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安東 處士의 삶
-現場을 찾아가는 학술발표회-
惟一齋 金彦璣 先生와 生涯와 學問
2015년 11월 1일(일요일) 장소: 惟一齋宗宅(안동시 외룡면 가구리) 발표자: 李性源 博士(강호문학연구소)
주관 : 사단법인 유교문화보존회 후원 : 안동시, 유교문화선양회, 안동청년유도회
인사말
節氣가 서리가 내린다는 霜降이 지나 立冬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오늘 날씨 조금 쌀쌀하고 다소 협소하지만 이곳 유서 깊은 惟一齋先生宗宅에서 관내 貴賓들과 鄕中 여러 어르신들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인사 올립니다.
저는 社團法人 儒敎文化保存會 理事長의 직책을 맡고 있는 李在業입니다. 평소에 자주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만 誠意 부족하고 不肖하여 여의치 못했습니다. 지금은 家庭마다 문중마다 가을걷이와 時祭로 寧日이 없을 줄로 압니다. 항상 건강하시어 우리 後輩들을 격려해주시고 가르쳐주시고 꾸중해주시기를 바람니다.
유교문화보존회는 두 가지 정도의 사업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國寶70號 <訓民正音解例本> 板刻事業’이고, 또 하나는 ‘安東 處士의 生涯와 學問’에 대한 학술대회입니다. <훈민정음해례본>에 대해서는 요즈음 이른바 ‘尙州本’의 등장으로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그러나 이 상주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국내 유일본이 ‘安東本’이었습니다. 지금 간송미술관에 보존된 <해례본>은 아시다시피 바로 오늘 학술대회를 하는 광산김씨 유일재선생 둘째 아들의 집인 ‘肯構堂古宅’에서 유출된 것입니다. 아마 최초에 보관된 집은 유일재종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유일재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어찌 그 책이 보관되었겠습니까? 이를 그대로 다시 板刻하여 本家나 市廳廳舍나 아니면 신축된 道廳廳舍 등 적의한 장소에 비치하여 ‘안동본’의 존재를 알리고자 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우리가 보존하고 선양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어느 자치단체에서는 <三國遺事> 刊行 기록을 가지고 자치단체 전체의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선양하는 곳도 있습니다.
또 하나 사업은 ‘安東 處士의 삶과 學問’에 대한 학술대회입니다. 安東靑年儒道會에서 진행해온 ‘樓亭巡禮學術大會’와 궤적을 같이하는 성격의 학술대회입니다. 올곧고 참다운 자세로 在野에서 생애를 마친 處士들의 삶을 照明하여 안동선비의 기상과 정신의 뿌리가 어디에 근원하는가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동안 안동에서 개최된 많은 학술대회는 大學校나 國家機關의 일정한 공간에서 大賢 중심의 대회였습니다. 유교문화보존회의 행사는 樓亭巡禮처럼 現場을 찾아가는 대회에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여, 오늘 여기 500여년의 전통과 역사가 응축되어 있는 이곳 惟一齋宗宅에서 그 첫 번째 행사를 가지고자 합니다.
木手는 사방 100리 이내에서 材木을 구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고 성장한 이곳 안동에서 우리 삶의 근원과 정신을 찾지 않고 어디에서 그 삶의 진리를 찾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 處士들의 자취와 숨결이 서려있는 유적 현장을 찾아가는 행사는 더욱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동안 우리 安東人들은 우리가 간직해온 文化遺品들의 가치를 몰랐습니다. 안동은 도시 전채가 박물관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이의 중요한 가치를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微力하나마 이런 사업을 계기로 우리 고장의 文化遺産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끝으로 오늘 이 모임이 있도록 物心兩面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金丙文 유일재종택의 어르신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아울러 발표를 해 주신 농암종손 李性源 博士께도 보존회를 대표하여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참석하신 모든 귀빈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축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5年 11月 1日 社團法人 儒敎文化保存會 理事長 李在業 拜上
안동문학의 번성함은 실로 선생으로부터 창도되었다 -惟一齋 金彦璣 先生에 대하여-
1. 宗宅의 成立과 處士
이른바 ‘종택’이란 어떻게 탄생했나. 왜, 무엇이 그토록 전통을 지키도록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지켜 온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한마디로 종택 문화는 훌륭한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훌륭한 인물은 누구인가?’라고. 우리 역사에서 인물은 ‘시호諡號’와 맞물려있다. 시호 이외에 다른 인물 평가는 없다. 인물에겐 시호가 내려진다. 훌륭한 사람이 죽으면 시호 논의가 일어나고, 시호가 내려지면 국가적 인물로 공식 인정된 다. 주무 부처는 ‘봉상시’라는 기관이다. 우선 인물이 죽으면 일대기를 짓는다. 집안 차원에서 짓는 글이 ‘가장家狀’(혹은 ‘유사遺事’)이다. 가장은 ‘행장行狀’의 기초가 된다. 가장은 초고이고 행장은 완성된 글이다. 가장은 집안사람이 쓰지만 행장은 그렇지 않다. 당대의 문장가에게 부탁한다. 왜냐하면 행장은 ‘공식 일대기’이며, 시호를 받기 위한 글―시장諡狀―의 기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시호를 받기 위한 공적 조서가 시장인데, 시장은 행장을 기초로 한다. 행장도 그렇지만 시장의 글은 절대 허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시호는 압축되고 정밀한 의미가 부여된 문文, 무武, 정貞, 공恭, 양襄, 효孝, 장莊, 경敬, 익翼, 안安 등 120여 가지의 글자를 상호 조합해서 짓는다. 가령 ‘익翼’자는 ‘사려심원思慮深遠(사려가 심원하다)’, ‘정貞’자는 ‘청백수절淸白守節(청백하며 절개를 지켰다)’, ‘문文’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인격과 학문이 높다), ‘양襄’은 ‘인사유공因事有功(특정한 국사에 공이 있다)’, ‘충忠’은 ‘위신봉상危身奉上(위기에 몸을 바쳐 충성했다), ‘효孝’자는 ‘자혜애친慈惠愛親(너그럽고 효성이 있다)’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어떤 분의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라면, 글자 뜻으로 보아 “인격과 학문이 높으며 청백하고 절개를 지킨 분”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글자 의미를 알게 되면 시호만 보고도 그 분 생애의 특징적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의미도 내재되어 있다. 가령 ‘문文’이라는 글자는 ‘도덕박문’ 이외에도 ‘민이호학敏而好學’, ‘충신애인忠信愛人’ 등 10여 가지의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이순신은 이름보다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시호가 이렇게 일반화된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충무忠武는 ‘군인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함’이니 아주 적절하다. 이렇듯 시호 내림은 생전의 이력으로 이미 그 가부가 어느 정도 공론화되며, 심사의 제도적 객관성과 투명성으로 인해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다. 사대부 최고 영예는, 생전에는 ‘대제학大提學’ 벼슬이고 사후에는 시호 내림이었다. ‘문文’으로 발신한 선비들에게 국가적 글[文]을 총괄하는 문형文衡-대제학-이야말로 진정 영예로운 관직이 아닐 수 없었다. 정승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그래서 대제학만은 그 임명권이 최고통치자의 권한 밖에 있었고, 임기도 정해져 있지 않다. 국왕의 결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관직이었다. 양촌 권근의 외손자로 권남, 한명회 등과 공부한 적인 있는 사가 서거정이 점필재 김종직에게 문형이 넘어갈 것을 염려하여 무려 23년을 지킨 뒤 어세겸魚世謙에게 넘긴 것과, 사암 박순이 ‘퇴계에게 양보했다’는 일화 등은 대제학이 갖는 무게의 한 단면이다. 대제학은 당대 최고 문인이다. 적어도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시호 또한 이에 못지않다. 사후 업적평가를 통해 국가적 공로자로 인정한 총체적 보상이기에 더욱 큰 영예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 시호라는 것은 ‘영예로움의 표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확한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하면 30여 가지의 신분 변화가 있다고 한다. 시호의 내림은 이런 경우와 비교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시호가 내려진 사람은 국가적 원로나 공훈자로 공식 추대된 자이기에, 존경과 더불어 영원히 추모 받을 권리가 합법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봐야 한다. 불천위 자격이 갖추어진 셈이다.
사진: 시호 교지
시호가 내려지면 묘비의 글을 다시 쓰고 고유告由한다. ‘황색교지’를 태워 그 연유를 고하기 때문에 ‘분황고유焚黃告由’라 한다. 이때 자손들은 간혹 ‘이 할아버지에 대해서만은’이라고 전제하면서 은연중 추모논의를 한다. 훌륭한 조상을 추모하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불천위 옹립 여론이 일어난다. 여론이 향촌의 동의와 유림들의 공론을 얻게 되면 추모전용 집을 짓고 고유를 한다. 그 집을 ‘사당祀堂’(혹은 ‘가묘家廟’)이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실龕室’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위패位牌’(‘신주神主’라고도 함)를 모시게 된다. 이렇게 모셔진 위패는 살아 계신 듯 경건하고 신성하게 보호된다. 이른바 ‘신주 모시듯’ 해야 한다. 이런 절차를 밟아 모신 위패는 이제 개인이 멋대로 옮기거나 훼손하거나 소멸해서는 안 되는 불천의 위패, 이른바 백세불천百世不遷의 불천위가 된다. 물론 시호가 내려졌다고 모두가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며, 조선 후기 매관매직 시대에 내려진 시호와 인물들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당이 지어지고 위패가 모셔지면 자손들은 정해진 날 추모의식을 가지며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게 된다. 이를 수행하려면 자연 사당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추모 예는 제사고, 손님 접대는 접빈이다. 이를 ‘봉제사’와 ‘접빈객’이라 한다. 이를 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종손宗孫’이라 하고 그 아내를 ‘종부宗婦’라 한다. 나머지 자손들은 ‘지손支孫’이라 한다. 적손으로 내려오는 손자가 종손이고, 종손을 지원해주는 자손이 지손이다. 이를 조직화 한 단체가 ‘문중門中’이다. 이로써 하나의 ‘가문家門’이 탄생한다. 그 집은 다른 집과 다르게 ‘솟을대문’의 집을 짓는다. 집성부락에 솟을대문이 있는 집이 대개 그런 집이다. 그런 집을 우리는 ‘종택宗宅’ 혹은 ‘종가宗家’라 한다. 종택은 가문 탄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자손 모두의 의지와 문화의 중심체이기도 하다.
