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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렛 책상 외 2편
김 응 환
한국철도공사 정년퇴직
대경상록아카데미 수필창작교실 회원
고향 친구를 만나기 위해 부산 나들이에 나섰다. 부산역에서 친구를 만나 태종대로 향했다. 태종대는 어릴 때 몇 번 가보았고, 직장에 근무할 때는 달려서 몇 번 가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한창 마라톤에 빠져 부산역 뒤쪽 합숙소에서 출발하여 영도다리를 건너 아름다운 해안 가도로 30여km를 연습 삼아 가끔 달리던 시기였다.
창밖에 비치는 풍경은 과거보다 많이 변해 있었으나, 내 마음은 옛날 그대로였다. 태종대 버스정류장에 내려서 옛 생각을 하면서 시원한 바람을 벗 삼아 일주도로를 한 바퀴 돌았다. 도중에 바다가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사 먹고 옛날에 한번 가봐야지 했던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자갈마당’이라는 해변으로 갔다. 거기서 싱싱한 멍게 해삼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친구와의 옛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태종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벗 삼아 좀 더 산책한 후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하여 다시 야경이 아름다운 송정해수욕장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S라는 고향 친구 한 사람을 더 불렀다. 그 친구도 배와 관련한 일을 하고 있다. 호주로 남미로 어디든 배가 고장 나면 장시간 그곳에 머무르며 배를 고치는 기술자로 가끔 외국에서도 전화하던 친구다.
송정해수욕장 해변 아늑한 횟집에서 반갑게 셋이 만났다. 특별히 주문한 자연산 회는 오늘따라 더욱더 맛이 좋았다. 우리는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던 이야기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어릴 적 40년도 더 지난 고등학교 때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중학교에 늦게 가게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에는 합격했으나, 그 당시 나는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됐다. 7남매 6형제 중 넷째인 나는 큰형님과 작은형님 두 분 모두 입대하고, 바로 위 형님은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집안 형편도 어렵고 무엇보다 농사일을 도와야 할 처지였다.
그 후 3년이 지나 바로 위 형님과 나 바로 아래 동생 삼 형제가 경산의 어느 미국이 후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게 됐다. 그 당시 우리 삼 형제가 공부할 방법은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학교에 가는 관계로 철이 좀 더 들었는지 공부를 열심히 하여 반에서는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지금 생각해도 중3 때가 제일 열심히 공부해본 것 같다. 입시 철이 되어 그 당시 대구 시내 반월당 근처에 봉산독서실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먹고 자면서 공부하였다. 저녁이면 의자를 모아서 그 위에 자기도 하고, 끼니는 거의 라면으로 한 달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바로 위 형님이 고등학교 안내 팸플릿을 한 장 갖고 왔다. 그 당시 나는 인문계인 대구의 D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형님이 가져온 원서는 서울에 있는 국립철도고등학교였다. 우선 학비가 무료이고 졸업 후 특채로 취업이 된다는 매력이 있어 형님과 상의하여 그 학교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입학 후 학교 근처 용산에서 월 12,000원 정도인 하숙비가 부담되어 두 달만 하숙하고, 형편상 서울에서 좀 떨어진 소사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방에 웬 책상이 하나 놓여있었다. 주인아주머니께 물어보니 어제 왔던 그 친구가 사놓고 갔단다. 어릴 때 고향 집 이웃에 살았으며 그야말로 죽마고우인 G라는 친구다. 그 당시 나는 형편상 책상 살 돈이 없어 밥상을 책상 삼아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보기에 안타까웠는지 책상을 사다 놓고 인사도 없이 가버렸다. 자기도 아직 학생인데 어떻게 그럴 생각을 했으며 또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
짙은 갈색으로 아주 옛날 스타일의 이 책상은 고등학교 자취생활 3년 동안 이사할 때마다 가장 중요한 물품이었고, 철도청에 발령받아 결혼하고 여러 번 이사 다닐 때도 늘 이사품목 1호였다. 때론 너무 낡아 인제 그만 버리자는 아내 성화에도 차마 버릴 수 없어, 낡은 서랍을 여러 번 수리하면서도 계속 내방을 지켰다. 그리고 한잔하거나 특별히 아들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책상에 숨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친구 간에 우정과 검소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내게 낡은 이 책상은 책상 이상의 보물 같은 것이었다.
