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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이의민이 정권을 쥐었을 때,
그의 아들 이지영은 삭주 분도 장군으로 내려가 있었던 적이 있다.
삭주는 양수척(고리 백정)이 많이 살았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백제의 유민 가운데 왕명을 거역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양수척이라고 하였다.
그 중에서도 결사적으로 왕명에 반대한 무리를 모아 압록강 부근에서 살도록 내쫓았다.
그들은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집단생활을 하면서 고기를 잡아 목숨을 이었다.
그래도 생활이 어려워진 여자들은 노래와 춤으로 업을 삼았다.
그 기생 가운데서도 잘생긴 여자들은 세도가의 첩으로 들어가 장안에서 이름을 날렸다.
이지영이 서울로 올라올 때는 자운선도 따라 왔다.
"이곳에서도 너를 따를 만한 미인이 없구나!"
이지영은 매우 흡족했다.
사실, 자운선의 얼굴은 아주 아름다웠다.
경치 좋은 벽란강의 보달원을 자기의 절로 정한 이지영은, 거기에 다리를 놓았다.
보달원은 바로 백천에 있었으므로, 개성에 가려면 누구나 이 다리를 건너야만 하였다.
▶하지만, 이지영이 단독으로 놓은 다리여서 아무나 다니지 못하였다.
다리가 준공되자,
이지영은 보달원에서 낙성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서울에 있던 장군들은 모두 이 낙성식 잔치에 참석했다.
최충헌도 장군 이었으므로, 이 잔치에 참석하여 구경을 했다.
자운선은 이리 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따르고, 노래도 부르며 춤을 추었다.
긴소매를 휘저으며 가락에 맞추어 나비처럼 춤을 추는 자운선의 모습은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장부로 태어나서 저런 미인을 갖지 못하고 죽다니…….'
최충헌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
그 뒤 최충헌은 이지영을 없애려고 나섰을 때, 제일 먼저 자운선부터 찾았다.
황해도 해주에서 한유가 이지영을 죽이고, 자운선을 곱게 데려왔다.
최충헌은 꿈에도 잊지 못하였던 자운선을 차지하자 기쁘기 한량없었다.
"자운선아, 내가 너를 찾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였는지 아느냐?"
"황공하옵니다."
"전날 보달원에서 너를 본 뒤에 잊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하온 줄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다. 너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마음씨 또한 아름답구나."
이때 최충헌의 나이는 40살이 갓 넘었다.
자운선은 온갖 호강을 누리며 최충헌의 옆에서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최충헌은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다음 일들을 착착 진행시켰다.
우선 왕을 갈아치우고 반대당을 모두 없애 버렸으므로,
이제는 최충헌의 천지가 되었다.
☆☆☆
신종 5년,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관리들을 임명하고 정치를 펼쳤다.
왕은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경대승이 먼저 설치한 '도방'을 계승한 것이었다.
희종 때에는 최충헌을 '은문상국'이라 칭하여, 왕도 최충헌을 받드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또한, 진강후에 봉해져서 최충헌은 왕족과 같은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제 최충헌은 세상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은 권력을 손에 쥐었다.
이 때부터 최충헌의 집을 흥녕부라 하였으며, 막료까지 두게 되었다.
최충헌은 궁중을 드나들 때는 평복을 입고 일산(햇빛을 가리는 기구)을 받쳤으며,
찾아오는 문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최충헌의 시대였다.
최충헌 외에, 그 일가붙이들도 세력을 이만저만 부리지 않았다.
최씨네 개한테는 함부로 눈을 흘기지 못하였다.
최충헌의 생질 박진재도 최충수를 없애는 데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되었다.
그를 찾아오는 문객도 최충헌의 문객 수와 맞먹었다.
문객이 많으면, 그 중에는 별의별 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게 마련이었다.
박진재의 문객 중에서 용맹스럽고 지혜가 뛰어난 자들이 있으면,
최충헌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박진재는 최충헌이 자기를 경계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박진재는 그라는 최충헌을 또 못마땅하게 여겼다.