종택宗宅의 성립 요건을 다시 정리해보면, 누구나 알만한 훌륭한 인물-조상祖上-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이 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사당祠堂-이 있어야 하며, 그 다음은 사당을 지키는 수호 주체의 공간-종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은 사당 수호를 전담한, 맏아들로 이어온 직계후손-종손宗孫과 종부宗婦-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이 종손, 종부를 외곽에서 보호하는 후손들-지손支孫-이 있어야 하며, 이 지손들로 구성된 단체-문중門中-가 있어야 한다. 즉 불천위 종택이 되기 위해서는 조상, 사당, 종택, 종손종부, 지손, 문중으로 구성된 유기체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나의 요소만 없어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상, 사당, 종택은 하드웨어고, 종손종부, 지손, 문중은 소프트웨어다. 이런 구성 요건이 충족되고 작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천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중심에 종손, 종부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묘소墓所, 족보族譜, 서원書院, 재사齋舍, 문적文籍 등은 이를 보다 완벽하게 수호하는 외곽의 장치가 된다. 무엇보다도 기일忌日마다 철마다 행해지는 각종 추모 제사祭祀는 그 종택이 종택으로서 온전한 임무와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증명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와 다른 각도에서 불천위로 모셔지는 인물도 있다. 바로 재야학자다. 당시 명칭은 ‘처사處士’다. 처사는 ‘선생’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만 부여된 극존칭이다. 16세기 붕당정치朋黨政治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와 출사를 단념하고 산림에 은둔하게 된 고매한 선비들에게 부여된 최고의 존칭이었다. 은사隱士, 유일遺逸, 은일隱逸, 일사逸士, 일민逸民 등으로도 불렸으며, 남명 조식(南冥 曺植),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을 당대의 처사라고 호칭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 이 용어가 남발되어 격이 떨어지는 처사가 양산되지만, 학자에 대한 존경심은 조선 500년 내내 변하지 않았다. 문文을 숭상한 조선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대구 최고의 명문, 옷골 ‘백불암 종택’은 당대의 처사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더불어 ‘영남 3로嶺南三老’로 추앙받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을 불천위로 모시면서 존경받는 종택이 되었고, 흔히 대산 이상정의 제자로 ‘호문 3로湖門三老’ 혹은 ‘호문 3종湖門三宗’의 1인으로 일컬어지는 후산後山 이종수李宗洙의 불천위 위패에는 ‘처사處士’라는 단 하나의 약력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후산 위패에 쓰인 글자는 이러하다.
‘현선조고후산처사부군신주顯先祖考後山處士府君神主’
이런 측면에서 불천위 인물들의 면모를 보면 관료官僚 이전에 학자라는 전제가 우선되었다. 그래서 그가 공부한 정자, 그가 남긴 문집文集, 혹 그의 학문을 잇고자 지은 서원이 있으면 더욱 완벽하다. 이 가운데서도 문집의 유무가 가장 중요하다. 이런 연유로 고관의 벼슬을 지냈음에도 학자로서의 명성이 없어 불천위가 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능문能文’은 필수조건이지만 ‘능리能吏’는 충분조건에 불과하다. 요컨대 명실상부한 불천위 인물이란 문집, 종택, 서원, 정자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으면 거의 불천위로 보면 틀림없다. ‘계문고제溪門高弟’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은 문집(《간재집》), 서원(오계서원), 정자(군자정)가 있고, 안동의 처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도 문집(《경당집》), 서원(경광서원), 정자(광풍정) 등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종택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처사는 곧 ‘학자’다. 그렇다면 학자가 왜 이렇게 존경받게 되었을까? 다른 지역은 잘 모르나 안동에서 인물 평가는 ‘조행操行과 글’로 압축된다. 조행은 행行이고 글은 지知의 범주에 든다. 생각해보니 이중에서도 글을 단연 소중하게 여겼다. 글이 곧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글과 더불어 인격의 향상이 수반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문文=인人’의 인식은 ‘인사人事’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인사는 곧 ‘타인에 대한 배려’인데 글로 인한 타인의 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조상들은 글을 소중하게 여겼고, 글을 잘하고 못하고를 매우 따졌다. 이중환의 목격담에 “그때 안동 사람들은 외딴 마을,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글을 읽었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글은 인간을 정밀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게 하고 언행을 세련되게 하여 기품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이런 관점의 정점에 있는 분이 퇴계였다. 안동에 유달리 ‘문집文集’과 ‘유고遺稿’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프로와 아마추어 할 것 없이 ‘글을 짓고 발표하고’의 풍토가 만연한 곳이 지난날의 안동이었다. 안동 지역에 무수히 남아 있는 만사, 제문, 내간, 편지 등의 고문서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연유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동에서는 “그 집도 글이 끊어졌다’ 혹은 “글이 끊어지면 그 집은 끝난 집이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정치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은 이유, 즉 부지불식간에 발산되는 그 자아도취의 허세와 위세를 적어도 문인들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불암, 후산, 간재, 경당 같은 재야학자들, 다시 말하면 처사處士들이 역시 당당한 불천위로 추앙받는 사실에서 조선시대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여실하게 보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처사 가운데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빼어난 인품과 학식이 있는 경우 ‘사시私諡’를 받는 일도 있었다. 벼슬이 없어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받지 못한 경우 향촌 사회에서 공론으로 시호를 증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시다. 지난날 향촌 사회에서 사시를 받은 학자는 분명 있었다. 이를 받은 당사자는 물론이며 후손들의 영예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효당실기世孝堂實記》라는 책을 보면, 18세기 대구의 효자이며 학자인 요산樂山 이익룡李翼龍(1732~1784)이 죽으니, 그 제자들이 상중喪中에 ‘사시’를 올릴 것을 거론하여 논의 끝에 결국 백불암 최흥원의 의견을 따라 ‘술효述孝’라고 지었다는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사시는 정말 영예 중의 영예였고 ‘조선시대다움’의 한 단면이었다. 처사는 관료를 넘어섰다. 따라서 처사가 죽으면 불천위로 모셔지기도 했다. 모셔질 뿐만 아니라 당당하고 매우 영광스럽게 모셔졌다. 이런 연유로 불천위도 시호諡號가 내려 뚜렸이 국가적 추모자격을 부여받은 불천위를 ‘국불천위國不遷位’라 하고, 향중에서 추모하여 모셔진 처사處士의 불천위를 ‘향불천위鄕不遷位’라 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어디까지나 편의적 구분이지 개념 설정이 분명한 제도적 구분은 아니다. 국불천위가 있으니 그 대칭으로 향불천위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불천위와 관련된 유사한 명칭들, 즉 ‘유림불천’, ‘문중불천’ ‘도천道遷’, ‘향천鄕遷’ 등의 명칭들도 마찬가지다. 불천위면 그냥 불천위다. 물론 국가적 공신이나 문묘에 배향된, 그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불천위가 있고, 나라에서 부조위 문서가 내려와 불천위로 인정된 특이한 경우도 있다. 가령 순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의 경우가 그렇다. 멸문한 집안에 후일 그 후손의 존재가 확인되어 향불을 피위 영원히 추모하도록 부조위의 교지가 내려와서 그야말로 국불천위가 되었다. 그런 저런 연유로 부조위 교지를 받은 분이 몇 분 있다. 그렇지만 국가적 차원의 불천위란 인증문서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굳이 구분한다면 ‘시호를 받은 2품 이상의 관리’ 가운데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쉽게 말해 국가적 인물이면 국불천위이고, 지역적 인물이면 향불천위이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구분이다. ‘인물의 판단’이 전적으로 개인 저마다의 기준과 취향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위의 두 경우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불천위로 모셔지는 분들도 있다. 시호는 물론 학자로도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문중 차원에서 자기 조상 가운데 한 분을 ‘불천위’로 옹립하기도 한다. 정통성과 정체성의 확립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옹립된 분을 우리는 ‘사불천위私不遷位’라 한다.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불천위 옹립의 본질은 훌륭한 인물 모시기, 훌륭한 인물 되기, 훌륭한 인물 따라가기의 염원이 있다. 이는 안동 사람의 소중한 자산이며 문화의 내면적 양상이다. 안동의 수많은 종택과 불천위 사당, 세덕사 등의 추모 공간과 이를 수호하는 문중의 존재는 그 엄연한 외연적 현상이다.
사진: 문집
사진: 후산 이종수 사당 불천위위패
2. 惟一齋 宗宅
안동 시내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35번 국도는 도산길(옛 예안길)이다. 국도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와룡이라는 지역이 나오고, 국도변에 ‘유일재 종택惟一齋宗宅’이라고 쓴 표지석을 보게 된다. 표지석을 따라 500미터 정도 들어가면 문화재 표지판이 나타나고 바로 종택이 보인다. 이곳은 ‘유일재惟一齋’라는 호를 가진 분이 살던 집으로, 그 직계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종택’이라 한 것으로 보아 유일재는 ‘불천위不遷位’, 즉 사당에 영원히 위패가 모셔진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일재는 누구인가? 광산김씨 김언기金彦璣(1520~1588)라는 분으로, 빼어난 학식과 인품을 지닌 당대의 처사處士였다. 도산길에서 이 분은 별로 떠올려지지 않은 분이다. 와룡은 아직 안동 땅이고 도산은 광산김씨의 세거지인 군자리君子里에서부터 시작했으니 말이다. 과거 행정구역으로 보면 도산(옛 예안)은 도산이었고 안동은 안동이었으니 유일재는 도산에서는 조금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도산9곡陶山九曲은 옛 오천烏川(외내) 운암곡雲巖曲을 그 일곡一曲으로 본격적인 도산이었다. 그렇지만 도산길에서 이 어른을 모른척하고 지나칠 수는 없다. 카프카는 생전에 고독했고 사후에 빛이 났다. 하지만 이 분은 생전에는 빛이 났지만 사후에는 고독했다. 빛이 난 이력은 이러하다.
“1561년 ‘유일재’라는 현판을 걸고 학생을 가르치니 날마다 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다 수용할 수 없었고...돌아가시던 해에도 경서를 들고 찾아오는 자들이 날마다 문에 이르렀다. 이를 즐거워하며 생애를 마쳤다.”
눌은 이광정李光庭(1552~1627)이 쓴 행장行狀 기록이다. 퇴계 선생이 도산서당을 지은 해가 1560년이니 거의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강학의 문을 연 셈이다. 퇴계는 생애 309명의 제자를 두었고 유일재는 189명을 두었다. 명문 대학 옆에 조그만 학원이 문을 연 형국이었고, 원장 경력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도무지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상황은 전연 그렇지 않았다. 학원은 “날마다 구름처럼 찾아오는 학생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고, 그런 상황은 선생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행장行狀에는 또 이렇게 쓰여 있다.
“선생께서 남치리와 정사성을 도산서당으로 보내 학업을 마치게 하니, 학문으로 이들의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권위, 박의장, 신지제, 권태일은 과거에 합격하여 명관이 되었다. 김기, 금발은 조행으로 명성이 드러났고, 권홍은 후진 양성을 하여 많은 훌륭한 제자들을 배출했다. 안동문학의 번성함은 실로 선생으로부터 창도되었다.”
정승 반열에 오른 퇴계가 전국의 인물들을 제자로 둔 것에 비할 수는 없지만 유일재의 제자 역시 경북 북부 일대를 망라했다. 무과에 급제한 박의장은 영덕 출신이고, 신지제는 의성 출신이다. 장원 급제했지만 답안지를 절취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요절한 조수도趙守道(1565-1593)는 청송靑松에서 찾아온 제자였다. 짧은 생애, 조수도는 일기 형식의 기행문 한 편을 남기고 갔다. 《신당일록新堂日錄》이라 했다. 세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첫째 단락은 서울로 과거 보러 가는 기록이고, 둘째 단락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의 사회상과 자신의 대응 모습이며, 마지막 단락이 도산 기행이다. 죽기 1년 전 1592년, 도산 길을 걸어갔던 불우한 천재 조수도는 스승의 묘소를 찾았고 짤막한 소회의 글을 남겼다.
