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신(神)의 존재 여부.
신이란 형체나 감각도 느낌이나 냄새도 없는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과학적인 증명이나 수학적인 정리에 의해서도 이해되기 어려운 아직 명확한 규명을 하지 못한 미완의 주인공이다. 더러는 신의 존재를 체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간혹 그러한 느낌과 체험들을 일종에 정신 착란 작용으로 치부하며 부정하기 일쑤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류를 보고 인정치 않는 부류는 자기‘에고’적인 사고의 틀 속에 묶여서 있지도 않은 가상에 신을 자기 속에 심어놓고 키우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와는 반대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부류의 생각은 신을 인정치 않는 그들이 정신적인 장님이라 현존하는 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고 옹호한다. 어찌 보면 동전의 양면과 같은 논리로서 있을 수도 또 없을 수도 있는 존재가 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1) 신의 부정
무신론자의 입장은 과학과 자연 법칙성 수학적으로 그들이 밝힌 것들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자연법칙이란 꾸준한 변이에 의해서 생성, 소멸, 진화과정을 거쳐서 발전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오르지 사실 증명으로 확인되고 이렇게 증명된 과학이 수학처럼 질서 정연한 논리를 반박할 자료가 없거나 있어도 논리에 버금가지 못하면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주의자나 무신론자들은 눈으로 보이고 역사적인 고증과 과학적인 증명 수학적인 정리에 의해 탄생한 학설들 또한 모든 문제를 말할 때 자연 발생적인 진화 또는 그 과정을 과학으로 증명했다고 말한다. 과학이나 수학으로 증명 불가능한 아니 아직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사건들을 그들은 자연 발생적, 또는 기적, 불가사의라고 표현한다. 이 세상은 만물과 인간이 자연 법칙성으로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데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가는지를 생성 소멸 진화를 과학의 틀 안에서만 해석하고자 한다.
2) 신의 긍정
태초 이전부터 신은 존재 했으며 그는 영원불멸의 존재로서 지금도 미래에도 신은 계속 역사하신다고 믿는다.
지구의 탄생과 인간과 만물의 탄생은 누군가가 만드신 주인이 있다고 믿는다. 만물의 생성, 소멸, 진화 과정의 모든 것이 신의 섭리 하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 한다고 믿는다. 자연 발생은 스스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오직 신의 주관하에 신의 섭리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모든 천체의 움직임은 신의 허락 없인 한 치도 움직일 수 없고 오르지, 신이 계획하신 그대로 발전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3) 두 입장의 절충
무신론자나 사실주의 입장에서 본 불가사의나 기적 같은 현존 사실에 대하여 증명 불가능 할 때 가능의 답으로 끌어오는 자연 발생이란 단어는 어떻게 보면 그대로 설명될 수 있겠다. 철학의 대가인 “플라톤”의 ‘이데아’론도 망각의 강 저쪽엔 무엇이든지 존재하고 있는데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모든 것을 잊어 버렸고 인간 현세에서의 발명과 발견은 다만 망각에서 기억을 되살려 재현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가설에 대한 반박 논리가 있을까? 망각의 강 저쪽을 어느 누가 체험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물론 과학이나 수학으로 모든 것을 확실하게 증명 정리한다면 우리 인간에겐 가슴 벅찬 일일 것이다. 유신론의 주장처럼 신이 만드신 모든 것들이 어떻게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증명이 된다면 궁금증이 해소되고 생활에 응용 분야가 넓어질 것이다. 불가사의나 기적을 유신론자 들은 신의 섭리로 해석한다. 모든 것이 신의 작품이라 해석한다. 이 또한 맞는 대답 같기도 하다. 과학이나 신학이나 무론하고 모든 파생된 실체에 대하여 그 과정 설명이 불가능할 때 양대론 입장이다. 그렇다면 과학에서의 진화 과정의 에너지는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자생적일까? 아니면 어느 누가 공급하는 것일까? 어떠한 물체가 진화하자면 진화를 위한 모든 자연조건 및 환경이 진화 조건에 맞게 변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은 무엇이 만들어 주는 걸까? 자연발생과 신의 작품에 연관성은 과연 무엇일가? 이 두 가지 모두가 신의 몫이 아닐까?
