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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설움
작사 조경환
작곡 이재호
노래 백년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 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 ~ ♩♪♬ ~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십 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 ~ ♩♪♬ ~
낯익은 거리다마는 이국보다 차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 서리가 뼛골에 스미는데
어데로 흘러가랴 흘러 갈쏘냐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40년 2월에 [태평레코드]에서 음반이 발매되었다.
지금은 이 노래가 통상적으로 2절까지만 부르지만 발표될 당시에는 3절이었다.
고려성(본명 조경환) 작사, 이재호 작곡으로 '백년설'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이다.
☞ 노래의 ‘탄생비화’
1938년 어느 날!
이미 작사가로서 자리를 잡고 있던 고려성(본명 조경환)과 가수로서 주목을 받고 있던 '백년설'이 광화문 뒷골목의 어느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주모가 따라주는 사발술을 말없이 받아 꿀꺽꿀꺽 단숨에 마시고 난 두 사람에게는 그날따라 술맛도 씁쓸했던지 침울한 표정은 영 풀릴 줄 몰랐다.
이윽고 약속이나 한 듯 새어 나오는 긴 한숨~~~~
“어휴 제기 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날 두 사람은 [경기도 경찰국 고등계]의 호출을 받고 가서 호된 취조를 받았다.
이유는 먼저 발표한 가요 [번지 없는 주막]을 문제 삼았다.
1.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
구즌비 나리는 그 밤이 애절구려
능수버들 채질 하는 창(窓)살에 기대어
어느 날짜 오시겠소 울든 사람아
~♩♪♬ ~ ♩♪♬ ~
2. 석유등 불빛아래 마주 앉아서
따르는 이별주에 밤비도 처량구려
새끼손을 걸어놓고 맹세도 했건만
못믿겠오 못믿겠오 울던 사람아
~♩♪♬ ~ ♩♪♬ ~
3. 아주까리 그늘아래 가슴조이며
속삭이던 그 사연은 불같은 정의였소
귀밑머리 쓰다듬어 맹세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요 그리워 정녕 그리워
“주막집에 번지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구즌비 오는 밤에 왜 우느냐?”
“왜 하필 비 오는 날에 이별을 하느냐?”
등등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취조를 했다.
가사의 숨은 뜻은,
내 나라 내 땅이지만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망국의 서러움을 나그네의 신세에 절묘하게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문화의 모든 것을 빼앗길 운명에 처한 암흑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깊은 상념 속에서 마지막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는 불끈 쥔 주먹에 담뱃갑을 구겨서 움켜쥐었다.
'고려성'은 시선을 허공에 응결시켰다.
‘그래 이거야!’
그는 구겼던 담뱃갑을 다시 펴고 선술집에서 토막 연필을 빌렸다.
그리고는 막힘없이 적어 내려갔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렇게 해서 생겨난 노래가 '나그네 설움'이다.
이 가사는 고려성, 백년설과 함께 [태평레코드사]에서 함께 일을 하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겨졌다.
스스로 귀재라고 일컫던 작곡가 이재호!
그는 어느 겨울 폭설이 온 장안을 뒤덮고 있을 때 금단추 제복에 외투도 걸치지 못한 채 바이올린 하나만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사나이였다.
가수 ‘남인수’와는 어릴 때부터 죽마고우인 그는 처음에는 [OK 레코드사]에 몸을 담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문호월’, ‘손목인’, ‘김해송’, ‘박시춘’ 등 기라성 같은 맴버들 틈에서 빛을 못 보게 되자 소속사를 옮겼다.
그는 [OK 레코드사]와 함께 우리나라 초기 레코드계에서 쌍벽을 이루던 [태평레코드사]와 손을 잡고 ‘박향림’, ‘백년설’과 같은 신인을 기용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어 작곡가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이재호’와 ‘백년설’ 콤비는 가요계의 신화를 이룬 ‘박시춘’과 ‘남인수’ 콤비 못지않은 무게를 갖게 되었으니 가히 '이재호'의 재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호가 완성한 곡은 물론 '백년설'이 불렀다.
원래 대중의 인기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레코드란 출반이 되어 고객 손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반응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나그네 설움'이 수록된 음반만은 [태평레코드사]에서도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내놓았다.
관계자들의 자신감을 짐작할 만하다.
발표되자 말자 이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정확한 통계 자료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태평레코드사] 창사 이래 최고의 판매 실적인 10만 장이 넘는 매상을 올렸다고 한다.
광복 이전에 발표된 대중가요 중 음반 판매량이 가장 많은 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절에는 한국, 만주, 중국 일대, 일본 등 우리 교포가 사는 전 지역이 판매처였다.