“내 어린 시절 선생님에게 글을 배웠는데 그때 가야촌에 있었다. 큰 재주와 경륜을 온축蘊蓄했으나 뜻을 펴지 못하시고 후진 양성을 임무로 하며 일생을 마쳤다. 잠시 상념에 잠겨 주위를 배회하니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유일재의 수업 방법 가운데 주목되는 부분은 “학생들과 산천의 수석 사이로 산보하면서 북을 쳐서 학생들의 뜻을 분발하게 하여 자득自得하게 했다”는 점이다. ‘자득’이란 ‘문리를 스스로 터득한다’는 뜻의 매우 격조 높은 말이다. 그 자득을 북을 쳐서 이르게 한 것이었다. 좌선하는 듯한 경敬의 자세가 일반화되어 가던 시대에 이런 지도방법은 매우 독특하다. 혹시 오늘의 교육에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사진: 유일재종택 해설: 최근 유일재종택에서 국학진흥원에 고서 829책, 고문서 769점, 총 1688점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기탁한 바 있다.
3. 惟一齋의 孤獨
퇴계 사후 도산 사림과 안동 사림은 경쟁적으로 추모 사업을 벌였다. 그래서 도산 사림은 1574년 도산서원을, 안동 사림은 1575년 여강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1576년 같은 날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다. 여강서원 건립은 퇴계학파의 분화를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안동 사림의 힘을 상징했다. 그런데 이 서원의 초대 원장이 유일재였다. 안동권의 수많은 쟁쟁한 제자를 넘어서서 지명된 것이었다. 여강서원 초대 원장 추대는 안동 사림의 최고 학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이 54세 때였다. 그렇지만 유일재의 영광과 학통은 사후 명성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것이 유일재의 고독이다. 고독의 이력은 이러하다. 학자는 학문으로 말한다. 학문적 업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일재는 학문적 업적이 없다. 없지 않았지만 없어져 버렸다. 임진왜란에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학자에게 제대로 된 학문적 업적이 남아 있지 않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유일재의 글은 지금 <유일재선생일고>에 수록된 9편에 불과하다. 시6수, 부1수, 서1편, 잡저1편이 전부다. 분명 많은 시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없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소중한 한 편의 글인 <상부백권초간서上府伯權草澗書>는 유일재의 글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엄청난 문중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것은 유일재가 여강서원 초대 원장으로서 안동부사 초간 권문해에게 여강서원의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해 사액서원이 되도록 요청한 글이었다. 여강서원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유일재는 원장으로서 원규院規를 마련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아울러 이 글을 썼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 글은 저자 시비是非가 크게 일어난 바 있다. 그런데 안동의 이런 ‘시비是非’들은 그 특징이 어디까지나 ‘글의 의한 시비’로 특징지어져서 하나의 ‘시비문화是非文化’를 이룩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잘 나타나지 않은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산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의 안동문화를 이끌어 온 중요한 콘텐츠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치열성'이 항일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하나의 예로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의 여강서원 배향 공방과 관련된 백졸암 류직柳稷의 글을 보면, “어제 (저편에) 모임이 끝나면 오늘 (이편에서) 모임을 갖고, 어제 (저편에서) 글을 보내면 오늘 바로 (이편에서) 반박문을 지으니 그 형상이 마치 적국과 대치한 것 같다”했다. 원문이 “昨日罷會 今又作會 昨日飛一通文 今日又製一通文 有如敵國相持”인데, ‘飛一通文, 又製一通文’의 방식은 ‘시비 문화’의 핵심적 요소였다. 한편 ‘상부백서’에 대해서는 눌은 이광정이 행장行狀에 그 원문 대부분을 소개하며 이렇게 평가했다.
“이 편지를 자세히 음미해보면 서술한 차례가 조리가 있어 수 백 마디의 말 안에 퇴계선생의 일생을 포괄하여 거의 빠뜨린 것이 없다. 지혜가 성인을 알아보기에 충분하고 오래도록 따라 배우며 마음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순종하여 자세히 살피고 묵묵히 안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쓸 수 없다. 이렇다면 선생의 학문에 대한 조예를 알 수 있다.”
‘유사후서遺事後序’를 쓴 삼여당 배행검裵行儉의 글은 이렇다.
“선생은 일찍이 여강서원 원장이 되었는데 부백 초간 권문해에게 편지를 올려 퇴계 선생의 성대한 덕을 차례로 서술하였다. 이는 월천 조목의 언행록, 학봉 김성일과 문봉 정유일의 서술과 서로 부합하며 서로 드러내었다. 만약 선생의 친절한 훈도를 받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이 형용할 수 있었겠는가. 옛날 단목씨端木氏가 溫.良.恭.儉.讓 다섯 글자로 공자孔子를 찬양했는데 송유宋儒들이 모두 잘 살펴보고 잘 말했다(善觀而善言)라고 했다...이른바 고기 한 점만 맛을 보아도 온 손안의 국물 맛을 알 수 있다(嘗一臠而知九鼎之味)”
최근 국학진흥원에 이 글이 ‘惟一齋草本’이라고 쓰인 중요한 고문서가 기탁되었다. 거기에는 한말의 학자 자산 금우열(紫山 琴佑烈, 1824-1904)의 서문과 시 한편이 있어 소개한다.
“만력 원년(1573년) 여강서원을 창건하여 선사 퇴도 이황 선생을 배향하고 유일재 김선생을 추대하여 원장으로 삼았다. 선사께서 백운동서원을 세울 때 경상도관찰사(沈通源)편지를 올렸던 고사에 의거하여 안동부사 초간 권문해 공에게 편지를 올렸다. 이 편지는 직접 쓴 원고의 초고본이다. 금우열은 우연히 먼지 쌓이고 좀먹은 고적古籍 속에서 이 편지를 얻었다. 장차 헤지고 문드러져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아 그 선현의 손수 쓴 필적이 끝내 인멸되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마침내 종이로 배접하고 메우고 보수하여 책상 위의 진귀한 보물로 삼으니 어찌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원문: 萬曆元年 創建廬江書院 享先師退陶先生 推惟一齋金先生爲洞主 依先師白雲洞上書方伯故事 呈書于府伯草澗權公 此其手稿草本也 佑烈 偶得此本於古籍塵蠹中 將至敗爛無餘 惜其先賢手迹之終歸泯沒 遂褙紙(土+眞)補 爲案上之珍玩 何其幸也
天道託人終不滅 천도는 사람에 의탁하여 끝내 사라지지 않으며 吾心非有古今殊 우리들 마음 역시 고금에 다를 수 없네 堂堂廟宇排平地 당당한 묘우를 넓은 대지에 세웠으니 鬱鬱雲煙滿勝區 울울한 기상이 서원 주변에 가득하네
芬苾萬年修敬享 향기로운 제수로 만년토록 향사를 행하여 光名百代建宏模 광명백대의 이를 우뚝한 모범을 세우셨네 吾儕勉力相興起 우리 후학들은 서로 권면하여 일어나서 坦坦前頭共進趨 탄탄한 선현이 나아간 길 함께 따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진위는 한 때 오랜 세월 회자되었다. 아마 영원히 결론이 날 수 없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유일재의 글 가운데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시 한편을 감상하기로 하자.
題茅齋(모재에서 쓰다) 謀拙難成屋數間 모생 졸렬하여 집 한 칸 짓기 어려워 開基春日涉冬寒 봄 날 터 닦고 추운 겨울 지났네 重茅風散椽全露 겹 이엉 바람에 날려 서까래 드러나고 塼土氷凝壁未乾 흙벽 얼어 벽은 마르지 않네
月入虛簷明照榻 달빛은 빈 처마로 들어와 마루를 비추고 烟生疎戶翠連山 성긴 문에서 나는 연기 푸른 산을 두르네 蕭條雖甚吾猶樂 비록 쓸쓸하지만 오히려 즐거운 것은 爲是身心兩得閑 심신이 모두 한가롭기 때문이라네
이 시는 유일재의 유유자적한 처사적處士的 인생관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으로, 당대 명현 20여명이 대거 차운次韻했다. 차운한 선현들은 백담 구봉령, 학봉 김성일, 송암 권호문, 회곡 권춘란, 지산 김팔원, 인재 권대기, 문봉 정유일, 일재 구찬록, 동고 안재, 설월당 김부륜, 취병 고응척, 약봉 김극일, 귀봉 김수일, 후조당 김부필, 일휴당 긍응협, 춘당 오수영, 계당 손명, 청암 이원승, 만취헌 이빙, 일죽재 신내옥 등이 있고, 고산 이유장, 눌은 이광정, 우계 김명석이 후대 차운했다. 유일재가 문인 학자로서 많은 당대의 동료, 문인들로부터 존경과 우정을 나누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시라 할 수 있다. 학봉鶴峯의 차운次韻은 그런 정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結契金蘭伯仲間 백중간에 금란계 맺어 雪溪乘興趁秋寒 눈 내린 개울 흥이 나면 겨울에도 찾아 갔었지 坐來螢榻人如玉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 옥과 같았고 講罷鱣堂舌欲乾 수업 끝난 강당에서 쉼 없이 책을 읽었네
塵世無論多白眼 속세에는 질시하는 사람 많았지만 樽前不負有靑山 술동이 앞에서는 청산을 저버리지 않았네 我生政被林泉癖 내 인생 산수를 사랑하는 벽이 있어 此日平分物外閑 오늘 함께 물외의 한가로움을 나누어보세
사진: 모재현판 해설: 와룡면 가야리에 있는 유일재의 서당 모재의 편액
사진: 모재수계첩
사진: 모재중건소완의 해설: 계해년 10월 3일 용계서원에서 모재를 중건할 것을 논의하여 완전한 결정을 했다는 완의 문서
‘글 모음’이 ‘문집文集’이다. 글을 모을 수 없기에 문집을 만들 수 없었고, 문집이 없음은 유일재를 망각하게 했다. 그런데 유일재의 고독은 좀 더 다른 곳에 있다. 유일재는 분명 당대의 학자였다. 서당을 정식으로 열고 30여 년 한 결 같이 학생들을 가르쳤고 많은 제자를 두었다. 16세기 유일재는 퇴계 이후 안동 최고의 학자였다. 그런데 왜, 안동 문학의 창도자인 유일재의 학맥은 이어지지 못했을까? 빛이 빛을 가렸다. 퇴계와의 관련 때문이었다. 유일재는 퇴계 제자명단에 올랐다. 올랐지만 곡절 끝에 올랐다. 유일재가 퇴계의 정식 제자 입문은 물론, 묻고 배우고 한 이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일재선생일고》는 말할 것도 없고, 《퇴계집退溪集》 어디에도 유일재를 제자라고 인정할 만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1차 제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범위를 넓힌 2차 명단에 들어갔다. 그런 연유로 유일재의 학문적 빛은 사후 퇴계의 광채에 바래져 갔다. 그것도 급속히 바래졌다. 퇴계 직계 제자들과 그 후예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유일재의 제자이자 한편으로는 퇴계의 제자인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1543-1580)를 여강서원에 배향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일도 유일재의 고독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퇴계가 몰했을 때 동문들은 남치리를 장례위원장격인 상례相禮에 추대했다. 그때 남치리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이 기록이 의심스러워 문헌을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나이 28세 제자를 상례로 추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치리는 여강서원 건립 시 편액을 쓴 구봉령과 상량문을 쓴 월천 조목, 그리고 봉안문을 쓴 서애 류성룡 등과 나란히 원규를 지어 그들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을 정도로 학행이 뛰어남을 증명했지만 37세에 요절했다. 