'외숙 최충헌만 죽으면, 내가 정권을 잡을 텐데…….'
박진재는 은근히 최충헌을 시기했다.
"외숙은 장차 왕이 될 생각을 품고 있소.
머지 않아 내 앞에 영광이 돌아올 날이 있도다."
박진재는 가까운 사람에게 은근히 최충헌을 없앨 뜻을 비쳤다.
이 소문을 들은 최충헌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미리 손을 쓰지 않으면, 내가 큰 화를 당하겠다.'
최충헌은 이런 생각을 하였다.
☆☆☆
어느 날, 최충헌은 박진재를 불렀다.
박진재는 외숙의 부름을 받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안 갈 수도 없었다.
박진재는 할 수 없이 흥녕부로 갔다.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해치려고 하느냐!"
이 말을 들은 박진재가 기가 죽고 말았다.
"제가 감히 어찌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잘못 들으셨사옵니다."
박진재는 엉겁결에 거짓말을 하였다.
"이놈, 내가 네놈에게 속을 줄 아느냐? 발칙한 놈!"
"그렇지가 않습니다. 중간에서 시기하는 무리들이 거짓으로 고한 것 같습니다."
"잔소리하지 마라!"
최충헌은 좌우에 있던 부하들을 시켜서 박진재를 묶도록 하였다.
"저놈의 다리를 끊어라!"
박진재는 다리의 근육이 끊겨 귀양을 가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최충헌은 이처럼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나쁜 마음을 먹는 자가 있으면
사정을 두지 않고 즉시 처단했다.
☆☆☆
희종 7년 12월,
최충헌은 관리의 임명을 왕에게 아뢰려고 수창궁으로 들어갔다.
이때, 중관이 나와서 최충헌의 종자를 데리고 갔다.
잠시 뒤에 중과 평민 10여 명이 무기를 들고 최충헌이 있는 곳으로 와서 종자를 때려 눕혔다.
최충헌은 흉계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히 어전으로 들어서며,
"전하, 신을 구해 주십시오." 하였으나, 왕은 문을 닫고 열어 주지 않았다.
최충헌은 왕이 주동이 되어 자신을 해치려는 줄 알고,
지주사의 방으로 들어가 반침 속에 숨었다.
얼마 뒤에 중 한 사람이 들어와서 두리번거렸다.
"이놈이 어디로 갔지?"
중은 이내 방을 나갔다.
또, 얼마 있다가 다시 중 몇 사람이 와서 방안을 뒤졌다.
최충헌은 다락 속에 엎드려 숨어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응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때, 중방에 있던 최충헌의 부하인 김약진과 정숙첨이
최충헌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돌아오지 않자 수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은 군사 몇 사람을 데리고 궁궐로 가서 최충헌을 찾다가 중 몇 사람들과 결투를 벌였다.
그리고는 즉시 도방에 연락하여 군졸로 하여금 궁궐 밖에서 지키도록 하였다.
"진강공은 무사하다!"
노영의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외쳤다.
도방의 군사들은 일제히 뛰어들어 중들과 격투를 벌였다.
중들은 당해 내지 못하고 달아났다.
김약진이 앞으로 나서며,
"영공, 내가 나가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겠소." 하고 말하자 최충헌이 말렸다.
"그러면 후세 사람들이 내가 왕을 시해했다 할 것이오. 내가 책임지고 범인을 잡겠소."
김약진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최충헌은 즉시 사약 정윤시와 중관을 잡아 안은관에 가두도록 하고, 관련자를 조사하여 처벌했다.
이 사건으로 희종도 영정도로 쫓겨났으며,
주모자 왕준명, 우승경 등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다음 왕으로 명종의 아들이 강종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많아서 3년만에 죽었다.
다시 강종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고종이다.
최충헌은 이렇듯 명종·희종·강종·고종 다섯 임금을 만들어 낸 셈이었다.