2.선(善) 과 악(惡)
선과 악은 어디서 존재하는 것인가? 형체도 파장도 없는 사고의 느낌에서 선과 악을 가름하는 인간 세계에서 보편타당과 아름다움은 선으로 취급되고 한편으로 기울거나 추악하면 악으로 분류된다.
신의 철저하신 선악 사상이 공평 타당한 원칙을 강조하시기에 이 원칙에 위배될 땐 악의 생산이 일어난다고 본다.
1) 선과 악의 주체와 양면성
과연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생활수단에서 파생된 결과는 신께서 허락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지고한 신의 사상에서 태초에 만물을 만드신 것을 전제로 어느 것 하나 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아픔과 두려움을 모르는 식물을 취한다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픔과 두려움을 아는 동물을 취한다는 것은 취하는 인간에게는 생존의 수단이겠지만 당하는 동물에게는 분명 악한일 일 것이다.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논리로 본다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의 몫을 챙겨야 생명을 부지할 수 있다. 그렇게 경쟁하면서 승자가 살아남는다는 어찌 보면 패배자에게는 승자가 악의 존재로 비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 일련의 이러한 악들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한쪽도 지울 수 없는 공동운명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악을 지우면 선이 생존할 수 없고 차라리 모두 없애버리면 신의 창조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칼이란 잘 사용하면 이기이지만 잘못하면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흉기가 되듯 흉기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칼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칼은 사용 목적대로 음식 만드는 일이나 유용한 쓰임에만 사용하여야 한다는 신의 가르침, 이것이야말로 악을 물리치고 선으로의 회귀란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존귀하신 신께서도 악의 존재를 인정하시지만, 악보다 선의 가치가 무한히 크므로 악을 멸하지 않으시고 다만 악을 흡수해 선으로가는 여러 지혜를 가르치고 계신 것은 아닐는지! 선은 아름다움이다. ‘화이트헤드’의 미학 신정론에서 말하듯이 아름다움이 악을 흡수한다. 이것은 신의 섭리와 역사하심이다. 신은 쉼 없이 아름다움을 창조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파생물이 악이라 생각한다면 신께서 인간들을 무궁한 발전과정을 거쳐서 원점으로의 회귀 즉 에덴동산으로의 인간귀화가 목적이라면 악을 제하면 발전이 있을 수 없고 욕구가 없으면 또한 그 욕구를 충족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발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파생물인 악을 목적 회귀를 위하여 공존을 허락하고 계시지 않나 생각된다.
2.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그에 아주 작은 부분인 지구라는 별을 창조 부분에서 선택하셔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아름다운 에덴을 만드셨다. 만드시는 과정서부터 어떠한 결과가 오리라는 사실을 이미 아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설파하셨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와가 사탄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따 먹은 자체가 하와의 욕구 충족을 위한 행위의 파생물이 아니었을까! 창조주께서 인간의 생성과 발전과정을 생각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간에게 욕구와 영특한 지혜와 발전 원천인 에너지조차 넣어주시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1) 하나님의 계획되신 능력
만물과 인간을 만드실 때 끝없는 발전과 진화를 통하여 에덴으로의 회귀시키심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며 현재나 미래에도 그 일을 위하여 끊임없이 역사하신다고 믿고 싶다.
3. 하나님의 목적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쉼 없는 발전과 진화를 통하여 아름다움을 창조하시고 악을 그곳에 흡수시켜서 그 아름다움 속에 인간과 만물을 귀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아닐까?
1) 만물의 객체성을 허락하신 창조주
인간이나 식물이나 동물이나 무생물까지도 쉼 없이 항상 변화한다. 생명이 없는 존재들도 풍화작용과 기상 변이에 의하여 육지가 바다가 되고 바다가 육지가 되고 큰 바위산도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깎이고 없어져 버린다.
수백 억 년 전부터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생성, 소멸, 진화의 반복과정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과연 적자생존 법칙에 의해서만 움직였을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틀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가능하지 않았을까? 어느 것도 딱 부러지게 단언할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 되나, 신께서 이모든 만물에 객체성을 허락하셨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믿고 싶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물에 객체성을 허락하시고 무궁무진한 진화 발전의 에너지를 일초의 정지함도 없이 주관하신다는 말이다. 사고나 생명이 없는것들에게 자연환경 기후의 틀 안에서 생성 소멸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시고 식물이나 동물의 진화 과정에서도 개개의 종류들에 발전 능력을 부여하시고 스스로 발전할 수 있게 힘을 주신다는 말이다. 신께서는 그분의 모든 능력을 남김없이 만물에 물려주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이리하여 원점으로의 복귀 시까지 한 치의 오차 없이 역사 하실 것이다.
