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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유다 땅의 왕으로 앉혔다.
2. 그런데 왕이나 그의 신하들이나 그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전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3. 그 때에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서, 자기들을 도와 그들의 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달라고 청하였다.
4. 그 때는 예레미야가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 사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때였으며,
5. 바로의 군대가 이미 이집트에서 출동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퇴각한 때였다.
6. 그 때에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보내어 나에게 물어 보도록 한 유다 왕에게 너희는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를 도우려고 출동한 바로의 군대는 제 나라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8.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는 다시 와서 이 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질러 버릴 것이다.
9.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틀림없이 너희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너희 자신을 속이지 말아라. 그들은 절대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10. 너희를 공격하는 바빌로니아 군대 전체를 너희가 물리쳐서 오직 부상병들만 남긴다 하여도, 그들은 각자의 장막에서 떨치고 일어나 나와서, 이 도성을 불질러 버릴 것이다.'"(렘37)
1 King Nebuchadnezzar of Babylonia made Zedekiah son of Josiah king of Judah in the place of Jehoiachin son of Jehoiakim. 2 But neither Zedekiah nor his officials nor the people obeyed the message which the Lord had given me.
3 King Zedekiah sent Jehucal son of Shelemiah and the priest Zephaniah son of Maaseiah to ask me to pray to the Lord our God on behalf of our nation. 4 I had not yet been put in prison and was still moving about freely among the people. 5 The Babylonian army had been besieging Jerusalem, but when they heard that the Egyptian army had crossed the Egyptian border, they retreated.
6 Then the Lord, the God of Israel, told me 7 to say to Zedekiah, “The Egyptian army is on its way to help you, but it will return home. 8 Then the Babylonians will come back, attack the city, capture it, and burn it down. 9 I, the Lord, warn you not to deceive yourselves into thinking that the Babylonians will not come back, because they will. 10 Even if you defeat the whole Babylonian army, so that only wounded men are left, lying in their tents, they would still get up and burn this city to the ground.”
아무리 가까운 나라에 가도 우리와 너무 다릅니다.
음식도 언어도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자동차의 운전석이 우리와 반대 편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일본 가면 정말 헷갈릴 것 같습니다.
제대로 운전하면서도 역주행이라고 착각할 것 같습니다.
운전석도 주행방향도 뒤집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애굽에서 약속의 땅을 향해가는 광야의 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신앙의 길을 자동차 타고 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설교란 운전석도 주행 방향도 바뀐 차를 제대로 운전하도록 지도하는 일입니다.
세상 차는 죄와 이기심의 쪽에 운전석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가는 차의 운전석은 의와 이타성이라는 곳에 있습니다.
좌우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는 길을 돕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 때 역주행한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에게 설교하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얼마 전 설교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1.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를 대신하여 요시야의 아들 시드기야를 유다 땅의 왕으로 앉혔다.
1 King Nebuchadnezzar of Babylonia made Zedekiah son of Josiah king of Judah in the place of Jehoiachin son of Jehoiakim.
1절의 말씀을 보면 때로 우리 민족이 강대국들에게 당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남의 나라가 우리 왕을 멋대로 세우는 일!
그런 일은 비참한 일입니다.
당시의 강대국 바벨론(지금의 이라크)은 고니야를 폐위하고 시드기야로 유대 왕을 앉혔던 것입니다.
바벨론이 제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를 사람을 유대 왕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과 자신을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그런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행동을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서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을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다고 믿는 그들은 백이면 백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잘 따랐을까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에서 시작해서 백성들까지 한마음이 되어서 그 예언자의 말씀을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왕이나 그의 신하들이나 그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전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2 But neither Zedekiah nor his officials nor the people obeyed the message which the Lord had given me.
그들은 예레미야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일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레미야의 말씀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옥에 가두고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일 주일에 한 번씩은 반드시 모이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말씀을 읽고 외우고.......
그런데 막상 말씀이 주어지자 그 말씀을 거부하는 것일까?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는 것인가?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들은 하나님의 말슴은 그들이 전혀 원치 않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도 그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이 말씀을 전하는 일이 그렇게 싫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지긋지긋했습니다.
그래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은 하나님께 그의 코가 꿰여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8,9)
여기에서 말하는 폭력과 파멸은 바벨론의 침공입니다.
당시에 그 적군이 무기를 들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적군에 포위된 이스라엘은 죽을 지경이었는데 거기다 대고 예레미야가 적에게 항복하라고 했습니다.
그 바벨론을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 바벨론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랬으니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왕이나 그의 신하들이나 그 땅의 백성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전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2 But neither Zedekiah nor his officials nor the people obeyed the message which the Lord had given me.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민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말씀은 선민이 이방인의 지배를 당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했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불신으로 통했습니다.
당시 시드기야 왕은 왕으로써 바른 일을 했던 것입니다.
3. 그 때에 시드기야 왕이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를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서, 자기들을 도와 그들의 주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달라고 청하였다.
3 King Zedekiah sent Jehucal son of Shelemiah and the priest Zephaniah son of Maaseiah to ask me to pray to the Lord our God on behalf of our nation.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에게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들의 적을 무찔러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선조처럼 왜놈이 온다고 도망하지 않았습니다.