☆☆☆
고종 4년 정월, 흥왕사, 흥원사, 경복사 등의 승려들은
최충헌을 없애려고 선의문으로 공격해 들어가며 거란병을 가장하는 작전을 폈다.
선의문을 지키는 군사가 완강히 버텼으나, 그들의 손에 죽었다.
그들은 최충헌의 집으로 밀어닥쳤다.
최충헌은 즉시 가병 수백 명을 풀었다.
가병은 순검군과 힘을 합하여 승병들을 모두 쳐죽였다.
잔당을 모두 잡아서 문초한 결과,
최충헌은 중군 원수 정숙첨이 주동자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충헌은 정숙첨을 귀양보내는 한편,
숨어 있는 승병 3백여 명을 체포하여 죽였다.
이때 승려로서 죽음을 당한 자가 8백여 명이나 되었다.
최충헌의 목을 노리는 자가 승려들의 세계에까지 미친 것이다.
☆☆☆
고종 6년, 최충헌의 나이는 71살이었다.
그 동안 최충헌은 송청의 딸을 아내로 삼아서 아들 우·향을 낳았다.
그는 다시 손홍윤의 아내 임씨를 강제로 아내로 삼아서 아들 성을 두었으며,
집권한 뒤에 다시 강종의 딸 왕씨와의 사이에서 구와 선사를 낳았다.
최충헌은 이처럼 이복 형제의 아들들이 많아서 뒤를 잇는 문제를 걱정하였다.
그 해 9월, 최충헌이 병이 들어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되자 큰아들 우를 불렀다.
"아무래도 형제간에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 그러니, 다시는 문병도 오지 말아라."
한편, 상장군 지윤심과 유송절 등은 향을 내세우려고 모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최충헌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큰아들 최우는
먼저 손을 써서 향을 내세우려는 지윤심과 유송절 등을 죽이고, 기회를 살폈다.
"악공을 불러 연주를 하라."
최충헌이 일렀다.
악공 수십 명이 연주를 하여 아악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최충헌은 그 소리를 듣다가 세상을 떠났다.
죽는 순간까지도 최충헌은 사치스러웠던 것이다.
왕은 모든 신하들에게 흰옷을 입고 모이라고 하였다.
장례 절차마저도 최충헌은 국상과 같은 위엄을 보였다.
☆☆☆
고종 7년,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을 대신하여 권력을 쥐었다.
최우는 최충헌이 집권할 때 저질렀던 여러 가지 잘못을 고쳐 다스리기 위해,
강제로 빼앗았던 공사전을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그의 이름은 높아졌다.
물론,
최우도 자기 집에 정방을 두고 관리들의 성적을 매기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모든 관리는 최우의 정방에서 나아가 성적을 평가받아야 했으며,
무슨 일이든지 정방에서 결제를 받아야 시행하였다.
성적을 평가하는 최우는 마치 용상에 앉은 왕과도 같았다.
최우는 청상에 앉았으며, 6품 이하의 관리들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땅에 엎드려야만 하였다.
고종 18년, 최우의 아내인 정씨가 세상을 뜨자 조정에서는 좋은 비단 70필을 내렸다.
최우는 이것을 사양하고 10필만 받았다.
최우는 얼마 뒤에 상장군 대집성의 딸을 맞았는데,
이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 한 번 시집을 간 적이 있었던 과부였다.
그래도 인물이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최우는 정식 부인으로 맞았다.
이 무렵에는 국제적으로 정세가 매우 불안하여, 몽고의 침략이 되풀이되던 때였다.
최우는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그리고 강화도의 서울을 크게 번화하게 만들었다.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공로로 최우는 진양후가 되었다.
모든 신하들은 그의 저택으로 가서 공을 치하하였다.
하지만, 최우의 저택은 개성에 있는 것만큼 크지 않았다.
최우는 각 군에 영을 내려서 재목을 구해 오도록 하여 새로 저택을 지었다.
이때 지방관들은 최우에게 잘 보이려고 앞을 다투어 좋은 제목을 받쳤다.