그 친구가 옛날에도 어렴풋이 이야기는 했지만 이번에 그 책상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상세히 들려주었다. 아직도 외항선을 타는 친구는 그 당시 나보다 2년 먼저 부산 해양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그때 고3 실습을 나가 얼마간 번 돈으로 그 책상을 샀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 혼자서 자취생활을 하는 친구가 책상도 없이 공부하는 모습이 몹시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책상 하나쯤 사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당시로써는 보통 마음으로는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 친구 입장이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살아오면서 우리 아이들과 지인들께 친구가 사준 책상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고 지내왔지만, 오늘 다시 그때의 일과 친구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누가 말했던가, 한사람이라도 진실한 친구가 있다면 성공한 삶이라고... 퇴직을 얼마 앞둔 그 친구는 한번 출항하면 거의 일 년씩이나 걸려야 귀국하는 외항선 기관사로서, 해외에서 산 좋은 술이나 좋은 약이 있으면 갖다 주기도 하고, 내가 어렵게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할 때도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줬다. 지금도 가끔 외국 어느 항구에서나 아니면 귀국하여 가장 먼저 나에게 안부를 전해오는 친구다. 앞으로 살면서 나도 그 친구와 같이 누군가에게 그런 마음을 나누면서 살고 싶다. 빛바랜 책상이 지금은 비록 기능을 못 하여 창고에서 뿌옇게 먼지가 쌓여가고 있지만, 우리의 우정은 여전히 바이올렛 향기 속 토파즈 보석처럼 빛이 난다.
달리기 단상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인간 기관차라 불린 체코의 전설적 마라토너 에밀 자토펙이 한 유명한 말이 생각난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우리가 한평생 살다 보면 어려운 고비도 있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왜 없겠는가. 하지만 이를 참고 견디면서 노력하면 성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극복해야 완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인생이나 마라톤이나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언제부턴가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마라톤이라고 대답한다. 매월 달리기를 위한 모임이 서너 번은 되고 일정표에도 주말마다 마라톤대회 표시가 되어 있다. 헬스장에 가서도 늘 마무리는 러닝머신으로 한다. 얼마 전 TV 자막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담배를 피우는 것보다 더 건강에 나쁜 것은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결국 운동을 하지 않고는 건강해질 수 없다는 이야기다. 운동 중에서 달리기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의 마라톤 시작은 2000년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40대 후반 우리나라 생활체육이 움트던 시절, 건강을 위하여 달리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넷 검색을 했다. 마침 ‘대구마라톤클럽’이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망설이지 않고 바로 가입했다.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신천에서 함께 모여 달리기를 시작했다. 2001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의 달리기는 그해 첫 대회출전을 3월 18일 서울 동아마라톤으로 정하고 열심히 연습했다.
광화문 옛 이화여고 앞 첫 하프를 뛰기 위해 출발선에 섰을 때 가슴 벅찼던 그 기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해 가을 조선일보춘천마라톤에 참가하여 3:49:14의 기록으로 생애 첫 풀코스를 완주했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기분이었다. 계속 기록을 단축해 나가던 2003년 3월 16일, 여섯 번째 풀코스 도전 서울동아마라톤대회에서 마침내 3:12:34 기록으로 나의 최고기록을 달성했다. 당시 8000여 명 참가자 중 738등 10% 이내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골인,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007년도까지 풀코스를 24회 완주하고 직장생활과 나이 등을 고려하여 그 후에는 주로 하프코스에 참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제주도, 금강산 등 전국 각지 160여 개의 대회에 참가하고 받은 대회 기록증과 완주 메달은 한 상자가 넘는다.