데뷔 1년 만에 '백년설'은 이 노래로 당대 최고의 가수인 ‘채규엽’과 ‘남인수’를 능가할 만큼 인기를 얻게 된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태평레코드사]는 ‘이재호’, ‘백년설’ 콤비의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복지만리] 등을 발표하여 가장 규모가 컷던 [OK레코드]의 ‘남인수’, ‘박시춘’ 콤비에 필적할 만큼 인기를 얻었다.
이에 자극받은 [OK레코드]는 물밑 작업을 통해 벌금과 제약을 모두 감수하면서 당대 최고의 전속금을 지불하고 1941년 백년설을 스카우트하였다.
이 노래는 1930년대 후반 일본에서 유행한 도추모노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낭만적 분위기가 가미된 유랑을 묘사했고, 전주에서는 일본의 대중가요 ‘쓰마코이도추(1937년 발표)’와 유사한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백년설의 3대 대표작으로는 이 노래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가 꼽힌다.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성주군에는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의 상황을 나그네에 비유하여 피압박민족의 설움을 표현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이 노래는 요즘에도 잊히지 않고 즐겨 불린다.
특히 하모니카 동호인들이 4중주곡으로 연주를 하면 연식이 좀 된 어르신들이 굉장히 좋아하는 곡이다.
색소폰을 비롯한 많은 악기들의 연주 방법이 반주 음악(Mr)에 맞추어 하는데 비하여 '하모니카 4중주'연주법은 다른 악기나 반주 음악의 도움을 일체 받지 않고 하모니카 자체만으로 하는 연주 기법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은 훨씬 고급 연주 기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일상화된 Mr연주 기법에 비하여 하모니카 4중주 연주 방법은 아주 신선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라고 연주 후에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말을 들었다.
이 노래는 ‘남인수’와 쌍벽을 이룬 백년설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낭만적인 유랑 정서를 표현한 1940년 전후 트로트의 새로운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직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원곡
☞ ‘백년설’은?
본명은 이갑룡이다.
1914년 5월 19일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예산리에서 아버지 이형순과 어머니 선산 김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28년 성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9년 성주농업보습학교(現 성주고등학교)에 입학해 1931년에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가서 ‘한양부기학’에서 2년간 공부하다가 은행과 신문사에서 잠시 근무했다고 한다.
1938년에 시험 삼아 녹음한 <유랑극단>이 다음해에 발매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가수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한다.
1941년까지 [태평 레코오드사] 전속으로 있으면서 <두견화 사랑>, <눈물의 수박등>, <복지 만리>, <대지의 항구>, <일자 일루>, <나그네 설움> 등을 불러 당대 최고의 가수가 되었다.
백년설의 "두견화 사랑"은 장안의 소위 직업여성들로부터 단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다.
백년설이 공연을 마치면 모셔 가려고 기다리는 여인들이 줄을 이었고 그가 가는 곳엔 어디나 항상 푸짐한 술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백년설이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를 만나 가수가 된 것은 그에겐 일생일대의 행운과 함께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이재호’, ‘전기현’ 등 내로라하는 작곡가와 가수들로 [태평연주단]이 구성되어 국내는 물론 멀리 만주 지방까지 순회공연을 다녔다.
백년설이 지방공연에 나서면 어디에서나 수많은 관객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만 봐도 그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1941년 초 대구 공연 때의 일이다.
대구는 그의 고향인 성주와 가까운 곳이다.
그 무렵에는 그의 히트곡 ‘나그네 설움’과 ‘번지 없는 주막’의 노래가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그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공연장은 초만원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공연 도중 객석에 있는 한 여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서 끈질긴 구애 끝에 결혼을 하였다.
무대에서 열창을 하다가 한 무리의 검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에게 시선이 고정되었다.
여러 명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화려한 가수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여성들 속에 둘러싸이다시피 했었지만 지금 그의 앞에 나타난 여학생에 비견할 만한 여인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한눈에 반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공연이 끝나고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경북고등여학교’의 이한옥이라는 사실을 어렵게 알아낼 수 있었다.
다음 날부터 상경을 미룬 채 그녀의 뒤를 밟아 어렵게 그녀를 만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마다 도망치듯 피하기만 하고 눈길한번 주지 않고 애간장을 태웠다.
당대의 최고 인기가수로 무대에서는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박수를 받았지만 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가용이라고는 없던 시절 기동력을 위해 대구시내에 단 3대뿐인 영업용 택시 한 대를 한 달 동안 전세를 내어 그녀의 뒤를 쫓아 다녔다.
어느 날 마침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정중하게 청혼을 했다.