세상에는 퍼즐의 조각 하나하나 없어서는 이룰 수 없는 조합으로 짜여있음은 존귀하신 분의 놀라운 작품 세계에 감탄할 뿐이다.
4. 소(小)우주로서의 인간
태초부터 창조하신 신의 우주관 속에 인간이란 무수한 소우주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소우주 각자가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며 진화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
1) 인간 속에서의 소우주
인간의 마음속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신이 거하시는 성전이 있고 천당과 지옥, 에덴동산이 함께 어우러진 그곳엔 선악과가 탐스럽게 열려 있을 것이고 지금도 신께선 악과는 죄악의 시초이니 누구의 꼬임에도 악과는 따 먹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시며 그 유혹을 이기는 방법론에 대하여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지 않을까? 그리하여 선과의 착함과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꽃 피울 때, 자연적으로 악과는 선과에 흡수되어 영원한 에덴에서의 영생 복락을 찾을 그곳이 되지 않겠나. 소망해 본다.
그토록 인간이 소망하고 염원하는 그곳은 아쉽게도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는
갈 수 없는곳이 그곳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너무도 험난하고 힘들어서 존재자의 능력과 안내 없이는, 그분의 특별한 은총,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역사하심 없이는 그 동산에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보인다. “땅에서 맺지 못하면 하늘에서도 맺지 못한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살아 생존 시의 인간 소우주 속에서 먼저 평안한 천국을 맺고 누려야 하늘 천국도 갈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부족함에 존귀하신 분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과거나 현재에도 동산에 탐스러운 악과를 유혹에 현혹되어 여전히 답습하여 따먹는 죄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자해지의 결연한 의지로 자신의 온 힘과 정성을 다 하여 그분께 간구하고 기도하고 한 점 의혹 없는 믿음 속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5. 믿음의 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유신론과 무신론을 떠나서 믿음 자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유명한 C. E. O들의 한결같은 성공 비결은 장래에 이룩할 목표물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정진한 결과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 목적하는 목표물이란 실체도 형체도 없는 단지 믿음을 통해서만 느낄수 있고, 믿음을 통한 확신 때문에 행동할 수 있는 뜨거운 에너지의 지속적인 공급으로 성공이란 열매가 맺어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발명가 “에디슨”은 세상이 말하는 실패를 그는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배움으로 터득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믿는 그것은 언젠가는 실현이 된다는 굳은 믿음, 한 치의 의혹도 부정도 없는 순수한 열정과 믿음이 있었기에 실현했고, 인간도 새처럼 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과 신념으로 일관한 “라이트 형제”의 꿈이 실현되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성경에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말씀하셨던가!
질 좋고 강건한 금속을 만들려면 몇 십번 담금질해야 탄생 하듯이 우리 인간에게도 실패, 좌절, 아픔과 고통, 이 모든 시련은 앞으로의 정진을 위한 발판 만들기가 아닐까 하는 굳은 신념과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고 정진하면 꿈꾸는 천국 세상에 가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
1) 감정의 순화작용
우리 인간은 동물과 달라 생각대로 행동하고 욕심대로 움직일 수 없다. 거창하게 신의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구속을 준다면 올바른 행동이라 할 수 없고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법의 제재와 함께 윤리적인 지탄을 받게 된다. 물론 다툼이란 어떠한 행동에 대한 결과물이겠지만 감정의 기복 여하에 따라 순한 행동과 악한 행동이 발생한다. 현행 법 체계에서는 육체적인 행동 여하에 따라 처벌이 가해지고 있고 양심에 대한 생각은 처벌되지 않고 있다. 생각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욕구 충족의 유혹이 난무하는 지극히 현상적인 일상에서 생각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에 욕구 불만은 얼마나 쌓여 있겠나! 이러한 욕구불만의 해결책이 신에 의존하는 절대주의 믿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종교적인 믿음 속에는 육체적인 행동 이외에 양심적인 생각까지도 커버한다. 육적인 죄뿐 아니라 심적인 불경스러운 생각 까지 처벌받는 것이다. 마음의 생각에 따라 행동이 오듯이 믿음을 통하여 용서와 사랑으로 내면의 세상을 맑게 한다면 자신의 마음은 한없이 아름답고 평온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하기에 앞서 생각을 다시 하게 되고 다시 하는 생각 속에 믿음이 자리한다면 인간 감정을 순화 제어시키지 않을까!