선천적으로 기관지가 좋지 않은 나는 달리는 데 힘이 많이 들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도 병세가 잘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힘들지만 달리기를 계속하다 보니 오히려 기관지가 전보다 많이 좋아짐을 느꼈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건강하니까 달린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달린다.
출발선에서는 항상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 이 자리에 서 있음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즐겁게 달리자. 그러나 달리다 보면 힘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그날의 달리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들이 군대에 갔을 때는 힘든 군 생활을 잘하기 바라며 달렸고, 손자가 태어났을 땐 손자가 잘 자라주기를 바라고 달렸고, 주위에 아프거나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그를 생각하며 달렸다. 그리고 2015년 11월에는 40년 직장생활을 마감하는 퇴직기념마라톤을 직장마라톤 후배들과 함께 달렸다. 그렇게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며 달리다 보면 웬만한 고통쯤은 견딜 수 있고 결국 결승선에 도달하게 된다. 결승선을 앞두고는 항상 힘차게 달려간다. 그리고 두 팔을 번쩍 들고 그래 오늘도 해냈어! 자축하며, 잘 견뎌준 두 발에 감사한다.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다. 그래서 마라톤 속설에 이런 말이 있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것은 그날 컨디션이 아니고, 또한 정신력도 아니다. 오직 연습만이 완주를 담보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42.195km 풀코스를 완주할 힘은 오직 연습에 달려있다. 그리고 바쁜 현대인이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짧은 시간에 가장 운동 효과가 좋기 때문이다.
달리기는 힘든 운동이다. 그래서 혼자 하기보다는 서로 격려하며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가입된 동호회가 아직 다섯 군데나 된다. 달리기하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었다. 그래서 대회장에서나 주로走路에서 아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이것 또한 대회 참가의 묘미고 재미다.
그리고 지금까지 마라톤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일본과의 체육 교류다. 내가 회장으로 있는 단체와 일본 시가현 마스터즈와는 2008년도부터 지금까지 계속 교류하면서 양도시간 친목과 우호증진에 힘쓰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양국관계가 어렵지만, 민간교류인 우리는 만나면 형제애를 느낄 만큼 가깝다. 여든 중반의 일본의 기무라 회장은 10년간 계속된 우리와의 체육 교류를 아주 자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행사 때마다 말하곤 한다. 지난 11월 초에 그들이 주최하는 쯔찌야마마라톤대회에 다녀왔고, 내년 4월 개최되는 대구국제마라톤대회에는 우리가 일본팀을 초청해놓고 있다. 앞으로도 양도시간 체육 교류는 계속될 것이다.
이제 일상이 된 마라톤이다. 때로는 힘들고 조금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마라톤으로 인하여 건강도 챙기고 사람도 사귀고, 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생활체육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나이가 들어서도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과연 나는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까? 생활체육의 선진국인 일본에서는 나이가 들어서도 활발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오늘도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역지사지(易地思之)
“같은 아파트 하시는데 우리가 뭐 친척이라도 됩니까?” 아주머니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요즘은 차량이 예전보다 대형화되어서 그런지 주차 시에 접촉사고가 자주 발생한다. 운전이 서툰 사람이나, 특히 여성 운전자들은 주차가 가장 많이 신경이 쓰인다고들 한다. 우리 아파트는 그런대로 주차환경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마음이 바쁘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길 수 있다.
