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의 악마의 속삭임 :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사실 가짜이다!”
요즘 과학자들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시뮬레이션일 수 있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영화 속에서나 말할 수 있는 이러한 공상적 이야기들을 왜 마치 진짜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추론해 보자! 어떤 사건의 이유는 항상 복합적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나 이득들이 모여서 하나의 구체적인 현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소한 4가지 이유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중요한 것부터 나열해보자!
❚ 이 글에서 말하는 과학자란 우주가 시뮬레이션 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과학자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바람!
1) 자신들이 만든 기술을 하루 빨리 상용화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란 원래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던 학문이었지만 현대로 올수록 기술을 개발하는 실용적인 학문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기술이 빨리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활용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야 기업에서 상품을 만들고 상용화 할 수 있고 자신들이 그 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과학자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에 관계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그럴 것이다. 세계 자체가 시뮬레이션이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시뮬레이션도 이 구체적인 현실과 다를 바 없다. 구차한 현실에 집착하지 말고 멋진 시뮬레이션의 세계에 사는 것이 더 났다. 그러니 하루 빨리 시뮬레이션 세계로 들어가라! 뭐 이런 세뇌를 끊임없이 되 내이는 것이다. 거짓말도 자꾸 듣게 되면 사실처럼 들리니까!
2) 옛날 과학자들과 달리 요즘의 과학자들은 거의 유물론자들이고 그들에겐 가치의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와 인생을 오직 유물론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가치의 개념이 사라져 버린다. 현실, 실재, 진짜, 사실에 대립하는 가상, 허상, 가짜, 거짓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전자는 어떤 식으로든 가치를 가지고 있거나 가치를 산출하지만, 후자는 가치가 상실되어 있거나 가치를 파괴하는 것이다. 인생은 가치의 계열로 점철되어 있다. 무엇을 좋아하거나, 어떤 것을 갈망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에는 물질적 가치, 정서적 가치, 심리적 가치, 윤리, 도덕적 가치, 정신적 가치, 영적이 가치 등 다양한 가치가 있다. 화가들이 전혀 돈이 되지 않는 그림을 계속 그리는 이유도 그것이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농부들이 사실상 손해를 보면서도 농사를 짓는 이유도 농사를 짓는 행위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에서 모든 가치를 오직 물질적 가치로 환원하게 되면, 사실상 애써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고, 애써 학문을 할 필요가 없고, 애써 자녀들을 기를 수 없고, 애써서 평화를 추구할 필요도 없다. 시뮬레이션 세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 손쉽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악마가 인간에게서 바라는 것, 그것은 모든 가치들을 던져버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들은 인문학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가상 세계 속에서 하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이다.
3) 현대의 과학자들은 철학을 특히 형이상학을 전혀 모르고 있다. 철학적 언어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이러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진짜가 곧 가짜다, 우리가 사라는 현실이 곧 가상이다’라는 이러한 괴변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가상이나 가짜라는 말은 ‘실재’ 혹은 ‘진짜’를 전제할 때, 의미가 있는 말이다. 예를 들어 진짜 칼은 손에 그으면 베이고 피가 난다. 진짜 칼과 유사하지만 드라마에서 사용하는 가짜 칼은 베이지도 않고 피도 나지 않는다. 가짜가 있다는 것은 곧 그것과 대립하는 진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가짜이다’라는 말은 진짜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짜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용법상 통용될 수 없는 말이다. 나아가 말하고 있는 자신도 가짜라는 말이고, 또 그가 하는 말도 가짜라는 말이다. 그러니 가짜가 가짜를 말한다는 것은 곧 ‘모순의 모순 즉 “이 세계가 진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기초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 없으니, 괴변 즉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4) 자신들은 ‘세상 모든 이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주 시뮬레이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서의 창조설을 성서가 말하는 그대로 진실 혹은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과 동일하게 일종의 ‘근본주의자’ 혹은 ‘광신도’와 같은 사람들이며, 이들의 심리 속에는 우리만 ‘진실하고, 신실하고, 진짜이고’라는 일종의 잘못된 ‘선민사상’내지는 ‘우월사상’을 가진 이들이다. 창조설은 신이 이 세계를 만들었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인간을 만들고 인간을 그 속에서 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설은 세계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한 방편이다. 창조설은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사실을 손쉬운 방식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설화라고 하기도 한다. 창조설화는 어떤 경우에도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유비 혹은 비유이며, 우리를 거기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가치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이론인 것이다. 그래서 창조설은 믿음의 영역이지 학문의 영역이 아니다.
이 우주가 다른 우주의 탁월한 종족이 만든 시물레이션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게 현대의 새로운 창조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를 찾고자 하는 과학자들은 마치 아프리카나 중동의 어느 곳에 에덴동산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신학자와 유사한 것이다. 하지만 창조설과 시뮬레이션의 차이는 전자는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도록 도와줄 수 있지만, 후자는 인생의 의미를 파괴하고 가치를 없애 버리는 것이기에 큰 차이가 있다. 창조설을 마치 팩트인 양 그 증거를 찾아 해매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은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라는 일종의 우월감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그 어떤 진리를 기어코 밝혀내겠다는, 그래서 자신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진리의 사람임을 밝혀보겠다는 우월감이 빠진 사람이다. 우주시뮬레이션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정확히 그 원리는 같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허상에 빠져 살고 있지만, 우주를 탐구하는 나는 이들이 허상에 빠져 살고 있음을 밝혀 줌으로써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플라톤이나 장자는 결코 이 세계가 가짜이거나, 허상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으로 거짓이나 가짜나 허상에 빠져 살 수도 있음을 비유나 신화적인 방식으로 자각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비유나 신화를 진짜로 믿는 것은 어린아이들뿐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마치 지혜가 텅 빈 어린아이들과 같은 이들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