그리하여 공자의 제자 안자와 비교하여 ‘계문안자溪門顔子’로 일컬어졌다. 이런 연유로 유일재 제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배향이 추진됐지만 퇴계의 주요 제자인 학봉, 서애의 후손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유일재 사후 아들 갈봉 김득연이 다시 한 번 남치리를 여강서원에 추향하려고 애썼지만 역시 이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로써 유일재의 학맥은 끊어졌다. 여담이지만 퇴계 제자는 1700년대 창설재 권두경이 처음 작성한 100명을 시작으로 이후 160명, 170명, 260명으로 계속 확대되어 드디어 1914년에는 309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적부 문제가 있었다. 가령 1914년에는 서애의 후손들이 그 내용적 오류를 지적하며 폐간까지 주장했고, 퇴계 후손들도 역시 격렬히 대응하여 《병산통문변록屛山通文辨錄》이라는 대응의 책을 발간하기까지 했다. 책 내용에는 율곡 이이가 퇴계의 제자로 등록된 것을 ‘지시식세知時識勢’, 즉 시류에 편승한 파렴치한 행위라는 칼날 같은 지적이 있어 무척 흥미를 끈다. 실상을 떠나 ‘율곡은 과연 퇴계 제자가 되는가’ 하는 의문이 당시에도 이미 존재한 것이었다. 퇴계 제자 309명은 그 실상보다는 퇴계의 생애에서 정식으로 배운 제자를 포함하여 그와 교유하거나 접촉한 인사 대부분을 망라한 숫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일재를 제자로 넣은 것 역시 그렇다. 실상보다는 정황에 의한 추입推入이기에 정통 제자들의 후예들과는 상이한 정서가 싹트고 있었다. 하늘에 별이 있다. 그것도 무수히 있다. 어느 것은 항성이고 어느 것은 위성이다. 항성은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며, 위성은 다른 별의 빛을 받아 반사의 빛을 내는 별이다. 고독이란 무엇인가? 외롭지 않아야 할 인물이 외롭게 됨을 나는 고독이라 한다. 유일재가 그런 인물이다. 조수도의 평가처럼 “큰 재주와 경륜을 온축한 학자”로, 안동 문학의 창도자라는 평가를 받은 분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일재는 항성이었다. 구봉령, 권춘란, 권호문, 김팔원 등의 쟁쟁한 친구들이 모두 퇴계 제자가 되었지만 유일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퇴계를 찾아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퇴계처럼 서당을 열고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자기 빛깔의 생애를 보냈다. 그리하여 권위, 박의장, 신지제, 권태일, 조수도 등을 과거에 합격시키기도 했다. 퇴계와 동시대에 도산서당을 가는 길목에 자리하여 당당하며 왕성하게 학생을 받고 가르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4. 惟一齋의 追慕와 顯彰
유일재는 1588년 69세의 나이로 몰하였다. 당대 동료, 문인들이 만사輓詞를 했다. 서애 류성룡, 면진재 금응훈, 일휴당 금응협, 금역당 배용길, 동리 김윤안, 매창 정사신 등이 만사를 했고, 문인으로는 옥봉 권위, 지암 안발, 송와 권희, 오봉 신지제, 김지 등이 있고 송소 권우의 제문이 있다. 아마 더 많은 글이 있었겠지만 지금 남아 있는 글은 이 정도이다. 그래서 배행검의 유사에도 “애석한 점은 옥산 권위, 오봉 신지제, 노천 권태일 같은 현인은 오랜 세월 모셨는데도 선생의 아름다운 덕을 찬술하여 전수한 자취를 드러낸 것이 없는 점이다”하였다. 그렇지만 모재茅齋 시에서 보았듯이 학봉鶴峯을 비롯한 당대 선현들이 모두 차운하였고, 서애西厓는 만사에서 “학문은 전문의 고루함을 비웃었고, 향내에서는 두 분을 달존達尊으로 추대했다”고 했다. 서애의 만사輓詞는 이러하다.
學笑專門陋 학문은 전문의 고루함을 비웃었고 鄕推二達尊 향내에서는 두 분을 달존으로 추대했네 名聲但司馬 명성은 생원에 그쳐 勳業阻靑雲 훈업은 청운에 막혔네
風樹餘欒棘 돌아가신 지극한 슬픔으로 堂封遽舊原 옛 선영에 모셨네 庭階富蘭玉 집안에 훌륭한 아들들 있으니 天報驗斯存 하늘의 보답이 여기에 있음이네
유일재가 몰한 이후 제자들은 해마다 모여 선생님의 추모를 결의했다. 노천蘆川 권태일權泰一(문과, 형조참판)은 묘소 아래 재사를 짓고, 통문을 짓고 제문을 짓고 축문을 썼다. 모든 글이 추모의 정이 절절하다. 그 가운데 ‘동문들에게 한 통문(同門通諭文)’의 한 구절은 이렇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그리워하여 잊지 못하는 마음은 한결같을 것입니다. 몇 해 이래로 모여서 전奠을 드리는 예를 비로소 행하여 부족하나마 못다 한 그리움을 의탁했습니다. 다만 생각하건데 사는 지역이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있어 각기 제수를 담아 가져오는 것은 아마도 영구히 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듯합니다. 이에 서너 명의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규정을 세우기로 의논을 정하고 돈과 곡식을 거두어 종자돈을 마련하고 이자를 늘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사가 제수를 마련하고 날짜를 정하여 통지문을 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동문들은 1년 마다 모여 전을 드리며 위안하는 정성을 펴서 변함없는 법도로 삼아 폐지하지 않고 영원히 이어가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눌은 이광정은 이런 평가를 했다. 행장의 한 구절이다.
“아 선생은 참으로 은자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문인들이 서로 이끌어 해마다 한 번씩 선생의 묘에 제사를 지냈고, 자손들도 해마다 이를 따라 법으로 삼아 백여 년이 되었으니 선생의 덕을 깊이 사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용계 보덕사 상향축문龍溪報德祠常享祝文’을 쓴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축문은 이러하다.
勵志劬學 뜻을 세위 학업에 힘쓰고 誠心樂育 성심으로 교육을 즐거워하였으며 餘敎未沫 남긴 가르침 사라지지 않으니 敢忘報德 감히 은덕 갚을 일을 잊으리이까
사진: 용산보덕단이설시일록 해설: 1943년 3월 유일재의 신주를 와룡산 보덕으로 이설하면서 기록한 일록이다.
사진: 용계서원 현판 해설: 안동시 와룡면 산야리에 유일재를 모신 서원의 편액이다.
5. 惟一齋 宗婦 金後雄
《신동아》 2004년 3월호에는 ‘안동-유일재 김언기 종부 김후웅의 생애’라는 글이 있다. 글을 쓴 저자 말이, “(대통령)탄핵관련 기사가 갑자기 튀어 들어와 상당부분 삭제되어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장문이고 그래도 감동적이다. 내용은 기막힌 생애를 산 한 여인의 인생 내력이다. 어처구니없다고 해야 할까. 젊은 여인들이 보면 ‘왠 조선시대의 여인의 환영인가’ 할 정도의 느낌을 갖게 할 그런 여인이고 사연이다. 글 일부는 이렇다.
“김후웅金後雄씨는 올해 여든 된 할머니다. 안동의 광산김씨 유일재종가의 종부다. 남편은 6.25때 월북했다. 슬하에 혈육 한 점 없다. 아니 없지는 않았는데 어려서 홍역에 잃었다. 평생 혼자 살아왔다. 그는 자신을 위해 새 옷 한 벌 스스로 산 적 없고 더운 음식 한 번 스스로 입에 넣어본 적이 없다. 서른이 좀 넘으면서부터 ‘죽으면 썩을 몸’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김후웅씨의 철학에 ‘죽으면 썩을 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반대되는 사상이 또 하나 있다(하긴 그는 사상이란 말이 딱 질색이다. 남편이 사상이란 괴물 때문에 북으로 넘어가버렸다고 여기니 그럴만하다). 그건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는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그 신외무물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원칙이다. 스스로의 몸은 ‘죽으면 썩을 몸’이고, 다른 사람의 몸만 ‘신외무물’이다. 김후웅씨는 일생 ‘죽으면 썩을’ 자신의 몸을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여서 ‘신외무물’인 다른 사람의 몸을 돌보며 살아왔다. 상반된 두 가치가 충돌을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다. 갈등 또한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경천동지할 변화가 생겼다……헤어진 남편이 평양에 살아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그래서 작년 2월 드디어 그 남편을 금강산에 가서 만나고 돌아왔다. 실로 54년 만의 만남이었다.……그 후 일본을 경유한 편지 한통이 그에게 배달되었다. 서두가 ‘사랑하는 안해 김후웅에게’라고 쓰인 편지였다. 소문을 듣고 그 편지 내용을 궁금해 하는 내게 김후웅씨는 간지럼 타는 소녀들이나 낼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전에 들어본 적 없던 웃음이었다. ‘세상에 남사시러워라.…이 영감, 하는 수작 좀 봐라, 남사시러워라..’ ‘한 구절만 읽어 주세요.’ ‘…보자…에 또…여보, 아이고 여보란다…여보는 무슨…’ ‘계속 읽어 보세요’ ‘꿈같이 헤어져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는지, 귀한 몸 건강히 지나는지……귀한 몸이란다. 세상에, 아이고, 날더러 귀한 몸이란다...귀한 몸은 내가 무슨…’ 김후웅씨는 55년 만에 받은 남편의 편지, 그 첫머리에 쓰인 ‘귀한 몸’이라는 말에 억누른 울음이 터졌다. 그러나 곧 그 울음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체통에 어긋나는 일로 여겼다……(그렇지만 아무튼 그 일 이 후) 김후웅씨는 점점 웃음이 많아졌다. 별일 아닌 일에도 전에 없이 까르륵 웃는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 ‘유일재’를 지키는 고독한 여인, ‘유일재 종부’로 호칭되는 김후웅 여사 역시 항성이다. 여인은 이 시대 누가 무슨 말은 하던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던 계산도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길의 인생을 갔다. 2001년 4월 7일, 평생을 받들고 모시던 시아버지(諱 金達洙, 1902-1999)가 98세 고령으로 돌아가시고 어느덧 3년이 지나 길제吉祭를 지냈다. 여인은 그때 정식 종부가 되었다. 친지, 일가들이 모여 인고의 세월을 보낸 이 여인의 종부취임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여인은 이날 원삼저고리에 족두리를 쓰고 나와 친지들의 갈채를 받았다. 여인은 그동안 입만 열면 “죽으면 썩어 없어질 몸”이라고 노래하고 다녔다. 그렇지만 이제는 죽어 없어져도 그 이름이 간단히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이름은 유일재 종택 사당에 “유인의성김씨신위孺人義城金氏神位”라고 오래도록 쓰여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15年 11月 1日 文學博士 永川 李性源 謹識
사진: 망기 1991년 3월 유학 김달수(유일재 12대 종손)를 병산서원 도유사로 천망하는 망기
사진 : 유일재 종택 길재吉祭 해설: 2003년 길재 당시 유일재 종부 김후웅 여사의 모습, 원삼에 족두리를 한 연인이 종부이다,
사진: 명문 해설: 유일재 14대 종손 김용진이 ‘出國遠地’하여 이미 50여년이 지났지만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김병문의 아들 김효기를 유일재 15대 봉사손(종손)으로 결의하고 남긴 문서. 말미에 결의에 참여한 다섯 분이 모두 서압이 있지만 14대 종손 김용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부록 1.
