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
곽 흥 렬
피아노로 연주되는 아리랑을 듣는다. ‘전통음악과 현대 악기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조지 윈스턴의 아리랑 연주 발표회 녹화 음반이다. 여태껏 전통악기로만 들어오다 양악기로 바꿔서 들으니 전혀 색다른 맛이 느껴진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풀리어나가는 유장한 가락이 시조창의 음률을 닮았다. 그 구성지면서도 애조 띤 곡조가 가슴속을 파고들자,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아릿한 정감에 젖어든다.
아마도 그래서이지 싶다. 몇 해 전, 세계 음악계의 거장들이 모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노래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곡을 뽑는 자리에서 우리의 아리랑이 그 대상으로 선정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선정 과정에는 단 한 명의 한국인도 끼여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로 미루어 보면 결과에 대한 객관적 신뢰성은 충분히 확보된 셈이다.
아리랑이 그처럼 훌륭한 노래인 줄을 미처 몰랐다. 오늘, 세상의 수다한 악기들 중에서 제일로 맑고 고운 음색을 지녔다는 피아노 선율에 실려 흐르는 아리랑을 듣고 있노라니, 그 이야기가 결코 빈말이 아님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렇게 빼어난 예술성을 지닌 노래임에도 여태껏 아리랑의 값어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은 어인 까닭일까. 그건 아마도 공기처럼 늘 가까이에 두고 있은 때문은 아닐까.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외치던 어느 광고 카피에도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 좋은 것을 놔두고서 지금껏 물 건너온 신식 노래만 즐겨 듣고 부르고 음미할 생각을 했으니, 적이 스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서른몇 해 전 고등학생 시절, 추수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 같았던 그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당시 시골서 대처로 유학을 온 나는 고모 집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 곳에다 자취방을 얻었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부모 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얼뜨기가, 끈 떨어진 망석중이 신세가 되어 혼자 하는 도회지 생활은 외로움이 깊었다. 고모가 가까이 계셨다는 것은 낯선 환경에 낯가림 심한 내게 큰 위로가 되었고, 그래서 고모의 그늘을 의지 삼고 싶은 마음에 생쥐처럼 사흘돌이 그 집을 들락거렸다. 고모네 집이 비록 고향 집만 하지는 않았어도, 허전한 가슴을 달래기엔 그나마 그런대로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고모는 아들 둘에 딸 다섯을 두었는데, 그 딸들이 어쩌면 그리 하나같이 인물이 빼어났었던지 모르겠다. 누나들도 물론 그랬지만 여동생들은 더욱 예뻤다. 비록 최종적으로 입상은 못 했어도, 그 가운데서 둘이나 미스코리아 선발 대회에 출전하여 본선까지 올라갔을 만큼 출중한 미모를 지녔던 것을 보면.
그렇게나 아름다웠음에도 내게는 여동생들이 그처럼 예쁘다는 느낌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저 이웃의 아가씨들보다는 조금 반반한 생김생김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다. 노상 만나선 책상머리에 이마 맞대고 앉아 공부하고 앞마당에서 장난치며 노닥거리다 보니 그 아름다움에 그만 무감각해지지 않았나 싶다. 우리처럼 밥도 먹고 화장실도 가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순간, 별나라의 요정인 양 신비스럽게 여겨지던 여자 선생님에 대한 환상이 무참히 깨어지고 만 어린 날의 슬픈 기억과 비교가 어떠할까.
남의 손에 든 떡이 더 커 보인다는 속담처럼, 무엇이든 남의 것은 더 좋아 보이는 게 사람의 심리인가 보다. 자기 집 정원에 피어난 장미는 정작 자신보다는 울타리 너머 행인들의 눈에 더욱 아름답게 비쳐지게 마련이다. 그것은 지금 그 떡이 내 손안에 없기 때문이고, 그 장미가 그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는 까닭에서가 아닐까.
사람들은 항용 『아라비안나이트』니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작품을 세계적인 문학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여부가 없는 말씀이다. 그 작품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불후의 명작이며 인류의 무가보無價寶한 정신적 자산이 아닌가. 그러기에 애당초 의혹의 눈초리에서 벗어나 있다.