실은 그는 위대한 애국자였습니다.
지금 그는 그를 왕으로 세운 바벨론 세력을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 믿는 신앙과 애국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말인가!
그 때 시드기야는 그의 선조 히스기야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왕은 앗수르가 위협했을 때 성전에 홀로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이 위대한 왕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기도했던 다음 날 아침, 히스기야는 쓰러져 죽어 있는 185,000명의 적군을 확인할 수있었던 것입니다.(사37:36)
시드기야는 바로 그 일을 하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시드기야의 행동은 정말로 이상한 것입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수없이 메시야를 전했습니다.
시드기야도 그 내용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들에게 항복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을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 요청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지금 우리 눈앞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백 번 성경을 통독한 목사님이 가난하고 주린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모를 리 없습니다.
또 부요하고 배부른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말씀(눅6:20-26)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설교 전에 본문으로 읽었던 그 말씀을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복 받아서 우리 장로님 돈 많이 벌었다는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입니다.
막상 말씀을 그대로 무시해 버리는 방식입니다.
설교 전에 읽은 본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 좋은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4. 그 때는 예레미야가 아직 감옥에 갇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백성 사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던 때였으며,
4 I had not yet been put in prison and was still moving about freely among the people.
어떤 사람이 독일에선가 경험했던 일입니다.
한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마트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의 어머니가 어떤 행동을 한 줄 압니까?
그 녀의 신발을 벗어서 그 아이를 두들겨 패더라는 것입니다.
사람 창피한데 그냥 사주고 말지.......
물론 요즈음 같으면 거기에 아동 폭력으로 경찰이 출두했을 일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위해서 어떤 것이 더 교육적인까?
그냥 사주고 마는 것일까?
신발짝을 벗어서 때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오늘 성경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마트 바닥에 드러누운 이스라엘을 바벨론이라는 신발을 들어서 때리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생각은 하나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제 생각에 마트 바닥에 드러누워서 뒹굴어버려!
물론 이 광경을 아주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신발로 자식을 때리니 제 어머니도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신발을 벗으시더니 때리셨고 그들이 세상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으로 흩어져서 얼마나 천대를 받은 줄 압니까!
그 때 이방 나라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보고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2. 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하고 말하게 하겠습니까?(시115:2)
하나님 안 계시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저들이 저렇게 실컷 두들겨 맞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오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의 중심을 변화시키려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자식을 만들기 위해 신발짝을 들으셨던 것입니다.
차 사달라면 차 사주고
컴퓨터 사달라면 사주고
집 사주고.......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끼어있는 예레미야는 또 무엇인가?
말씀에는 관심도 없는 백성들과 하나님의 사이에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은 무엇인가?
네델란드에 한 소년이 학교를 가다가 댐에 물이 새들어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작은 물구멍을 막았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마을이 바닷물에 잠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마을을 살리기 위해 홀로 버텨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점점 커졌습니다.
이제는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팔뚝을 그 물구멍에 집어넣어서 바닷물을 막아야 했습니다.
당시 왕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따라서 바벨론에 항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애급으로 밀사를 보내서 지원병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야는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서 예레미야를 통해 정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생각을 수용할 의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애굽에 밀사를 보냈던 것입니다.
교회에 갔다가
무당 찾아갔다가
불당에 갔다가
천주 교회에 갔다가.......
그의 요청대로 애굽 군대가 출동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드기야 왕은 교회 부흥회에 와서 이 간증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
우리 하나님께서 애급을 감동하게 하셨다.
그 애굽 군대가 우리를 도우러 온다.
할렐루야. 아멘!”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의 군대가 급해진 것입니다.
애급 국경으로 급히 이동해서 먼저 애급과 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의 군대가 애굽 국경으로 물러갔습니다.
5. 바로의 군대가 이미 이집트에서 출동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퇴각한 때였다.
5 The Babylonian army had been besieging Jerusalem, but when they heard that the Egyptian army had crossed the Egyptian border, they retreated.
이렇게 되고 보니 예레미야는 더 곤란해졌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바벨론 군대에게 항복하고 말했는데 그들이 애굽 군대를 향해 급히 퇴각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는 이 하나님의 기회에 바벨론의 후방을 치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임하셨습니다.
6. 그 때에 주께서 예언자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6 Then the Lord, the God of Israel, told me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기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항상 위기로 몰아갔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유대 백성들에게 애굽의 등장은 바벨론을 펴주실 승리의 기회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상황과 정반대의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다.
7.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를 보내어 나에게 물어 보도록 한 유다 왕에게 너희는 이렇게 전하여라. '너희를 도우려고 출동한 바로의 군대는 제 나라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
7 to say to Zedekiah, “The Egyptian army is on its way to help you, but it will return home.
예레미야는 정말 죽고 싶었을 것입니다.
댐의 구멍은 더 커졌고 이제 예레미야는 팔뚝이 뭡니까?
댐이 무너지게 생겼습니다.