완성된 최우의 저택 정원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수십 리에 뻗쳤다.
또,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 별천지를 이루었다.
☆☆☆
고종 30년, 최우는 이름을 최이로 고쳤다.
그 뒤부터는 몽고군의 침략이 없었으므로, 강화도의 생활은 평온하였다.
자신만 호화롭게 지내는 것이 양심에 찔렸던지,
최우는 궁궐에 강안전을 고쳐 짓고 황금색 능라주로 벽을 발랐으며,
서예로 이름난 최환으로 하여금 글씨를 써서 붙이도록 하였다.
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
최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4월 8일이 되자,
최우는 그 동안 전쟁으로 열지 못했던 연등회를
전에 송도에 있을 때 보다 더욱 성대하게 열었다.
오색 등불을 많이 달아서 대낮같이 밝혔다.
이 날만은 최우가 자기의 저택을 일반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도록 하였다.
이 날,
백성들은 구름같이 모여들어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넓은 뜰을 메웠다.
밤이 깊어 갈수록 기녀들은 춤과 노래로 재주를 뽐내었다.
일반 사람들은 음식 대접도 받았다.
오랜만에 푸짐한 음식을 먹어 보는 사람들은 기분이 좋았다.
"진양후, 오래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밥과 떡을 주소서."
모두들 최우를 칭찬하였다.
5월이 되자,
최우는 높은 관리만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
여기에는 팔도에서 모은 온갖 진귀한 음식과 기녀 수십 명이 시중을 들었다.
그 비용이 엄청났다.
최우는 비록 몽고군에게 쫓겨 강화섬에서 지냈을망정, 사치스러움은 전보다 더했다.
난리를 겪은 백성들만 고통이 심했다.
☆☆☆
고종 36년에 최우가 죽자, 왕과 같은 예우로 장사를 지냈다.
최우는 본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첩인 서련방의 몸에서 만종과 만전 두 형제를 얻었다.
하지만, 최우는 두 아들에게 군사권을 주지 않으려고 모두 중으로 만들었다.
큰아들 만종은 단속사로 보냈으며, 작은 아들 만정은 쌍봉사로 보냈다.
그들 앞에는 무뢰한 중들이 들끓어서 재물을 빼앗는가 하면 행패가 심하여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대로 가만 두어서는 안 되겠다!'
최우는 어사 오찬과 행수 주영규를 단속사와 쌍봉사로 보내어 그 동안 빼앗은 곡식을
모두 풀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무뢰한 중들을 모조리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
만종은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버님께서 이처럼 아들을 억압하시면, 자식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최우는 그제야 아들을 용서해 주었다.
그 뒤, 최우는 만정의 이름을 '항'으로 고쳤다.
그리고 항에게 공부를 가르쳐서 호부상서의 벼슬을 주었다.
최우의 병이 심해지자,
최항은 군대를 이끌고 경계를 튼튼히 하여 무사히 정권을 이어받았다.
이 틈을 타서 상장군 주숙이 왕정을 되찾겠다고 난을 일으켰으나,
최우의 세력이 강하여 쉽게 가라앉혀졌다.
☆☆☆
최항은 정권을 쥐자마자 반대파를 모두 꺾어 버리고,
아버지 최우와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없앴다.
이때 계모인 대씨도 독살되었으며, 대씨 일파도 모두 해를 입었다.
최항 역시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강화도에서 나가지 않고 몽고에 반항하였다.
몽고와의 전쟁 위협이 엿보이자 최항은
강화도에 중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승천포에 궁궐을 지어 몽고와 평화 교섭을 벌이도록 하였다.
고종 42년 11월,
왕은 조사를 내려 최항 부자의 공을 칭찬했다.
'옛날 주공과 소공은 주나라를 도와 나라를 튼튼히 하였고, 소하와 조참은 한나라를 튼튼히 하였도다.