유일재惟一齋의 문인록門人錄
부록 2. 갈봉 김득년의 ‘청량산유록’
淸凉山遊錄
葛峯 金得年 1579년 8월 26일, 가야佳野(안동시 와룡면의 한 마을 이름)의 집에서 아버지를 위한 수연의 자리가 있었다. 술잔이 한 순배 돌고 난 후 내가 참석한 벗들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나에게 청량산산행을 허락하시니 여러 분과 함께 하기를 희망합니다” 하니 모두들 좋아하고 찬성했다. 그때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산행은 진실로 아름답다, 그러니 남악고사에 따라 백편의 시를 지어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셨다. 명령을 받고 드디어 희망자를 모으니 박익朴瀷, 권눌權訥 ,권산두權山斗, 금순선琴順先, 우계유禹季綏, 박백어朴伯魚, 박중윤朴仲胤 그리고 동생 득숙得숙(石 +肅)등이었고, 부포의 역동서원에서 만나려고 했다. 안발安潑과는 전에 한 약속이 있어 알아보니 지금은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함께하지 못한다고 한다. 여간 실망스럽지 않다. 5일 후(8월 30일), 권눌과 동생과 내가 시 백편의 명령을 받고 5일치의 양식과 한 항아리의 술과 심부름하는 아이를 데리고 추풍에 필마로 떠나니 그 상쾌하기가 기러기가 둥우리를 떠나 저 푸른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았다. 김기金圻 형제를 (와룡) 방잠의 집에서 보고 오천烏川으로 김해金垓 , 금응훈琴應壎 어른을 뵙고 ‘비암鼻巖’에 도착하니 바위모양이 크고 기이하다. 말에 내려 걸어서 올라가 멀리의 들을 보니 긴 강이 굽어 돌아 또한 볼만했다. ‘예안’ 강변을 따라 아낙네에게 길을 물어 ‘청현廳峴’을 넘어 낙동강에 이르니, 물의 깊이를 알 수 없어 한참을 있으니 이미 날이 저물었다. 곧 ‘다래(月川)’ 로 가서 ‘곽연정廓然亭’에 오르니 정자 위에 한 소년이 있는데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 절을 하는데 물어보니 권득설權得說의 처남으로 성명이 채연蔡衍이었다. 정자는 단애에 위치하여 넓은 호수를 감싸 안고 사방의 들을 바라보니 확 터져있었다. 채연의 할아버지인 진사어른께서 지으신 집이다. 정자 뒤 소나무가 삼사십리 빙 둘러있는데, 진사어른의 장인인 권첨지께서 심으셨다 한다. 내가 이미 권득설과 약속이 있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맞이하고 권득설 역시 곧 걸어서 왔다. 날이 어두워 한 나그네가 ‘부포浮浦’에서 왔는데 박중윤인가 했지만 멀어서 잘 알 수가 없었다. 권득설의 소개로 월천 조목(月川 趙穆)선생을 부용봉 아래의 ‘소명헌昭明軒’에서 뵙고 둘러앉아 청량산산행을 말씀드리니, 흔쾌히 말씀하시기를 “좋은 일이다. 내 마땅히 그대들과 함께하리라, 먼저 가서 기다리라” 하신다. 함께 하신다니 기쁘기 그지없고, 이런 명산의 여행에 어른을 모시고 가게 되니 진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날이 저물어 물러나와 권득설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어둑해져서 권득설과 함께 역동서원으로 향하니 푸른 밤 강 하늘 돌아가는 외로운 배의 아늑함이 마치 ‘유세독립遺世獨立의 정취’가 있었다. 물에 모래가 드러나서 배가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 벗들과 함께 언덕을 올라 말을 타고 숲을 뚫고 소나무 길로 들어가 서원에 도착하니 밤은 깊어 문이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려 원노院奴에게 열쇠를 열게 하고 ‘삼성재三省齋’에 들어가니, 김명보金明甫와 금업琴업, 금개琴愷 형제가 월천선생에게 날마다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비록 초면이었으나 구면처럼 여겨졌는데, 이는 대게 가까이 살고 있었던 까닭으로 이미 그 이름을 들은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등불을 마주하고 이야기하다가 베개를 나란히 하고 함께 잤다. 맑은 꿈에 ‘신선의 산 12봉(청량산)’이 감겨오고 있었다. 9월 1일 의관을 갖추고 새벽에 상현사에 알묘하고 물러나와 둘러보니, 마루는 ‘명교당’, 서원은 ‘역동서원’, 좌우 방들은 ‘정일재’, ‘직방재’라 했고, 동, 서재는 ‘사물재’, ‘삼성재’라 했다. 모든 편명과 벽 위 ‘학규’들은 모두 퇴계선생의 글씨였다. 선현의 유목을 눈앞에서 보게 되니 후생에게 경모심이 절로 일어났다. 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곧 박중윤을 보고 부포에 들어가 자려다가 다시 나와 곽연정에서 여러 벗들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박익, 우계유, 박어백 등이 언약을 저버렸다. 이에 곧 도산으로 향했다. 도중에 분천汾川’ 을 지나가는데 날아 갈 듯 산뜻한 정자가 강 그림자에 드리우는데, 그 쇄락함이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주인어른을 뵙기를 청하니 주인어른이 나와서 맞이하셨다. 그리하여 드디어 ‘애일당愛日堂’ 에 올라 그 현판기문을 보고 그 대臺를 밟아보니 당시의 농암상공聾巖相公의 풍류를 상상할 수 있었다. 탄상을 금할 수 없었다. 이윽고 하직하고 나오니 주인어른은 곧 상공의 아들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 이었다. 얼마간 걸어 도산서원 에 도착하여 사당에 참배하고 ‘완락재’, ‘암서헌’, ‘지숙료’, ‘관란헌’ 등을 보니 완연히 뵙는 듯 흠앙의 마음이 우러나고, 나아가서는 옆에서 부축하여 모시고 있어 직접 말씀을 듣는 듯 했다. 가만히 도산서당 을 살펴보니 창문과 책상이 명랑하여 진실로 진유眞儒의 서식처가 아닐 수 없었다. 슬프다! 내가 태어남이 뒤여서 모시고 배울 수 없었으니 일생의 한스러움이 아닐 수 없다. ‘천광운영대’에 올라 ‘탁영담’을 굽어보고, 동편으로 ‘천연대’에 올라 ‘반타석’을 보니 강변모습을 글로 다 쓸 수가 없다. 그때 어부 한 사람이 그물을 올리는데 물으니, ‘의인의 주민’이라 한다. 버들가지에 꾀인 고기를 나누어 주어 나그네의 반찬으로 했다. 얼마 후 채낙蔡樂이 다래로부터 따라와서 밥을 먹고 함께 떠났다. 동쪽으로 5, 6리를 가니 선생의 묘소 가 보였다. 말에서 내려 멀리서 예를 올리니 더욱 더 산이 무너지는 슬픔을 이길 수 없었다. ‘천사川沙’를 건너 조그만 주점을 지나니 역정 수십 명이 돌을 모아 방죽을 쌓는데, 금참봉琴參奉과 오진사吳進士 두 어른이 도산서원의 학전學田 경영을 위함이었다. 인사를 하고 잠시 환담을 나누고 다시 ‘단사협丹砂峽’을 거처 ‘백운지白雲池’를 지나니, 붉고 푸른 협곡이 좌우로 도열해있는 산촌 마을이 있는데 흡사 도원경桃源境을 방불하게 했다. 내개 벗들에게 말하기를, “살아평생 태평성대를 보지 못하고 살아평생 학문성취를 이루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와 같은 한적한 산촌 강가에서 주경야독하고 나물먹고 물마시며 한 세월 살면 얼마나 좋을까”했다. 강의 꾸불꾸불한 돌길을 따라가니 말이 잘 걷지 못해 잠시 내려 물을 마시고 쉬는데, 물속에 많은 골뱅이들이 기어 다녀 이것 또한 볼거리가 되었다. 권득설이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말하기를 “저기 푸른 협곡 절개처가 ‘월명담月明潭’이라” 한다. 길이 험해 가서 볼 수는 없었고, 다시 길을 겨우 찾아 일동日洞 에 도착하여 ‘고산孤山’ 에 오르니 그 주변형상이 마치 강가에 자리한 푸른 골뱅이 한 마리의 모습이었다. 물은 그 아래를 빙 둘러 흘러가고 천길 못을 이루었다. ‘고산’ 위는 높고 모가 나며 바위 층이 평평하다. 축을 쌓아 작은 단을 만들었는데 10여명이 앉을 정도였다. 바위에 이름을 써놓았는데 ‘수운대水雲臺’라 했다. 반은 구름 속에 가려있고, 천길 절벽에 물빛과 산 그림자가 같은 색을 머금어 그런 이름을 얻었음이리라. 고산의 층 벽에는 ‘조대釣臺’가 있고, 바위 면에는 퇴계선생의 시가 있는데, “일동주인 금씨 를 지금 계시는가 불러보니, 농부는 손 흔들며 못들은 듯, 한참이나 구름 속에 홀로 앉아 있네”였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다. 강 위에 정자가 있고 정자 아래 배가 있어, 그 풍광이 저 중국 소동파의 ‘적벽의 풍류’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일동주인이 이때에 관직에 있었으므로 정자는 주인이 없고 배만 묶여있었다. 여러 벗들과 정자에 유숙하려고 배를 띠우려고 했는데, 마침 식량을 실은 나귀가 지나가니 말위에서 주저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고, 곧 날이 저물었다. 일행이 다시 1리쯤 걸었을까 하는데 어떤 중이 푸른 바위사이에서 손을 흔들며 나와 권산두가 고감으로부터 온다고 알려준다. 기쁜 나머지 나귀의 배를 채찍질하니 신선의 흥취가 일어나서 마치 원숭이와 학을 기다리며 다투어 맞이하는 것 같아 그 쾌적함을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조그만 주점에 도착하니 그 옛 이름이 ‘나화석천羅火石川’이라 하는데, 곧 지금의 ‘박석博石’ 이다. 잠시 말을 언덕에 묶어두고 술 한 잔씩 마시고 이윽고, 강돌이 있는 여울을 건너려고 하니 말이 겁을 먹고 가려고 하지 않았으며, 또 빠질 염려도 있었다. 그래서 옷을 벗고 목욕을 하면서 건너니 가슴속이 서늘하였다. 강을 건너 하얀 돌에 둘러앉아 술 한 잔씩하고 노래도 했다. 주점주인에게 소를 빌려 식량과 음식을 옮기고 골짜기로 들어서니 숲속에 옛 성城이 있는데, 여러 중들이 말하기를, “옛날 공민왕이 몽진한 장소”라 한다. 슬프다! 전설을 상고해보지 않아 모두 믿을 말은 못되지만 그 전쟁의 혼란한 시절을 상상해보면 적병의 추격을 받은 임금이 이런 외진 구석에서 조석을 구차하게 해결했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일대의 낙엽이 쌓인 곳에는 만고의 수심이 서렸건만 지난 일을 아무렇게나 논할 수도 없었다. 걸어서 ‘낙수대’를 지나니 층 벽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영롱하였다. 그윽한 골짜기를 지나니 숲이 우거진 곳에 문득 돌들이 쌓여 있는데, 중이 말하기를 “여기가 ‘삼각묘三角墓’입니다, 옛 날 어느 중이 ‘연대사蓮臺寺’를 세우려고 갖은 고생을 다하다가 죽어 ‘뿔 셋 달린 소’, 즉 ‘삼각우’가 되었습니다. (그 소가)재목을 실어 나르다가 어느 날 힘이 다해 죽어서 묻은 묘입니다”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영혼을 품부 받은 인간이 소로 변할 수는 없는 이치인데 너는 그 사실을 보았느냐”하니, 대답을 못했다. 골짜기와 층계를 돌아 계곡으로 들어가니 아찔한 돌길에 모골이 소연하였다. 고개를 들어 창공을 보니 기이한 바위가 솟아 있고, 천길 절벽에 안개가 끼어 마치 절의의 선비가 우뚝하게 서서 도끼로도 그 기상을 꺾을 수 없는 모습처럼 보였다. 