왕과 백성들은 그들의 기도대로 애급의 군대가 애굽의 국경을 넘어 도우러 온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랬으니 유대는 이 때라고 베벨론의 후방을 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기뻐하는 백성들에게 찬물을 끼얹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착각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흥회로 성령 충만한 사람들 손에 예레미야는 몰매 맞아 죽게 생겼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애굽으로 갔던 바벨론의 군대들이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8.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는 다시 와서 이 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질러 버릴 것이다.
8 Then the Babylonians will come back, attack the city, capture it, and burn it down.
예레미야의 예언은 부흥회 때 했던 시드기야 왕의 뜨거운 간증을 공격하고 점령하고 불 질러 버렸습니다.
그럴 줄이야!
그 뜨거운 신앙 간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적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지적에 따르면 그들이 보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는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애급에서 도우러 오고 있다는 간증은 헛것이었습니다.
진정한 실상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애급 군대가 아닙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는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게 되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성경은 이런 면에서 아주 친절합니다.
바로 그 의문을 풀어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적대하지 않으려면 다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9. 나 주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틀림없이 너희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너희 자신을 속이지 말아라. 그들은 절대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9 I, the Lord, warn you not to deceive yourselves into thinking that the Babylonians will not come back, because they will.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종일관 파멸과 패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하며 애굽의 지원부대를 부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신기루에 속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람들이 속고 있는 원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9. 너희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틀림없이 너희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너희 자신을 속이지 말아라.
9 I, the Lord, warn you not to deceive yourselves into thinking that the Babylonians will not come back,
이 혼란은 시드기야 왕과 그 백성들의 생각에 있었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고등어 살 생각으로 마트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따라오던 아이 생각이 매대의 장난감에 꽂혀버린 것입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의 생각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백화점 앞에서 뒹굴어버리면 장난감을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뿐입니다.
오직 그것을 차지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신발짝에 맞지 않으려면 어머니의 생각을 읽고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을 버리고!
신앙이란 하나님이라는 인격을 철저히 전제하는 일입니다.
기도를 끌어들이면 그것들이 모조리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하면 그것이 모조리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악한 것입니다.
기도까지 끌어들여서 제 생각을 성취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는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겟베마네에서 예수님의 생각을 버리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주 씨름을 하셨습니다.
신앙이란 내 생각과 싸우는 일입니다.
제가 언제까지 내 생각과 씨름을 해야 합니까?
2 How long must I wrestle with my thoughts?(시13:2 NIV)
“하나님, 큰일났습니다.
제 생각이 장난감에 꽂혀버렸습니다.”
이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주의가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드디어 애급 군대가 등장했다고 그것을 하나님의 실상이라고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보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고 귀신 쫓아내시고 그것을 보면서 확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선생님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을 부인하신 것입니다.
2. 이 사람이 밤에 예수께 와서 "랍비님,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하지 않으시면,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런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2,3)
신앙이란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태어나는 일입니다.
이전 죄인의 눈으로 보았던 기적들은 모조리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헛것들입니다.
10. 너희를 공격하는 바빌로니아 군대 전체를 너희가 물리쳐서 오직 부상병들만 남긴다 하여도, 그들은 각자의 장막에서 떨치고 일어나 나와서, 이 도성을 불질러 버릴 것이다.'"
10 Even if you defeat the whole Babylonian army, so that only wounded men are left, lying in their tents, they would still get up and burn this city to the ground.”
애굽 군대가 바벨론을 쳐부셨든지 아니면 이스라엘이 후방을 공격했든지 바벨론의 군대가 몰살당하고 부상병만 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현상을 보면서 우리가 드디어 승리가 했다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허깨비에 속은 것입니다.
그 부상병이 일어나더니 절뚝거리면서 예루살렘을 불태워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소년의 한 도시락을 손에 드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그것은 한 사람의 도시락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으로 장정만 5,000명을 먹이셨던 것입니다.
보이는 허상은 한 사람의 것이지만 실상은 장정만 5,000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은 식량이었습니다.
미친 바다는 사람 죽이는 곳입니다.
그것이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부르시더니 그 바다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미친 바다는 허상이었습니다.
말씀을 따라서 베드로는 물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상입니다.
11절 이후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 그에게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가 감옥에 갔습니다.
말씀을 대충 전했더라면 예레미야에게 그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그는 옥에 갇혔습니다.
그 감옥의 고문이 심했던지 먹을 것도 챙겨 주지 않았던지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맞아 죽든지 굶어 죽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시드기야 왕이 몰래 예레미야를 찾아온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려고 왔던 것입니다.
그 때 예레미야가 나 죽게 생겼다고 왕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20. 그러니 이제 부디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높으신 임금님, 부디 저의 간구를 받아 주셔서, 저를 다시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거기에 가면 살아 나올 수 없습니다."(렘37:20)
왕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왕은 왕궁에 있는 옥으로 그를 옮기고 굶지는 않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죽을 고통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전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실천하시다가 그만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고난을 보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죽음과 고초를 수용하심으로 하나님의 영생을 전해주셨던 것입니다.
죄인들의 눈에 예수님은 역주행하시는 것으로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