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안먼광창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북에 구궁이 있고 동에는 궈자보우관(囯家博物馆), 서에는 런민따휘이탕(人民大会议堂)이 있어 관람객이 들며 나며 기념사진 찍는 곳이 광장이다. 광장 관람객은 외국인이나 베이징 구경온 중국촌놈들이 아닌가싶다. 각양각색의 깃발을 든 가이드를 줄줄이 따라다닌다. 광장 출입은 X선투시기를 놓고 짐검사를 하고 정사복 공안이 좌악 깔려 불심검문도 잦다.
광장에 행사있을 때는 폭발물 처리차량도 등장했다.
1949년 10월 1일 창건된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역 마오쩌둥(毛泽东)은 톈안먼뤄(天安门楼) 초상화속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남쪽에 있는 자신의 기념당에 잠들어있다..
마오쩌둥의 친필로 人民英雄永重不朽 라고 적혀있는 인민영웅기념탑, 필체는 가늘고 결코 달필은 아니다. 공산당지, '人民日報'라는 제자도 그의 글씨임을 알겠다. 그 뒤편에 있는 것이 마오주석기념당인데 오른편 사진이다.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실용주의 노선의 류샤오치(刘少基)를 내치고, 십여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겼으며, 결코 모범적이지 못한 사생활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그지만, 공을 7 과를 3으로 평가하여 지금도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던 냉엄한 국제정세의 틈바구니에서도 자유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을 세워 오늘이 있게 한 우리의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은 커녕 동상 하나 없는 한국의 졸렬함이 부끄럽다. 그가 가르치게 한 민주주의 덕분에 그를 독재자로 부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건만, 아 아, 그 자유를 모르누나.
마오쩌둥을 10초 정도라도 볼 수 있었던 것은 세번 실패하고 네번째 성공했다. 4월 14일 일요일 10시에 광장에 도착해보니 인산인해인데 기념관은 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친절할 것 같은 여경관에게 물었더니, 광장행사 있어 열지 않는단다. 어제 연다는 전광판을 봤는데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더니 마라톤(馬拉松)이 있어 그렇다며 뜀뛰는 흉내까지 보여준다. 미심쩍어하던 내가 나중에 깨달으니, 아차 어제 내가 한자를 잘못 읽었다. "暫停开放"이라 쓴 것을 마음속에서 "暫定开放"으로 停을 定으로 멋대로 바꿔 읽었으니...4월 20일 토요일 10시에 도착하니 기념관 줄이 어디까지인지 모를 지경으로 광장에 꽉 차 포기하고 보우관(博物馆)으로 발길을 돌렸다. 4월 23일 화요일, 평일이라 괜찮겠지 하고 다른 일 보고 11시에 도착했더니 웬 걸, 줄이 너무 길어 짐 맡기고 12시에 마감하는 입장시간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그저께 다 못본 보우관으로 향했다. 4월 24일, 민박 안주인에게 6시반에 아침식사 부탁하여 8시에 광장 도착했다. 보우관 남쪽 보관처에 12원내고 배낭, 카메라, 물병 다 맡기고 검색 통과하여 줄 서서 한시간만에 휴대폰 끄고 입장했다. 사람들은 마당에서 2원 내고 흰국화꽃 한송이를 사서 정성스레 헌화했다. 대부분 타지방 사람들이지만 결코 가식이 아니었다. 뒷사람에 밀려 옆얼굴을 바라본 시간이 10초 정도 될까.
연전에 하노이의 기념관에서는 한바퀴 돌며 1분정도 좌우에서 여유있게 호치민을 볼 수 있었다.
일본 항복 직후인 45. 8.28일의 장제스와 마오쩌둥. 마오쩌둥과 호치민(胡志明)의 만남.
이때는 분명 장이 셌고, 49년에는 마오가 셌다. 호는 국민에게 헌신적이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류샤오치의 실용노선에 섰다가 마오에게 밀려 실각과 복귀를 반복하지만 부도옹으로 일어선 덩샤오핑. .