진양공 최우는 과인이 왕위에 오른 뒤에 지성으로 사직을 도왔으며,
사자 시중 최항은 아버지의 업적을 이어서 대장경 판을 완성시켜 백성들이 큰복을 받았도다.'
왕은
특히 최항 부자가 강화도의 방비를 튼튼히 한 공을 칭찬하고, 식읍을 더 내렸다.
최항은 이것을 사양하여 더욱 칭찬을 받았다.
그러던 중, 최항은 고종 44년에 병이 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최항이 아직 정권을 잡기 전 승녀로 있을 때,
그는 송서의 집 여종과 사귀어 아들 의를 낳았다.
최의는 어릴 때부터 용모가 빼어났으며,
손에서는 은은한 황금색이 돌았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유명한 학자들이 최의를 잘 가르쳤다.
최항은 세상을 떠나던 날, 선인열과 유능을 불러서
"내 아들 의를 잘 부탁하오." 하고 뒷일을 부탁했다.
이로써 최의는 쉽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왕이 최의에게 차장군의 직함을 내림으로써, 그는 최고의 직권자가 되었다.
최의는 자기 어머니 출신이 천하였으므로, 신분에 대해서는 별로 따지지 않았다.
최의가 정권을 잡기 전부터 세도를 부리던 송길유, 김인준, 김승준 등은 불안해하였다.
그러던 중, 송유길이 너무 재산을 탐하고 함부로 세도를 부리다가 망하였다.
최의의 장인인 거성 원발은 자기의 공을 세우려고
"유경, 유능, 김인준 들이 공모하여 정권을 잡으려고 합니다." 하고 몰래 고해 바쳤다.
최의는 노하여 유경 등을 불러 놓고 꾸짖었다.
"나는 너희들을 심복으로 삼아 믿었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음모하여 상전을 헤치려 하느냐?"
그러자 그들은 땅에 머리를 대고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 가운데 김인준은 대대로 최씨 문중에서 자란 종이었다.
김인준의 아버지가 최충헌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서 친시라는 이름으로 항상 주인을 모시고 다녔다.
이 종의 아들이 곧 김인준과 김승준이었다.
그들 가운데 김인준은 최우의 신임을 받았다.
김인준은 한때의 잘못으로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그래도 최우는 믿을 사람은 김인준 밖에 없다 하여 최항의 집권 시대에는 더욱 신임을 받았다.
김인준의 세력이 약해지자 반대로 거성원발이 세도를 잡았다.
때문에 거성원발의 세력과 유경, 유능, 김인준 등의 일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싸움을 벌였다.
어느 날,
신의군의 도령낭장 박희실, 이연소 등이 유경, 김인준 등에게
"최의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소인배들과 어울려 나랏일을 그르치고 있소.
우리가 먼저 그들을 없애지 않으면, 우리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할지 모르오.
4월 8일 밤에 거사합시다!" 하고 말했다.
이 말을 중랑장 이주가 엿듣고, 자기의 공을 세우기 위해
최문본, 유태, 박훤 등과 함께 의논한 뒤에 최의에게 고해 바치려고 하였다.
한편, 김대재는 자기의 장인 되는 최양백에게 4월 8일에 거사하는 것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최양백은 즉시 승낙했다.
그러나, 최양백은 사위가 돌아간 뒤에
혹시 실패하면 자기의 목숨이 달아날 것을 두려워 최의에게 알렸던 것이다.
최의는 심복인 유능을 불러 역적 모의에 대해 물었다.
유능은 이미 음모가 드러난 것을 짐작하였고, 다행히 자기는 거기서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밤은 너무 늦었습니다.
즉시 야별초 지유 한종궤를 시켜서, 내일 아침에 이일휴로 하여금 치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즉시 반역의 무리들을 치도록 하라!"
최의가 명령했다.
그래서 이 날 밤의 위기는 넘겼다.
이 때, 최의의 옆방에서 최양백의 딸이 이 말을 엿들었다.
그녀는 살며시 빠져 나와 그 사실을 남편인 김대재에게 말했다.