2). 삶 속에 참다운 지혜
속담에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다. 계획은 거창하게 세웠으나 삼일이 못 가서 제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을두고 한말일 게다. 이토록 우리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힘이 없다. 어떤 강력한 힘이 있어서 좋든 싫든 그 힘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달라질까? 여기서 강력한 힘이란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힘이다. 일상에 모든 것을 그 힘에 의지하고 그 힘의 주관에 따라 살아간다면 “로봇” 인간이라 비웃지 않겠나! 전지전능한 힘, 기적을 행하는 파워, 목적함을 이루는 강력한 원천의 힘, 아름다움만을 창조하는 성실한 에너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의 아픔과 좌절이 온다고 해도 그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슬기를 줄 수 있는 강력한 힘, 그 속에서의 삶이란 “로봇” 인간이라 비웃어도 나는 기꺼이 그 삶을 택할 것이다. 이러한 원천의 힘은 과연 존재 하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존재 한다. 다만 그의 실체를 체험하는 데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마음속에 쌓여 있는 장벽부터 허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강력한 힘을 동경하고 구해야 한다. 그러한 힘의 존재 실재를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눈을 감고서 한적한 시골 옛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을 회상해 보자. 수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귓가엔 그 아름다운 풍금 소리가 지금도 들려오고 개구쟁이들의 재잘거림이 분명 살아 숨쉰다.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힘의 원천이 바로 마음속 믿음 안에 확실히 살아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부정이냐 긍정이냐 에 따라 차이가 현저히 달라진다. 부정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추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지 못할 것이고 긍정 속에는 잊혔던 일들까지도 생생히 살아 숨 쉴 것이다. 현재 삶이 너무 힘들고 고달파도 장래엔 행복이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구차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옛것은 가고 새로운 것이 등장하고 그렇게 믿고 신뢰했던 부모나 형제도 때가 되면 없어지고 정밀함이 생명인 시간까지도 어느 순간에 흘려버린 시간속을 헤매야 함은 사실 아닌가? 그러나 이렇듯 모든 것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다. 점 과점 사이를 연결하는 자장 빠른 선은 직선뿐이고 모든 만물은 창조주의 객체성을 부여받은 작품이라는 것과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에 영원 무궁토록 애정과 사랑을 주신다는 참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 속에 우리의 삶 전체를 맡겨놓고 애정과 사랑의 “파이프라인”을 연결해서 원 하는 대로 생활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공급받는다면 그렇게 하자면 우선 “파이프라인”을 연결하는 수고로움은 자신이 감당해야할 것이고 원 하는 대로 공급받을 아름다움과 사랑에 꼭지는 자신이 틀고 자신이 잠가야 하는 수고로움이 수반 될 것이다.
농부들은 똑같은 씨앗을 뿌리고 수확한다. 어느 농부는 풍부한 수확을 하고 어느 농부는 부실한 수확을 한다.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열심히 풀 뽑고 물 주고 거름 주어 풍부한 열매를 맺을때 까지의 흘린 땀의 양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믿음의 씨앗 또한 동일하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소망으로 뭉쳐진 믿음의 씨를 뿌리고 그 소망을 이룰 때 까지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하고 정진한다면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그분의 권능 앞에서 소망도 이루기 전에 포기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겠지!
