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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76. [역경의 열매] 설동순 (1-21) “맵고도 달큰한 게 세상살이 맛이제”
5월이면 머위장아찌를 담글 때다. 머위는 쌉싸래한 맛이 일품인데 고들빼기하고는 또 다른 은근한 쓴 맛이다. 잎이 너무 퍼지지 않은 놈으로 골라서 깨끗하게 다듬은 다음에 소금에 사나흘 절이고, 다시 씻어서 물기를 완전히 뺀 다음에 고추장에 박아 놓으면 머위 고추장 장아찌가 된다. 고추장을 충분히 흡수했을 때 새 장으로 바꿔주기를 대여섯 번 해야 제 맛이 나는데 마지막 고추장을 넣을 때 물엿을 약간 넣어 버무리면 좋다.
잘 익은 머위장아찌를 꼭꼭 씹으면 별의별 맛이 다 난다. 첫맛은 맵지만 곧 머위 본연의 쓴 맛이 혀 위에 퍼지고, 소금에 절인 채소 특유의 짠 맛이 씹을 때마다 배어 나오다가, 잘 익은 고추장 특유의 달큰함이 마지막으로 온 입에 퍼진다. 그 맵고도 쓰고도 짜고도 단 맛이란.
나는 고추장이 좋다. 깻잎 오이 두릅 마늘 더덕 도라지 고들빼기 매실 감 굴비 등 어떤 것을 담가도 맵고도 달큰한 맛으로 감싸 안아 감칠맛 나는 장아찌로 만들어 준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다. 갖은 재료가 고추장 장아찌로 되는 과정과도 같다. 내가 장아찌 재료라고 한다면 나에게 고추장은 예수님이시다. 처음 교회 다니기까지 어려움도 많았고, 그 이후로도 신앙생활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인다 하면 예수님은 당장 고초 당초보다 매운 시련을 주신다. 그 시련을 겪어내고 나면 쓰고 짠 인생사는 부드러워지고 달콤함만 남
는다.
한때는 입버릇처럼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 주절거리기도 했었다. 가난해서 2∼3일에 한 끼밖에는 밥을 못 먹던 시절에 늘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나맨치로 재미지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 거여” 하는 말이 시시때때로 나온다.
못살던 그때 입맛을 잃은 뒤로 지금도 먹는 재미를 별로 못 느끼지만, 대신 다른 재미가 많다. 맛난 고추장 담가 사람들에게 먹이는 재미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그들과 더 가까워질 때, 그 재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내가 태어나 살아 온 고장 순창은 섬진강 상류에 자리해 물 맑고 맛 좋은 채소들로 유명하다. 여러 음식 중에서도 고추장이 이름났다. 고추 농사 하기에도, 장이 숙성되기에도 가장 좋은 기후와 조건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내가 어릴 때도 집집마다 고추장을 직접 담그는 것은 물론,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파는 집들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뭣 헌다고 돈을 받는디야” 하면서 그냥 싸주곤 했지만 말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지만 내가 이렇게 평생 고추장 덕을 보고 살 줄은 몰랐다. 고추장을 팔아 자식들 키웠고, 교회를 섬기고 선교할 수 있었고, 고추장 파는 사람 중에 신앙이 좋다는 이유로 국민일보 비전클럽 회원이 됐고, 거기서 귀중한 인연을 맺고 소중한 신앙의 친구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나에게는 그런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중 둘째, 홍일점으로 태어난 나는 꿈이 일절 허락되지 않는 환경을 원망하며 자랐다.
정리=황세원 기자 hwsw@kmib.co.kr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 "맵고도 달큰한 게 세상살이 맛이제"
* [역경의 열매] 설동순 (2) 힘겹던 열 살 때 논둑 길서 ‘믿음’과 첫 대면
* [역경의 열매] 설동순 (3) 교회에서 만큼은 부엌데기가 아니었다
* [역경의 열매] 설동순 (4) 초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 출입금지령’
* [역경의 열매] 설동순 (5) 교회도 진학도 포기한 채 공장으로
* [역경의 열매] 설동순 (6) 스물넷 처녀, 서른넷 총각을 만나다
* [역경의 열매] 설동순 (7) 부모 결혼반대에 반발 보란듯이 도망
* [역경의 열매] 설동순 (8) 부모냉대 속 내뜻대로 결혼… 살길 막막
* [역경의 열매] 설동순 (9) 결혼 첫 날 신혼집 가니 빚쟁이가 맞아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0) 가장 힘들 때 예수님 생각… 아기 업고 교회 출석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1) 나를 부엌데기로만 알던 아버지가…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2) 순창에 이사온 후 남편이 고추장 장사 권유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3) 내 집 마련하자 고추장 사업도 용기 생겨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4) 판로 염원 기도에 기적처럼 손님 찾아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5) “귀한 사람 먹는데 좋은 재료로 만들자”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6) ‘공장 고추장 섞어 판다’ 소문에 맘고생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7) 틈틈이 개척교회 돕기… 사업은 날로 번창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8) 종탑헌금 불만… 잘 나가던 교회 발길 끊어
* [역경의 열매] 설동순 (19) 갈등 빚은 이들도 쾌유 기도… 멍울 사라져
* [역경의 열매] 설동순 (20) 선교한다 해 고추장 보냈지만 수차례 떼여
* [역경의 열매] 설동순 (21·끝) 내게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 구원받은 것
◇약력=1952년 1월7일생 / 1991년 순창전통고추장 제조 기능인 지정 / 현 ‘순창전통별미고추장’ 대표, 순창읍교회 권사
***[역경의 열매] 설동순 (2) 힘겹던 열 살 때 논둑 길서 ‘믿음’과 첫 대면
“죽으면 썩어질 노무 손목댕이, 뭐 한다고 놀린다냐! 언능 뛰어 들어오니라!”
어려서 대문 밖에서 친구들하고 잠시라도 놀고 있자 하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이런 호통이 들려오곤 했다. 4남매 중 외동딸, 게다가 오빠와는 열여섯 살이나 차이 나는 둘째로 태어난 나는 맏딸 역할을 톡톡히 해야 했다.
그 덕에 어릴 때부터 어머니 음식 솜씨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다행한 일이다. 어머니는 동네에서도 얌전하고 솜씨 좋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그 당시는 어느 집이나 그랬겠지만 순창 고을 사람들은 다 집집마다 고추장을 정성들여 담갔다. 다른 고장 사람들이 보기에는 맛이 비슷할지 몰라도 우리가 볼 때는 앞집 뒷집 옆집 고추장 맛이 다 달랐다. 어느 집 것이 맛있느냐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내 입엔 우리 집 고추장이 제일 착착 붙고, 친구 입에는 그 집 고추장이 감칠 맛 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우리 집 고추장은 근동에서 맛있다는 말을 들었다.
고추장은 메주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기 전 기본이 되는 재료를 어떤 형태로 하느냐를 기준으로 세 가지 만드는 방법이 있다. 밥으로, 떡으로, 밥에다 엿을 합쳐 쓰는 방법. 이렇게 세 가지다. 요즘은 떡을 기계로 뽑아서 만드는 방법과 시판용 엿기름으로 만드는 방법이 손쉽기 때문에 많이 쓰인다. 그러나 내가 볼 때 맛이 제대로 나는 전통 재래식 방법은 찹쌀이나 보리쌀로 밥을 해서 아랫목에 띄워서 만드는 방법이다. 내가 어릴 때는 거의가 이렇게 했고, 나는 지금도 이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
어머니는 매년 음력 11월쯤 되면 쌀 두어 말로 고추장을 담그셨다. 쌀을 끓일 때 아궁이 옆에 지켜 서서 나무 주걱으로 젓는 일은 내 몫이었다. 그럴 때면 왜 그렇게 부엌 밖으로만 마음이 향했는지 모른다. 나는 친구들보다 2년 늦은 열 살에야 학교에 들어갔는데 친구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이면 일하는 게 더 싫었던 생각이 난다.
고추장 만드는 일은 이틀이 꼬박 걸렸다. 어머니는 중간중간 나에게 간을 보게 하셨다. “한꺼번에 간을 했다가 짜게 되면 1년 장맛 다 망친다”면서 신중하게 간을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나중에 처음 고추장 사업을 시작할 때도 어머니께서는 일을 도와 주시면서 이 말씀을 하고 또 하셨다. 나도 아마 딸들에게 고추장 비법을 전수할 때면 이 말을 하고 또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어머니와 함께 일하는 시간은 나은 편이다. 예닐곱 살부터 동이에 물을 이어 나르고, 할머니를 따라 산에 다니며 갈퀴로 나무를 긁어모으는 일도 매일 해야 했다. 보리쌀로 밥을 하기 위해 함지박만한 작은 절구인 ‘합독’에 보리쌀을 가는 일도 매일 하지만 늘 힘겨웠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별다른 재미라고는 모르고 살아가던 내 어린 시절에 큰일이 일어났다.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크나큰 일이었다. 바로 전도를 받은 것이다.