층 벽은 구슬 같고, 작은 물줄기 소리 낭랑한데, 붉은 개수나무는 서리를 머금고, 푸른 잣나무는 바람을 머금어 우뚝한 12봉의 여러 신선들과 더불어 구름 비단의 병풍을 열고 구름 화음의 비파를 타고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사자목에 이르니 돌길이 좁아 드디어 여러 벗들이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산길을 뚫고 층층의 바위를 밟아 10걸음에 한 번씩 쉬고 시를 지으며 천천히 걸어가니 마침내는 마음이 상쾌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때 갑자기 피리소리가 있어 고요히 산간에 퍼지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금순선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피리 부는 동자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기뿐 마음에 칡넝쿨을 잡고 바로 올라가니 가파른 고개에 권산두가 요대에 홀로 서서 고성난무 하니 산 귀신들이 영합하고 석양에 햇살이 다투어 빛나 진실로 헌헌장부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금순선과 권산두가 서로 마주보고 소회를 펴고 편안히 웃고 다정하게 담소하기를 “10년 친구들이 한번 이렇게 신선이 되어 만났으나 그 사이 몇 번은 만날 수 있었지 않았던가!” 한다. 금산의 박경은 권산두의 매부인데, 들으니 권산두를 따라 왔다고 한다. 연대사의 바위 대에 벗들과 나란히 앉아 낙조가 지고 안개가 피어오르는 봉우리들을 보니 천변만화의 조화가 일어났고, 잠깐 사이에 구름이 몰려와 산의 형태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한다. 상투한 자 반 정도는 머리 결발을 풀고 천문과 지리를 논하고 시와 문장과 논하는데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늙은 중이 안개 속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곳은 ‘축융봉’과 ‘금탑봉’이며, 그 다음이 ‘경일봉’, ‘자란봉’이며, 그 다음이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이며, 이곳은 ‘선학봉’, ‘연화봉’이며 그 뒤에 있는 것이 ‘향로봉’이고, 그 뒤에 있는 것이 ‘내장인봉’과 ‘외장인봉’으로 무릇 12봉입니다”한다. 내가 감격해 말하기를, “옛날 주자朱子가 여산廬山의 경치에 매료되어 이름을 붙였으니, 만약 주자가 아니었다면 여산은 만세토록 이름 없는 산으로 남았을 것이 틀림없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도 천년세월 적막하게 있다가 주신재周愼齋선생을 만나 이름을 얻은 즉 이것 또한 이 산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했다. 하늘이 어두워져 드디어 ‘지장전’에 들어가니 여러 중들이 따라왔다. 불 밝히고 자리를 펴서 벗들과 둘러 앉아 술자리를 마련하고 목동으로 하여금 피리를 불게 하니,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하며 밤새도록 취하고 흥청거렸다. 집을 나와 홀로 하늘 집 적막한 유곽에 서 있으니 마치 우주 속에서 온 세상을 굽어보는 것 같았다. 이날 밤 권눌이 같이 온 여덟 사람을 ‘8신선’이라했다. 채씨 한 사람은 ‘청동’이라 하고 나머지는 나이 따라 모두 아무개 신선이라 하고, 이후로는 이름과 자를 부르지 않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나의 웃음거리였다. 그리하여 여러 신선들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자게 되었다. 9월 2일 아침을 먹고 절을 나오니 중 희조, 계동 등이 안내하고, 또 어떤 젊은 중이 필묵을 가지고 뒤에 따라왔다. 동쪽의 좁은 산길을 따라 ‘중대암’에 들어가니 그 옆에 새로 절을 짓는데, 물으니 ‘십왕전十王殿’이라 한다. 불상이 마루에 가득한데 흡사 인형 같았다. 내가 눈을 붉히고 성을 내며 그것들을 치우려하니 중들이 가로막고 못하게 한다. 내가 말하기를 “불가는 어쩌다 한번 세상을 퍼져 천고의 사람들에게 혹세무민하니 지금 누가 능히 선왕의 도를 밝혀 사람들을 그 길로 가게 하겠는가”했다. 불상을 헐고 중들을 매질하니 심히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고도암’에 도착하니 병든 중이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바로 ‘보문암’에 도착하니, 중이 산머루를 내놓아 벗들과 함께 먹었다. 남쪽으로 금탑봉을 향하니 길은 좁고 미끄러워 위험스러웠다. 나무를 잡고 바위에 의지해 여러 번 쉬었다가 나아가곤 했다. 채청동은 피리 부는 자로 먼저 가서 반야대에 올라 몸을 숨기고, 한가롭게 피리를 부니 그 맑은 소리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무쳐 마치 자진이 후산에 올라 생황을 부는 것과 같았다. ‘치원대致遠臺’에서 잠시 쉬며 ‘총명수’를 마시니 대臺는 절벽 위의 돌아가는 허공에 늠름하게 걸려있고, 물은 깎아지른 절벽 밑의 아득한 푸른 돌에 떨어져 그 빛이 빙설과 같았다. 주변에 물으니, “유선儒仙 최치원이 이곳에서 놀고 이물을 마심으로서 얻어진 이름”이라했다. 내가 말하기를 “고운은 12세에 중국에 들어가 28세에 귀국해서 이름이 천하에 알려져 ‘동방문장의 시조’가 되었는데, 어느 여가에 여기에 와서 책을 읽고 이 물을 먹어 총명해졌다는 말인가. 혹 말하기를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서 중들과 어울려 놀며 영주를 찾고 삼산 홍류동 봉하석에 글을 쓴 유적이 지금 완연이 남아있고, 지리지와 국사에 모두 최치원의 청량사는 곧 합천군 가야산의 월류봉 아래를 지칭하는 것이라 했으니, 후인들이 어찌 이 산을 따라 이 이름을 끌어와 속인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로 이런 말이 있었고, 내가 그렇게 들었을 뿐이다. 전설이란 의심스러운 점이 적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으니 후일 식자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하였다. ‘치원암’에 들어가니 마침 중이 없어 선방이 조용한데 단 나무 그림자가 마당에 가득하다. ‘극일암’의 돌층계를 오르니 천 길 노송老松이 있는데 그 둘레가 10여명이 감싸않은 정도였다. 바위 뒤에 ‘풍혈風穴’이 있고 ‘풍혈’ 앞 바위에 바둑판이 새겨져 있는데, 비바람 천년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기를 “최치원이 바둑 두는 판”이라 했다. 비록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암자에 들어가 보고 그 대를 밟아보니 또한 최고운에 대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다. ‘안중사’를 지나 ‘상청량암’에 이르니 중이 산열매를 내어놓는다. 곧 ‘하청량암’으로 내려와 옛 터전을 배회하며 그 특이한 경관을 둘러보았다. 골짜기는 그윽하며 여러 봉우리가 푸른색을 띠며 사방으로 빙 둘러 우뚝우뚝하고, 크고 작은 단풍이 비단처럼 펼쳐져서 가을 산의 아름다움을 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암자 뒤 샘이 있는데 맑고 청렬淸洌하여 손으로 한 움큼 떠 마시니 가슴속에 쌓인 것들이 모두 씻어지는 듯 했다. 암자 동쪽에 띠를 엮어 두어 칸 지은 조그만 암자가 있는데, 가보니 파리한 중이 혼자 기거하고 있어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누가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초가암자가 있다”하여 나가는데, 중이 말하기를, “가는 길이 험하고 멀며 지금 비워 있다” 하여, 드디어 가는 것을 포기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서 ‘김생굴’로 가는데 길이 가파르고 험해서 칡넝쿨 줄기를 잡고 몸을 바위에 붙여 겨우 찾아갔다. ‘김생굴’은 층 벽 아래 위치했는데, 그 모습이 위 봉우리는 용이 춤추고 아래 바위는 호랑이가 앉은 자세였다. 교묘히 깎아진 형상이 진실로 천작天作이었다. 낭떠러지로 물이 흩어져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마치 푸른 하늘에 갑자기 이는 뇌성 같고, 맑은 날 흩날리는 빗줄기 같았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보니 은하수가 거꾸로 매달린 듯하고, 석실이 맑고 고와 신령스러움이 있으니 이곳이 그 서식처임이 틀림없다. 내가 말하기를 “김생은 신라 원성왕 때의 사람으로 필법이 우리나라 제일이었다. 일찍이 그 글자 자획의 굳고 힘참을 보았는데, 여기 청량산에 와보니 산의 모습이 그의 글씨의 정수精髓에 이입移入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옛날 장욱張旭이 공손대랑公孫大娘의 춤을 보고 초서를 배워 입신의 경지에 들어갔음이 그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세상에 김생의 서법書法을 모르는 것은 ‘산에서 터득(山故)하여 썼기 때문’이었다. ‘대승암’를 향하는데 나무사다리가 썩어 끊어져서 소매를 걷어 튀어나온 바위를 잡고 간신히 건너니 간이 콩알 만해졌다. 중이 없어 들어가지 않고 바로 ‘하대승암’에 다다르니 한 조각 바위 대에 나무 그림자가 무성했다. 여덟 신선이 흩어져 앉아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숲 사이의 작은 길에 흰 옷을 입고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보였으니 권득설였다. 우리들이 기뻐하며 곧 술병을 열고 술을 마시니 또한 산중의 기이한 흥취였다. 날이 저물어 ‘문수암’을 지나는데, 여러 중들이 문밖에 나와 기다렸다. 다시 ‘보현암’에 들어가니 암자 앞에 기이한 바위가 있고, 바위위에 단풍나무가 있는데 매우 사랑스러웠다. 암자 서편으로 천 길 낭떠러지에 ‘옛 대(古臺)’가 있는데, 이 산의 명소인 ‘중대암’이라 했다. 내가 여약과 더불어 소나무 아래에 취해있어 해가 이미 서산에 넘어 간 것도 몰랐다. 깨어 보니 모든 신선들은 다 내려가고 한 신선이 있어 서로 부축하여 ‘문수암’으로 돌아왔다. ‘대승암’의 중이 와서 알리기를 “월천선생이 이미 ‘연대사’에 도착했다”한다. 곧 찾아뵙고 싶었으나, “내일 ‘서암西庵’에서 만나자”고 하시었다. 이윽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창밖에 밤새도록 옥구슬소리가 쟁강거렸으니, 이는 곧 자란봉의 동쪽이며 경일봉의 서쪽에 있는 개울물이 합류하여 떨어지는 폭포소리였다. 밤이 깊어 산속은 고요한데 선방에 잠을 자니 아무런 꿈도 없다. 홀연히 깨어나니 이 몸이 이미 세상 밖 어디에 던져져서 마치 ‘천모산天姥山’ 아래에 앉아서 푸른 원숭이가 절규하는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9월 3일 아침을 먹고 ‘문수암’으로부터 걸어서 ‘보현암’을 지나 ‘중대암’에서 잠시 쉬고, 절벽을 빙 둘러 ‘몽상암’으로 나아가니 길은 끊어지고 바위는 가파른데 나무로 엮은 작은 사다리를 건너는데 한 발만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이때 한 신선이 석벽의 세 신선에게 ‘기행문(遊錄)’을 쓰게 하는데 “옛 소장공의 무리가 일찍이 석벽에서 글을 지어 명소가 되었으니 여기도 이로부터 역사가 되리라” 한다. 층 벽 바위를 밟아 어느 ‘옛 암자(古庵)’에 들어가니 돌문이 반쯤 열려 있는데 중이 떠난 지 오래였다. 