3) 긍정적 사고방식
창조주께서는 모든 만물의 객체성을 부여 하셨을 때 계획하시고 역사하심의 실체가 진화이다. 진화란 앞으로 발전해서 나아감을 뜻한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진화에 맥을 같이하는 단어가 긍정이고 퇴보와 같은 뜻의 단어는 부정이라 생각해보자. 모든 죄의 원천이 부정이라 정의한다면 지나친 논리 비약 일가? 앞서 보았듯이 욕구 충족의 파생물이 죄악으로 봤거니와 욕구 충족은 선을 외면하므로 탄생하여지는 것은 아닐는지! 이면엔 악도 긍정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악을 긍정함은 그 악 자체가 선이란 믿음의 착오에 의해서 긍정일 것이다. 악을 행함이란 악 자체를 긍정해서 행함이 아니고 애써 선의 긍정을 외면하려는 행동이다. 이토록 신의 말씀에는 부정이란 있을 수 없기에 모든 말씀 자체가 아름다움과 선이며 긍정 자체이다. 신의 말씀 속에서의 삶은 긍정의 세계이며 그것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고 움직일 수 없는 확신이 서면서 생활의 감사함과 평온 속에 그분의 은혜를 만끽할 삶을 얻을 수 있다.
4) 더불어 사는 방법의 지혜
함께 산다 라 함은 상대방을 필요조건 속에서 서로의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 때 상대성의 원리처럼 양극이 존재하는데 한 극의 존재만으론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 없다. 전기처럼 양극이 서로 합칠 때 힘을 발휘함처럼 인간관계도 이와 같아서 상대 때문에 고마워하고 상대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고 믿게 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힘이 생기겠는가? 내가 존재 하기 위해선 상대방이 필수 요건이고 그 필수 요건을 고마워함은 물론 위하고 감싸주는 따듯함도 더 할 것이다. 농부는 땀 흘려 지은 곡식을 도시에 공급하고, 도시에선 돈으로 고마움을 대신하고, 그들은 그 돈으로 생필품을 구입한다. 이러한 생필품도 애써 만든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가 사용함으로 편리함을 보장받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실어다 주는 버스가 있기에 우리는 목적지에 편히 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세계에 모든 일들이 이렇게 얽혀서 서로의 존재의 귀중함을 피부로 느낄 때 신의 말씀처럼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관계 속에는 주고받는 상대성으로선 이해되지 않는, 무엇의 부족함을 채워준다는 고마움의 전제 속에서, 받지 않고서도 줄 수 있다는 순수성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창조주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처럼 말이다. 사랑이란 순수한 마음 그대로 보상이나 이해관계나 가식적이어서는 안 된다. 수정처럼 맑고 옹달샘처럼 투명하게 진심과 존경과 용서의 앙금 없는 종합체가 사랑이다.
5). 진정한 사랑의 이해
신을 믿든, 믿지 않던 사랑이란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말이랴! 성경의 말씀처럼 “원수를 네 몸처럼 사랑해라” 하셨거늘 과연 인간의 감성 속에서 이렇게 깨끗함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컨대 신의 기댐 없이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 없이는 얻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처럼 완전하지는 못 하더라도 그분을 의지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생활이 일상이 된다면 어느 정도는 기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그래서 진정한 사랑 이란 게 이런 거였구나! 라는 그분의 사랑을 먼저 체험해 본다면 참사랑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해 본다. 사랑받아본 자만이 사랑할 수 있듯이 신의 무궁한 사랑을 몸으로 체험해서 일상의 아름다움으로 꽃피우는 사랑이었으면 그래서 다툼이 없는 용서만이 존재하는 사랑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지나친 욕심도 내 본다.
6). 나눔의 생활 실천
“나눈다” 란 가지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주는 것 즉 등분의 개념 이 아닌 나누어 주는 행위 개념이다. 나눔 중에는 물질과 정신이 있겠다, 그러한 양대 나눔의 실천은 풍요 속에서의 나눔은 나눔의 의미가 없고 부족함과 궁핍함 속에서의 나눔이 아름다운 것이다. 육신이 살자면 먹어야 하고 육체의 강건은 영의 살찌움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신의 말씀 속에는 영 육 간에 나눔의 실천을 강론하고 계신다. 성경 말씀에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궁핍하면 궁핍을 당하는 상대도 너와 같을진대 자기의 필요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을 남에게 양보하는 미덕, 한 톨의 콩을 반으로 쪼개어 나누는 사랑! 자기의 행위가 죄악인지도 모르며 사는 사람들, 그들을 내 몸 같이 아끼고 사랑하여 그들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하지 않겠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눔 실천에 진리이며 최고선이 아닐는지? 신을 믿는 그들은 쉼 없이 기도한다. 그 기도 속에는 나만 잘되고 남을 저주하는 기도는 없다. 더불어 잘되길, 용서하길 원하는 기도이다. 신의 품속에서의 기도는 저주가 있을 수도, 욕심이 있을 수도, 음모가 있을수도 없다. 오로지 경건한 마음, 순수한 마음,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간구한다. 이것이야말로 나눔의 실체가 아니겠는가?