열 살 때였다. 친구들과 나무를 이고 논둑길을 걸어가는데 말쑥한 차림의 남자 어른이 맞은편에서 다가왔다. 우리는 순간 경계를 했지만 “나는 저그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온 전도사란다”라는 말에 우리의 눈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3) 교회에서 만큼은 부엌데기가 아니었다
봄꽃은 흐드러지게 피는데 날씨는 영 더워지지 않는다. 전라도 말로 이렇게 ‘춥도 덥도 안 한 날’이면 나는 어려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생선조림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탕이나 국은 후텁지근하고, 그렇다고 냉국이나 비빔국수 먹기는 이른 요즘 같은 때 딱 맞춤한 밥반찬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 바다에 접하지 않은 순창에서는 생선이 참 귀한 음식이었다. 고등어자반과 말린 북어 정도가 내가 맛볼 수 있는 생선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내 입에는 그 두 생선이 제일 맛있다. 어머니가 가끔 광에서 꺼내 와 물에 불려 졸여 주셨던 북어는 씹을수록 매콤하면서 고소했고, 장에 다녀오신 날 말린 무와 고구마 줄기를 넣고 해 주셨던 고등어조림은 구수하면서 얼큰했다. 지금도 한 젓가락 입에 넣었을 때 입 안 가득 퍼졌던 행복함까지 고스란히 떠오르는 추억의 음식들이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땅도 재산도 하나 없이 빈손으로 살림을 시작하셨다. 나보다 열여섯 살 많은 오빠를 키우실 때는 마을마다 다니며 손으로 짠 광주리를 팔아야 할 정도로 빈한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오빠를 최선을 다해 가르치셨고, 나중에 내 뒤로 얻은 남동생들도 하는 데까지 교육시키셨다. 그러나 그 가운데 낀 나에 대해서는 전혀 공부를 시킬 의지가 없으셨다. 그 시대가 다 그렇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시집가면 너므 집 사람 될 가시내를 뭣 헌다고 가르친다냐”하는 부모님의 말이 그렇게 서운하고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나무를 잔뜩 긁어 머리에 이고 친구들과 논둑길을 걸어가다 교회 전도사님과 마주쳤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금과면 중앙교회에 부임해 오신 전도사님이셨다.
“너희들, 교회 안 나올래? 맛난 것도 주고, 재미있는 찬송도 갈켜 주고 헐 틴디.” 모르긴 몰라도 그때 우리들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을 것이다. 그 시절 그 시골에서, 우리에게 그런 제안을 해 온 사람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친구들과 나는 교회에 나갔다. 지금처럼 아동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일 오후 교회 옆 작은 방에 둘러앉아 건빵이나 떡을 얻어먹으며 노래 부르고 율동한 게 전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나를 ‘집안일 돕는 일손’이 아닌 한 명의 어린이로 대해 준 것은 그 시간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복음’에 대한 깨달음은 없었다. 솔직히 먹을 것 주고, 노래 가르쳐 주니까 마냥 좋았던 것뿐이다. 그러나 그때 교회 다닌 경험은 평생 내 신앙의 기반이 됐다. 특히 그해 어느 날 다른 교회 장로님이 오셔서 가르쳐 주신 찬송 하나가 오래도록 남았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 나는 다만 나그네 나의 집은 저 하늘 저 넘어 있고 천사들은 하늘에서 날 오라고 부르니 나는요 이 땅에 있을 맘 없어요.”
이 찬송을 부를 때 나는 마음속에서 뭔가 덜컥 하고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다가 아니구나. 나도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안 깊은 곳으로 스며든 그 깨달음은 이후로 살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떨쳐 일어나게 해 준 큰 힘이 됐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4) 초교 졸업과 동시에 ‘교회 출입금지령’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그해 나는 열 살이었지만 1학년이었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열여섯에 졸업할 때까지 6년간은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내 어린 시절의 유일한 즐거움은 신앙생활이었다.
시련은 학교 졸업과 동시에 찾아왔다. 아버지로부터 “인자 교회 그만 나가거라” 하는 명령이 떨어졌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교회당은 연애당’이라고 굳게 믿으셨던 것이다. 문제는 나도 “아버지, 그렇지 않아요.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무섭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때 우리 동네에는 교회에서 비롯된 연애 사건이 여럿 터졌다. 심지어 먼 친척뻘인 남녀가 교회에서 교제하다 가족들 눈을 피해 잠적한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엄격했던 유교 사회에서 교회가 아니면 젊은 남녀가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장소가 어디 있었겠나. 특히 진학의 기회를 얻지 못해 촌에 남은 청년들이 기독교라는 이국적이고 새로운 문화 속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를 함께하는 이성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애들과 달리 그리 조숙하지 않았던 열여섯 살 나에게는 아직 연애란 먼 일이었고 교회는 내게 삶의 돌파구, 숨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기독교 신앙의 기반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박해가 심할수록 신앙을 지켜야 진짜 기독교인’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때문에 아버지가 ‘교회 금지령’을 내리셨어도 교회를 향한 내 마음은 쉽게 접히지 않았다. 특히 우리 집은 교회에서 가까웠다. 집을 나서 갈대밭을 끼고 우물을 지나 걸어가면 바로 교회였다. 찬송 소리가 집에 들려올 정도는 아니었지만 밤에 갈대밭 쪽을 바라보면 흔들거리는 불빛 사이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니 교회에 갈 수 없는 날이면 마음이 그렇게 싱숭생숭할 수가 없었다.
때때로 아버지 몰래 집을 나서 교회에 가기도 했지만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대문 옆 작은 방에 작은할머니가 계셨는데 귀가 밝으셔서 내가 나가는 기척만 들리면 장지문을 벌컥 열고 “야야, 동순이 연애당 간다아!” 하고 소리를 치셨던 것이다.
그러던 중, 집회가 열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운 좋게 작은할머니에게도 안 들키고 나왔다 싶었는데,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가 쫓아 들어오셨다. “동순아! 큰일났다야, 시방 아부지가 너 붙들러 오신당게!” 나는 즉시 교회 문 밖으로 뛰쳐나가 갈대밭으로 숨어들었다. 곧 “이노무 가시내, 언능 못 나오나?” 하는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뒷덜미를 낚아 챌 듯이 쫓아왔다.
갈대밭 사이로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갈댓잎이 얼굴을 스쳐 생채기를 내고 숨이 가빠왔다. 아버지가 손에 들고 오신 게 부지깽이인지, 빗자루인지는 몰라도 거기 얻어맞을 게 무서워 그리 달린 것은 아니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문득 갈대밭 한가운데 멈춰 섰다.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님, 제발 맘껏 교회 다니게 해주세요. 지금은 안 된다면 언제가 되든 그런 날이 오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 나를 샛노란 달이 굽어보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5) 교회도 진학도 포기한 채 공장으로
고추장 장아찌 중에 제일 정성이 많이 드는 것은 굴비장아찌다. 조기 내장을 빼고 손질하는 데만도 공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놓으면 제일 뿌듯한 게 이 장아찌다. 손질한 조기는 소금물에 넣어 씻은 뒤 말린다. 만일 여름에 매달아 말린다면 파리떼가 ‘이게 웬 떡이냐’며 달려들 테니 요즘처럼 선선할 때 말려야 한다. 덜 말린 채로 쓰면 비린내가 난다. 꾸덕꾸덕 충분히 마른 조기를 고추장 단지에 쿡 박아놓고 고추장이 충분히 스며들었으면 새 고추장으로 갈아주기를 두 번 정도 하면 된다. 이렇게 만든 굴비장아찌는 그야말로 밥상의 보물이다. 중요한 손님이 와도 상에 이것 하나만 내놓으면 충분히 생색이 난다.
물론 나는 어려서 이런 귀한 음식은 거의 먹지 못했다. 어머니는 가끔 담그더라도 손님 접대할 때가 아니면 아버지와 오빠 밥상에만 살짝 내주곤 하셨다. 그때는 어머니가 야속했지만 지금은 나부터가 이렇게 정성이 든 음식을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난다. 아버지의 속정을 알기 때문이다. 어린 나를 교회에 못 가게 하신 것도 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러셨던 것이라고 지금은 이해한다.
감시하고 쫓아다니고 몇 번은 붙잡아 때리기까지 했는데도 내가 말을 듣지 않자 아버지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너하고 나하고 뒷산 배나무 밑에 가서 죽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고집을 부린다고 마음을 돌릴 아버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교회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언젠가는 간다. 내 안에는 주님이 계시니까’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는 교회에 못 가는 것도 시련이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큰 슬픔이었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중학교가 있는데, 친구들은 거의 진학을 하거나 사정이 안 되면 서울에 식모살이 가서라도 야간학교를 다녔는데, 나는 그저 일손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집에 남았다.
당시 오빠는 경찰이 돼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빠는 집에 올 때마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동순이, 오빠가 나중에 서울 데려가서 학교도 보내주고 시집도 보내주고 허께”라고 했다. 그러나 막상 진학할 때가 되자 “서울 오빠 집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또 결혼을 해서 조카 낳고 분주하게 살고 있어서인지 오빠도 그 말을 기억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배움을 끝내기는 너무나 서운했다. 집에서 혼자 신문을 놓고 한자를 베껴 써보고, 영어 알파벳을 끼적거려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혼자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곧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가내수공업 공장에 다니게 됐다. 대나무로 장식용 작은 양산대를 만드는 일이었다. 대나무를 쪼개서 작은 기계에 넣어 볼펜심처럼 둥글고 길게 만든 뒤 1000개 단위로 묶는 단순한 일이었다. 동네 언니 대여섯 명과 둘러 앉아 라디오도 듣고 유행가도 부르며 그저 시간이 어서 가기만 바랐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부르며 ‘다 이렇게 사나 보다’ 하고 체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자신도 모르는 불만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6) 스물넷 처녀, 서른넷 총각을 만나다
“참말로 속 터지네. 가시내가 뭣이 잘났다고 오만 선자리 다 마다허고 저러고 집구석에 콕 처박혀 있으까잉∼!”