암자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있는데 내려 보니 아래는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계곡인데, 바로 ‘연대사’의 위 지점으로 이 산 절경의 한 장소였다. 돌길을 돌아 바위 틈 위 ‘원효암’으로 올라가니 길은 더욱 가파르고 위험했다. 벌처럼 붙어서 두 다리를 움직여 오르니 식은땀이 나고 몸이 기울어 질 때마다 현기증이 일어났다. 심한 갈증이 일어나고 목구멍에 타기 시작했다. 바위 밑을 보니 ‘차가운 샘(寒泉)’이 있어 손으로 한 움큼 떠 마시니 오장이 서늘했다. 이윽고 층 벽 아래 옛 암자 터가 보여 물어보니 “신라 때 원효가 수행했기 때문에 얻어진 이름”이라 했다. 동편 깊은 계곡으로 나아가니 칡넝쿨이 햇볕을 가리는데, 어느 중이 ‘만월암’ 앞의 대로 안내하여 피곤한 다리를 좀 쉬었다. 걸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더욱 기이했다. 다시 ‘만월암’으로 들어가니 나의 선조先祖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마치 어제 쓴 것처럼 먹빛이 선명하며 만감이 교차되었다. 다시 ‘백운암’에 들어가니 선방이 고요하고 깨끗하여 지팡이를 던지고 한참 쉬었다가 드디어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험한 길을 힘써 나아가니 길은 점점 높아지고 보이는 것은 더욱 멀어져 오를수록 자신은 더욱 낮아지고 지형도 좁아졌다. 여러 번 나무그늘에 쉬면서 마침내 ‘탁필봉’ 아래에 도달했다. 그런데 그 꼭대기가 칼날같이 뾰족하여 오를 수 없고 드디어 ‘연적봉’에 올랐다. 가파른 정상에서 잠시 사방을 둘러보니 마치 학가산, 팔공산, 속리산이 모두 눈 아래 있어 동산소노의 중심과 태산아래 작은 천하의 기상이 또한 상상이 되었다. 돌아서 탁필봉을 지나 바위 사다리를 건너 자소대로 오르니 푸르고 붉은 단애 구름 속에 솟아있어 하늘이 지척인 듯했고, 아찔하여 내려 볼 수가 없었다. 북쪽으로 소백산과 죽령을 바라보고 동쪽으로 재산, 소천의 땅을 보니 사방의 둘러싼 크기와 산천의 장대함이 모두 한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나는 듯이 ‘자소봉’을 내려와 ‘백운암’, ‘만월암’을 지나, 곧 장 서쪽 암자로 가니 월천선생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뵙게 되니 여간 기쁘지 아니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지팡이로 숲길을 헤치고 천천히 쉬어가며 돌아 내려와 ‘연대사’를 지나 ‘진불암’에 들어가니, 절벽 바위들로 둘러싸인 형상이 마치 항아리 속에 지어져 있는 것 같았다. 중천이 이미 밝아 오는데 다시 불당으로 들어가 월천선생을 모시고 고금을 담론하니 개으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어 마치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오랜 지병이 낳는 듯했다. 밤이 늦어 물러나 ‘지장암’에서 잤다. 9월 4일 아침을 먹고 말과 종을 먼저 보내고 골짜기 어귀에서 월천선생을 모시고 서편으로 ‘금강굴’로 가서 ‘자비암’에 들어가 돌 의자에 한참 쉬고 있으니 아침 햇살이 온 산을 붉게 물들였다. ‘연화봉’ 아래로 위험한 돌길을 가니 인적이 끊어진 곳에 산머루가 달려 있는 별천지가 나왔다. 아침 해가 높이 솟고 이슬에 옷이 젖는 것을 알지 못했다. 5, 6리 정도 가서 깊은 계곡에 들어가 앉으니, 개울물 소리가 졸졸 흐르는데 곧 ‘도수암道修庵’ ‘열천冽泉’ 아래였다. 중이 말하기를 “‘도수암’은 ‘내장인봉’ 절벽 끝에 위치하는데, 서쪽은 위태로운 벼랑으로 사람이 접근할 수 없어 반드시 절벽 줄을 잡고 내려가야 하는데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가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서쪽 절벽 길을 따라 바위에서 쉬면서 계곡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있고, 하늘은 맑은데 갑자기 발아래 비바람이 몰아쳐와 문득 이 산의 높고 험준함과 이 몸이 세상밖에 나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험로를 거듭 지나 ‘금강굴’에 도착하니, 절벽 끝에 조그만 암자가 있는데 바위가 곧 지붕이었다. 조용히 들어가니 구석의 한 정안靜安한 곳이 곧 중의 거처였지만 돌아올 시간까지 있을 수 없어 내려왔다. 바위 끝에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멀리를 바라보니 단애가 갈라진 곳에 한 줄기 물이 철철 흘러 아래로 빙 둘러 내려가서 더욱 이 암자의 빼어난 경관을 도와주었다. ‘방장굴’이라는 곳이 있다고 하여 찾고자 했으나 지금 위치를 알 수 없고, 길이 막혀 더 이상 나아갈 수도 없었다. 한스러운 일이다. ‘외장인봉’을 돌아 ‘엽광동葉廣洞’으로 내려와서 강 언덕으로 올라가 벗들과 이별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 ‘박석博石’의 모래 언덕에서 쉬었다. 돌아보니 겹겹의 험한 산과 아지랑이와 노을들이 마치 유완이 천태를 따라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강변에서 점심을 먹고 석양에 월천선생께 이별 인사를 하니 권득설이 먼저 떠났는데 이는 월천선생을 향도하기 위함이었다. 작은 고개를 넘어 온혜溫惠에 도착하여 박중윤, 채약과 작별했다. 구름 산은 점점 멀어지고 동행한 벗들도 다 흩어졌다. 말이 머리를 흔들며 신음함이 오래되었다. 월천선생과, 권득설이 마침 날이 저물어 길을 묻기에 따라가다 드디어 함께 가게 되었다. 송현에 이르러 월천선생을 작별하고 예안禮安으로 향하여 고삐를 잡으니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돌아보게 되었다. 12의 신령한 봉우리가 우뚝하게 눈에 들어오고, 험한 산과 첩첩의 구릉이 “바다를 보고 물을 보기 어렵다”는 말이 어찌 빈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황혼에 달이 뜰 때 권눌과 금순선과 동생이 가야에 도착하여 아버지께 고하고 물러났다. 이선李僎과 이간李侃 등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마시고 헤어졌다. 태백산의 한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나와 청량산이 되었는데, 맑은 기운이 가득하고 정맥이 모여 있고, 여러 봉우리가 다투어 빼어나 늠름하기가 푸른 대나무 같아 쉽게 범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래 큰 강이 둘러 흐르니 곧 황지에서 흘러온 낙동강의 하류이다. 돌이 미끄러워 말을 달릴 수도 없고 배도 건널 수가 없지만, 햇살에 물이 말라 비로소 사람이 건널 수 있게 되어서는 산은 더욱 수려하고 기이하다. 길은 갈수록 험한데 어지러운 협곡을 돌고 돌아 곳곳의 골짜기를 굽이돌아드니 속세는 점점 아득히 멀어진다. 정령 망령된 자들의 말고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마치 약수를 건너 봉도에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대저 이 산의 주위는 불과 백 여리에 지니지 않지만, 우뚝한 봉우리마다 모두 암대에 흙이 있어 만 길 깎아지른 곳에 수목이 울창하며, 운무가 골짜기에서 나와 창공으로 흩어지니 그 기이한 형상이 마치 그림 같아 실로 조물주의 특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내 일찍이 산수 유람의 벽이 있어서 매양 좋은 산과 물을 만나면 흔연히 즐거워하며 돌아가기를 잊었다. 동쪽으로 읍령泣嶺을 넘어 동해바닷가의 관어대觀魚臺를 밟고, 넓고 창명한 바다에 어룡이 춤추는 것을 굽어보았으며, 서쪽으로는 조령을 넘어 종남산을 올라 궁궐의 웅장함에서 인물의 성대함을 보았으니 비록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의 천하 주유에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일찍이 원한 것이 그런 것이었다. 다만 오지의 구석진 곳에 살며 거친 신세로 억매여 있어 천하의 장관을 다 보지는 못했지만 흉중의 호연한 기상은 길러보는 것이 평생의 한이었다. 슬프다! 천하의 명산을 다 거론할 수 없다. 중국도 그렇다. 다만 우리나라의 명산을 이른다면 금강산을 최고로 하니, 거의 천하의 세 신령한 산 가운데 하나로 중국인들이 항상 흠모해 가보고 싶어 한 산이다. 금강산으로부터 오대산이 나오고 오대산으로부터 청량산이 되었다. 그래서 대대로 청량산을 ‘작은 금강산’이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청량산의 신령함을 중국의 천태산과 영취산 아래에 두겠는가. 내 10세 때 이미 청량산의 존재를 알아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실행하지 못한 것이 이미 15년이 지났다. 청량산과 우리 집과는 겨우 하루 걸음 밖에 되지 않았지만 몸이 속세에 억매여 있어 벋어나기 어려웠다. 주리고 목마른 소망 속에 홀연히 세월만 흘러 추풍이 부는 오늘 청려장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12봉에 오르게 되었다. 12봉은 주신재 선생이 명명한 것인데, 지금 그 봉우리를 보고 그 이름들을 상상해보면 진실로 잘 지어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외봉으로서 큰 것을 ‘장인봉’이라 한 것은 중국태산의 웅장함에 비유한 이름이다. 내봉으로 가장 우뚝한 것을 자소봉이라 한 것은 하늘과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기러기가 금빛 오리같이 솟아있어 향로봉이라 했고, 우뚝 솟아 부용 같아 연화봉이라 했으니 연대사의 서쪽 봉우리로 불가에서 이른바 의상봉이라고 한 곳이다. 자소봉에서 서족으로 50 거리에 뽀족히 솟은 것이 탁필봉이고, 탁필봉에서 서쪽으로 29보 정도의 걸음에 홀연히 솟은 것이 연적봉이고, 연적봉의 앞에 야위고 파리한 봉우리가 선학봉이다. 동쪽에 우뚝한 경일봉은 빈욱의 의를 취한 모습이고, 축융봉은 형산의 이름을 모방했다. 금탑봉은 경일봉의 아래에 있고, 자란봉은 경일봉의 위에 있어 내외 형세가 합해있고, 좌우로 마주 읍을 하고 있다. 서쪽에 있는 것은 동으로,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으로 향해있다. 자소봉은 9층으로 일곱 절을 품고 있는데, 백운암이 가장 높은 곳에 있다. 그 다음부터 차래로 만월암, 원효암, 몽상암, 보현암, 진불암, 중대암이 있다. 경일봉은 무릇 3층으로 다섯 절을 품고 있는데, 금생암, 상대승암, 하대승암, 보문암, 고도암이다. 금탑봉은 3층으로 다섯 절이 있다. 형세가 탑과 같아 다섯 절이 모두 중층에 걸려있는데, 치원암, 극일암, 안중사, 상청량암, 하청량암이 이들이다. 문수암은 자란봉의 뒤 동쪽에 있고 연대는 선학봉의 남쪽에 있는데 이마처럼 툭 튀어나와 있다. 연적봉의 아래에 서초막이 있고, 연화봉의 아래에 자비암 등의 여러 암자들이 위로는 까마득한 봉우리를 지고 있고 아래로는 깎아지른 절벽의 여러 봉우리에 저마다 자리하여 모두 층탑같이 보였다. 여러 봉우리를 보면 나약한 사람을 족히 용기를 주고, 여러 폭포소리를 들으면 탐욕스런 사람이 염치를 알게 하고,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우면 이것 또한 신선이 된 것이리라. 