이 같은 기도를 통하여 마음에 때가 벗겨질 때 비로소 나눔의 실체를 경험하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 신께서는 그렇게도 사랑했던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처절한 죽음으로까지 보내시고 우리 죄를 사하지 않으셨나! 이토록 그분은 우리에게 확고한 나눔의 실천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7). 낮은 곳으로의 인도
속담에 제 잘난맛에 산다는 말이 있다. 우리 인간은 그러한 착각 속의 환상에 도취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리 인간은 자랑 속에서 살고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자기 옹호, 자기 방어, 자기 자랑. 자기의 판단력이 모든 완숙함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다툼 속에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 보이려는 행동으로 일관한다. 세상 학문이 많을수록, 지위가 높을수록, 가진 게 많을수록, 명성을 얻을수록 목에 힘,이 있고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졸렬함을 흔히 본다. 이들의 눈엔 세상이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으로의 삶에서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무엇이 보일 것이다. 내가 생존하는 이유는 내가 남보다 잘된 이유는 세상을 위해서 나에게 헌신의 임무를 책임 지우려고 존재시킨다. 라고 생각이 바뀐다면 과연 목에 힘이 들어가 있을까? 이같이 우리 생활은 생각의 차이, 느낌의 차이, 믿음의 차이에 의해서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고 보인다. 신의 말씀이 바로 나의 생존 이유를 깊이 성찰하게 만드신다. 우리인간 중엔 잘되고 못된 자도 있다. 무엇이 잘되고 어떤 것이 못되었는지는 세상 속에 우리 잣대이고 신께선 모든 인간에게 똑같은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다. 살인자의 자식을 둔 부모는 그 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은 비록 죄가 있다고 하여 거둘 수 없는 게 부모 사랑이다. 이처럼 신께서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편애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찾으시는 자상함의 주인공이시다. 생활의 궁핍함이 결코 미덕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죄도 되지 않는다. 신께선 나에게 이러한 궁핍함을 왜 주시는지를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처럼 궁핍을 주시는 데는 참다운 진리가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 참다운 진리를 찾아야 그 속에서 발전이 오고 풍요가 오는 것은 아닐까. 소수 장애인이 장애를 딛고 성공한 사례들이 있다. 그들은 불편함 속에서 진리를 찾았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신께서 나에게 주신 장애가 어떤 뜻이 있는지, 그 장애를 이겨야 신의 참뜻을 이룬다는 진리를 터득한 것이다. 그는 장애 없이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달갑게 여기지 않는 그 편견에 장애물이 그에게는 눈물겹도록 감사함이 장애를 견디는 기폭제가 된 것이다. 이렇듯 신앙은 잘됨으로 감사하고 못됨으로 잘됨을 찾아 감사하는 낮은 곳으로의 인도 역할을 해 주지 않을까?
8). 믿음의 주체
믿음이란 단어 자체는 말하기 쉽지만, 인간의 의지는 너무나 미약하여 의심의 벽을 허물어야 비로소 믿음의 싹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문제는 부정과 의심의 벽을 어떻게 허무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고 보인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이러한 벽은 형체도 없는 투명한,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영적인 세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 벽을 허무는 데는 때에 따라 1초도 걸리지 않을 수도 있고 평생을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부정과 의심은 이 벽을 견고하게 덧칠하는 것이요 긍정의 믿음은 일순간에 허무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의 두 길은 같은 선상에 놓여있는 도착점이 반대인 길이다. 믿음과 긍정의 길은 성공과 행복의 길이요 부정과 의심의 길은 반대의 길이다. 같은 출발점에서는 성공과 실패가 보이지 않지만 각자 길을 가면 갈수록 차이가 벌어져 버린다. 불행의 길을 향하면서 행복을 꿈꾸고 동경 한다면 넌센스가 아닐까? 이러한 진리를 터득했더라면 불행의 길을 멈추고 행복의 길로 발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서울 간다고 부산 쪽으로 가고 있으면 가면 갈수록 서울은 멀어질 것이다.
