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교서(敎書)
가뭄 때문에 대언들에게 구언하는 교서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6월2일 (을해)
임금이 대언들에게 이르기를, “가뭄이 너무 심하니, 정사의 잘못함이 없는가 널리 옳은 말을 구하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니, 대언들이 아뢰기를,
“착한 말을 구하는 것은 임금의 미덕입니다. 마땅히 왕지를 내리시어 옳은 말을 구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언들로 하여금 구언(求言)하는 교서를 기초하게 하였다. 교서에 이르기를,
“내가 부왕이 중하게 부탁하심을 받들어 나라 다스리기에 성심을 다해서 풍년이 들고 평화롭기를 바랐더니, 돌이켜 생각하건대, 덕이 부족하여 천심을 받들지 못하였는지 왕위에 임한 처음부터 놀라운 한재를 당하여, 기도 드리기를 간절하게 하였으나, 조금도 비가 내릴 징조가 없으니, 아침 저녁으로 삼가고 두려워해서 몸둘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바르고 충성된 말을 들어서 재변이 풀리기를 원하노니, 대소 신료(臣僚)와 한량(閑良)ㆍ기로(耆老)는 각각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다 말하여, 이때에 정사의 잘못된 것과 생민의 질고를 숨김없이 다 진술하여, 내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애휼하는 뜻에 부합하게 하라. 그 말이 비록 사리에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한 죄주지는 않으리라.”
하였다.
상왕이 의령 부원군 남재의 빈소에 치재한 교서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12월17일 (정해)
상왕이 병조 참의 윤회에게 교서를 주어서 의령 부원군(宜寧府院君) 남재의 빈소에 치제(致祭)하였다. 교서에 말하기를,
“생사의 길고 짧은 이치는 대개 천명의 자연에 인함이요, 슬프고 영화로움에 증작(贈爵)하고 무휼(撫恤)하는 임금의 은혜는 실로 국가의 떳떳한 법이라, 하물며 고굉(股肱)의 늙은 이에게 어찌 융숭한 예수(禮數)가 없으랴. 경은 성질이 영걸하고 식견이 고매하매, 학문은 들은 것이 많고 적선한 나머지 경사스러운 일도 많았다.
천명의 거취(去就)를 알고 인심의 향배(向背)를 살펴, 고려의 국운이 썩어 들어가고 우리 집 왕업이 일어날 때를 당하여, 태조를 몸과 마음으로 도왔고, 생민을 도탄에서 건졌으며, 의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단하여 창업하는 큰 규모를 도와 이루었고,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여 개국의 중요 정책에 협력하였다. 오부(烏府)의 기강을 진작하니, 간사한 무리는 모두 낙담하였고, 은대(銀臺)의 후설(喉舌)을 맡아 왕명을 출납함에 있어서 면종(面從)하지 않아, 명망은 조정에 높고, 풍성(風聲)은 중외에 떨쳤다.
일찍이 내가 〈명나라에〉 조근하던 날, 부사(副使)가 되어서 발 벗고 물 건너는 수고로움을 꺼리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뒤, 더욱 보필의 공을 발휘하여 자신의 안위를 걸고 국가와 운명을 같이하였으며,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였음은 후인에게 경계가 될 만하고,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였음은 진실로 철전(哲前)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나이 더욱 높아도 기운은 더욱 장하였으며, 벼슬이 더욱 높아도 마음은 더욱 겸손하였다.
바야흐로 정양(靜養)하여 한가롭게 거처하고, 함께 태평 세월을 길이 향유할까 하였는데, 한 번 병이 들어서 갑자기 구천으로 떠날 줄 어찌 알았으랴. 말이 이에 미치매 슬픔이 그지 없도다. 어허, 경이 지키던 지조는 생사에 따라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마는, 만약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어디에 고문하여 결정할까. 변변치 못한 휼전(恤典)을 베풀어 조금이나마 영령을 위로하노라.”
하였다.
[주D-001]오부(烏府) : 어사대(御史臺), 즉 사헌부의 별칭.
[주D-002]은대(銀臺) : 승정원.
법가를 갖추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제사를 내리다. 그 교서
세종 1년 기해(1419,영락 17) 12월19일 (기축)
임금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백관을 거느리고 남재의 집에 거둥하여 사제(賜祭)하였다. 임금이 그 집 문전 6, 7보 앞에서 말을 내려 악차에 들어갔는데, 상주(喪主) 남지(南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맞이하였다. 지에게 명하여 잔을 올려 제사를 드리게 하고, 소윤(少尹) 김상직(金尙直)이 교서를 읽었다. 제를 마친 다음 임금이 법가를 돌렸는데, 지(智)가 길 왼편에 엎드려서 애곡(哀哭)하니, 임금이 식(軾)에 이마를 대어 예하고 지나갔다. 그 교서에 말하기를,
“듣건대 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한몸 한마음이라.
그러므로 임금이 신하에게 살아서는 작록으로 영화를 주고, 죽어서는 조휼(弔恤)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 고금에 통한 의리요, 국가의 떳떳한 법칙이다. 생각건대 경은 낭묘(廊廟)의 거룩한 자질과 산하의 뛰어난 정기를 타고 나서 백가(百家)의 학문을 다 닦고 세상 만사의 변화를 처리하는 재주가 있었다. 대[竹]를 쪼개고 물고기를 나누매, 백성들은 바지[袴]가 다섯 벌이라는 노래를 부르게 되고,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으매 노래는 감당(甘棠)에 미쳤도다.