평소에는 주로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는데 이날은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바쁘게 어디 갈 데가 좀 있어서 아파트 옆 지상 주차장에 잠시 주차하려고 후진하고 있었다. 아뿔싸! 백미러 상으로는 괜찮을 것 같았는데 뭔가 닿는 느낌이 왔다. 깜짝 놀라 차를 세우고 확인해보니 옆 차선에 주차된 차량 앞부분에 살짝 부딪쳤다. 얼른 손수건으로 부딪친 부분을 닦아보지만,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잠깐 망설이다가 운전석 앞에 있는 전화번호로 차주께 연락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부탁이라도 한번 해볼 요량으로……. 전화를 받고 내려온 아주머니는 자기 차를 한 바퀴 돌아보더니 어떻게 처리할 거냐고 물어온다. 잠시 머뭇머뭇하다가 할 수 없이 나는 보험회사에 사고접수를 하고 자주 가는 카센터 위치를 일단 알려줬다. 그리고 카센터 사장에게 전화하여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차가 오면 잘 중재하여 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 카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서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르지만, 그 아주머니가 상당히 화를 냈다며 정비공장에 수리를 의뢰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 카센터 사장이 적당한 선에서 돈을 좀 받고 사고처리를 종결하는 게 어떻겠냐고 해봤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바로 보험처리 하자고 했으면 덜 신경 써도 될 일을 내 마음 같을 줄 알고 이리저리 궁리한 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보험회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차 수리로 인한 비용이 50여만 원 지급되었다고 했다. 평소에 생각했던 일이지만 우리나라 차들은 너무 외형에 신경 써 차량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생기면 아예 범퍼든 문짝이든 통째로 갈아버리든지 도색을 하는 등 낭비가 아주 심하다고 느껴왔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그래도 남보다는 좀 낫겠지 생각하고 부탁해본 일이지만……. 그 아주머니가 무섭게 쏘아붙이던 한마디 말이 아직도 뇌리에 남는다.
그런데 그 사고가 있고 난 후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상록아카데미에서 수업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업 중이라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문자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 무슨 일인가 전화를 해보니,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차 중에 내 차에 접촉사고를 내어 연락했다고 했다. 나는 집에 가서 차 상태를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여 주차장에 주차된 차를 확인해보니 겉보기에는 별로 표시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접촉이었다. 사실 오래된 차이고 범퍼 앞뒤에는 작은 흠집이 이미 좀 나 있었다. 그러나 내 차를 접촉한 사람은 차종이 에쿠스라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차 수리로 비용이 많이 들까 걱정을 했는지 전화 중에도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얼마 전엔 내가 접촉사고를 냈는데 이번에는 내 차가 당한 것이다.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 정도 사고로 그렇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는데, 내심 문제 삼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를 입력해 놓으면 카카오톡으로 사진 등 상대방 정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어있다. 특히 아파트 단지 비슷한 주차구역에 차를 주차 시켰다면 같은 동에 살 확률도 있다. 혹시나 해서 아내에게 카톡에 뜬 사진을 보여주니 어머! 아는 사람이네. 부부가 아내와 같은 헬스장에 다니는 우리 아파트 같은 동 옆 라인 사람인데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는 사이란다.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아서 바로 전화를 걸어, 큰 흠집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더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몇 번이나 계좌번호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계좌번호를 보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며칠 지나고 나서 하루는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건너편에 어떤 분이 나를 알아보았는지 머뭇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 누굴까 하고 쳐다보는데, 그분이 먼저 누구 아니냐며 얼마 전에 차량 접촉사고를 낸 사람이라면서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대뜸 내 호주머니에 찔러 넣는 것이 아닌가? 그럴 필요까지 없다고 극구 말렸으나 그렇게라도 해야지 자기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하면서 바쁘게 달아나고 있었다. 더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 할 수 없이 그냥 가던 길을 가면서 봉투를 확인해보니 30만 원의 돈이 들어있었다. 언젠가 만나겠지 하면서 봉투를 미리 준비하고 다니셨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를 우리 가족 단톡방에 올렸더니 우리 큰아들은 요즘 시대에 정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으며, 이런 일을 다루는 보험회사에 다니는 작은아들은 감동적인 사연이라고 까지 이야기했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집 앞을 다니다가 그분을 만나게 되면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불과 한 달 만에 승용차 접촉사고의 가해자 입장이 돼 보기도 하고 피해자가 돼 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역지사지해 보는 기회였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상대가 너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서는 나 같으면 못 이기는 척하면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았을까?
세상이 각박한 것 같지만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아직은 살만한 세상이 아닌가 싶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상대방과 크고 작은 일로 부딪치게 될 때가 있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대처방법은 역지사지해보는 거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해 못 할 게 없으리라. 두 번의 가벼운 차량 접촉사고로 많은 것을 생각해볼 기회였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