김대재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 김인준에게 전했다.
"그 동안 최양백이 고자질했구나."
김인준 부자는 즉시 신의 군에 달려가서 박희실과 이연소에게 말했다.
"일이 아주 급하게 되었소! 최의가 우리의 음모를 알고 내일 아침에 우리를 싹 쓸어버린다 하오.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죽는대서야 말이 되겠소? 당장 일어납시다!"
그들은 전에 모의했던 사람들을 급히 모았다.
임연을 중심으로 한 몇 사람은 한종궤를 잡아 죽였다.
임연은 다시 삼별초의 군사들에게 말했다.
"최의는 죽었다 하오. 즉시 모이도록 하오."
삼별초 군사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모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유종, 박송비, 김인준도 모여
대신 중에서 덕망 있는 사람을 내세워야 한다고 말한 뒤에 추밀원사 최온을 불러들였다.
여기에 최양백도 모였다.
김인준이 삼별초군에게 눈짓하자, 최양백을 즉석에서 없애 버렸다.
딸은 남편인 김대재를 도와주어 평생 부유하게 지냈지만, 최양백은 양다리를 걸쳐서 죽임을 당했다.
그 다음으로 이일휴를 없애 버림으로써 최씨 일파는 모두 쓸어버린 셈이었다.
이제는 최의의 집으로 들어갈 차례만 남았다.
삼별초의 군사들은 횃불을 쳐들고 궁궐 같은 최의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날 밤은 안개가 짙게 덮여서 몹시 어두웠다.
어느 듯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김인준이 지휘하는 군대가 잽싸게 담을 넘어 공격해 들어갔다.
거성원발은 무슨 낌새를 알아차렸던지,
그날 밤에 최의의 저택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거성원발은 뜻밖의 습격을 받고 대항하였으나,
김인준의 군대가 많은 것을 알자 최의를 업고 달아나려고 하였다.
최의는 원래 몸이 뚱뚱하여 거성원발이 잘 업을 수가 없었다.
거성원발은 급하여 최의를 다락 속에 집어넣고,
문 앞에서 쳐들어오는 졸개들은 마구 목베었다.
이때, 임연과 오수산이 달려와서 거성원발과 승부를 겨루었다.
모두 이 무렵의 명장들 이였으므로, 칼싸움이 불꽃을 튀겼다.
몇십 합을 싸우다가 먼저 오수산이 이마에 칼을 맞고 쓰러지자,
거성원발은 담을 뛰어 넘어 달아나고 말았다.
밖에서 이것을 본 군사들이,
"저놈 잡아라!" 하고 외치며 쫓아갔다.
거성원발은 그 군사마저 무찌르고 달아났다.
거성원발은 죽을힘을 다하여 강까지 10여 리 길을 도망치다가
기진맥진하여 쓰러져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한편, 최의는 거성원발의 용감한 싸움에 힘입어
다락에서 뛰어나와 대항하려다가 임연의 칼에 몸이 두 동강나고 말았다.
이로써 고종 45년 3월 26일,
최씨 무신 독재정권은 4대 61년만에 막을 내렸다.
유경, 김인준, 최온, 임연 등이 대궐로 들어섰다.
모든 신하들이 태정문 밖에 모여 있었다.
유경과 김인준이 들어가서 왕에게 절하였다.
"경들은 종묘 사직을 위해 크나큰 공을 세웠노라!"
왕은 눈물까지 흘렸다.
"최씨의 장기 집권으로 백성들은 도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신등이 그것을 보고 일어나서 역적을 죽이고 충성을 하였습니다.
즉시 곡식을 풀어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소서."
김인준이 아뢰자,
왕은 이를 즉시 시행토록 하였다.
이튿날, 김인준 등은
이번 거사에 참가했던 삼별초군을 대궐로 이끌고 들어와서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만세!"
최씨 4대가 모은 재산은 모두 풀어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고종은 유경, 김인준, 임연 등에게 공신의 칭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