믿음이란 학문적으로 증명된 실체가 아니다. 생각의 차이뿐이다. 믿으면 믿어지는 것이고 의심하면 부정되는 것이다. 내 부모가 친부모일가 아닐까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에 의심을 더하는 쪽으로 기울어, 친부모가 아니라는 착각이 온다. 평상시 부모가 자기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부정이 가감됐을 때 친부모가 아니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대하는구나. 느끼게 된다. 붉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게 붉게 보이듯 부정의 안경을 끼고 보면 반사물은 모두 부정으로 보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각대로 이루어진다. 는 격언처럼 나는 바보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왜 이렇게 운이 없을까? 이렇게 부정 속에서 자탄만 하고 있으면 그는 어떻게 될까? 좌절의 구덩이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성공자 와 실패자의 차이는 넘어졌을때 일어서는 것과 일어서지 못하는 차이 뿐이라고 했던가? 다시 일어서는 자는 성공이라는 믿음의 확신 때문에 다시 일어나는 것이고 좌절하는 자는 성공을 부정하기 때문에 좌절에 머물기 때문이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거늘 내가 최선을 다할 때 한 단계 높일 힘의 토대가 마련되고 그 힘은 스스로 행동해야 생기는 것이고 에너지의 지속적인 충족은 믿음 속에서 만이 공급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천지창조 이래 모든 창조물 중에 확실한 똑같음이 있는 것을 발견치 못했다. 오직 과학의 유전자 분석으로 종의 구별만 있을 뿐이다. 한 치의 착오나 누락도 없이 수백억 년을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건만 옛날에 내가 있었을까? 나와 똑같은 인간이 있을까? 형상도 색깔도 같음이 없다. “백인백색”이라 했던가? 이렇듯 너무나 신비스러운 사건은 자연발생으로 이뤄진 것일까! 역사하시고 주관하시는 신의 섬세하신 능력의 작품은 아닐까? 이토록 같음이 없이 각기 다른 창조물의 작품 배경엔 과연 어떤 뜻이 숨겨져 있을까? 나는 과연 무엇일까 남들은 잘 나가는데 나는 왜 제자리걸음일까?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는 왜 불행할까? 이러한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못 나가는 이유,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좌절하는 이유, 이러한 이유 중엔 부정이 개입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잘나갈 수 있는, 성공할 수 있는, 나만의 특별한 그 무엇을 찾아보지 않고 있지는 않는지 인간 객체인 나 자신은 우주 안에 아주 특별한 나 하나만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오르지, 나 하나뿐이란 아름답고 숭고한 창조의미를 생각해 봤는가? 실패를 위한 작품이 아니고 성공 작품으로의 탄생을 그분이 주셨거늘, 우리는 그분의뜻을 이해하고 의심 없이 믿을때 긍정의 싹틈과 함께 믿음이 자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믿음, 하고야 만다는 결심, 목표는 내 것이라는 긍정, 신께선 나와 함께 항상 역사 하신다는 굳은 의지와 믿음, 이것이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의 주체가 아닐까?
우주가 아무리 넓다고 한들 신의 영역보다 넓을수 없다.
“땅에서 맺지 못하면 하늘에서도 맺지 못한단” 말씀처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참사랑으로 말씀 하시는 신의 뜻을 굳게 믿으며 간구하고 원할 때 현생에서의 천국과 영화를 맺지 않겠나 생각해본다.
그 길로의 정진이란 믿음밖에는 왕도가 없는 길이다. 신의 조화로운 창조능력, 역사하심, 살아 숨 쉬는 그분의 숨결! 이것은 믿음의 바탕 안에서만 가능하게 느끼고 확신 하는 것이다. 예술품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듯이 미술 애호가 들이나 “피카소”의 그림을 걸작이라 칭찬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면 초등학생의 그림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하여 그 속에 담겨있는 참 예술의 가치를 이해할 때에 예술품의 신비스러움 같이 전능자의 능력을 인정하고 믿는 확신 속에서만 그분의 존귀함과 사랑을 느낄 것이다.
첫댓글 순리대로 따르는게 인간이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지기님
늘~ 평안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