마오의 사후, 과도체제를 거쳐 정권을 잡은 덩샤오핑(邓少平)은 자신에게 과해진 박해를 복수로 되갚지 않고 마오의 평가를 공 7, 과 3으로 하여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세우고 개혁개방으로 중국을 부흥시킨다. 1989년 천안문사태를 강경진압합으로서 자유주의자의 비판을 받지만, 중국인들은 덩의 단호함에 대한 평가가 높다고 한다. 자유, 중요한 줄 알지만 그것을 빙자해서 중구난방해서는 그 시점의 중국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덩을 지지한다는 조선족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큰 땅덩어리가 중구난방이어서는 지리멸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남조선도 단호해야합니다. 남조선이 지금은 세지 않습니까. 망나니인 북조선의 멱살을 틀어쥐어야 합니다."
이에 앞서, 과거 중국의 온건 간판스타였던 저우언라이(朱恩來)를 만나러 4월 16일 톈진으로 향했다. 톈진에서 난카이중쉐, 따쉐(南开中学,大学)를 다니고 5.4운동을 비롯한 청년활동을 한 때문에, 거기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일찍 민박주인을 깨우기가 뭣 해, 전날 월마트(沃尔玛)에서 산 빵과 물을 챙겨넣고 나섰다. 베이징남역에 7시 도착, 여권을 제시하고 7시 35분에 출발하는 고속열차 "和谐"의 표를 54.5원 내고 샀다. 기차를 타려면 반드시 증명이 필요하고 여권번호가 표에 인쇄되어 나온다. 톈진간에는 고속열차가 10~15분 단위로 있어 예약이 따로 필요 없다.
고속열차 和谐의 기관차. 톈진간의 속도는 290km/h를 넘지 않았다. 고속열차 충돌 사고 이후 350여km에서 300여km로 낮춰 운행한단다.
텐진역은 새로 지어 개장한지 얼마 안되는지 상가가 모두 비었고 밖으로 나오니 역사가 하도 커서 웬만한 거리에서 카메라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해 160여km 거리를 35분만에 도착했다. 제가끔 바쁜 발걸음으로 뿔뿔이 흩어지니 도착역사는 금새 텅 비었다. (출발과 도착이 어디든 분리되어있다.) 여행안내라도 찾으려고 서성이고 있노라니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뭐라고 빠르게 이야기하는데 알아들을 수 없어 팅부동(听不懂 못알아듣는다) 했더니 종이를 한장 내미는데 구원화지에(故文化街), 톈호우궁(天后宮), 구러우(鼓楼), 구청바오거다러우(故城堡疙瘩楼), 우따다오주지에취(五大道租界区) 등을 나열하고 있다. 자기차로 안내한단다. 반나절은 걸릴 것으로 짐작이 돼 250위안 달라는 것을 200으로 흥정했다. 지금이 비수기라 싸단다. 성명을 물었더니 팡귀샹(方贵香)이라는 명함을 내민다.
남편이 톈진역에 근무하고 26살 난 딸을 둔 팡여사가 엘란트라로 안내한 덕에 오전 일정으로 열거한 지역을 걷고 타고 둘러보고 나서, 이타이리스펑징취(意太利式风景区)의 마르코폴로 광장에 앉아 궈부리따주뎬(狗不理大酒店) 본가에서 사온 궈부리(狗不理)로 점심을 때웠다. 역사적인 인물과 관련해서는 장쉐량(张学良), 리홍장(李鴻章)의 집을 지나면서 보고, 1920년 쑨원(孙文)이 묵었다는 Astor호텔도 보았다. 리홍장은 한국사에 등장해서, 쑨원은 신해혁명의 중심인물로서 잘 알려졌지만 장쉐량은 낯설 것 같아 부연하자면 1936년 시안(西安)사건을 일으킨 인물로 장제스 휘하에 있으면서 시안을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합작하여 항일전을 하자는 요구를 했고 장제스가 석방된 후 자진하여 군법회의에 출두하여 금고형을 받았다. 중국에서는 그의 애국적인 행동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톈호우궁은 바다의 안전을 비는 여러 신을 모신 사당이랄까, 좌는 톈호우냥냥(天后娘娘) 즉 이 궁의 주인공 귀비이고 아들 관평과 부장 주창을 거느린 관띠(关帝)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위왕 차오차오(曺操)가 흠모하던 관위(关羽)는 사후 황제 반열까지 지칭되며 재물이든 안전이든 빌어야 할 일에는 등장한다.