내가 스물넷 되던 해, 어머니로부터 이런 잔소리를 하루에 열 번은 들었다. 그때로 치면 스물넷은 처녀 나이로는 꽉 차다 못해 넘치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중신이 안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경찰서에서 수사과장으로 근무하던 오빠 덕인지,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선 자리가 줄을 섰다. 선 본 상대 중에는 지서 주임도, 순경도, 선생도 있었다. 몇몇은 내가 좋다고만 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될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는 매번 선을 보고 돌아오면 미적미적 답을 안 하고 두 번 다시 만나러 나가지도 않았다. 다섯 살 밑의 막내 동생도 벌써 상고를 졸업하고 한국전력에 입사한 마당에 말만한 처녀애가 시집을 안 가고 버티고 있으니 어머니로서는 복장 터질 일이었다. “야야, 한번 말을 혀 봐라. 뭣이 마음이 안 든다는 거여, 대체?” 아무리 다그쳐도 나는 고개만 저었다. 어머니는 가슴을 탕탕 치며 눈을 흘기셨지만,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는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상대를 재고 고르느라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선 자리에 누가 나오든 나는 제대로 살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당장 시집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자라오며 내 뜻대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데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 눈을 크게 뜨고, 돈 많고 직업 확실하고 신앙생활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게 현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영악한 계산은 할 줄 모르는 순진한 시골 처녀일 뿐이었다.
그때는 이미 초등학교 졸업하고 5∼6년 다녔던 대나무 공장도 그만뒀고, 집에서 농사와 살림만 돕고 있었다. 때때로 뒷산의 사방사업, 즉 나무 심는 일에 불려 나가기도 했다. 온 나라가 나무 심는 데 열심이었기 때문에 며칠에 한 번씩 동네 젊은이들이 사방사업에 총동원됐다.
그날도 남자들이 삽으로 파 놓은 구덩이에 묘목을 놓아주고, 흙이 다 덮이면 발로 꼭꼭 밟아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사방관리소 직원 한 분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설양, 우리 직원 중에 심성 착한 이가 하나 있는디 만나 볼텨?”
내가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자 “실은 이이가 전부터 설양이 맘에 든다고 다리 놔 달라고 하도 졸라서 말이여”라면서 “나이는 좀 많긴 허지만 학력도 괜찮고 집이 남원인디 그럭저럭 살 만한 집안인가벼”라고 설득해 왔다.
알고 보니 이미 사방사업 현장에서 몇 번 본 이였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듯해 총각인 줄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서른넷이었다. 사방관리소 정식 직원도 아니고 임시직이었다. 그동안 선 본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턱도 없는 조건이었지만, ‘한 번 만나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부모님을 통하지 않고 들어온 소개 자리였기 때문일까.
그렇게 몇 번을 만나 밥도 먹고 산책도 하는 ‘데이트’를 해봤다. 그런데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눠 보니 소개받을 때 들은 말은 ‘고향이 남원’이라는 것 빼고는 거의가 사실이 아니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7) 부모 결혼반대에 반발 보란듯이 도망
살림이 빠듯할수록 자주 먹게 되는 게 깻잎이다. 상이 푸짐할 때는 젓가락이 잘 안 가지만, 찬이 없어 찬밥에 물 말아 먹어야 할 때는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반찬이다. 그래서 제일 어렵게 살던 시절에도 깻잎 김치와 장아찌는 늘 떨어지지 않게 담곤 했다.
깻잎으로 김치를 담글 때는 어리고 연한 잎으로 골라야 한다. 억센 잎으로 담으면 익어갈수록 맛이 없다. 반면 고추장 장아찌로 담을 깻잎은 자잘하면서도 빳빳하고 싱싱한 것으로 골라야 제맛이다. 고추장에 오래 담가 둬도 향긋한 맛과 향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어려서도 넉넉지 않은 집에서 자랐지만 내 일생 최대 고비는 신혼 때였다. 이유는 말하나마나 가난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기 때문이다.
좋다는 선 자리 다 마다하고 스물다섯에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사방관리소 임시 직원과 연애를 시작했다.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소개받을 때는 분명 ‘학력도 집안도 괜찮은 남자’라고 들었건만 실제로 만나 보니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인,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처지였다.
사람 마음이란 것은 참 이상해서, ‘이 남자 참 불쌍하다’ 싶더니 곧 정이 들고,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난 지 6개월쯤 되자 나는 집에 결혼하겠다고 통보했다.
나이 꽉 차서 시집 안 간다고 눈치를 주던 부모님이신지라 어디든 가겠다고 나서기만 하면 환영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경찰인 오빠를 통해 신원조회한 내용까지 들이대며 “이렇게 쥐뿔도 없는 넘한테 간다고 시방까지 그 똥고집을 피고 있었어야!” 하면서 호통을 치셨다.
“저도 잘난 거 하나 없지 않어요.” “뭣이여! 여자가 자기 잘난 것으로다가 시집을 간다냐! 느이 오빠 잘 키워서 경찰 맨들어 놨으면, 그게 느이 오빠만 위해서 헌 일이여! 그 덕에 너도 시집 잘 가고, 집안 일으키라고 헌 일이지. 잔말 말고, 오늘부터 문밖출입 금지니께 그리 알어!”
무섭게 닦아세우기는 하셨지만 부모님은 크게 걱정하시는 것 같지 않았다. 어려서 교회에 못 가게 했을 때나, 중학교에 안 보냈을 때나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내민 채 서성대고, 시키는 일을 미적대면서 한동안 속을 썩였지만 결국 부모님 뜻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는 달랐다. 둘이 도망을 간 것이다. 나는 당돌하게도 “형오씨, 우리가 좋으면 됐지 뭣이 걱정이요? 결혼해서 삽시다!”라고 먼저 말했고 실제로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그렇게 둘이 찾아간 곳은 처음 우리를 소개해 준 사방관리소 직원 집이었다. 거기서 며칠, 남편 동료 직원의 집에서 며칠, 이렇게 열흘쯤 지내고 있을 때 어머니가 어떻게 수소문을 했는지 찾아오셨다. 이런저런 말로 달래고 설득해도 되지 않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겄는가” 하시면서 약혼을 시켜줄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다. 살면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내 뜻을 관철시킨 것이었다.
당시 내 삶의 과정들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으셨는지 지금도 짐작할 수가 없다. 다만 그때 불현듯 내 안에서 터져나온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셨다는 ‘자유의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태어나 처음 맛본 자유의지의 달콤함은 짧았고 대가는 컸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8) 부모냉대 속 내뜻대로 결혼… 살길 막막
좋게 말하면 ‘사랑의 도피’요, 당시 고향 사람들 보기에는 ‘말 꺼내기도 추접스러운 일’이었던 나의 가출 사건은 어머니의 “남사시러서 못 살겄다. 결혼 허락해 줄텡게 들어오니라”는 읍소에 흐지부지 일단락됐다. 차라리 그 길로 도망가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가서 살았더라면 서러울 일도, 고달플 일도 적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랬다면 고향을, 부모를, 어머니의 손맛을, 고추장을 잃었겠지. 세상 일은 참 알 수가 없다.
돌아와서 곧 약혼을 했다. 약혼이라고는 해도 기념사진 한 장 찍은 것이 다였다. 그때는 5월이었고 결혼식은 12월에 올렸으니 7개월을 다시 집에서 지낸 셈이다. 그 기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말이 허락이지, 부모님은 내게 무관심으로 일관하셨다. 함께 살고 있던 올케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면구하기도 하고 조바심도 났지만 “12월로 날을 잡았으니 조신허니 기다리고 있거라”는 부모님 말씀에 더 이상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남편 될 이와 상의하다 보니 큰 문제가 있었다. 결혼해도 들어가 살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집에다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서 근처에 사채를 놓는 아주머니 집을 찾아가 돈 2만원을 빌렸다. 그리고 앞으로 살기로 한 남원 쪽에 월세 1800원짜리 집을 구해 열 달치 방세를 선불했다. 부엌도 없이 아궁이만 있는 방이었다. 그리고 남은 돈으로 허리 높이 좀 안 되는 쌀통을 하나 장만했다. 친정에서 해준 혼수는 스테인리스 세숫대야가 전부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남편이 나를 위해 서 돈짜리 금반지하고 그때 유행했던 비로도 한복, 코오롱 한복 두 벌을 해줬다는 것이었지만 받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결혼식 날 아침, 머리를 올리러 미장원에 가야 하는데 집안 식구들은 각기 바빠 보였다. 어머니도 올케 언니도 따라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혼자 털레털레 버스를 타고 읍내 미장원으로 향했다. 창 밖으로 을씨년스런 겨울 풍경이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 좋자고 부모 반대 다 물리치고 허는 결혼인디 웬 청승인가” 하면서 얼른 눈물을 닦았지만 봇물처럼 커지는 슬픈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다 미장원에서 친척 아주머니를 만나 “아니, 왜 새신부가 혼자 온 거여?” 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엉엉 울어버렸다.
