장편인 까닭으로 노정이 자세하고 서술 내용이 풍부하며, 치밀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자세하고도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독자에게 생동감을 준다. 고사 성어나 한자의사용을 억제하고 순 한글로 기록하여 서민 계층의 독자를 겨냥한 것은 조선 후기 가사의 한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김인겸의 '일동장유가'와 더불어 조선 후기 기행 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연행가의 내용
25세의 젊은 선비였던 홍순학은 연로한 김인겸이 떠날 때 가족들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걱정에 빠졌던 경우와는 달리, 소년 공명의 자부심과 기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연행의 길은 서울을 떠나 고양, 파주, 임진강, 장단, 송도, 평산, 곡산, 황주, 평양, 가산, 정주를 거쳐 의주까지 국내서만도 근 한 달이 걸린 여정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로소 "허박하고 약한 기질 만 리 행역 걱정일세." 하고 가족의 곁을 떠난 외로움과 나라 생각에 무거운 나그네의 심회를 말해 주고 있다.
나라 안에서 융숭했던 대접과는 달리, 무인지경인 만주 벌판에서 군막 생활의 괴로움과, 봉황성에서 만난 남녀 호인들의 기괴한 옷차림과 그들의 주식 생활 등 낯선 이국의 풍물을 소상히 관찰하고, 그의 특유의 익살로 표현하고 있다.
청석령을 넘으며 효종이 심양으로 잡혀 간 치욕을 통분해하기도 하고, 요동 칠백 리에서 사내의 호기를 뽐내기도 했다. 이르는 곳마다 고적을 찾아 상고하며 북경에 도달한 것은 석 달만인 6월 6일. "자문을 받을어서 상서에게 봉전하고 삼 사신 꿇어앉아 아홉 번 고두하여 예필 후 돌아오니 사신 할 일 다 하였네." 긴 행역에 비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북경의 문루, 절, 고적을 구경하고, 시전을 두루 살피고, 환희 요술을 참관, 인사를 방문하여 인정을 교환하였던 일 등 당시 저쪽과 이쪽의 정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눈깔은 움쑥하고 콧마루는 우뚝하며, 머리털은 빨간 것이 곱슬곱슬 양모 같고, 키꼴은 팔 척 장신, 의복도 괴이하다. 쓴 것은 무엇인지 우뚝한 전립 같고, 입은 것은 어찌하여 두 다리가 팽팽하냐? 계집년들 볼작시면 더구나 흉괴하다. 퉁퉁하고 커다란 년 살빛은 푸르스름 …… 새끼 놈들 볼 만하다. 사오륙 세 먹은 것이 다팔다팔 빨간 머리 샛노란 둥근눈깔, 원숭이 새끼들과 천연히도 흡사하다."
북경 길가에서 만난, 처음 보는 서양인을 표현한 대목에서도 그의 익살과 조선 선비의 오기를 볼 수 있다.
7월 18일 돌아서서 8월 23일 도착, 왕께 복명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반 년에 걸친 연행 기간 중 그가 보고, 느끼고, 접한 바를 3800여 구에 담아 노래로 엮었다.
사대 사행의 일원으로 수행하며 배타 천시의 오기가 넘친 청년 선비, 그의 눈에 비친 이국의 풍물과 경개를 자상하고 흥미롭게 기록한 '연행가'는 그 때 그 역사와 인정을 상고하기에 귀중한 자료다. (자료 출처 : 이석래, '교주 기행가사집')
갈등의 대청(對淸) 의식
이 작품에서 "일 년 삼백육십 일에 양치 한 번 아니하여 이빨은 황금이요, 손톱은 다섯 치라."고 한 것은 청나라 사람을 멸시한 예라고 하겠다.
