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 길
비봉산의 강이식 장군 (2)
수양제의 통치
수양제 양광은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앉는다.
물론 이 일에 대해 많은 이설도 있기는 하지만 양광은 아버지 수문제의 애첩인 선화부인 진씨를 흠모하여 겁탈하려고 하였다. 선화부인이 간신히 달아나 문제에게 이를 알렸고 문제는 유술과 원암에게 폐태자 용을 불러오도록 지시하니 이 사실을 알게 된 양광은 유술과 원암을 감금하고 장형을 보내 앓아누워있던 문제를 죽여버렸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수양제는 아버지였던 수문제와는 전혀 달랐다. 문제는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을 생각하면서 20년 넘게 최선을 다해 천하를 안정시키고 생산을 장려하여 국가와 백성의 부를 늘려 놓았으나 양제는 이렇게 쌓은 부를 자신의 욕심과 사치로 낭비했다. 어쩌면 문제가 천하를 안정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었고, 이것이 국가의 근본을 흔들리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아버지가 천신만고 끝에 다져 놓은 기초가 비극적이게도 아들 양제의 망나니짓을 위한 밑천이 된 셈이었다.
양제가 황제가 되기전에는 총명하고 능력이 탁월했다.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정도로 군사적인 능력이 있었으며, 글재주도 있었고, 예술에도 조예가 있었다.
604년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한 양제는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시작했다. 수나라의 도성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의 주생산지가 강남(중국)이라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서 효율이 낮아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는데, 물길이 도성까지 닿지 않았기에 운하 건설은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운하 건설은 부황 문제 때부터 시작됐으나 국고의 손실을 염려해서 중단하고 있었다.
대공사에는 백성의 부역을 동원해야 하므로 백성의 생계에 주는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기간을 넉넉하게 잡고 조정해야 했는데, 양제는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동원하였고 거기다가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과 대로를 건설하면서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운하 건설은 혹독했고 여성들까지 끌고 동원하여 재촉했다.
보다 못한 신하 한 명이 '운하 사업은 나라의 장래에 도움이 되는 일인 건 맞지만 폐하께서는 너무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십니다. 그동안 죽은 사람만 250만 명이 넘으며, 운하로 양측에 쌓인 유골은 아직 다 치우지도 못했습니다. 게다가 너무 많은 백성이 노역에 끌려간지라 농사도 제대로 돼 있지 않은데 흉년까지 겹쳐서 백성들은 굶어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간언하자, '에잇! 저놈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잖아! 여봐라, 이놈을 끌고 가서 매질해 죽여라!' 하고 반응한다.
대운하 건설에 동원된 연인원 1억 5,000만 명이었고 잘못한 곳을 발견하고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런 서슬 퍼런 양제의 행동에 아무도 대항하지 못했고 모든 신하와 장수들은 그 아래서 아부하며 자기 생명을 유지하려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는 길 만이 자신들이 살 수 있고 부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사실 그럴까?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디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나?
하나님의 공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