결혼식도 약혼 때 못지않게 사진만 찍는 행사에 불과했다. 가족사진을 찍은 뒤에는 다들 부리나케 식당으로 가버렸다. 그때 막내 동생이 슬그머니 와서 돈 2만원을 건넸다. “큰형이 주라 하대. 신혼여행 가라고.” 그제야 하루 종일 시큰해 있던 코끝이 좀 가라앉았다.
그러나 신혼여행 갈 여유는 없었다. ‘이 돈 2만원으로 방 얻느라고 진 빚 갚고, 홀가분하게 출발하자’고 생각하며 남편과 남원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혼 방에 들어서니 본격적인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언제가 돼야 나를 기억해 내나 보자’고 벼르고 계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 뒤로 몇 년이나 더 징그럽게 고생을 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떠올렸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9) 결혼 첫 날 신혼집 가니 빚쟁이가 맞아
1975년 겨울, 결혼식을 마치고 남편과 남원으로 향하며 “이자부터 우리 힘으로 잘 살아봅시다. 성실하게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안 오겄는가” 하며 손을 맞잡고 다짐을 했는데, 방에 딱 들어서니 웬 아저씨가 일곱 살쯤 된 남자아이와 앉아 있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물으니 첫마디가 “돈부터 내놓으시오!”였다. “무슨 돈요?” “댁네 남편이 이 동네 살면서 갖다 먹은 보리쌀 값이오!”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 얼굴을 보니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남의 방에 막무가내로 들어와 계시면 어쩐다요? 지금은 없응게 다음에 오시쇼.” “그렇게는 못 허지. 들어보니 순창에 좀 산다 허는 집 딸내미 얻어서 결혼했다고 허든디. 살만 혀졌으면 너므 돈부터 갚는 것이 순서 아니당가!”
나는 기가 차서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모릉게 알아서들 하시오” 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 들어가고 버티고 있으니 제풀에 지쳤는지 아저씨는 “갚나 안 갚나 내 두고 볼텡게!” 하며 아들 손을 잡고 돌아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며칠간 빚쟁이들이 끊임없이 찾아왔다. 남편이 총각 시절에 그 고장에서 이장을 한다며 진 빚은 무려 50만원이 넘었다. 집 한 채 값이었다. 예물이라고 해 준 반지와 한복 값도 여기 고스란히 포함돼 있었다.
남편은 빚쟁이들 등쌀에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할 정도였다. 어쩌다 남편과 마주앉게 된 날, 나는 벼르던 말을 했다. “여보, 우리 장사를 헙시다.” “장사? 무슨 장사? 나는 장사는 한 번도 안 혀 봤는디.” “못 허는 게 어디 있소. 목구멍에 풀칠을 하려면 뭐라도 허는 것이지.” “그럼 무슨 장사를 헌당가?”
다음날로 우리는 장에 가서 생 명태 두 짝을 사고 리어카를 얻어 왔다. 그리고 남편은 사촌 형과 둘이서 리어카에 생선을 싣고 광한루를 한 바퀴 빙 돌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한 마리도 안 팔리네” 하는 것이었다. “이리 줘 봐요. 차라리 내가 팔지!” 집 앞에 명태를 널어놓고 팔아봤는데 나라고 별 수 없었다. 창피해서 “생선 사시오, 생선 사시오” 하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이었다. 겨우 세 마리, 300원어치를 팔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걷어치웠다. 남은 생선은 시댁과 큰집, 주인집 등에 나눠줘 버리고 말았다.
“다른 연구를 해 봅시다.” “무슨 연구를 또 한당가.” “아, 그럼 마냥 이러고 있을라요?” 다시 우리는 광양에 기차 타고 가서 김을 한 톳 사다 팔아봤다. 역시 숙맥 둘이서 얼굴만 붉히다가 고작 1000원 남기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 뒤로 감도 팔아봤고 번데기 장사도 해 봤지만 걷어치우는 시기만 빨라질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빚쟁이는 계속 찾아오고, 하루 한 끼도 못 먹는 날이 계속됐다. 그런 와중에 7월 한창 더울 때 큰딸 은영이가 태어났다. 병원은 고사하고 산파 부를 돈도 없어 애 낳은 경험이 있는 동네 새댁을 불러다 놓고 아이를 낳았다.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가신 뒤, 애 낳고 딱 사흘 만에 나는 일어나서 밥 하고 기저귀를 빨아야 했다. 남편은 빚쟁이들 때문에 아기 얼굴 보러 오기도 어려웠다.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렇게 하나님은 나를 인생의 가장 큰 고비로 몰아가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0) 가장 힘들 때 예수님 생각… 아기 업고 교회 출석
큰딸 은영이를 낳고 사흘 만에 일어나 살림을 돌보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났을 때였다. 기저귀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 들어왔다. 앞집 새댁이 나보다 딱 1주일 늦게 딸을 낳았는데, 나더러 월 5000원을 받고 그 집 살림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딴에는 내가 기왕에 기저귀 빨래를 하고 있으니 같이 맡기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벌이가 거의 없던 터라 두 번 생각도 않고 좋다고 했다.
그날부터 바로 앞집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기저귀며 산모 빨래를 우리 집 것보다 몇 배 힘을 줘서 빨고, 삶고, 청소하고 미역국을 끓이다 보니 문득 기가 막혔다. 나 자신도 몸을 푼 지 고작 1주일인데 다른 산모를 수발하는 처지가 한심하고도 서글펐다.
그간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연탄불 한번 못 때고 겨울을 났어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 이 때의 슬픔은 전에 느꼈던 것과 달랐다. 마음이 마르고 말라 물기라곤 전혀 없는 사막처럼 팍팍해져 있었다. 그런데 고마운 건 그렇게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싶은 바로 그 순간 예수님 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아, 교회에 가야겠다!”
어쩌면 내가 그 때를 가장 힘들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 없이 살았던 마지막 시기여서인지도 모른다. 그 후 교회에 다니고 다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뒤로는 더 어렵고 배고파도 그리 힘들지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주님 붙들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같은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던 교회 집사님을 찾아갔다. 남원동부교회 구역장이고 전도도 열심히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상하게 나보고는 한번도 교회에 가자고 하신 적이 없었다. 먼저 찾아가서 “다음주부터 나도 교회 나갈라니까 데불고 가시오” 했다. 갓난아기를 업고 그렇게 다시 교회에 다니게 됐다.
세상에 혼자라고, 남편도 기댈 수 없고 오로지 나 혼자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한탄하기도 했건만, 그 덕에 교회 간다고 당당하게 나서도 막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껏 교회 다니게 해주세요”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기도는 이 때 이미 이뤄진 것이었다.
그 후로도 물론 생활은 어려웠다. 한 번은 집에 쌀이 똑 떨어져서 고민하던 차에 친정집에서는 한참 논에 나락 훑을(탈곡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를 업고 찾아가 “일손 모자랠깨비…”하며 은근슬쩍 사람들 틈에 끼어 일을 도왔다. 그리고는 사람들 눈을 피해 마당에 널려 있는 나락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 세 자루를 가득 담은 뒤 근처 방앗간으로 가져갔다. “우리 식구들 모르게 좀 찧어주소. 서로 손해 볼 것 없응게”라는 내 말에 그 집 주인은 금세 뜻을 알아차렸다. 좀 덜어내는 조건으로 입을 다물어달라는 뜻 말이다. 한참 뒤에 가지러 가니 찧은 쌀을 겨우 한 자루 돌려줬다. 그러나 싫은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나는 부리나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말하자면 친정집 쌀을 훔친 것이다.
비어 있던 쌀독에 쌀을 부으니 거의 입구까지 올라왔다. 그 행복감이란. 대한민국 부자들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역시나 사단이 났다. 누군가 내가 쌀자루를 들고 버스 타는 장면을 본 것이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1) 나를 부엌데기로만 알던 아버지가…
“동순아, 야야, 말 좀 혀 봐라. 참말로 니가 쌀 푸대 돌라간(훔쳐간) 거여? 아니제?”
친정집 벼 탈곡하는 날, 사람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 몰래 쌀 한 자루를 훔쳐낸 날로부터 얼마 후 친정집에 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급기야 어머니는 식구들이 다 있는 앞에서 나를 추궁하셨다. 물론 어머니는 모두 오해라는 생각에,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은 아버지가 나를 더 안 좋게 보실까봐 걱정돼서 물으신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쌀을 훔쳐낸 나로서는 드릴 말씀이 없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점점 나를 조여왔다. ‘잘못했다고 할까, 한번만 봐달라고 할까, 아니면 뭘 그런 걸 가지고 난리냐고 역정을 낼까’ 궁리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문을 벌컥 열고 나오셨다. “내가 가져가라고 줬다! 누가 도둑질했다고 씨부리더냐. 한번만 더 그딴 소리 혀 봐, 주댕이를 쪄불랑게!”
그 때까지였다. 나를 구박덩이, 부엌데기로만 여기는 아버지라고, 하나도 해 준 것 없는 아버지라고 원망하던 마음은 그날로 풀렸다. 나도 아버지의 귀한 자식이란 것을 그 이후로는 한번도 의심해 본 적 없었다.