굳이 단사를 먹고 백일 중천에 오른 이후에야 신선이라 할 것이 있겠는가! 최치원으로서 인해 이름난 대와 암자가 되었고, 김생으로 인해 이름난 굴과 암자가 되었지만 역사에 고증할 수 없으니 어찌 옛 자취가 어제와 같으랴! 슬프다! 이 산이 만약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이백, 두보의 시와 한유, 유종원의 글과 주자, 장남헌이 유산하여 천하의 명산이 되어 천고 우주에 알려졌을 터이지만 고운과 김생에 의해 한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진실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돌이켜보면 이 산은 안동에 속해있으면서도 예안 경계와 가까운 까닭으로 송재松齋선생, 농암선생이 앞 시대에 태어나시고 퇴계선생이 후세에 태어나셨으며, 계속해서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되었으니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이번 5일간의 여행에서 잡영雜詠 97수를 지었고, 전후 청량산 시 100여 편을 기록했으니, 이번 여행의 소득으로는 거의 목표를 이룬 셈이 아닐 수 없다. 돌아와 한 방에서 백수의 시를 펼쳐놓고 감상해보니 신령스러운 산의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만족한 것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이번 걸음이 단순한 구경거리에 그치지 않고 장차 기이한 경치를 보게 될 때 또한 경계를 삼고자 했다. 옛날 주자朱子와 장남헌張南軒이 남악南嶽에 유산함이 무릇 7일인데 수창한 시가 119편이었다. 그런 데 유산하는 그 어느 날 밤, 남은 재를 뒤적이며 마주 앉아 지은 시가 거칠다고 하며 가려서 엮고, 이후로는 노래할 만한 것이 있어도 시로는 표현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저주에서 작별할 때 장남헌이 주자에게 시를 한편 지어주었으나 주자는 부賦로 답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남악유산록’이 되었는데, 그 후기에 “계미일에서 병술일까지 4일간 남악에서 저주에 이르기까지 무릇 180리 사이에 산천, 임야, 풍광, 경물의 구경이 시가 아닌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서로 시에 대해 더불어 토론하고 연구하기로 약속했지만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또 이어서 “시를 지음에 본래부터 나뿐 일이 아니나 우리들이 절실히 그만 둔 것은 그것이 감정에 빠져 근심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벗들이 함께할 때는 보인輔仁의 유익함이 있기 때문에 혹 감정에 빠짐을 면할 수 있지만 하물며 무리를 떠나 혼자 있음에랴!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여 작은 기미나 순간에도 귀와 눈을 흘리게 하고 마음을 옮기게 하니 장차 무엇으로 이것을 막아 내겠는가” 하였다. 지금 동행한 벗들은 공경히 읽고 밝게 새겨 마땅히 좌우명으로 해야 되지 않을까! 이미 벗들에게 고했고, 내 몸에도 반성하기 위해 글을 써서 스스로 책망하는 자료로 삼고자 한다. 7월 갑인 광산 김득년 지음
**김득년(1555-1637): 본관은 광산, 자는 여정汝精, 호는 갈봉葛峯, 유일재의 아들로 생원, 진사에 모두 합격했으나 일생을 후진을 양성하며 보냈다. 김기, 김령, 권태일, 배용길 등과 교유, 임란창의의 공으로 통훈대부 사헌부집의에 증직, 국문학사에 ‘지수정가’라는 장문의 가사작품을 남겨 주목된다. 소개한 ‘청량산유록’은 100여 편에 이르는 청량산유산기‘ 가운데 그 묘사가 가장 사실적이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주신 주세붕의 ‘유청량산록’과 더불어 애독되는 글이다. 약관에 쓴 글로 갈봉의 문학적 소양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의 글이기도 하다. 저서 <갈봉집>을 남겼다. 부록3. 갈봉 김득년의 ‘지수정가止水亭歌’
갈봉 김득년이 전 160여행으로 지은 장편 가사. 필사본으로 전하는 ≪갈봉선생문집(葛峰先生文集)≫ 권말에 수록되어 있다. 각 행은 대체로 4 · 4조 8자로 되어 있다. 정철(鄭澈)의 ‘관동별곡’ · ‘사미인곡’이나 박인로朴仁老의 ‘태평사’,·‘누항사’보다도 부피가 많은 작품이다. 제목에 나오는 지수정이란 갈봉이 손수 읽어낸 건축물, 곧 정자를 가리킨다."와룡산(臥龍山)이 와룡형을/지에하고 남역크로/머리드러 구의구의 느리혓다가"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그 줄거리가① 와룡산의 산세와 거기에 선영을 뫼신 일, ② 지수정을 세운 까닭과 그 주변의 자연의 경색, ③ 지수정에서 실마리를 삼아 황지에서 낙동까지 이르는 낙동강 상류의 명소 · 문물을 헤아리고, ④ 자연을 벗 삼고 풍월을 읊조리는 스스로의 생활을 노래하였으며, ⑤ 와룡산 주변에서 철철이 벌어지는 갖가지 일들과 그 사이에서 사는 자신의 분복을 말하고,⑥ 낙이망우(樂而忘憂)하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자신의 생활과 그 사이에도 고개를 쳐드는 사모치는 정, 우국의 마음을 피력하고, ⑦ 도학자로서 선철의 본을 따라 살아가리라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크게 보면 이 작품은 양반가사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그 말씨가 생경한 편이며, 또한 사이사이에는 한문투 어휘가 섞여 있다. 또한 그 내용 역시 작자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와 체험내용들을 지루하게 나열한 것도 흠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상당한 말솜씨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특히 서경을 시도한 경우에 그런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다.내용에서 보면 "소리소리 듣 거/처처(處處)의 우 새오/밋비치 보 거/절절(節節)이 픠 고치", "천산(千山)에 곳 다지고/만목(萬木)에 새닙나니/녹음(綠陰)이 만지(滿地) 여 / 하일(夏日)이 채 긴 저긔" 등이다.문학사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정철 · 박인로 등의 가사가 쓰여 진 바로 다음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또한, 인맥으로 보면 농암 이현보李賢輔,, 퇴계· 이황李滉 등 영남 북부지방의 사림계층 출신 가사의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작품이다. 영남 북부지방 사림계층의 문인들이 주업으로 삼은 것은 한시문漢詩文이나 이들은 다른 한편 국문을 매체로 한 가사작품도 남겼다.
사진: 지수정가
부록 4. 광산김씨 긍구당 고택과 <훈민정음해례본>
유일재의 둘째아들은 만취헌 김득숙(晩翠軒 金得숙(石+肅)1561-1589)이고, 만취헌의 증손 김세환金世煥의 당호가 긍구당肯構堂인데 이 집은 <훈민정음 해례본>이 최초 보존된 집이다. 이른바 <안동본>이다. 간송미술관에 보관된 국보 제70호이며 1997년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로 그 책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상주본>이 발견되기까지 유일본이었다. 만취헌은 자가 익정益精으로 형 갈봉 김득년, 아우 김득의와 함께 뛰어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약관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관찰사가 영남좌도와 우도의 선비들을 모아놓고 문예실력을 겨루는데 우복 정경세와 함께 번갈아 1등을 하였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만취헌일고>가 그 책으로 당대 인물과의 교유 인사와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있다. 만취헌 또한 다시없는 효자로 유일재가 몰하자 극진한 상을 치루고 빈소에서 애통해하다가 병을 얻어 다음해인 1589년 그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렇지만 유일재의 가문은 갈봉 김득년-김광주-김취구-김국환으로부터 5세를 지나 김도상으로 이어지는 종계와 더불어 유일재-만취헌 김득숙-김세환으로 이어오는 긍구당 가문 역시 효와 학문적 전통으로 인해 안동 유수의 전통 명문으로 존재하게 했다. 이런 전통이 <훈민정음 혜례본>이란 유래 없는 세계적 고서를 500여년 소유하고 보존하게 한 근본 바탕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여담이지만 요즈음 발견되어 소유권 문제로 논란을 빚고 있는 이른바 '상주본' 역시 안동에서 유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주장하는 곳도 있다. 흥해배씨興海裵氏 임연재종택(臨淵齋 裵三益, 1534-1588)에서 유출된 <제왕운기> (보물895호)는 1360년 공민왕 9년에 간행된 책으로 동국대박물관에 버젓이 보관되고 있다. 이 책 역시 <훈민정음해례본>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처 유출되었다.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서울 인사동에 있는 수많은 고서 80% 이상이 안동책이라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긍구당은 원래 永川이씨 宗宅이었는데 유일재가 재혼을 하면서 처가인 이 집에 살게 되었다가 뒤에 물려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다. 집의 특징으로는 생활의 중심 공간인 정침은 사랑마당 북쪽에 위치하고, 사랑마당 서쪽에 외양간채, 정침 서쪽에 방앗간, 동쪽 높은 터에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사당 안쪽에는 정교한 솜씨로 조각하여 위패를 모신 감실이 있어 주목받고 있다. 비교적 옛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들로 우리의 옛 민가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지금 긍구당의 후손으로 김선일 부장판사가 있고, 판사의 부친인 김대중 종손이 이 집을 지키고 계신다. 종손의 漢文經典 講讀은 그 초성이 옛 선인들의 강독소리와 흡사하여 꼭 한 번 들을만하다. 그리고 한학漢學에 깊은 조예造詣 역시 이런 집안의 가풍家風이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음을 증명함은 말할 것도 없다.
사진: 광산김씨 긍구당 (경상북도 유형문화재316호)
***간송 전형필이 지킨 위대한 세계문화유산- ‘훈민정음 해례본’
누가 언제 어떤 원리로 왜 만들었는지 알려진 세계 유일의 문자 -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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