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mazing Grace
찬송가 305장 Amazing Grace ‘놀라운 주님의 은혜’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을 지은 존 뉴튼은 미국에서 1700년대 사람인데 젊은 시절에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가게 되고 결국 노예선을 타게 되었습니다. 검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잡아서 팔아넘기는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한 번은 친구가 소포로 책을 보냈는데 토마스 캠피스가 지은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었습니다. 친구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 책을 읽었는데 그는 큰 광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모범수로 조기 석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는 39세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그 놀라우신 은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은 찬송가가 ‘Amazig Grace’입니다. 세상에서도 대중의 입에 널리 알려진 찬송입니다. 그가 젊었을 때 그렇게 방탕하고 지은 죄를 다 회개하고 또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우신 은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찬송을 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성경 요한복음 21장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3번이나 부인하여 주님을 떠났으나 그가 회개하고 주님께 나아왔을 때 주님이 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을 주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명을 주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첫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모였을 때 몇 번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도마가 없을 때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마가 있을 때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보고서라도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은 디베랴 바닷가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밤새 물고기 잡으려 애를 썼습니다.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새벽 무릅 쯤 되었을 때 주님이 그 바닷가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물고기를 잡았느냐?”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혔습니다. 다른 제자가
“주님이시다!”
라고 하니 베드로고 얼른 물에 뛰어들어 바닷가 주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생선을 굽고 계셨고 또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 하여 같이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주님의 육신이 부활하셨으니 생선을 같이 잡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어준 이름이 ‘게바’ 즉 ‘베드로’입니다. 이 뜻은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반석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지어준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본래의 이름 ‘시몬’을 부릅니다. 인간적인 베드로 즉 본성 때문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 보고 절대 자신을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가 닭이 울기 전에 3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실제 주님이 체포되었을 때 대제자상의 뜰에서 밤에 불을 쬐면서 여종이 물어볼 때도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면서 심지어 저주까지 하며 맹세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는데 주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울고 회개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화에 의하면 베드로가 선교하러 다닐 때 새벽에 닭이 울기만 해도 늘 울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 주님을 부인한 것이 죄책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잘못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나약함을 이미 알고 계셨고 주님은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약한 점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 주님은 오늘날 우리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약한 모습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한 가지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주님의 질문 중에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여기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해석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이것들’이라도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들이라는 말은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에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즉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느냐는 그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는가? 어떤 물질이나 권세나 이 세상의 무엇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그것을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질문을 한다면 그것을 물으실 것입니다.
“네가 이 세상이 있는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아멘 우리는 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네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인정을 하고 또 주님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다고 대답을 할 때 ‘필레오’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는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라고 물었는데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내가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사랑한다는 말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데, 헬라어는 아가페와 필레오가 차이가 있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 부모의 사랑과 같이 전적인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필레오는 친구의 우정 같은 진실 된 정을 말합니다. 아마도 베드로 자신의 과오가 있으니 차마 주님을 아가페 한다고 대답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래도 주님을 좋아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멘
우리도 때로는 실패하고 온전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실수도 있지만 그래도 날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당부하시기를
“네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어린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즉 어린 성도들 먹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어린 성도도 해당이 되고 또 어린 자녀 같은 성도들을 양육하라는 의미도 됩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는 것입니다. 아멘
두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주님이 이어서 두 번째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역시 주님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고 주님의 사역자가 되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의무적으로 행하는 사역이 될 것이며 결국 그것은 삯꾼 목자 혹은 외식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덕목입니다. 아멘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또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두 번째 역시 ‘내가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는냐?’고 물었지만 베드로는 역시 두 번째도 ‘나는 필레오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는 아가페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없어 주님을 필레오 한다고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때 주님이 당부하시기를
“내 양을 치라!”
고 하셨습니다. 양을 친다는 것은 양을 돌본다는 것입니다. 양을 케어하고 보살피는 것입니다. 목자가 양을 돌보는 일을 목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목회사역을 목양이라 하지 않습니까! 양을 낮에는 푸른 들판으로 몰고 가서 마음껏 풀을 먹게 합니다. 그리고 배가 부를 쯤 되면 맑은 시냇가로 인도해서 물을 마시게 합니다. 그리고 더울 때에는 그늘에서 좀 쉬게 합니다.