그쯤부터 친정과 빈번하게 왕래하고, 추수하면 친정에서 쌀도 보내주고 하면서 조금씩 살림살이가 안정돼 갔다. 남편도 다행히 임시직 공무원으로 꾸준히 일하면서 월급을 받아왔다.
물론 줄줄이 태어난 딸들 먹이고 입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었다.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파출부, 뜨개질, 밤 깎기도 했고, 화장품 외판원도 해봤다. 애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업고, 화장품 가방 멘 채 아지랑이 피는 거리를 허덕이며 걸어가던 어느 여름날을 떠올리면, 어떻게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아득해진다.
그래도 남에게 진 빚은 어김없이 갚았다.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애들 키우고, 조금씩 돈 모아서 전셋집으로 이사 가고, 그런 재미로 살았다. 남편이 익산시청 수도과 임시직으로 들어가 익산에서 2년간 살다가 다시 남원으로 돌아와 1년쯤 됐을 때였다.
남편이 그날따라 늦는다 했더니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택시 기사인데 소매 언저리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 댁 아저씨가…”하고 말문을 여는데 나도 모르게 “죽었대요, 살았대요?”하고 물었다.
“살기야 살았지요.” 이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며 속으로 이런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도 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남편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승합차에 치였다고 했다. 뺑소니였다. 머리와 팔에 상처를 입어 피를 많이 흘렸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데는 없었다.
남편을 싣고 와 준 택시 기사에게 뺑소니차를 봤느냐고 물었다. “글씨…. 다른 건 못 보고 교회차든디.” 그 말에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곧 “어차피 못 찾을 텐데 그냥 놔둡시다”라고 말해버렸다. 그날 밤에 꿈을 꿨다. 골목 끝에 점집이 있었는데 마귀들이 모여 난리굿을 피고 있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소리치니 주변이 꽃밭으로 바뀌었다.
남편은 얼마간 입원해 있다 별 후유증 없이 회복해 퇴원했다. 그리고 얼마 후 친정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순창으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2) 순창에 이사온 후 남편이 고추장 장사 권유
“느그들 인자 고마 순창으로 돌아와 살그라. 아부지 엄니도 가차이서 돌봐 드리고. 느이 서방 일자리는 나가 알아서 헐테니. 동순이 니는 나 사는 것도 좀 돌아보고.”
1982년에 서울 경찰국 특수과장으로 근무했던 친정오빠가 순창경찰서장으로 부임해 왔다. 오빠는 순창읍내 관사에서 살고, 올케언니는 조카들과 함께 서울에 남았다.
때문에 나더러 읍내 관사에 다니며 살림을 돕고 부모님과도 가까이 살라며 오빠가 순창으로 이사 올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손을 써서 남편을 순창구청으로 발령내 주었다.
그렇게 순창읍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아쉬웠던 것은 정들었던 남원중부교회를 떠나는 일이었다. 교회에 다시 다니기 시작할 때는 남원동부교회에 나갔으나 도중에 한 번 교회를 옮겼다. 이유는 남편이 일하던 사방관리소 소장님이 전주 서문교회 장로님이셨는데, 아는 목사님이 남원에서 교회를 새로 개척하니 그쪽으로 나가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었다. 나는 소장님께 “그 핑계로다가 우리 애들 아부지도 교회 함께 나가게끔 말 좀 잘 혀 주세요”라고 했다.
내 신앙생활을 말리진 않아도 따라 나서지 않던 남편은 직장 상사 부탁을 마다하기 어려웠는지 순순히 “함께 교회 댕길테니 그짝으로 나가자고”라고 했다.
남원동부교회를 찾아가 보니 우리가 첫 성도였다. 아직 교회당도 없이 가정집을 얻어 목사님댁 식구 6명이 달랑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 내외와 목사님 내외가 함께 벽돌을 날라 교회를 지었다. 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 말고도 남원중부교회는 나에게 참 귀한 교회다. 왜냐하면 교회를, 목사님을 섬기는 일의 즐거움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목사님댁이 하도 어렵게 사니까 교회에 갈 때마다 쌀 김치 등을 이고 가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차츰 친정에 가서 채소를 얻어와도, 이불이 필요해 사러 가도 사모님 생각이 났다. 그래서 어딜 가든 내것 하나 사면 목사님댁 것 하나 사곤 했다. 나도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웠다.
정이 담뿍 든 교회를 떠나는 발걸음이 쉽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순창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에겐 중요한 의미였다. 금의환향까지는 아니어도 떠나올 때와 달리 가족들 건사할 만큼은 자립했다는 점도 뿌듯했다. 그동안 알뜰히 살아온 덕에 남편이 남원에서 진 빚은 다 갚았고, 전세금 1000만원에 월세 10만원짜리 집을 얻어 이사했다.
그때는 네 딸 가운데 셋째까지 태어나 있었다. 남원과 익산에서 하던 것 같은 부업을 다시 할 만큼 어렵지는 않았지만 어려서 어머니에게 늘 들었던 대로 ‘죽으면 썩어질 손, 놀려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집 근처 고추장 만드는 집으로 일을 하러 다녔다.
나도 본래 어머니에게 잘 배워 고추장을 담그는 법은 훤했다. 그러나 이 집에서 일한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고추장 된장 장아찌 담그는 일이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1년쯤 지났을 때 남편이 “이자는 우리끼리 고추장 장사를 혀 보세”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선뜻 자신이 서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3) 내 집 마련하자 고추장 사업도 용기 생겨
고추장 사업을 시작할 때 우리 집 상황은 한편으로는 좋고 한편으로는 어려웠다. 처음으로 집을 사서 이사 간 직후였다는 점에서는 좋은 시절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알는지 모르겠다. 사글셋방, 전셋집을 전전하다 처음 집을 사서 이사 가는 기분을. 1970년에 대한전선에서 나온 냉장고를 들여놨을 때 이후로 가장 좋았다. 지금은 아무리 좋은 집을 사도 그런 순진한 기쁨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 집을 마련하면서 우리는 빚을 꽤 졌다. 본래 내 성격대로라면 빚을 져서까지 집을 사지 않았을 텐데, 그때는 무리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살고 있던 전셋집 주인이 이사 온 지 불과 1년 만에 집세를 다시 올려 달라고 하면서 ‘집 없는 설움’을 단단히 자극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내 집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좋은 집이 없나 알아보러 다녔다. 순창 터미널 근처에 나온 2층 양옥집이 마음에 딱 들었다. 가격이 1800만원이었는데 가진 돈은 전세금까지 합해 1400만원 정도였다. 포기하려고 해도 그 집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하나님, 저 집을 저희 가족에게 주세요” 하고 기도한 뒤 덜컥 계약을 했다.
그때 초등학교에 갓 들어갔던 큰딸은 양옥집에 살게 된 게 워낙 좋았었는지 그 이후 기억만 선명하게 가지고 있다. 지금 물어보면 “어릴 때 우리 집이 동네에서 제일 잘 살지 않았어요?” 한다. 단칸방부터 시작해 그리도 고생하며 키웠는데 다 잊고 유복하게 자란 것으로 기억해 주니 어미로서는 고마울 뿐이다.
내 집을 마련하자 사업을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그 전에도 몇 번 친정 식구나 이웃들로부터 “너므 일만 돕지 말고 즈그 일을 해보랑게” 하는 조언을 들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던 터였다. 남편이 본격적으로 제안한 데 이끌려 1983년 성탄절을 앞두고 쌀 한 가마(80㎏) 분량의 고추장을 담갔다.
아무리 작은 사업이라도 하나님께 신고는 해야 할 것 같아 남원서 다니던 남원중부교회 왕용주 목사님 내외를 모셔다가 예배를 드렸다. “우리 설동순 집사님, 욥기 8장 7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지금은 조촐하게 시작하는 고추장 사업이 점점 번창해서 앞집 뒷집 옆집 땅 다 사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사모님은 나중에 “실은 나가 그때 우리 목사님 기도 듣고 속으로 피식 웃어부렀네” 하셨다. 빚을 잔뜩 지고 있는 우리 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좀 분수에 맞게 기도를 해 주시지”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기도가 한 치도 틀리지 않게 다 이뤄졌다. 우리는 나중에 고추장 판 돈으로 그 뒷집 양옥을 사들였고 양쪽 옆과 앞쪽 땅 120여평(약 430㎡)도 샀다. 기도 한 토막도 땅에 떨어트리지 않고 들어주시는 주님이시다.
그런데 막상 처음에는 고추장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일손 돕던 집이나 주변 사람들을 보면 판로는 대개 남편이나 친척의 직장 등을 통로로 알음알음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내 주변머리로는 여기저기 부탁해서 고추장을 팔기 시작한다는 게 엄두가 안 났다. 항아리마다 가득가득 담긴 고추장을 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4) 판로 염원 기도에 기적처럼 손님 찾아
1983년 12월 20일이었다. 고추장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쌀 한 가마를 들여 담근 고추장들이 항아리마다 가득한데 팔 방법이 없었다. ‘괜히 일을 벌였나…’ 하며 한숨짓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서울에 사는 시누이였다.