그녀의 집안은 대구에서 소문난 명문가였다.
그녀의 부모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결코 좌절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한 달을 뒤를 쫓아다니던 어느 날 마침내 그녀를 택시에 태우는데 성공해 데이트를 할 기회를 얻었다.
끈질긴 구애 끝에 결국은 결혼을 할 수 있었다.
1941년으로 당시 백년설은 26세, 이한옥은 18세였다.
생전에 이한옥의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녀는 쳐다보기만 해도 황홀하여 눈이 부신 대단한 미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한옥은 학창시절에 문학에 관심이 많아 문학서적을 많이 탐독했다.
학창시절부터 써오던 일기를 결혼 후에도 계속 쓴 덕분에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다고 알려져 있다.
당대의 유명 시인[이육사]로부터 선물 받은 미발표 시 몇 편과 함께 많은 일기장을 친정집에 보관해 왔다.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그 귀한 자료를 엿장수에게 주는 바람에 모녀간에 한동안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년설은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과 같은 자선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슬하에 세 딸과 아들을 두었으나 결혼 10년 만인 1951년에 결핵이 악화되어 부인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이 때 딸 셋은 각각 10살, 7살, 5살이었고, 아들은 겨우 3살이었는데 4남매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첫 부인과 사별을 한 4년 후인 1955년에 ‘야래향’, ‘도라지 맘보’, ‘한강’등의 인기곡을 발표한 당대의 인기가수 심연옥과 재혼하였다.
부부는 1957년경부터 '여호와의 증인' 종교에 심취했다고 알려졌다.
백년설은 1963년 서울 광화문 ‘시민회관’에서 은퇴공연을 한 후 가수활동을 접었다.
그 후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그는 1970년대 중반에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지만 극적으로 회복을 했다.
1979년에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백년설은 젊은 시절부터 시작한 냉수마찰을 평생을 계속하는 등으로 건강관리를 했지만 1980년 12월 6일 65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유도가 5단으로 단단한 체력이었지만 말년에 얻은 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 선생은 생전에
“백년설은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여 너무 일찍 타계했다!”
고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재혼을 한 심연옥과 사이에도 딸과 아들을 낳았다.
출처 : [성주신문] 2012년 12월 26일(수)
☞ 보너스 스토리
(번지 없는 주막)
『번지 없는 주막』은 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으로 1940년에 발표한 「백년설」의 노래로 나라를 잃은 헐벗고 굶주리던 우리 동포들의 통한을 담은 것이었다.
나라가 없는데 어찌 주거할 집이 있겠는가?
그래서 주막에 문패도 번지수도 없었다.
일제강점기 '태평 레코드'에서 앨범을 출시할 때였다.
원래 계획은 '산팔자 물팔자' 와 '눈물의 백년화' 라는 곡이 수록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눈물의 백년화' 가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발매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번지 없는 주막』 을 황급히 대타로 내세웠다.
『번지 없는 주막』은 여러 가수들의 리메이크를 거치면서 원래 3절이었던 노래를 2절과 3절을 섞어서 2절까지로 부르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인 형태가 되었다.
작사가 박영호는 월북을 하였기에 본명 대신 '처녀림'으로 통용 되고 있다고 한다.
☞ [번지없는 주막]영화
1961년에 강찬우 감독이 제작한 동명의 영화로 당대의 쟁쟁한 배우 김승호, 박 암, 도금봉 등이 출연했다.
그 동안 밀수에 가담해 왔던 주인공은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고 자수하여 형을 살고 나온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가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밀수에 다시 가담한다.
그래서 아내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출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배반할 것을 염려한 일당들에 의해 죽고 만다는 줄거리다.
첫댓글 나그네설움4중주한 동영상까지 첨부하셨네요
감사합니다 🎵
이젠 관중들의 수준이 높아져서 이곳을 찾는 분들의 눈높이에 맞추는 것이 좋은 것 같아서...
이 영상을 보신 분들은 아무래도 우리 '하모애'의 수준을 높게 볼 것이고 따라서 지도강사님을 비롯한 우리 단원들의 자긍심도 더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에서 선을 보였습니다.
송이골님
하모愛의 자긍심이 대단 하십니다~♡
시골와서 맨날 바쁘다 오늘 아침에 여유로이 감상 합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 거부하다 타계 했다는 비보군요.
*여호와의 증인*은 군대도 수혈도 거부하는 종교랍니다.
친척중에 그 종교에 빠진 아내땜에 밤마다 싸우는걸 봤거던요.
송이골님 덕분에 공부 잘 했습니다.
고마워요~^,^
관심을 갖고 읽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