해가 지려하면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 안에 넣습니다. 안전하게 보호합니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먼 들판에서 몇 개월 먹이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임시 천막과 숙소를 마련하고 양의 우리도 만듭니다. 그리고 당번을 정해서 밤에도 우리를 지킵니다. 늑대나 이리가 공격을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낮에 들판에 풀을 먹을 때에도 목자들은 항상 양들을 살펴봅니다. 멀리 늑대나 이리가 오지 않는지 살피고 만일 짐승이 있으면 몽둥이를 들고 달려가서 쫓아냅니다. 양이 스스로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양을 돌보고 먹이고 또 안전하게 쉬게 하는 모든 일을 목양이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성도들을 먹이고 지키고 양육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양을 이단으로부터 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또 지켜 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주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일을 베드로와 그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유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모진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도 도망갈 것입니다. 위험한 일이 생기면 포기할 것입니다. 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지 않고 폭압을 감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양을 사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아멘
셋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째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이렇게 물으시니 베드로도 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심히 고민되었지만 그래도 베드로의 대답은 역시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 질문 중에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는냐?’라고 묻지 않고 이번에는 ‘네가 나를 필레오 하느냐?’라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인정을 하며 ‘네가 그래도 나를 필레오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변함없이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필레오 하는지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을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이 왜 물으십니까? 그것은 고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말하기를 원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사랑의 고백을 받으시기를 원하며 우리의 입술의 찬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됐지, 왜 매주 나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매 기도시간에 왜 사랑의 찬양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입술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필요한 것을 부모가 알죠. 그렇지만 요구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또 기쁘게 줍니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역시 그렇습니다. 끊임없는 고백과 찬양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 때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양을 먹이라!”
분부하셨습니다. 양을 먹인다는 것은 양의 꼴을 먹이는 것입니다. 양은 풀을 먹습니다. 양이 먹는 풀이 있습니다. 양이나 소나 염소가 먹는 풀은 들판에 따로 있습니다. 아무 풀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풀이 있고 또 영양가 있는 풀이 있습니다. 그런 풀을 먹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여야 합니다. 영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양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매일 양식을 먹고 자라고 또 살아갑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듯이 영으로도 매일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나 듣고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먹는다는 것은 섭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 말씀을 읽거나 들음으로 내가 이해를 하고 내 마음에 감동이 되고 내 영에 유익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입으로 성경책을 찢어서 먹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주어 먹으라고 하니 그 말씀을 먹으니 입에서 꿀송이 보다 달고 배에서 쓰다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달콤하고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약이 되기 때문에 때론 쓴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성경예화) 창고에서 옛 것과 새 것으로 먹이는 종
주님이 비유로 마태복음에 말씀하시기를 주님이 타국에 갔다고 돌아올 때 종들이 창고에서 양식을 내어서 옛 것 양식과 새 양식으로 먹이는 것을 보면 칭찬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의 종이 깨어서 늘 성도들에게 구약과 신약으로 영의 양식을 먹이는 것을 주님이 보신다면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생각하기를 주님이 더디 올 것이라 여기고 게을러 양식을 먹이지 않으면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평신도 사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로 교회에 봉사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봉사를 다 해야 합니다. 자기의 은사대로 다양하게 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특히 말씀으로 섬기는 일을 한다면 아주 귀합니다. 구역과 기관과 또 어떤 분야에서든지 말씀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에 헌신을 한다면 이 일은 사실 목양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 목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의 양식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아멘
결론) 너는 나를 따르라!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렇게 당부를 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이어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시면서 ‘너는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띠띠고 다녔지만 늙어서는 두 팔을 벌리리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남이 너를 데리고 가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젊어서는 마음껏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겠지만 나이가 많아서는 어떠한 순교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 옆에 다른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궁금해서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베드로게 하신 말씀이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습니다. 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대개 많은 경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전도하고 어떻게 헌금을 하는지 나도 그런 기준을 따라서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주님이 우리를 각자 부르셨으니 다른 사람 비교하지 말고 나를 부르신 주님을 따르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