“언니, 고추장 판다고 맨들었다면서요?” “응, 그라지, 근데 무슨 일이당가?” “고추장 1㎏ 50개만 싸서 부쳐주시라고요.” “뭣 헌다고 그렇게 많이?” “우리 아저씨 댕기는 동사무소 직원들헌티 돌릴라고 그라지요. 고추장 하면 순창 고추장인지 서울 사람들도 다 아는디, 이번 참에 지대로 맛보라고요. 어차피 연말이면 선물 돌리고 헌께.”
그렇게 해서 처음 고추장 판 돈을 만져 봤다. 개당 8000원씩 총 40만원이었다. 그 돈을 쥐니 용기가 생겼다. 고추장 장아찌도 담가 팔자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재료를 산더미처럼 사들였다. 문제는 일손 부족이었다. 친정어머니가 오셔서 고추장 간 보는 것부터 두루두루 도와주셨지만 더덕이며 마늘 까는 일까지는 둘이서 다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딸아이들을 동원했다. 큰 대야마다 더덕과 마늘, 도라지가 산더미처럼 담긴 방에 초등학교 2학년인 큰딸은 물론 7세 둘째, 3세 셋째까지 불러놓고 “엄마가 바쁜게 느그들끼리 이거 다 까놓그라” 했다.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우리보고 이걸 다 까라고요?”하는 큰딸에게 “그려, 니는 엄마 도와서 많이 해 봤제? 동생들 잘 갈켜 가면서 혀봐” 했다.
반나절쯤 후 들어가 보니 더덕과 마늘은 그럭저럭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 손이 엉망이었다. 손톱마다 흙물이 들고 여린 손끝이 거칠거칠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딸들은 방실방실 웃으며 “우리 잘했지요?” 한다. 칭찬 한 마디 없이 나는 큰딸을 보고 “앞으로 씨잘데없이 밖에 나가 돌아댕기지 말고 학교 땡하면 집에 와서 동생들 데불고 마늘 까야 헌다” 했다. “매일 허라고요?” 하면서 큰딸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뒤로 딸들이 참 고생을 많이 했다. 그 뒤에 태어난 넷째까지 딸들은 모두 중·고교 다닐 때까지 늘 집에만 오면 마늘과 더덕 까느라고 손이 쉴 틈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그럼에도 네 딸은 한 번도 싫은 소리 안 하고 착하게 잘 자라줬다. 학원 한 번 못 보냈어도 대학 가고 취직해서 다들 잘 살고 있다. 어릴 때 하도 고생을 시켜서 자란 뒤에는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했는데도 큰딸 은영이는 자진해서 내 곁에 살며 사위와 함께 일을 도와주고 있다. 무엇보다 모두 신앙심이 깊다는 것이 가장 고맙다.
처음에는 그렇게 가족과 친척들이 도와줘서 고추장을 팔았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쪽 일은 입소문이 중요한데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소문이 날지 기약이 없었다. 나는 이렇게 기도를 했다.
“하나님,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는 안 허겠습니다. 교회도 돕고, 하나님 일 할 수 있게끔 고추장 팔 곳 좀 마련해 주셔요.”
그런데 얼마 후에 집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어릴 때 고향에서 나를 전도한 전도사님이다. 그 후 안수 받고 전주 전동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던 김성돈 목사님께서 같은 노회 목사님들을 죄다 이끌고 오신 것이었다. “우리 설동순 집사가 고추장을 판담서? 나가 좀 팔아주러 왔지.”
***[역경의 열매] 설동순 (15) “귀한 사람 먹는데 좋은 재료로 만들자”
어린 나에게 신앙의 길을 열어 주셨던 김성돈(전주 전동교회 원로) 목사님께서는 내가 고추장 사업을 막 시작했을 때도 길을 뚫어 주셨다. 전주에서 순창까지 같은 노회 소속 동료 목사님들을 죄다 이끌고 고추장을 사러 오신 것이다.
“우리 설 집사가 고추장을 맹글어 판다는디, 내가 모른척 할 수 있간디? 내 설 집사 야무진 건 열 살 먹었을 적부터 알아 봤응게. 고추장 맛도 확실할 거여!”
김 목사님의 그 말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응원이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할 일이 맞나’ 하며 자신 없어지곤 했던 마음이 확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오신 목사님들에게 그분들이 구입한 고추장만 달랑 들려서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담가놓은 장아찌를 다 꺼내 와서 한 분당 두세 가지씩 싸드렸다. 놀란 친정어머니가 옆에서 눈치를 주셨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가시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도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좋은 쌀이랑 좋은 고춧가루 써서 잘 맹글었기에 망정이지, 싸게싸게 만들어서 이문 남길라고 했으믄 목사님들 볼 낯이 없을 뻔했고만….’
돌아보면 사업 시작 직후에 이런 마음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교회를 다니고, 매주 설교로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내가 처음부터 세상을 섬기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조금이나마 살림살이 펴지고, 애들 가르칠 수 있도록 한 푼이라도 벌려고 시작했다는 게 솔직한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판 고추장을 먼저 내 오빠, 남동생, 그리고 그 가족과 직장동료들이 먹도록 하셨다. 다음으로는 늘 고마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고향 목사님이 고추장을 사 가셨다. 나로서는 ‘귀한 사람들 먹이는 것인디, 다음번에는 더 좋은 재료로다가 더 반듯하게 만들어야 쓰겄구만’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점차 모르는 사람들이 구입하는 비중이 커졌지만 좋은 고추장을 먹게 해주고픈 심정은 그대로였다.
그 마음이 ‘순창전통별미고추장’에 대한 내 철학이 됐다. 순창에서 재배된 가장 좋은 재료, 가장 깨끗하게 키운 재료로 가장 맛있는 고추장과 장아찌를 만들자는 철학 말이다. 때문에 우리 상품은 다른 집에 비해 가격이 조금씩 비쌌다. 지나가다 들른 사람들은 “여기만 왜 비싸요?” 하고는 그냥 가기도 했다. 나는 “싼 재료로 만든 넘 찾는다믄 얼마든지 싼 데로 가시랑게” 하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 사간 사람들은 또 찾아왔다.
첫해 고추장 장사는 그렇게 성공을 거뒀다. 다음해는 처음의 5배인 쌀 5가마 분량의 고추장을 담갔다. 그 다음해는 10가마, 다음해는 20가마…. 이렇게 해서 지금은 매년 100가마 분량의 고추장을 담근다. 재료로 들어가는 고추만 14t 트럭으로 열네 차다.
30년 가까이 해 왔지만 고추장 사업에 있어서는 역경이 거의 없었다. 하나님께 감사 또 감사드릴 일이다. 딱 한번 억울한 일은 있었다. 1996년쯤이었다. 인근 가게에서 어느 정부 기관에 대량으로 납품하던 고추장이 공장에서 만든 싸구려 고추장을 섞어 판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문제는 얼마 후 그게 우리 집 일인 것처럼 소문이 났다는 것이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6) ‘공장 고추장 섞어 판다’ 소문에 맘고생
“은영이 엄마, 시방 큰일 났다믄서?” “큰일이라니? 무슨 일 말이당가?” “은영이네 고추장이 뭐 잘못된 게 들켜서 난리가 났다고들 쑤군쑤군 하든데? 암시랑도 안 헌거여?”
순창의 전통 고추장 민속마을에는 30곳이 넘는 고추장집이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붙어 있다. 막연하게 ‘순창 고추장’을 사려고 온 손님들은 그저 외관과 주변 입소문에 의지해 가게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 번 ‘저 집은 못 믿을 집’이라고 소문이 난다면 여간해서는 만회하기 어렵다.
그런데 중소 규모 고추장집 중에서는 짱짱하다고 소문나 있던 우리가 소문에 휘말렸다. 인근 다른 집이 싸구려 공장 고추장을 섞어 팔다 발각된 것이 어찌 됐는지 우리 일로 알려진 것이다. 그 고추장이 납품되던 곳에는 “어느 집 고추장이냐?”는 문의 전화가 연달아 걸려왔다고도 했다.
“아이고, 억울혀서 못 살겄네. 버선 속이라 뒤집어 보여 줄 수도 없고. 이걸 우짠다냐.” “엄마, 그냥 진짜로 걸린 집은 저그 저 집이라고 밝혀버리믄 안 되겄는가. 아예 가게 앞에 커다랗게 써 붙여 버립시다.”
아닌 게 아니라 딱 그렇게 하고픈 심정이었다. 그 집 앞에 동네 사람들 다 모아놓고 “어디 양자대면 혀서 누가 고추장에 몹쓸 짓 혔는가 속 시원하게 밝혀 보드랑게!” 하고 소리치고도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설 집사’여서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내가 이만큼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첫째로 하나님 은혜이고, 둘째로 ‘아무래도 믿는 사람이 파는 고추장이 확실하겠지’ 하고 찾아와 주는 기독교인 손님들 덕이었다. 때문에 내가 교인인 것을 인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 난장을 피워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인상을 준다면 고추장에다 몹쓸 짓을 했다는 누명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물론 정직하게 고추장을 만들어 왔다는 명예만은 반드시 회복하고 싶었다. 방법이 없어 끙끙 앓다시피 할 때 한 손님이 찾아왔다. “여그가 설 집사님이 하시는 가게지요?” 하고 운을 떼고는 뭔가 차마 말을 못 꺼내는 기색이었다. 말하나마나 “기독교인이람서 소문맨키로 속여 파는 건 아니겄지요?” 하고 묻고 싶을 것이었다.