여기서 나는 우리의 영원한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춘향전』을 생각한다. 피 끓는 청춘 남녀의, 신분을 뛰어넘은 순애보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 ‘춘향전’, 지구상의 그 어떤 위대한 소설과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을 이 훌륭한 작품을 두고는 왜 우리 스스로 세계적인 문학의 반열에 올리는 데 그리 인색해 하는지 의문부호를 달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필시 작품 외적인 여러 이유가 있을 터이지만, 그중 하나가 너무 가까이 자리하여 좋아도 좋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숙명적인 원시안遠視眼에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판소리가 그렇고, 민요가 그렇고, 사물놀이가 그렇고, 탈춤이 또한 그렇다.
우리는 일쑤, 남들은 하나같이 행복한데 유독 나만 홀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웃의 삶은 마냥 화려 찬란해 보이는 반면, 내 삶은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허덕이는 비참한 생활로 비쳐진다. 이 세상에 고민 없는 사람이 누가 있으며 고통 없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많든 적든 다들 고만고만한 고통과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존재자의 일상일 터이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역지사지를 헤아리지 못하는 그런 뒤틀린 생각이 노상 우리에게 낙담을 부르고 삶을 좌절하게 만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착시현상이다. 동화 속의 이야기에서와 같이, 행복의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 항시 내 주변에 머물고 있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쉽사리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다 막상 놓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진정 행복이었음을 깨닫고는 뒤늦은 후회로 한숨짓는다. 그런 작용의 중심에 원근법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 세상의 수다한 불행은 이 어쩔 수 없는 원근법의 이치에서 연유한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지난날 예의 그 유학생이던 시절, 나는 타관 객지의 쓸쓸한 자취방에서 싸늘하게 식은 밥 덩이를 꾸역꾸역 삼키며 문지방을 타고 넘어오는 주인집 가족의 도란거리는 이야기 소리에 한없는 부러움을 가졌었다. 그 정겨운 화음에 울컥울컥 가슴이 메어 오곤 했다. 삼복더위로 몸과 마음이 지쳐 갈 무렵, 그들이 저녁상을 물린 뒤 냉장고에서 꺼내어 한 조각씩 베어 물던 무르익은 수박의 황홀한 때깔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스톱 모션으로 기억의 언저리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그때 밀려드는 허기虛氣를 견디다 못해 이따금 시골집으로 달려갔을 때면 고향 마을은 아스라이 먼 곳에서 하나의 소실점이 되어 나타나고, 그 점 한가운데에 늘 어머니가 서 계셨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서럽도록 반가운 정경! 그 따뜻한 그림으로 나는 도회 생활의 허기와 외로움을 이겨낼 용기를 얻곤 했다.
세월이 흘러 막상 내가 예전 주인집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 보니, 그것도 참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여유로운 생활 가운데 침몰하여, 지금의 소박한 행복을 깨닫지 못하고서 더 먼 곳에 있을 크고 화려한 욕망을 꿈꾸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주렴계周濂溪 선생 같은 대문장가도, 연꽃은 멀리 두고 바라는 볼 수 있을지언정 만져서는 아니 된다고 했는지 모르겠다.
어디 연꽃뿐이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무리처럼, 그 무엇이든 아득히 떨어져 있을 때면 죄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느지막한 퇴근길에 멀리서 새어 나오는 내 보금자리의 불빛은 얼마나 포근하고 따사로운가.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금세 일상사에 지쳐 찌든 마음이 흔흔히 위로받는다. 우리는 늘 이 소박한 행복을 놓치고서 허둥대며 살아간다, 가까이 있는 아름다움은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아니하므로.
무릇 세상살이가 하나같이 그런 것 같다. 사람들은 내남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원시가 되어 버린다. 멀리 사는 친척보다 이웃사촌이 더 살갑듯, 사실 내 가까이에 있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고 더욱 값진 것일 수 있음에도 말이다.
이제부터 나는, 마음의 눈이 원시가 되지 말고 근시가 되고 싶다. 그리하여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동전을 살피듯, 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소박한 행복을 살피며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어디선가 정선아리랑의 구슬픈 선율이 이명耳鳴으로 귓전에 감겨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