청나라 궁궐에 들어가서 황제의 동가를 보면서 "용봉지자 천일지표 어떠하신 천안인고?"라고 기대감을 표명한 다음, "천하의 제일인이 호복한 이 자란 말가?" 하고 실망을 나타낸다. 여기서 우리는 지은이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는 대청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실망감의 표현은 지은이의 마음 속에 일고 있는 일종의 갈등을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공수, 황운곡, 동문환, 방정여, 방범염, 왕조제, 황현인 등을 만나 보고, 그 인물들의 준수한 기상과 고결한 성품을 찬양한 다음, "모두 다 대명 적에 명문 거족 후예로서, 마지못해 삭발하고 호인에게 벼슬하나, 의관이 수 통함은 분한 마음 맺혔구나. 예의의관 조선 사람 형제같이 반긴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데에서는, 명나라 후예 곧 한인과 청나라 사람 곧 호인을 구별하여, 전자를 망국민이기는 하지만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강개지심을 가진 문화와 예의의 선비들이라고 생각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진 데 반하여, 후자는 비록 천자라 하더라도 문화와 예의 풍속에 있어서는 미개한 야만으로 멸시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지은이는 비록 호인이라 하더라도 좋은 풍습, 부지런한 처신들에 관해서는 거짓 없이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정확하게 평가하는 객관성을 가지기도 하였다. 육아법에 관한 묘사나 , 농사와 길쌈에 부지런함을 노래한 것이 그 예가 된다. (자료 출처 : 최강현, '한국 기행문학 연구')
연행가(燕行歌)
1866년(고종 3) 가례주청사(嘉禮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北京)에 다녀온 홍순학(洪淳學)이 지은 장편의 기행가사(紀行歌辭).
1866년
3월에 왕비 책봉을 청나라에 주청하기 위하여 우의정 유후조(柳厚祚)를 상사(上使), 서당보(徐堂輔)를 부사로 한
사행(使行:사절단)의 일원이 된 그는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에 갔다가 그 해 8월 23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총
133일 동안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3,800여 구에 달한다.
서울에서 북경까지 긴 노정에 따라 고적을 더듬고, 풍속을 살피고, 인정에 접하였던 바를 소상히 기록한 여행기로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 日東壯遊歌〉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자 홍순학은 1857년(철종 8)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낸 25세의 젊은 선비로 사행에 오를 때 소년공명(少年功名)의 자부심과 기개가 있었다.
〔주요내용〕
서울을 떠나 고양·파주·임진강(臨津江)·장단(長湍)·송도·평산(平山)·곡산(谷山)·황주·평양·가산(嘉山)·정주(定州)를 거쳐 의주까지 국내에서만도 거의 한 달이 걸린 여정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로소 “허박하고 약한 기질 만리행역 걱정일쎄.”라 하며 이측(離側)한 외로움과 가국(家國) 생각에 무거운 나그네의 심회를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
융숭하였던 지공(支供)·지대(支待)와는 달리, 무인지경 만주 벌판에서의 군막생활(軍幕生活)의 어려움과 봉황성(鳳凰城)에서 만난
호인남녀(胡人男女)의 기괴한 옷차림과 생활, 낯선 이국의 풍물 등을 소상히 관찰하여 그의 특유의 익살로 표현하였다.
청석령(靑石嶺)을
넘으며 효종 입심(入瀋:심양에 끌려감.)의 수욕(受辱)을 통분하였던 이야기며, 요동(遼東) 700리에서 뽐낸 사내의 호기가
번뜩인다. 북경의 문루(門樓)·사우(寺宇)·고적을 소견하고, 시전(市廛)을 두루 살펴 환희(幻戱)·요술(妖術)을 참관하고, 인사를
방문하여 인정을 교환하였던 일 등 당시의 정황을 밝혀주고 있다.
“눈깔은
움쑥하고 콧마루는 우뚝하며 머리털은 빨간 것이 곱슬곱슬 양모 같고 키꼴은 팔척장신 의복도 괴이하다. 쓴 것은 무엇인지 우뚝한
전립 같고 입은 것은 어찌하여 두 다리가 팽팽하냐, 계집년들 볼짝시면 더구나 흉괴하다. 퉁퉁하고 커다란 년 살빛은 푸르스름……
새끼놈들 볼 만하다. 사오륙세 먹은 것이 다팔다팔 빨간 머리 샛노란 둥근 눈깔 원숭이 새끼들과 천연히도 흡사하다.”라고 하였다.
북경 길가에서 만난 초견(初見) 서양인을 익살로 표현한 대목에서 조선 선비의 오기(傲氣)를 볼 수 있다. 7월 18일 회환(回還), 복명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반년에 걸친 연행중 보고 느낀 것을 담아놓은 작품이다.
낙선재본(樂善齋本)과 국회도서관본이 전하고 있으며, 이 두 대본을 대교(對校)하여 수정한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간행한 ≪연행가≫가 보급되어 있다. 이 작품을 가사로 보지 않고 광의의 수필문학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다.
≪참고문헌≫ 哲宗實錄, 高宗實錄, 國文學通論(張德順, 新丘文化社, 1960), 燕行歌(李石來校註, 新丘文化社, 197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