“맞아요. 나가 설동순 집사여요. 즈이 집 고추장은 딴 거는 없고요. 지가 맨들고 싶은 대로 만든당게요.”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쫑긋 세우는 손님에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지는요. 낭중에 우리 예수님이 재림해서 이 땅에 오신다 하믄요, 우리 집으로 꼭 모시고 싶구먼요. 누추한 집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체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더 귀하게 여겨주신 게요. 오시면 딴 건 없고, 우리 집 고추장 푹 떠서, 순창에서 나는 질로다 맛난 야채랑, 순창 쌀로다 반지르르하게 지은 밥이랑, 맛깔나게 비벼서 한 그릇 대접하는 게 지 꿈이여요. 그런 마음으로다가 고추장 만드는 것뿐이랑게요.”
그 손님은 두 말도 안 하고 고추장을 한 단지 사가지고 갔다. 그 손님을 배웅하는 마음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고 뭔가 가슴이 뭉클하면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 뒤로 얼마 안 가 누명은 싹 잊혀졌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설 집사’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추장을 사갔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7) 틈틈이 개척교회 돕기… 사업은 날로 번창
다음 달 중순이면 매실 장아찌 담그기 좋은 때다. 그동안 여러 가지 매실로 장아찌를 담가 봤지만 가장 맛있는 게 재래종 청매실이다. 중간 크기의 단단한 청매를 골라, 소금물에 푹 절인 뒤 껍질을 벗기고 물기를 빼 고추장 항아리에 꼭꼭 눌러 담는다. 청매가 고추장을 충분히 흡수 할때 새 고추장으로 갈아 주기를 몇 차례 하다 보면 맛이 든다.
매실은 참 기특한 과실이다. 여러 고추장 장아찌 중에서도 제 본연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추장과 잘 어우러져 색다른 맛을 내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남들보다 배운 것은 적고, 세상 경험도 많지 않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1등 아니면 2등, 그 안에 들자”고 마음을 먹었다. 기도도 열심히, 헌금도 열심히, 목사님을 섬기는 일도 열심히 하고만 싶었다.
가족에게 “교회에 갖다 주는 돈 반만 식구들한테 써 보지”하는 핀잔도 듣지만 고추장 사업을 벌인 뒤 한번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것은 ‘돈 벌어서 선교에 보태겠다’고 서원했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분명했다.
또 국내 미자립교회들과 인도, 러시아 교회 개척에 작은 힘이나마 보탠 것이 알려져서 국민일보에 소개됐고, 국민 비전클럽 회원이 됐고, CBS TV ‘새롭게 하소서’에 출연했다. 그러면서 사업이 더 번창했다. 많은 교회와 목회자, 성도 분들이 믿고 고추장을 구입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삶의 어려움은 뜻밖에도 신앙생활 가운데 자주 찾아왔다. 어쩌면 나는 매실에게 좀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중심은 놔두고 받아들일 것만 챙기는 자세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지를 못했나 보다. 마음을 다해 뭔가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중심을 잃을 만큼 확 기울어지게 된다. 그럴 때 시험이 찾아온다.
1997년쯤 일이다. 남원에서 순창으로 이사온 뒤 나는 집 가까운 한 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처음 목사님 댁을 찾아갔을 때, 목사님께서 상에 간장 종지 하나를 놓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시상에… 아무리 어려워도 목사님이신디’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원중부교회에 다닐 때도 그렇게 했던지라 여기서도 내 것 하나 살 때면 목사님댁 것 하나 더 사면서 챙겨 드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무슨 덕 볼라고 그라간디? 그냥 내 맘이 좋은게 하는 것이제’ 했다.
그렇지만 깊은 속마음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세상적인 서운함이 밀려왔다. 계기가 된 것은 사모님께서 어느 장로님을 도와주라고 부탁하신 일이었다. 건실한 사업가인데 잠깐 어려우니 돈을 빌려드리라는 것이었다. 교인끼리의 돈 거래가 꺼려졌지만 사모님 청이라 적지 않은 돈을 빌려드렸다. 그 얼마 후 집사님 여럿이 집에 찾아왔다.
“설 집사도 돈 빌려줬담서? 을매나 되는가? 글씨 우리 다 떼이게 안 생겼는가, 다 함께 고발할 참인게 같이 허세.”
알고 보니 빚이 산더미인데, 하나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더라고 했다. “같은 교인끼리 그라믄 되간디요. 지는 좀 기다려 볼 참이어요” 하고 물리치기는 했지만 울화가 치밀었다.
그 직후에 사정을 모르는 목사님이 집으로 찾아오셨다. 교회 종탑을 세우는 데 기부하라는 것이었다. 그 순간 마음에 확 시험이 들어왔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8) 종탑헌금 불만… 잘 나가던 교회 발길 끊어
“우리 교회 종탑이 원체 낡어서, 애들도 올라가쌓고 허는디 전깃줄도 위험허고, 이참에 새로 세웠으면 혀요. 그래서 말인디, 설 집사님께서 맡어서 세워 주시고 복을 받으시지요.”
평소 같으면 목사님께 직접 이런 제안을 받은 것부터가 감사해서 두말 않고 승낙했을 터였다. 그러나 마침 그 직전에 교인끼리 돈 문제가 생겼고, 이로 인해 목사님 사모님께 인간적인 서운함을 갖게 된 터라 듣는 마음이 곱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러면 제가 어렵기는 허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맡지요” 했다. 그런데 이틀 후에 목사님이 또 찾아오셨다. “글씨… 알어보니께, 비용이 쪼매 더 든다네요.” 내가 이미 작정한 비용에 50%를 더 내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해 못할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내 마음에 찾아와 있는 시험이었다. “목사님, 지가 요즘 좀 어려워요. 한번 약속혔으니 첨에 내기로 헌 돈은 내겄지만 나머지는 다른 데서 구하셔요.” 이렇게 답하면서 속으로는 ‘참 내, 목사님 자제분은 서울서 한의사를 헌담서, 왜 교인한테만 돈을 내라고 허신대?’ 하는 불만이 올라왔다.
그리고는 그 주일부터 교회에 안 나갔다. 신앙인으로서 나의 한계가 그때 바닥까지 드러난 셈이다. 하나님께 복 받으려고, 하나님 일에 동참하려고 헌금을 한다면서도 세상적인 보상을, 즉각적인 인정을 바란 것이다.
교회에 발길을 딱 끊자, 사모님 장로님 집사님 할 것 없이 무시로 심방을 왔다. 그때 작은 사건이 또 있었다. 한 분이 “집사님, 같이 기도원에 가십시다” 하기에 “지는 기도원이라는 데를 안 가는 사람이여요” 했더니 서운한 말투로 “집사님. 그러면 지옥 가요” 하는 것이다.
“내가 왜 지옥엘 갑니까? 저는 천국 백성입니다. 당신들이 가면 몰라도!” 하고 냅다 소리를 지르고 모두 쫓아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교만할 수가 없는 말이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아이고, 내가 좀 참을걸’ 싶었지만 여전히 분이 안 풀리고, 마음이 복잡했다. 기도를 하려 해도 도저히 나오지 않고, 교회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때 병이 찾아왔다. 목 언저리를 만져 보니 콩알만 한 몽우리 대여섯 개가 잡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며 넘겼는데 며칠 더 지나니 밤톨만 해졌다.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남원에 살 때 알던 장로님이 의사로 계시는 병원에 찾아갔다. 장로님께서는 보자마자 “조직검사를 해야 합니다” 하셨다.
덜컥 겁이 났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오신, 전에 다녔던 남원중부교회 사모님을 “지가 알어서 헐팅게 사모님은 어서 가서 목사님 식사 챙겨주셔요” 하며 먼저 돌려보냈다. 그리고 그 길로 도망갔다.
‘암은 칼 대면 퍼진다’는 속설 때문에, 아니 그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명의 위협에 압도된 때문이었다. 집으로 향하면서도 발길을 옮겼다 돌렸다를 반복하다 문득 약국이 보이기에 들어갔다.
“약사 선상님, 여기 한번 봐주셔요.” 약사는 살펴보더니 “임파선이나 갑상선 문제일 수 있고, 결핵균 때문일 수도 있는데, 어쩔까요, 결핵 약이라면 지어 드릴 수 있고” 했다. 의약분업 전이라 처방전 없이 결핵 약을 보름치 지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도했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19) 갈등 빚은 이들도 쾌유 기도… 멍울 사라져
“아이고오, 주님! 지 좀 살려 주셔요. 지가 지금껏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혀 놓고 지 잘 먹고 잘 살자고 교회 다녔구먼요. 용서해 주셔요. 살려 주셔요. 주님 피 묻은 손으로 어루만져서 낫게 해주셔요. 지는 병원 갖다 줄 돈 없어라. 그 돈으로 선교하게끔 지 좀 낫게 해주셔요.”
울면서 며칠을 기도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 사모님, 잠시 관계가 틀어져서 불편했던 그분이 어디서 소식을 들으셨는지 눈물바람으로 달려오셨다. 손에는 물통을 들고 계셨다.
“집사님! 지가 오늘 새벽에 기도원에 가서 떠온 물이어요. 이놈 바르고 마시면서 기도하면 어떤 병도 싹 나슨다 헌께요. 오늘부터 그럭허면서 같이 기도해 보십시다!”