착한 정책을 건의하고, 아름다운 정치를 실시하여 후설(喉舌)의 책임을 맡으매, 탁한 것을 물리치고 맑은 것을 드높였으며, 오대(烏臺)에 있을 때, 홀로 그 명망이 우뚝 솟았고, 암랑(岩廊)의 영수(領袖)가 되어 만사를 조화하여 정내(鼎鼐)와 같이 안정시켰으며, 중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여 성명(聲名)이 자심(藉甚)하였다.
옛날 고려 말기의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이 흩어져 천명과 민심이 덕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자, 경은 그 기미를 밝게 알고 성조를 추대하여 억만년 무궁한 큰 자리를 개창하였고, 우리 상왕께서 명나라에 조근(朝覲)할 때 경도 또한 배종(陪從)하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상왕의〉 고생스럽고 어려움을 막았으매, 〈내가〉 왕위에 오르자 비익(裨益)함이 더욱 많아, 어린 나에게는 경과 같은 늙은이가 더욱 수감(水鑑)과 약석(藥石)이 될 것인데, 지금 그만이니 무엇으로 마음을 잡을까.
하물며 경은 과인에게 옛 은혜의 교분이 있고, 경의 손자는 인척의 경사가 있어, 장차 백료(百寮)의 의표(儀表)가 되어 네 세대를 보필할 것이라 하였더니, 하늘이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심인지 갑자기 방아노래를 멈추게 하였으니, 마음 아픔을 어찌 참으랴. 이에 유사에게 명하여 삼가 상사(喪事)를 치르게 하고, 이제 박한 제물을 갖추어 소유(素惟)에 와서 제전(祭奠)을 드리노라. 어허, 국가와 함께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길이 두 어깨에 졌으니, 애도하고 영광을 주는 예도 존망간에 극진하리로다.” 라 하였다.
[주D-001]식(軾) : 수레 앞에 가로막이한 나무. 수레를 타고 가다가 상복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여기에다 이마를 대어서 조의를 표하였음.
[주D-002]대[竹]를 쪼개고 : 병부(兵符). 지방의 수령 및 장수에게 병부의 한 쪽을 쪼개어 주어서 신표(信標)로 삼았음.
[주D-003]물고기를 나누매 : 구리[銅]로 물고기 모양의 인장을 만들어서 신표로써 그 반쪽을 지방관에게 주던 것임.
[주D-004]백성들은 …… 되고 : 동한(東漢) 염범(廉范)이 촉군 태수(蜀郡太守)가 되었는데, 전에는 화재를 방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이 밤에 불을 켜고 일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염범은 물을 많이 준비하여 밤에 일을 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편케 여겨서 노래를 불렀는데, “염 숙도(廉叔度:염범의 자)가 왜 늦게 왔던가. 불을 금단하지 않으니 백성이 편케 일한다. 전일에는 적삼도 없었는데,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일세.” 하였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정사를 잘하였다는 것을 의미함.
[주D-005]수레에 …… 잡으매 : 동한(東漢) 환제(桓帝) 때 기주(冀州)에 도적떼가 일어났으므로, 범방(范滂)이 청조사(淸詔使)가 되어 조사하게 되었는데, 수레에 올라 고삐를 잡아당길 적에 개연히 천하를 맑고 깨끗하게 할 마음이 있었다고 함.
[주D-006]감당(甘棠) : 나무 이름인 동시에 《시전(詩傳)》 소남편명(召南篇名)이기도 함. 주나라 소공(召公)이 남국을 순행하며 정사를 다스리고 농사를 권하면서 감당 나무 아래에 머물렀는데, 뒤에 백성이 그를 사모하여 그 나무까지 사랑하여 시를 지었다 함.
[주D-007]암랑(岩廊) : 의정부.
[주D-008]정내(鼎鼐) : 큰 솥.
[주D-009]경의 손자 : 정선 공주의 부마 의산군 남휘.
[주D-010]백료(百寮) : 백관.
[주D-011]갑자기 …… 하였으니 : 진(秦)나라 목공(繆公) 때에 백리해(百里奚)가 정승으로 정사를 잘하다가 죽으매, 아이들은 노래 부르지 아니하고, 방아를 찧는 사람들도 방아노래를 중지하였다는 고사에서, 정승이 죽은 것을 뜻함.
[주D-012]소유(素惟) : 빈소.
[주D-013]휴척(休戚) : 운명.
세자 책봉 후 중외에 유시하는 교서
세종 3년 신축(1421,영락 19) 10월27일 (병진)
세자(世子)를 책봉하고서 중외(中外)에 유시(諭示)하는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공손히 생각하여 보건대, 태조께서 처음으로 건국의 홍업을 열어 주시고, 우리 부왕 성덕 신공 태상왕 전하께서 크게 천명을 이어받으시어, 지극한 다스림을 높이시고, 나의 몸에 이르러 그 뒤를 이어 받들어,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하여 감히 조금도 편하려 하지 아니하였다. 오직 세자는 마땅히 일찍 세워서 종묘(宗廟)도 이어 받들고, 인심도 묶어서 모아야 한다.
이에 원자 향은 처지가 적장(嫡長)의 자리에 있고, 성품은 슬기롭고 온량하므로, 저위(儲位)에 거하게 하여, 이미 영락 19년 10월 29일에 왕세자에 게 책봉하여 책서(冊書)와 새보(璽寶)를 주었다. 이로써 예(禮)가 이루어졌음을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아름답게 만민들과 같이 이 큰 경사를 즐기려 하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다 알게 하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