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 이 가타리나(1783〜1839) • 조 막달레나(1807〜 1839) 모녀
o 이 가타리나는 과부,조 막달레나는 동정 순교자
o 1838년 모녀가 서울로 이주하여 조 바르바라의 집에서 생활하다가 함께 체포됨
o 1839년 8월(음력) 포도청 옥에서 모녀가 함께 열병으로 순교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열병 (장티푸스)에 걸려 순교한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당시 옥의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다블뤼 (A. Daveluy, 안 안토니오) 주교가 기록한 것처럼 “교우들의 상처에서 홀러나오는 피 와 고름은 오래지 않아 그들이 깔고 앉아 있던 멍석을 썩혀버렸고, 열병 으로 인해 여러 명이 며칠 사이에 목숨을 잃어야만 하였다.”39 40>
이 가타리나는 지방의 교우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부모가 교리에 밝 지 못한 탓에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비신자 조 씨와 혼인해야만 하였다. 이후 그녀는 삼남매를 얻었는데, 완고한 남편은 그녀의 오랜 설득에도 불구하고 천주 교리를 배우려 하지 않다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 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죽음에 앞서 아내 가타리나의 권고를 받 아들여 대세를 받고 좋은 마음으로 선종하였다.
남편이 사망한 뒤 가타리나는 세 남매를 데리고 모친이 있던 친가로 돌 아와 생활하였다. 당시 그녀의 맏딸인 조 막달레나는 7〜8세에 불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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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Ch. Dallet, 안응렬 • 최석우 역주,『한국 천주교회사』상, 분도출판사, 1979, 111쪽.
40)『기해일기』,105쪽. 혼인할 당시 가타리나의 나이가 19세였다는 기록도 있 다(『순교자 약전』, 29쪽 :『순교사 비망기』, 4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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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삼남매 중에서 가장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한편 비신자 친척들 은 가타리나와 그녀의 자식들이 천주 신앙을 봉행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여기에서 떼어놓으려고 훼방을 놓았다. 그러나 가타리나는 여기 에 굴하지 않고 자식들과 함께 부지 런히 기도문을 외 우고 교리를 익혔다.
가타리나와 막달레나 모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를 바치면서 묵상하는 일을 빠트리지 않았다. 특히 막달레나는 장성하면서 열심히 바 느질과 길쌈을 해서 모친과 어린 남동생들을 부양하였고, 하느님과 이웃 을 향한 사랑을 자주 드러내곤 하였다.
막달레나가 18세에 이르자, 가타리나는 그녀를 어떤 교우와 혼인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막달레나는 모친의 의중을 알아채고는 동정 을 지킬 원의가 있음을 고백하였다. 이에 가타리나는 동정 생활을 하면 비신자들로부터 의심을 살 것이 분명한 데다가 자신이 죽은 뒤에는 막달 레나가 아무 의지할 곳도 없이 홀로 생활해야 한다는 염려 때문에 막달 레나가 자신의 원의를 접고 혼인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로 설명해도 막달레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후로도 비신자 친척들은 자주 막달레나에게 혼인할 것을 종용하곤 하였다. 할 수 없이 그녀는 집을 나와 상경한 뒤 교우 집을 전전하며 열 심히 일하였고, 그렇게 5〜6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집으 로 돌아와 모친 가타리나를 봉양하며 생활하였다.
교리에 밝았던 막달레나는 어리석은 이들을 가르쳐 깨우치고, 가난하 거나 병든 이들을 보살펴 주었으며, 죽을 위험에 놓인 어린아이들을 찾아 다니면서 열심히 대세를 주었다. 본래 성품이 겸손하고 온화하였던 그녀 는 항상 좋은 일은 남에게 사양하고 어려운 일은 자신이 도맡아 했으며, 세속적인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838년에 이르러 그 지방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막달레나 는 모친 가타리나와 동생들과 함께 집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때 앵베르(L. Imbert, 범 라우렌시오) 주교는 이들 모녀 소식을 듣고는 회 장에게 분부하여 거처를 마련해 주도록 하였다. 이에 그들 모녀는 조 바르바라가 두 딸인 이영덕(막달레나), 이인덕(마리아)과 함께 생활하던 서강 독갑이골(현 지명 미상)41:의 집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가 바르바라의 집에서 생활한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때 포교 들이 사방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러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 중 하나가 “주교님이 체포되시면 우리 함께 자수를 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주교님의 뒤를 따르자.”고 제안하자, 조 막달레나는 “자수할 이유가 있 으면,우리 주 예수님과 우리 주교님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그렇게 합시 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다섯 여인들은 자수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한 달 도 채 되지 않은 5월(음력)에 포교배가 그 집에 들이닥쳐 다섯 여인들을 모두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다섯 여인들은 문초와 주뢰형을 받으면서 굳 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투옥되었는데,그때 이미 옥안은 먼저 체포된 교우들과 다른 죄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게다가 비좁은 옥 에는 사람들의 열기가 심하였고,열병이 만연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조 바르바라 가족과 함께 3개 월 동안 고통의 옥살이를 겪으면서 여러 차례 불려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가 가타리나와 막달레나, 바르바라가 차 례로 열병에 걸려 순교하였으니,때는 1839년 8월(음력)로, 가타리나의 나이는 56세, 그녀의 딸 막달레나의 나이는 32세,바르바라의 나이는 56세였다. 바르바라의 딸 막달레나와 마리아는 이로부터 3〜4개월 뒤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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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20, 김 베네딕타의 증언.
42) 『기해일기』,78〜80쪽, 104〜106쪽 :『순교자 약전』,29〜30쪽 :『순교 사 비 망기』, 435〜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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