그 말에 맺혔던 마음이 풀렸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났다. 문득 목을 만져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싹 나은 것이다. “아이고, 어매나, 진짜로 고쳐주셨네, 고쳐주셨어! 싹 낫어부렀네!”
이렇게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다 하면 누구나 그 길로 내가 교회에 도로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 못난 종은 그러고도 교회로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교회에 가지 않은 지 넉 달가량 된 10월 초였다.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순창 지역의 다른 교회 목사님이셨다.
“집사님! 저는 순창읍교회 김별배 목사입니다. 한번 찾아뵈어도 될까요?” 그리고는 오후에 사모님과 두 분이 찾아오셨다. “지금 교회에 안 나가신다면서요?” “예…. 그렇게 되었구먼요.” 거짓말은 못 하는 성격이라 그간 시험에 들었던 이야기를 다 했다.
“다른 것은 없고요, 믿음 좋으시던 분이 그렇게 교회 떠나시는 것을 보기가 영 안타깝고 혀서, 저희 교회라도 나오시면 어떨까요.” “그라믄 목사님, 지가 크리스마스만 지나고 교회 나갈게요. 지금은 정말 못 가겠네요.”
목사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럭허셔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돌아가셨다. 그날 나는 김치 담글 배추 1000포기에 간을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치 배추 수천 포기가 소금물 속에서 건져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외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며칠 후 지나가다 보니 바로 그 순창읍교회에서 저녁 집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속으로는 ‘어매, 가고자파 미치겄네’ 했지만 크리스마스까지 안 간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결국 발걸음이 교회로 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큰 은혜를 받았다.
집회 강사였던 강서신광교회 유정성 목사님께서 성도들에게 “올해 성탄절에는 결식노인들을 위해 교회에 쌀을 내놓읍시다” 하셨다. 그 말이 나에게는 축복처럼 들렸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못난 종에게 이렇게 다시 기회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두 말도 안 하고 쌀을 내겠다고 작정하고 왔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남편에게는 허락을 받아야겠다 싶었다. “은영이 아빠, 우리 쌀이 좀 남을 것 같기도 하고, 교회에서 어려운 사람들 돕는다고 해서, 한 다섯 가마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데 어떻게 허까?” 하니 “그려, 알아서 혀”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25가마를 내놨다. 그때부터 날로 새롭고 즐거운 신앙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물론 크고 작은 시험은 계속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20) 선교한다 해 고추장 보냈지만 수차례 떼여
고추장 팔아서 돈을 벌기도 많이 벌었다. 그 돈으로 애들 공부시켰고, 어려움 없이 살고 있다. 하나님 일에 주저 없이 헌금을 낼 수 있을 때 가장 기쁘다. 물론 그러느라 정작 나 자신을 위한 비싼 옷, 비싼 물건은 사 본 적이 없다. ‘사치’라는 것이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행복감을 위해 큰 돈을 쓰는 일이라면, 선교는 나만의 사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나를 허술하게 보는 사람들도 적잖게 만난다. 10년 전쯤이었다. 목사님 한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고추장을 싸게 공급해 주면 그걸 팔아 선교비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목사님은 곧 트럭을 빌려 와 고추장 몇 천만원어치를 수차례에 걸쳐 실어갔다. 그런데 그 후 연락도 없고 전혀 돈을 보내지 않았다. 한동안은 전화를 해도 피하더니 나중에는 미안하다며 도저히 사정이 안 된다고만 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수도 없었다. 그나마 이런 경우는 잘 해보려다 낭패를 봤겠거니 할 수 있다. 한번은 어느 정치인이 연락을 해 왔다. 최근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분명 정치권에서 활동하는 인물이었다. 국회 바자에서 고추장을 팔겠다며 “수익금을 좋은 데 쓰려고 하니 싸게 주십시오” 하기에 도매가로도 2000만원어치가 넘는 고추장을 트럭 세 대에 실어 서울까지 가져다 줬다. 고스란히 떼였다. 알고 보니 순창에 우리 말고도 당한 가게가 더 있었다.
서울경찰청에 근무하던 오빠는 노발대발하며 당장 수배를 내린다 했지만 나는 “오빠, 을매나 오지게 어려우면 나 같은 사람 돈을 떼어 먹겄어. 불쌍허다 치고 잊어버립시다” 했다.
미자립교회 몇 곳을 꾸준히 돕다 보니 도와달라는 곳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렇다고 전에 후원하던 것을 끊으려 하면 그간의 좋은 관계가 틀어져 버리곤 한다. 편지로 도움을 호소해 몇 차례 돈을 보내줬던 교도소 재소자는 처음에는 “정말 이런 교인이 있으시군요!”라는 편지를 보내더니, 돈이 끊어지자 말로 전할 수 없는 욕설과 협박을 담은 편지를 연달아 보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내가 과연 돈으로 선심을 써 온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위축됐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기도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말없이 위로해 주셨다.
2007년쯤, 남원의 한 목사님이 전화를 해 왔다. 농촌 노인들이 다니는 작은 교회인데 어렵게 흙벽으로 교회를 신축했지만 돈이 부족해 지붕을 못 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고추장 두 트럭을 도매가로 보내줬다.
그런데 그 일이 계기가 돼 국민일보에서 취재를 왔고 내가 2007년 10월 15일자에 ‘크리스천 CEO’로 소개됐다. 또 그 취재기자의 소개로 국민일보 비전클럽 회원이 됐다. 처음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건물 12층에서 열린 비전클럽 모임에 갔을 때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두근두근하며 홀에 들어서니 조용기 목사님을 비롯한 훌륭하신 목사님들, 기업 대표들, 국회의원, 장관 등이 가득 앉아 있었다. “나같이 못 배운 시골 아낙네를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세우시는구나!”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활동을 통해 진흥문화사 박경진 장로님, 탤런트 정영숙 권사님 등 신앙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역경의 열매] 설동순 (21·끝) 내게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 구원받은 것
지난해 10월 터키에 이어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 사이에 두 번째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국민비전클럽에서 함께 활동하는 진흥문화사 박경진 회장님의 제안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등을 둘러보고 왔다.
시내산에 올랐던 일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칠흑같이 어두운, 손이 곱아들 것처럼 추운 날이었다. 새벽 2시반에 숙소를 나서 처음 두 시간은 낙타를 타고 올라갔다. 가파른 계곡을 오르는데 갑자기 내가 탄 낙타가 샛길로 접어들었다. “워매! 워데로 간다냐, 시방!” 내 소리에 놀랐는지 낙타는 주저앉아버렸다. “음마? 이 넘이 시방 여기 주질러앉어 뭐 하자는 것이여! 여봐요! 언능 와서 이 넘 좀 워찌 해 보드랑게!” 소리소리 치자 현지인 안내자가 채찍을 들고 달려왔다. 낙타는 수차례 얻어맞고서야 일어서 제 길로 돌아갔다. “이 넘의 낙타야. 그라게 왜 매를 사서 맞니야, 넘들 가든 대로 가믄 될 것을.” 낙타에게 말을 건네다 보니 문득 묘했다. 때때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날 때마다 크고 작은 시험으로 나를 돌려놓곤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그라게, 나도 알어서 잘 갔으믄 엄한 시험 안 들고 살았을 거인디, 허긴 나처럼 못난 것을 매 때려 가믄서 여기꺼정 델꼬 오신 하나님도 참 무던하시네!”
3분의 2쯤 이르자 더 이상 낙타를 탈 수 없다고 해 일행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 끓는 물을 파는 곳이 있어 우리는 컵라면을 먹었다. 하는 일이 일인지라 해외에 나갈 때마다 고추장이며 장아찌를 몇 상자씩 가져가곤 하지만 마침 이때는 지닌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갓김치를 꺼냈다. 집에서라면 당장 내버릴 만큼 시어터진 김치였지만 새벽 4시에 추운 산길에서 먹는 그 맛은 기가 막혔다. 맛으로 평생 장사를 해 왔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맛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800개 남짓한 돌계단을 마저 올라 정상에 올랐다. 모세가 기도했던 그 자리에서 일출을 보며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항시 축복하시더니 여기까지 왔구나!”
늘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나는 군수도 도지사도 부럽지 않다. 세상 기준에 차도록 큰 성공은 못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았다.
내 신앙생활을 그렇게 반대하셨던 친정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모두 병석에서나마 세례를 받고 신앙의 확신 속에 돌아가셨다. 나를 포함한 4남매와 남편, 네 딸 모두 신앙 안에서 살고 있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린 나를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신 전주 전동교회 김성돈 원로목사님, 시험에 빠진 나를 정신이 번쩍 들도록 깨우쳐 주신 뒤 지금까지 도움을 주시는 강서신광교회 유정성 목사님, 가까이서 늘 이끌어 주시는 순창읍교회 김별배 목사님과 우상임 사모님이 그 은인들이다.
나는 지금껏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자녀들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늘 쓸 만큼 채워주셨다. 주신 하루에 만족하고, ‘설 권사’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게 ‘기왕 하는 신앙생활 1등 아니면 2등에는 들자’는 마음가짐으로 살다보니 기쁜 내일이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나맨키로 재미지게 사는 사람이 누가 있을 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