마르코폴로 광장, 19세기에 이태리식 거리가 조성되며 붙여진 이름일뿐 13세기 다또우(大都, 지금의 베이징)에 쿠빌라이칸(忽必烈)의 강청으로 10수년을 머물었던 마르코폴로가 여기 왔다는 것은 아니다. 오른쪽은 광장 한 켠에서 "부모님은 안계시고 몸져 누운 할아버지 봉양하는" 손녀딸의 아코디언 연주 모습. 엘 파사 델 콘도르가 흐르고 쇼핑백에는 성금이 모인다.
팡여사에게 저우은라이 기념관을 물으니 톈진역에 다시 태워주며 버스 환승역에 가면 차편이 있을 거란다. 여차하면 톈진에서 자고 갈 셈으로 8번선 버스를 타고 40분 이상을 10수개 정거장을 지나 톈타잔(天塔站)에서 한참을 기다려 161번으로 갈아타고 저우등지넨관잔(朱鄧紀念館站)에서 내리니 길 건너편에 기념관이 보인다.
입장료는 15원인데 연표(联票)다. 연표란 2개 이상의 입장료가 따로 정해진 곳을 카버한다. 기념관이 저우언라이.덩잉차오(邓潁超) 연명으로 된 것은 부인의 활약이 외교부장과 수상을 지낸 남편 못지않게 활발하고 모범여성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기념관에서 두 사람의 행적을 관람하고 시화팅(西花庁)으로 들어갔는데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에 있던 저우의 저택을 복제했단다.
다재다능하여 대학시절 연극연출도 하고, 대학을 마치고 일본의 와세다, 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하고 프랑스 유학을 한 지성과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온화하고 합리적인 성품으로 적이 없으면서도 가열찬 항일전쟁에 누구보다도 앞장 섰다. 다만, 마오쩌둥의 전횡을 견제하지 못한 비판은 후일에 받지 않을까?
오늘날의 현대자동차가 세계를 주름잡는 회사로 성장한데는 저우언라이도 한몫했다고 하면 과언일까? 1972년 내가 현대자동차에 근무할 때였지, 아마. 저우4원칙이 공표되자 신진자동차를 통해 한국시장을 주름잡던 토요타가 잽싸게 한국시장을 내팽개쳤다. 저우4원칙 중에는 대만과 국교를 맺은 나라와 관계를 가지는 기업은 중국과 거래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있었고 중국진출을 노리던 토요타가 신진과 야멸차게 결별했다. 신진과 힘겹게 겨루던 현대가 업계 1위가 되고 그 바탕위에 국산자동차로 세계진출을 해서 오늘에 이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람이 끝나니 오후4시,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게 충분하여 버스정류장에 나가, 노선을 아느니만치 갈 때와 다른 노선으로 톈진역에 닿았다.
아들은 줄곧 열차강도질 할 때의 제시제임스처럼 손수건으로 반복면을 하고 다녔다. 나는 둔해서 별로 못느꼈지만 텐진의 공기가 베이징보다 더 탁하단다. 바다가 50km 밖에 있지만 공업지구의 매연이 도시를 덮어 바람이 위력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첫댓글 무엇이 무엇인지 드디어 헷갈리기 시작한다.
티엔진에 가니 드디어 저우언라이(周恩來) 기념관이 나오네요. 그 유명한 거우부리(狗不理)가 톈진 특산이던가?
우당, 헷갈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日誌가 아니고 주제별로 이야기를 모으려다보니 앞뒤로 왔다갔다 하네요. 우정, 狗不理는 天津 특산입니다. 또하나의 특산에 마화(麻花)라는 게 유명한데 색갈이나 모양이 우리의 꽈배기랑 똑 같아서 사봤더니 바싹 튀겨서 돌덩이예요. 자칫 이빨 부러트릴 번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